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탐 ( 7 )
저돌맹진(猪突猛進).
마치 멧돼지와 같이 앞뒤와 스스로의 몸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들이받는다는 속담. 지금 저 괴물의 형세가 딱 그러했다. 아이의 뒤에 바로 벽이 있음에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머리를 들이박는다. 포격 같은 박치기였다.
쿵!
굉음. 그리고, 단단하게 축조한 벽임에도 무너진다. 벽 바로 뒤에는 해자를 파기 위해 깊게 파 놓은 구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까 보초를 떨어뜨렸던 그 해자의 구멍이었다. 벽돌 몇 개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진다. 어찌나 깊은지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아이는 간신히 그 돌진을 피했다. 그리고, 간격을 확보한 채 자신이 대태도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을 준비했다. 아이의 허리가 굽는다. 투포환을 던지기 위해 준비하는 투포환 선수처럼. 괴물의 등에 올라탄 채로, 공격을 노리고 있던 우스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먹어라!"
원심력을 담아 둥글게 휘둘러지는 유혼. 그 검날에선 붉은 기운이 불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일격은 괴물의 옆구리를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어냈다. 그러나 괴물의 숨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푸른 빛을 두른 대태도가 그것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괴물의 옆구리를 쑤시고 갈비뼈꼐까지 나아간 아이의 유혼을 막아낸 우스무.
그녀는 괴물의 등을 박차고 뛰어오른 채로 검을 내려찍었다. 머리를 노리는 상단세의 자세였다.
챙!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이는 일격이었지만 아이는 유혼의 손잡이로 그것을 쳐냈다. 푹! 깊이 쑤셔져 있던 칼날을 뽑아내고 자세를 벌린다. 우스무는 전략을 바꿀 생각인지, 이번에는 괴물에게서 조금 떨어져 아이를 비껴 포위하듯 섰다. 그리고 흉험한 기세로 묻는다.
"너, 쿠르누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응?"
"시치미떼지 마라! 월아검(月牙劍)의 절초를 네가 어떻게 쓸 수 있는 거냐! 그걸 쓸 줄 안다는 건, 이미 우리의 검을 꽤나 배웠다는 건데."
검을 잡은 채로 입술을 다무는 아이. 아이는 대태도를 사용한 검술 중 이것도 할 줄 안다기보다는, 이것밖에 할 줄 몰랐다. 이건 원래 레고르의 기술이었다.
림과 함께한 환상 속의 수련에서 레고르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이 기술을 사용했다. 수십, 수백 번을 눈동냥했으니 싫어도 높은 완성도로 따라할 수 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옛날의 아이라면 이런 것을 은연중에라도 티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글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검으로 확인해 봐."
차갑게 말하고 두 손의 간격을 좁혀 손잡이를 바짝 쥐는 아이. 상대방이 필요 없는 경계까지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우스무도 분홍빛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깨물었다. 괴물은 활처럼 허리를 굽힌다. 도약의 준비였다.
"아우우우우우우!"
거슬리는 쇳소리가 섞인 짐승의 울음을 내지르며, 괴물과 우스무는 동시에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그 월아검의 절초라고 불린 기술을 사용했다. 일식 중의 태양에서 빠져나오는 붉은 빛무리 같은 시뻘건 빛이 유혼 가득 맺히고, 크게 휘둘러진다.
그것은 거대하고 붉은 검영을 만들어냈다.
쿵!
"크헉!"
유혼의 힘. 카나기의 마력이 담긴 검을 만나면, 깨뜨리고 그 마력을 빼앗아 발출시키는 힘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전력을 다한 우스무의 대태도에 담겨 있는 마력을 유혼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거꾸로 붉은 빛의 탄기를 형성해 쏘아버렸다. 그것을 가슴에 얻어맞은 우스무는 상반신이 반으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뒤로 쓰러졌다. 우스무의 검은 유리조각처럼 깨졌다.
우스무를 쓰러뜨린 유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피를 흘려 너덜너덜해진 괴물의 내장에 처박힌 것이다. 손잡이 끝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범한 감각이 전해졌다. 쓰러뜨렸다! 아이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뭐, 뭐야?"
이것은 심장을 찔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끈덕진 살점 같은 무엇이 아교처럼 검날에 달라붙어 검로를 방해했다. 이 괴물은, 그 형상처럼, 생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살점이 되어버린 듯 했다.
"아우우우우우!!"
아주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괴물은 송곳니를 앞세워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괴물에게 어깨를 물려 개가 가득한 철창에 들이받히고 말았다.
"크악!"
충격의 여파로 시커팩 개가 들어차 있는 철창의 문이 구부러졌다. 문이 열리고, 개가 쏟아져나온다. 괴물은 아이의 살점을 잡아 뜯기 위해, 목을 움직여 어깨 전체를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월! 월! 월!"
시커팩 개는 영리한 개였다.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본능으로 직감하고, 자신의 편을 골랐다. 무너진 철창에서 쏟아져나온 수십 마리의 시커팩 개들이, 그 이빨을 곤두세우고 어쩌면 자신들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던 괴물을 덮친다. 어떤 개가 괴물의 눈을 크게 물어뜯었다. 그 때문에 괴물은 아이를 놓치고 말았다.
괴물의 이빨에서 풀려난 아이는 마치 검을 쥔 것처럼,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목청껏 소리 질렀다.
"레바테인!"
스스슥, 거대한 쯔바이핸더가 그 손으로 솟아오른다. 아이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 쯔바이핸더를 내려찍었다. 단두대 같은 일격이었다.
"카우우우욱!"
두개골을 가르고, 뇌수를 가르고 괴물을 쪼개놓는 레바테인. 수십 마리의 개에게 온 몸을 물어뜯기면서도 거칠게 저항하던 괴물은, 그제서야 그 숨을 거두었다.
"후욱...후욱..."
"잘했다. 역시 내 호위야. 혹시 이대로 내 전속 호위가 되어 줄 생각은 없나? 너라면 우리 교단에서 추기경 전속 처형자, 뭐 그런 역할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헛소리하지 마세요. 우욱!"
입안 가득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능청을 떠는 마레에게 다가가는 아이. 그 앞에는 여전히 바우얀이 텅 빈 눈으로 앉아 있었다.
"이제 이놈만 처리하면 끝이군. 내가 마술을 풀어서 내 정신과의 연결을 해제할 테니까, 푸는 순간 목을 쳐라."
"그냥 지금 치면 안 돼요?"
"이, 이 자식, 그럼 나도 죽는다니까?"
"그래서 치려는 건데요."
"뭐, 뭐?"
"농담이에요."
진심으로 질겁하는 마레를 보며, 피식 웃는 아이. 품에서 환도를 꺼내 들었다. 이 흉악범의 목은 이것으로 치고 싶었다. 환도의 검날에 새빨간 신기가 맺힌다. 마레는 신중한 표정으로, 바우얀과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말한다.
"셋 둘 하나 하면 휘두르는 거다."
"셋. 둘..."
"윽!"
하나, 그리고 목을 베려는 순간.
무언가가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우스무였다. 가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어떻게 살아 있었던 그것은 마지막 숨을 다해 자신의 주인을 지키려고 한 것이었다. 마레의 영민한 두뇌도, 아이의 예민한 감각도 전부 초월한 초월적인 충성심이었다. 어쩌면, 충성심을 가장한 다른 것일 수도.
"뭐, 뭐야!"
죽기 직전 마지막 괴력으로 아이를 덮친 우스무는, 가슴에서 빠르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호리병이었다. 아까 시커팩 로드에게 사용한 것과 같은 호리병. 그것을 꿀꺽꿀꺽 마시더니, 괴물 같은 힘을 내어 아이를 밀어붙인다. 마레는 당황해서 소리 질렀다.
"뭐, 뭐하는 짓이야! 그걸 인간이 쳐먹으면, 야만인과 똑같은..."
"닥쳐!"
우스무는 그렇게 말하고 아이를 붙잡은 채 저돌맹진한다. 목표는, 아까 괴물이 박치기로 뚫어놓은, 해자로 이어지는 구멍이었다.
"모두들! 여기 침입자를 죽여라! 죽이고, 바우얀 님을 구해라!"
우스무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목청껏 그렇게 소리 지르고, 아이를 끌어안은 채 해자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동안 아이는, 자신에게 들러붙은 우스무를 팔꿈치와 주먹으로 미친듯 후려치고 있었다.
휘이잉!
마른 해자의 구멍으로 몸을 던지자마자, 우스무는 성불했다는 듯 아이의 품에서 손을 놓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 역시 그렇게 될 것이었다.
"으아아악!"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환도로, 간신히 성벽의 돌벽을 뚫어 지지대를 만들고 매달렸다. 그 덕분에 떨어지지 않고 위태롭게나마 버틸 수 있었다.
"후욱...후욱..."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확인사살을 안 한 내 잘못이야. 아이는 입술을 떨며 그렇게 생각했다. 슬쩍 밑을 내려다보자, 무저갱 같은 어둠이 입을 쩍 벌린 채 도사리고 있었다. 아까 자신이 떨어뜨린 보초도, 우스무도 떨어져 죽었을 깊은 어둠.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아이의 뺨에 맺힌 핏방울을 스치고 지나간다.
"림... 이거... 어떻게 하지...?"
'천천히 칼을 잡고 기어올라보거라. 너라면 할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이를 악무는 아이. 반복해서 검을 박아넣으며, 발판 삼아서 기어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했다. 거의 5위계에 달하는 4위계의 마술사 둘, 거기에 삿된 존재의 힘을 빌린 괴물과 맞서 싸우면서, 힘을 너무 많이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쯤 칼을 박아넣어 올라가기를 마쳤을 때, 아이는 현기증 때문에 힘이 빠져 손에서 검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아이는 멍하니, 그 추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바닥에 나도 떨어지는 건가, 많이 아프겠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철창의 감촉 비슷한 것이 등을 점하고 있을 뿐이었다.
"응?"
아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새장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어떤 친숙한 존재의 새장 속에서, 마치 새처럼 안전하게 보관되어 천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 어, 그! 그때 봤던 그 천사!"
라그엘이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잿빛 날개를 가진 채, 한 손에는 커다란 새장을 들고 있는 천사.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를 새장으로 받아내 이렇게 구해낸 것이었다. 자신이 떨어진 벽의 구멍에 도착하자, 마레가 손을 내뻗어 새장 속에서 아이를 꺼냈다. 손을 붙잡고,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꽉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제기랄, 나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줄 알고 울 뻔했잖아."
"당신도 울 줄 알아요?"
진한 목소리였다. 너무 마레답지 않은 행동이라, 아이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레는 아이의 등을 툭툭 두드려준 채, 지하감옥으로 아이가 발을 디디도록 이끌었다. 그 곳에는 아이에 의해 풀려난 수십 마리의 시커팩이 꼬리를 흔들며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응당 있어야 할 존재가 없었다.
"그, 바우얀인가 하는 벼멸구는요?"
"미안. 놓쳤다. 널 구하려고 온 힘을 다 짜내서 라그엘을 부르는 새에, 마술이 풀려서 도망쳤어."
침통한 표정을 짓는 마레. 아직 라그엘의 영핵은 완전히 수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레가 워낙 간절하게 기도한 탓에, 그 부름을 받아 아탕칼리가 기적을 내려준 것이었다. 그 수복을 위해 젖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야 했기에 정신 제압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그 틈을 타 바우얀은 쥐새끼처럼 도망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 블로어라는 검도 회수 못 했다. 내 불찰이다. 미리 검 정도는 빼앗아서 다른 곳에 보관해도 됐는데..."
"아니, 괜찮아요.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까, 이제 금방 찾을 수 있겠죠. 나도 그것보다도 당신이 안 죽은 게 다행이에요. 그리고."
아이는 마레를 옆으로 물리고, 조용히 청원했다. 카나기를 죽이기 위한 하얀 대태도를.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있네요."
지하감옥의 입구에는, 수십 명의 카나기 병사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든 채 흉험한 기세로 모여 있었다. 우스무가 유언처럼 쥐어짜낸 소집령을 듣고 모여든 것이었다. 아이는 유혼을 한 손으로 치켜든 채 손가락으로 도발했다.
"와 봐."
다시 한 번 칼이 부딪는 소리가 지하감옥을 가득 메웠다.
*
마레는 탄식하듯 말했다.
"미쳤군. 정말 미쳤어. 너 이게 말이 되는 전과인가? 카나기의 4위계 둘, 3위계 열, 2위계 스물에 1위계 스물일곱을 혼자서 쳐죽인다고? 이게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전과가 아니잖아. 백정도 돼지를 하루에 이만큼 도축하진 못할 거다."
잔뜩 몰려든 바우얀의 잔당들은, 아이의 유혼 앞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부 고인이 되어버렸다. 카나기의 피를 잔뜩 포식한 유혼은, 이제 레바테인보다도 더 예리하게 정련된 검기를 발하며 만족스럽게 림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마레는, 턱이 떨어져라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푹. 무감각하게 카나기의 심장을 공양하던 아이는, 피 묻은 유혼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죠."
"네가 자유자재로 꺼내는 그 마검의 덕을 본 측면도 있는 건가? 그건 카나기 놈들이 쓰는 검과 비슷해 보이는데."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할까요?"
"젠장. 어디서 이상한 말장난은 배워가지고. 자꾸 그러면 십자가에 매달고 물어본다."
"누구한테 배우긴, 당신한테 배웠죠."
마레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시체를 공양하고 그것을 소각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스무번째 시체를 공양하던 도중, 갑자기 림이 아이를 불러세웠다.
'어린 사도야. 저것을 보거라.'
림이 어떤 시체를 가리켰다. 그 시체는, 카나기의 금지된 마술로 이상한 괴물이 되어버린 시커팩 로드의 시체였다. 분명히 숨이 끊어졌는데도, 괴상하게 변이된 그 심장은 마치 독자적인 생물이라도 되는 양 쿵쿵 뛰고 있었다.
'갑자기 든 충동이다. 안 될지도 모르지만, 한번 해 볼 가치는 있다고 느꼈다. 저 심장을 공양해 보아라.'
"뭐?"
'어서.'
림의 엄한 음성을 들은 아이는, 두말없이 레바테인을 불러내 그 심장을 찍었다. 그리고 림에게 이 심장을 공양하겠노라는 맹세를 했다. 검의 끝에서 검은 불길이 일어나 심장을 불태운다.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하듯 서 있던 림은, 눈을 번쩍 떴다.
'놀랍군. 대체 왜 이게 되는 거지?'
"뭐야? 무슨 일이야."
'내 어린 사도야. 너는 이게 무슨 존재인지 알고 있느냐?'
"음, 대충은 아는데... 제국 남쪽에 있는, 지금은 완전히 멸망해버린 땅에서 사는 괴물들이잖아. 망자의 땅인가 뭔가 그렇게 불리는 곳. 거기서 용케도 저런 괴물딱지들이랑 같이 살고 있는 야만인들이 맨날 제국이랑 여타 문명 국가들에 쳐들어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고."
'그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인간들이 아는 만큼은 알고 있구나.'
"그럼? 그게 아니라는 거야?"
'이건, 하레하둔을 비롯 제국에서 신기가 응축되어 탄생하는 괴물과는 그 궤가 다르다. 이건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야.'
"응?"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는 아이. 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괴물은 어쨌건 신이었거나 악마였던 것의 조각인 신기로 말미암아 태어나지. 이건 편의상 괴물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그 신기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해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이 센디엘에 파고들어 생겨난 것이야.'
'센디엘은 보통 모래시계로 비유되지. 악마가 그 모래시계의 바닥에 깔려,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세계를 전복시키려 애쓰는 자이고, 신은 그 모래시계의 천장에 걸터앉아 모래시계의 위층이 텅 비든 말든 그 전복을 막으려고 애쓰는 자라면, 이건 그 궤가 다르다.'
'신이 승리하든 악마가 승리하든, 위로 뒤집든 아래로 뒤집든, 모래시계 안에 들어있는 모래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그저 위치만이 바뀔 뿐이겠지. 하지만 이 놈들은 그게 목적이 아니다.'
'이 놈들은 세계의 멸망을 원한다.'
'이건 끌과 망치를 가지고 모래시계의 유리 벽을 전부 깨뜨려 모래를 전부 바깥으로 흘러나가게 만든 뒤, 모래시계 속에는 공허만을 남기려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 무슨..."
몸을 부르르 떠는 아이. 림은 그러거나 말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신도 악마도 아니고, 그 연원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고는 딱히 정의내릴 방법이 없지. 그래서 이것은 비밀스러운 문서에서는 삿된 존재라고 불리고, 부득이 신이라는 개념 아래 정의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외신(外神)이라고 불린다. 모래시계 위도, 아래도 아닌 바깥에 있는 신이라는 뜻이지.'
'그렇기 때문에 이놈들을 이용하는 마술은 금지되어 있는 거야. 이놈들의 속성은 선도 악도 아닌, 종언(終焉)이다.'
'그리고... 방금 이 녀석의 심장을 보았을 때, 나는 뜬금없는 충동을 느꼈다. 천 년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충동.'
'이 심장을 공양받고 싶다는 충동 말이야.'
"뭐?"
'그리고 이렇게 훌륭하게 공양 되었지. 나는 이것을 바탕으로, 너에게 새로운 힘을 내릴 수 있다. 그건 차차 갈무리해서 알려주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즉.'
'천 년 사이에, 이것도 뭔가의 마술사의 신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이는 침묵했다. 림이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를 대충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천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천 년 전, 이놈들은 세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무시해도 될 정도였지. 천 년 사이에, 이놈들의 세력이 엄청나게 강해진 것처럼 느껴지는군. 마술이라는 목적성을 띌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또 하나 고민하고 있다.'
"뭔데?"
'과연 이 힘을 네게 주어도 될까, 하는 고민 말이다. 이 힘은 너무 위험해. 잘못하면 너를 내부로부터 도괴시킬 수도 있다. 너도 찬찬히 생각해 보거라. 그리고 알아두거라.'
'모든 마술사를 말살한다는 소원을 이루려면, 이놈들도 전부 쳐죽여야 된다는 것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심장을 공양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림은 그저 심각한 얼굴로 외신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저번에는 네가 그 두냐의 검은 개한테 밀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말이야. 정정하지. 너는 분명히, 현 센디엘 최강의 열여섯 살이다."
카나기의 시체를 소각하는 것을 도우며 말하는 마레. 아이는 문득 궁금해져서 마레에게 물었다.
"그, 저보다 강할 수도 있다던 열여섯 살은 누구인데요? 두냐의 검은 개?"
"그런 놈이 있다. 년일 수도 있겠군. 확실한 건, 그 녀석이 두냐가 기르는 베들렘(Bedlam)이라는 거지. 아니, 그걸 왜 모른다는 거냐."
"베들렘?"
아이는 더 캐물으려다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끄는 몸짓 때문에 그것을 멈췄다. 몸짓의 주인은 시커팩 개였다. 잡종일까? 털 색깔이 이리저리 섞인 시커팩 개가, 끼잉 끼잉거리며 계속 옷자락을 잡아끌고 있었다.
"왜 그러니?"
공양을 멈추고 개를 쓰다듬는 아이. 림에게 마술사 살해를 서원한 이후에도 아이의 선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물을 좋아하고 돌보는 본성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안달이 난 듯 몸을 비비 꼬는 개를 쓰다듬으며, 아이는 이 생물이 자신에게 전달하려는 의지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건 부탁이었다. 다른 이의 구원을 바란다는 부탁.
"네 주인이 여기 잡혀 있는 거니?"
조용한 음성. 인간과 더불어 오래 생활한 시커팩 개는 눈치가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꾸 옷자락을 잡아 어딘가로 이끌려고 들었다. 아이는 유혼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죠. 이놈들, 개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잡아왔나 봐요."
마레도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차게 뛰쳐나가는 시커팩 개를 뒤쫓았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쏜살같이 뛰쳐 내려가는 시커팩 개. 이윽고, 그 개는 어떤 철문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을 박박 긁기 시작한다.
"굳게 잠겨 있는데. 뭐지?"
아이가 아까 보초에게서 입수한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았다. 베어버릴까. 아이는 레바테인을 부르려다가, 문득 조심성이 생겨 고개를 저었다.
"림, 혹시 이 안에 들어가서,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정찰해줄 수 있어?"
'어렵지는 않다만. 왜 그러느냐.'
"혹시 유독 가스 함정이나, 뭐 그런 게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건 굉장히 엄중하게 경비되는 모양인데."
'허. 조심성이 생겼구나. 좋은 징조야. 인간은 약하니 언제나 그렇게 돌다리를 건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림. 림은 문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끌어안듯 붙잡은 채 그 앞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림이 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함정은 있어?"
고개를 젓는 림. 아이는 표정을 밝게 바꾸고 레바테인을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림이 막아선다.
'허나 나의 사도야. 함정보다 더 위험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
"뭔데?"
'마술사다.'
아까 외신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림.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어린 순례자야. 혹시 나에게 하나를 맹세할 수 있겠나? 그럼 이 문을 열 수 있도록 비켜주마.'
"뭔데?"
'이 안에는 마술사가 한 명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다. 네가 착한 마술사를 죽이지 않으려 한다는 건 알겠다. 그게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는 죽이지 않으려는 것도 알겠어. 그것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 이번 단 한 번만, 그 신념에 예외를 만들어 주면 안 되겠나.'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듣겠어."
'들어가자마자 저 마술사를 죽여다오. 저 마술사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이다. 부탁한다.'
부탁한다니, 림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말을 경청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고려해볼게. 비켜 줘."
한숨을 내쉬고 문에서 멀어지는 림. 아이는 레바테인 가득 빨간 신기를 맺게 한 뒤, 검을 내질렀다. 철문은 수수깡처럼 깔끔하게 절단되어, 뒤로 무너졌다.
"왈! 왈! 왈!"
문이 열리자마자, 시커팩 개가 달려들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여인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마레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율사잖아. 왜 율사가 여기 잡혀 있는 거지?"
어깨가 드러나는 사제풍의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꽃봉오리를 낀 분홍 머리의 여자. 어떻게 보아도 율사의 차림이었다. 그것은 기진맥진한 채 방 안에 감금된 채로 누워 있었다. 마레는 턱을 매만지며 추론을 개진했다.
"아무래도 이놈들은 이 율사를 잡아오긴 했는데, 처리를 못 해서 굶겨 죽이려고 한 것 같은데. 라달라리아의 율사를 직접 죽이면, 그 악의를 감지하고 심장에 새겨진 마술이 본단에 신호를 보내버리거든. 그래서 이렇게 가둬놓고 천천히 굶어 죽게 만들어서 자연사 비슷한 거로 위장하려고 한 모양이다."
"그, 그런... 그런데 율사가 왜 여기에 있어요?"
"까만 백조가 있었던 거 아닐까."
"예?"
"고행의 순례. 몸뚱이 하나만 믿고, 법의 정의를 선물하러 생지옥을 돌아다니는 의례. 그걸 진짜로 하려고 한 신입 율사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 와중에 잡혀들어온 것 같은데? 솔직히 좀 감동이군."
그 말에 감동 섞인 눈으로 쓰러진 율사를 바라보는 아이. 황급하게 달려가서, 그 여자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뉘었다.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물을 꺼내, 그 입에 뿌린다. 여기 연금되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 물이 제일 고플 것 같아서였다.
어째서인지 그 뒤에서 림은 이마를 붙잡고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깨어났다."
그렇게 두 통 정도의 물을 들이붓자, 바짝 마른 입술이 움직이며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책이 어울릴 것 같은 아름다운 여자. 아이는 생긋 웃으며 그 율사에게 물었다.
"정신이 좀 드나요?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그 율사는, 눈을 깜빡이더니, 어딘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죽기 전 주마등을 보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것은 뱅어처럼 흰 손가락을 내뻗어, 아이의 뺨을 문질렀다.
"그렇구나, 죽기 전에는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보여준다고 하더니, 그렇구나..."
"죽지 않고 자랐다면, 아마 지금 이렇게 예쁘고 늠름하게 자랐겠지.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실 내가 마지막까지 미안한 건, 너밖에 없었어."
그러더니 갑자기 아이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박치기하려고 들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 몸을 뺐다.
"아악!"
그 바람에 여자 율사의 뒤통수가 바닥에 크게 부딪혔다. 그건 몸을 일으켜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야, 당신 뭐야!"
마레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옆에서 시커팩은 율사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잠시 후,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그 율사는, 갑자기 얼굴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맺더니, 아이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구원해야 할 백성이 많고, 법이 필요한 송사도 많은데, 이렇게 허무하게 여신님의 곁으로 떠나게 되는 줄 알고, 정말 속상했어요..."
그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아이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자신에게 꼭 끌어안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언젠가, 란페이가 그랬던 것처럼.
"아, 아직 제 이름을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아이 씨라고 하셨죠? 저분은 마레 델피에로라는 존함이라고 하셨고. 제 이름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각도지만, 아이의 등 뒤에 서 있던 림은 그 여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울기 직전,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억지로 울음을 뽑아냈다. 눈물이 마르자, 힐끔, 사방을 바라보며 가련한 척을 계속했다.
"다나 아니스라고 합니다."
림의 얼굴이 더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