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38화 (38/279)

8. 수탐 ( 5 )

성이었던 폐허.

한때 문밖에는 해자를 두르고 그 안에는 웅장한 성벽을 둘러친 채 흰 가문의 깃발을 고고히 휘날렸을 그 성은, 지금은 무너진 성터가 되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성터에 두 사람의 남자가 발을 들이밀었다. 어떤 음모를 추적하는 심문관과 그 호위가.

"윽, 제기랄. 시체 정도는 치워두지."

그 성은 전쟁에 휩쓸려 멸문한 어느 소영주의 성이었다. 아지프가 불러낸 독 구름의 마술로 성주 일가 전체가 몰살당한 이 성터. 그 인근에 버려진 시체들은, 짐승조차 그것에 입을 대지 않아 보랏빛으로 썩어문들어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레는 코를 틀어막으며, 어떻게든 그 부패한 것들 사이로 난 멀쩡한 길을 밟으려 애썼다. 그리고 멈췄다. 앞장서던 아이가, 그 자그마하게 난 길 한가운데에 앉아 땅바닥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냐? 왜 갑자기 멈춘 거야."

"당신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이거 봐봐요."

"음? 이건 말발굽이잖아."

"이 말발굽 편자 모양은, 원래 카나기가 주둔할 때 그들의 직공이 막 깎았을 때에나 나오는 모양이에요. 이 볼록한 끝 부분은 조금만 뛰어도 바로 다 닳아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그놈들이 다 나갔는데도 이게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건 조작한 거죠. 즉, 여기에는 이런 조작용 말발굽 편자를 들고 있는 놈들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눈을 껌뻑이는 마레. 아이의 은색 견장에 매달린 특등 수색자의 휘장이 번뜩인다. 일 년이나 카나기의 흔적을 뒤쫓아본 적이 있는 아이이기에 가능한 통찰이었다.

아이는 그 처세술은 아직 열여섯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런 전투와 추적의 감각은 아주 예리했다. 마레와 만나기 전 수십이 넘어가는 마술사를 찾아내 심장을 공양한 것도 이 재주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래, 그래서?"

"은폐의 규모로 봤을 때, 아무래도 여기에는 수레가 지나갔던 것 같아요. 그것도 자주. 그리고 그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을 지우다 어색해지니까, 말발굽을 찍어서 위장하려고 한 모양인 것 같고. 그리고, 그 수레가 지나간 길은... 이 정문이 아니라."

거의 기어 다니다시피 몸을 낮춘 채, 위장된 발자국을 찾아다니는 아이. 잠시 후, 아이는 말라붙은 해자에 반쯤 부서진 채 달라붙어 있는 도개교 앞에 섰다. 잘못 발을 디디면 도개교째로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아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입니다. 이 비스듬히 무너진 도개교를 타고, 성의 지하로 수레가 들어갔어요. 자세히 보니, 마술적인 방식으로 이걸 보강해뒀네요. 위장도 했어요."

"확실한가?"

"예."

"그럼 가자."

"곧이곧대로 정면으로 가면, 적의 감시자한테 들킬 가능성이 커요. 뒤로 가는 게 좋아요. 미끄러질 수 있으니, 제가 단검으로 계속 나뭇결을 찢어서 발판을 만들게요. 당신은 그 낙죽장도로 그 홈에 칼을 박으면서 천천히 따라오세요."

날렵하게 도개교에 매달려, 단검으로 발판을 만들며 전진하는 아이. 마레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뒤를 따랐다. 한때 해자를 품었던 구멍은 시꺼멓도록 깊다. 그 위를 두 사람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건넌다.

이십여 분이 지나고, 두 사람이 그 끝에 도착했을 때, 마레는 온 몸이 땀 범벅이 되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젠장. 두 번은 못할 짓이군."

"쉿!"

불평하는 마레의 입을 막는 아이. 아이의 귀에는 방금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들렸다. 이 도개교 그리고 도개교와 연결된, 급조된 지하로의 임시문을 지키는 보초가 낸 소리였다.

저벅, 저벅. 발걸음이 길게 들리더니, 바지춤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의를 느낀 보초가 저 해자 밑바닥에 오줌을 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벌써 세 번째인데, 계속 이러면 방광 다 헐어버리겠...윽!"

혼잣말을 하던 그 보초는, 그 방광건강에 대한 걱정을 유언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도개교 뒤편에 고양이처럼 숨어 있던 아이가, 폭발적으로 몸을 튕기며 그 뒤로 뛰어들어가 목을 꺾어버린 것이다. 보초는 바지도 추스르지 못한 채 목을 꺾여 해자의 깊은 구멍으로 떨어져 갔다. 쿵. 희미하게 시체가 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열쇠는 챙겼습니다. 가죠."

아이는 어느새 챙긴 둥근 열쇠꾸러미를 짤랑대며 선언했다. 마레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손속에 사정이 없군."

"당신 얘기대로라면, 이 성에 숨어 있을 놈들은... 다 죽어도 싼 놈들이니까요."

지금까지 마레가 보았던 것 중 가장 매서운 말투로 말하는 아이. 마른 해자의 바닥에 떨어져 한 줌 핏물이 된 카나기의 잡졸을 보고 씹어뱉듯 중얼거린다.

"다 저렇게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 줘야죠."

그럴 만도 했다. 마레가 해독을 의뢰한 암호문. 그 암호문에는 간단한 명령이 적혀 있었다.

하나. 15일 안에, 지정된 열일곱 개의 마을을 약탈해서, 시커팩과 같이 괴물의 피가 섞여 있는 모든 가축과 육축을 이 성으로 가져올 것.

둘. 15일 안에, 이곳에 집결할 것. 이를 들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비밀 유지에 사활을 다 할 것.

셋. 15일 안에, 모든 목격자를 제거할 것.

즉, 열일곱 개의 마을을 몰살시키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이들의 수장이라는 아이신고르의 문반이 통제하는 카나기 병사의 수는 100 남짓으로 파악된다. 마술사와 병사의 합 100이면, 힘없는 마을 열일곱 개 쯤은 이틀 만에도 전부 도륙을 낼 수 있었다.

이 암호문을 해독한 시점은 이미 4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즉, 이 모든 희생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이와 마레는 즉시 이 암호문에 적혀 있는 마을을 찾아다녔다. 이 성에 도착하기 전, 빠르게 움직여 그 마을 중 하나는 구했지만, 열여섯 개의 마을은 이미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약탈이 남긴 폐허에 망연히 서 있던 아이.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날아오르게 했다. 그것은 나풀나풀 날아올라 아이의 곁을 스친다. 아이는 그것을 붙잡았다. 그건 리본이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죽으며 떨어뜨린 망가진 리본. 마술사 살해자는 그것을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쥐어 잡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둘은 그 복수를 위해, 그리고 음모의 저지를 위해 그들의 본거지로 의심되는 성채에 당도한 것이다.

"이 문이군요. 안에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아이는 숨겨진 비밀 문을 더듬어 찾아내고, 귀를 들이댄 채 눈을 감아 안의 상황을 가늠했다. 공기가 휘몰아치는 소리. 병장기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짐승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고민하던 아이는, 더 고민해봤자 의미 없을 것 같아 문을 따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누구냐!"

"침,침입자다!

"림, 유혼."

거침없이 걸어나가는 아이의 앞을 두 사람의 카나기 마술사가 가로막았다. 아이는 성가시다는 듯이 유혼을 불렀다. 참격. 좁은 복도를 꽉 메우는 거대한 참격으로 두 사람을 잘라버리고, 가볍게 심장을 공양한 뒤 걸어나간다.

지금의 아이는, 마레가 그 언덕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나의 잘 벼려진 검 같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여기다. 여기가 그... 이상한 소리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에요."

지하의 지하. 심층의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문 앞에 도달한 아이는 열쇠 꾸러미의 열쇠 중 가장 크고 두꺼운 열쇠를 집어넣어 문을 열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마경이었다.

"아우우우우!"

"왈, 왈, 왈..."

"끼이이이잉...."

유사시에 저수조와 지하감옥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감옥. 원래는 죄수와 포로를 보관하기 위해 마련된 그 감옥의 쇠창살 너머에는, 시커팩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쇠창살에 갇힌 채로, 힘없는 비명 같은 울음만을 계속 토해내고 있다. 철문을 열자마자 그 비명이 지하감옥 가득 울려서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이, 이게 뭐야?"

아연실색한 아이. 문을 열고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레가 얇게 깔린 지하수를 철벅이며 다가가 철창에 갇힌 시커팩 개 중 하나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군. 이런 짓거리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밀 유지를 하려고 했던 거로군."

"당, 당신은 이게 뭔지 알아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축양."

마레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분노 때문인지 그 눈은 살짝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이 놈들은, 축양을 하려고 한 거다."

"예?"

"축양이 뭔지 모르나? 너는 신앙이 없었지.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이거 혹시 아나? 마술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 몸속에 품는 마력과, 신기를 수련한 자들이 몸속에 품는 신기의 차이를."

"아니오..."

"신기는 목적성 없는 신의 조각이지. 반대로, 마력은 목적성을 가진 신의 조각이다. 신기를 몸속에 축적하고 활용하려면, 온 센디엘에 퍼져 자유롭게 뻗어 나가려 난동을 부리는 신기를 몸속에 저장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마력은 좀 달라."

"마력은, 신앙하는 자로 간택 받은 채로, 자신이 섬기는 '신이 좋아하는 행위'를 하면 그 양과 질이 자라난다."

마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말하기 싫은 얘기를 할 때마다, 담배의 힘을 빌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성을 가진 신의 조각이라고 하는 거다. 그 섬기는 신이 부여한 목적성에 따라,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련되어 있고, 그 목적하는 방향으로만 성장하면 되기 때문에 신기보다 훨씬 사용하기도 쉽고 기르기도 쉽지. 그 마력을 풀어내 기적을 행하는 것이 마술이다."

"그렇군요... 그런 차이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요? 그게 이, 이상한 감금이랑은 뭔 상관인데요?"

"그러니 누군가는 생각한 거야. 신이 좋아하는 행위를 하면 자라난다라. 그럼 말이지."

"그걸 대량으로 양산할 수는 없을까?"

"예?"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에 벙쪄서 입을 딱 벌리는 아이. 마레는 철창 사이로 주둥이를 들이밀고 혓바닥을 핵핵대는 시커팩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태초에, 자연은 인간에게 달고 시원한 사과를 주었지. 그 선물을 받은 대가로, 인간은 나무를 붙잡아 검게 뒤집은 흙에 쳐박고 나무로서의 모든 부분을 잘라낸 채 오직 사과만을 내놓도록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 강요함으로써 보답했다."

"토지, 물, 벼이삭과 사과 그리고 그 외 모든 자연자본에 했던 짓을 신앙에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행위."

"그게 바로 축양이다."

"카나기는 자신의 신도가 괴물을 길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동시에, 자신의 신도가 난폭한 괴물을 사냥하는 것도 좋아한다."

"시커팩은 괴물의 피를 이은 가축이지. 이것도 마력의 목적성은, 괴물로 판정한다. 그럼, 이 시커팩을 잔뜩 모은 다음, 한쪽에서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길들이고, 폭력으로 그걸 억지로 난폭하게 만든 다음, 한쪽에서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처형한다면?"

"그럼 마력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겠지. 이만큼이나 엄청난 양의 시커팩을 긁어모은다면, 4위계 마술사가 5위계가 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이게 바로 축양이라는 짓거리다. 이거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이지. 마력이 자라는 방법을 알아낸 뒤, 그 최소부분만 남기고 본질에서 소외된 방식으로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

"이 놈들은 그 축양으로, 4위계의 지도자 두 놈을 전부 5위계로 올려보낼 생각이었던 것 같군. 5위계면 어딜 가도 핵심 전력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놈들이 사면을 교섭할 수 있겠지. 뭐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자칭 공생의 학파라는 자식들이, 개 수레를 끌면서, 인간과 진정으로 공생하던 개들을 잡아와서 이런 꼬라지로 만든 거지. 그 주인은 죽여버리고 말이야."

"왜 일자가 15일 뒤였는지도 알겠군. 그 날은 보름날이다. 시커팩 개의 야성과 괴물로서의 본능이 절정이 되는 날이지. 그 날 축양을 해야 가장 효과가 좋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 보름날 밤, 이 모든 개는 한쪽에선 억지로 세뇌당하고 한쪽에서는 목을 잘리게 되었을 거야."

"이런 짓거리가 허락되는 거에요? 말, 말이 되냐구요."

"물론 안 돼. 축양은 배교 다음으로 끔찍한 범죄 행위다."

"어쩌면 배교보다도 끔찍할 수도 있어. 배교자는 그 배교당한 교단만이 뒤쫓지만, 신앙을 축양한 자는 일곱 개의 교단이 모두 뒤쫓아 척살하도록 되어 있단다."

"이런 짓거리를 허락한다면, 신앙의 근간 자체가 망가질 테니 말이야. 즉 이걸 들키면... 이 놈들은, 일곱 교단의 공적이 된다."

"그래서 이렇게 암구호를 쓰고, 이상한 위장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숨기려 들었던 거지."

담배를 입에서 떼서 던지는 마레. 그와 동시에, 쉰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브라비, 브라비, 브라비시미!"

그 말과 동시에 모든 개 짖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모든 개를 통제하는 자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수염을 두 가닥으로 땋은 교활한 인상의 남자. 그 뒤를 대태도를 든 검은 말총머리의 여자가 지키고 있다.

교활한 인상의 남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하더니, 갑자기 박수를 쳤다.

"자네 말투를 들어 보니 랭 반도 출신인 것 같아서, 그쪽 연극의 찬사를 따라 해봤는데 말이야. 그렇게 우리의 계획을 파악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브라비! 어때, 기분 좋나?"

"닥쳐라. 허섭스레기."

내던진 담배를 짓밟으며 말하는 마레. 저 자의 수준은 딱 보아도 파악할 수 있었다. 4위계였다. 그 중에서도 거의 5위계에 달할 정도로 높은 4위계. 보유한 마력의 양이 심상하지가 않았다.

이 이상한 수염의 남자가, 아무래도 그 아이신고르인 모양이었다.

"아이신고르의 찌꺼기. 귓구멍 파고 잘 들어라. 이미 랭 교구에서는 네놈의 이 끔찍한 범죄행위의 혐의가 대부분 소명되었다고 생각하여 나를 비롯 처형 부대를 파견했다. 그중에는 절망의 천사를 이끄는 5위계의 추기경도 계시지. 나는 선발대일 뿐이야. 지금이라도 순순히 오라를 받고 속죄하면, 네 가문으로까지 책임이 번지는 건 막아주마."

이 자가 아이신고르일 거라는 추론으로 밀고 나간 거짓말과 허세였다. 마레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자는 녹록하지 않았다. 아이신고르는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그래? 그럼 내 이름이 뭔가?"

눈빛만은 여전히 흉흉하게 곤두세운 채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침묵하는 마레. 아이신고르는 껄껄 웃으며 수염을 비비 꼬았다.

"그런 허세는 잡졸들한테는 통할 테지만 말이야. 이신 아이신고르의 8촌인, 이 바우얀 아이신고르에게는 안 통한단 말씀이야."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오는 바우얀. 천장에 매달린 램프 때문에,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불빛 아래 드러났다. 그리고, 그 불빛이 비추는 또다른 물건 때문에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그의 옆구리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검이 걸려 있었다. 그 검의 옆면에 적혀 있는 이 글귀가, 아이의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압제이다.

그건 블로어였다.

"그 칼, 내놔!"

유혼을 청원해 뽑아들며 외치는 아이. 바우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꺾을 뿐이었다.

"오, 이건 내 부하가 내게 상납한 정당한 나의 것인데. 넌 도적인가? 왜 남의 것을 탐하는 게냐."

"닥쳐! 이 세상 누구도 나보다 더, 그 칼을 가질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순 없어. 내놔!"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 것 같은 흉험한 기세의 아이. 그 기세에 눌린 바우얀은, 자신의 뒤에 얼음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 무반 뒤로 살짝 몸을 피했다. 그리고 입을 계속 놀린다.

"물건을 원하면 거래를 해야겠지. 그래, 뭘 제시할 수 있나?"

"그 쪽이 먼저 제시하시지. 나름대로 협상할 거리는 좀 있다."

흥분 상태인 아이 대신 교섭에 나서는 마레.

"지금 그 검을 내주면, 최소한 네 두 년놈들이 편안한 죽음을 맞게는 해 주마. 편안한 죽음 말이야."

"그래? 그럼 네놈들의 목은 어떤가?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는 일이라서 말이야. 네 두 놈의 목을 쳐서 눈과 혀를 뽑게 해 주면, 이 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렬이군."

"그래... 결렬이다!"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의 뒤에 있는 거대한 철창을 열어젖히는 바우얀. 그 철창 뒤에서, 무언가가 눈을 떴다. 커다랗고 샛노란 두 개의 동공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쿵,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것은 불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이것도 시커팩인가? 어리광을 얼마나 받아줬으면 이 따위로 커져버린 거야?"

"그래. 시커팩 삼십 마리를 이끌었던 시커팩 로드다. 북쪽 숲에서 포획해, 운 좋게 길들이는 데 성공한 놈이지."

저번에 아이가 죽였던 시커팩, 그것보다도 세 배는 부피가 커다란 은색 털의 시커팩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이빨은 하나하나가 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유혼만큼 컸다. 바우얀은 훌쩍 몸을 날려 그 시커팩 로드 위에 올라타더니, 괴성을 내질렀다.

"덮쳐!"

그 명령을 신호로, 폐허가 된 성의 지하감옥을 배경으로. 아마도 이 수탐의 마지막을 장식할 결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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