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Bookmaker ( 1 )
붉고 하얀 능금과 사과꽃의 꽃길이었다.
"우와..."
세상을 가득 메울 듯 펼쳐진 사과농장. 그 사이에 조그맣게 난 길을 따라 걸으면서, 아이는 연신 탄성을 질렀다. 레오가 이끄는 다이너에 앉은 다나는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이 아이에게 말한다.
"내가 굳이 이 길로 오자고 한 이유를 알겠죠?"
"네!"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가 얼른 표정을 차갑게 굳히는 아이. 아이는 일부러 다나와 거리를 조금 유지하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태도까지도 귀여웠는지 다나는 쿡 웃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동네, 델로른은 이 지역에선 웨스벤 다음으로 안전한 지역인데요. 분지가 휘감듯이 그 지역을 감싸고 산에서부터 작은 실개천이 흘러서, 외적으로부터 방어를 해 주면서도 자급자족하기 충분해서 이런 지역이 생겼어요."
"그렇구나..."
"이 동네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다른 데서는 못 보는 시원하고 달콤한 사과가 열리는데, 이 사과 품종은 특이하게 사과꽃과 사과가 같이 피는 게 특징이에요. 그 사과를 설탕에 절여 파는 것과 사과주를 빚어 파는 게 이 동네의 주 수입원이죠. 웨스벤처럼 번화하고 부유한 도시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 동네는 농사짓는 동네 치고는 생활이 괜찮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어렸을 때 여기 농장에서 몇 달 일했거든요. 꼬맹이 임금 같은 거 그냥 떼먹어도 되는데, 전부 챙겨 주고 보너스로 말린 사과 정과까지 한 보따리 싸 줬어요.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인심이 후한 곳이었죠."
"돈이 궁하지 않을 정도로 인심이 후하면서, 다른 요술쟁이들은 오기 힘들 정도로 깊은 곳이니까... 여기라면 성명을 좀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여기로 오자고 한 거예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다나. 그러더니 문득 팔을 내뻗어 사과 하나를 뚝 땄다. 홍옥이라는 별명이 왜 생겼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새빨간 과실.
"어때요, 한 입 먹어 볼래요?"
"어, 어? 이거 남의 거 아니에요?"
"서리라는 거에요, 서리. 서리는 벌을 받지 않는답니다."
"왜요?"
율사가 하는 말이니 정말로 법적 근거가 있어서 그러는 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어보는 아이. 그런데 다나는 그 사과를 한 입 아삭 먹으면서 말한다.
"안 들켰으니까요."
"그냥 도둑질이잖아요!"
아이는 소리 지르면서 사과를 빼앗으려 했다. 다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휙휙 그 손을 피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 말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만, 그만, 농담이에요. 사실 이거 따면서, 안 보이게 동전 하나 가지 위에 걸어 뒀어요. 관습적으로, 그러면 그냥 값을 지불한 거로 친답니다."
"어?"
그 말대로였다. 다나는 한 입 더 크게 사과를 베어 물더니 아이의 입에 억지로 사과를 물려주었다. 자기가 입을 댄 부분이었다.
"어때요, 맛있죠?"
싱그러운 달콤함 뒤에 산미가 살짝 묻어 있는 신기한 맛이었다. 아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무신경하게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먹었다. 뭐야? 간접으로 키스했는데 반응이 아예 없어? 다나는 볼을 뾰루퉁하게 부풀렸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는 몰라서 눈을 멀뚱멀뚱 뜰 뿐이었다.
*
이상한 점은 그렇게 한참을 간 뒤에야 발견됐다.
"이상하다..."
"뭐가요?"
의외로 먼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건 아이였다. 다나는 어딘가 박하 냄새를 연상시키는 사과꽃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아 담배 한 대 태우고 싶다, 라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다 화들짝 놀라 아이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저렇게 낙과한 과실이 엄청 많이 보이는 데요."
휙,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져 짓뭉개진 사과를 가리키는 아이. 그 주변에선 개미가 모여들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수확을 하지 않는 거죠? 이것도 이유가 있나요?"
"어..."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이렇게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과실이 영글었다면 진작에 수확을 해야 했다. 제때 수확을 다 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풋사과일 때 일부를 따서 숙성하기도 한다. 이 농장에서 일했던 다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농장의 사과들은, 이미 수확할 시기를 한참 지나 농익었는데도, 아무도 그걸 거두지 않고 있었다.
"뭐지? 진짜 이상하네요."
복잡한 표정을 짓는 다나. 머릿속이 그것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걷던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 앞에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법한 광경이 들어왔다.
"거기 당신, 뭐하는 겁니까!"
다이너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르는 다나. 그들의 앞에는 검은 후드로 몸을 가린 서리꾼, 아니 사과 도둑이 있었다. 그 옆에는 사과가 가득 들어찬 큼지막한 광목 자루가 놓여 있었다. 사과를 수확해 담을 때 쓰는 자루였다. 다나가 어렸을 때 저기에 사과를 가득 채워 수레에 실어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검은 후드는 두 사람을 보고 굉장히 당황한 눈치더니 자루를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재빨리 소리쳤다.
"그대에게 선고한다!"
선고. 눈앞에서 현행범을 발견했을 때만 발동할 수 있다는 제약이 걸려 있는 마술이다.
"그대는 지금 절도의 죄, 타인이 점유하고 있는 재물을 절취하는 범죄를 행하였으며 그것을 질서의 회복을 바라는 율사의 앞에 드러냈으니, 그 사지를 포박당해 쓰러지는 벌이 합당하다!"
다나가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1위계의 마술. 약식 선고의 마술이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나의 말이 하나의 문자열을 이루어 그 도둑의 몸 주변에 구현화되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문자열의 포승에 묶여 바닥에 쓰러졌다.
"됐다! 붙잡았다!"
의기양양한 다나. 두 사람은 곧 마법에 묶여 몸부림치는 도둑에게 다가가 그 후드를 벗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 때문에 놀라 아연실색했다.
"뭐야, 아직 꼬마잖아?"
"꼬마 아니거든! 이 못생긴 할망구야!"
"이게!"
머리를 쥐어박는 다나.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이 쪼꼬만 도둑놈이, 내가 너 나이 때는 말이지, 음... 아무튼 열...열심히 죽,죽을 위기에 처해가면서 돈 벌었어! 누가 도둑질하래!"
'뚫린 입이라고 참...'
"왜 그래, 림?"
'아니다.'
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는 그 옆에서 조용히 남자아이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농가의 자식이 흔히 입는 차림이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짠 듯한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다.
"도둑질이 아닌걸!"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소리 지르는 남자아이. 다나는 깜짝 놀라 눈을 껌뻑였다.
"이거, 다 원래는, 우리 거였단 말이야..."
그리고 그 남자아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나는 그 남자아이를 번쩍 들어 다이너에 앉히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변호할 말이 있으면 하렴."
울먹이던 아이는,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
소작료가 세 배로 올랐다.
아이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원래 이 땅, 델로른은, 지주와 소작농이 나름대로 공생관계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지주들은 풍년에는 3할 흉년에는 2할이라는, 제국 내부와 비교해도 낮은 소작료를 준수했다. 그 대신 농민들은 마을에 위기가 닥치면 펄션이나 할버드 따위로 무장하고 민병이 되어 지주의 재산을 지켜주었다.
그렇게 거둬들인 사과는 2차, 3차로 가공되어 각지로 팔려나갔으며, 그것을 위해 들리는 상행인들과 이 땅에서 몸을 쉬러 들린 방랑자들이 뿌리고 간 돈 때문에 델로른의 영민들의 생활은 꽤 윤택했다.
그것이 부서졌다.
"어떤 돈 아주 많은 상단이, 지주들한테서 땅을 샀다고 했어... 시가의 5배로. 그리고, 팔지 않으면 암살자를 보내서 다 죽여버렸다고 했어..."
훌쩍이며 말을 이어가는 남자 꼬마. 아이와 다나는 어느새 그 꼬마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선, 멋대로 소작료를 세 배로 올려버렸어."
올해는 풍년이니 9할을 내놔라. 상단주는 그따위 소리를 전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당연히 광범위한 쟁의가 일어났다. 종래에 지주들이 함부로 소작료를 높이지 못한 이유는, 이 자들의 쟁의능력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과 재배는 델로른의 핵심 산업이었다.
마을 전체의 생업이 사과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주들이 개인의 탐욕 때문에 소작료를 올려받으려 하면, 바로 소작농뿐만 아니라 양조업자, 여관업자, 심지어 운송업자까지도 파업에 동참해 그 의지를 좌절시켰다.
"그래서, 파업을 하자고... 저 놈들이 만약 부랑자나 날품팔이 따위를 고용해서, 사과 수확을 멋대로 하려고 하면, 때려죽여 버리자고... 아무도 고용되지 말자고. 그러고 있었는데."
그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나섰다.
그냥 수확을 하지 않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농장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일용 노동자들의 진입을 막으려던 조합원들은 바보가 된 셈이었다.
그러자 몸이 단 것은, 소작농을 제외한 조합원들이었다. 소작농들이 소출을 전부 빼앗기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 외의 조합원들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적절한 가격에 사과를 다시 도매하기만 하면, 그걸로 사과주를 빚어서 외부에 내다팔 수 있다. 그러면 자신들의 생업은 해결된다.
거기서부터 균열이 생겼다. 이 상상을 초월한 행위에 당황한, 소작농 외의 조합원들은, 알아서 쟁의를 거두고 물러서 버렸다. 투쟁은 와해되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들은 9할의 소작료를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사과를 수확하거나 걷으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날품팔이를 고용해서 사과를 걷어간 다음 적절한 가격에 가공업자, 유통업자에게 팔 것. 그것 정도는 마땅히 기대했건만, 그들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사과가 나무에 매달린 채 썩게 만들려고 땅을 산 것 같은 행동이었다.
"뭐야... 그럼."
다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놈들 목적은, 그냥 이 땅의 생산 기반을 파괴해서... 델로른을 말려 죽이려는 것 같잖아."
그 말을 들은 꼬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그래서... 그 놈들이 보는 곳 아래서 거두면, 열 개 거두면 9개는 넘겨줘야 하니까... 몰래 가져가고 있던 거야. 원래 우리 건데, 아빠랑 엄마가 피땀 흘려서 가꾼 건데..."
안쓰러운 표정으로, 엉엉 우는 꼬마를 바라보는 다나.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손짓했다.
"어?"
그러자 남자 꼬마의 몸을 둘러싼 라달라리아의 언령이 눈 녹듯 사라졌다. 기소 중지. 스스로 이 건에 대한 기소를 포기한 것이었다. 아이는 당황해서 다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래도 되는 거에요?"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이도 이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율사가 약식으로 재판을 청구하고서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 그건 자기가 틀렸고, 성급했노라고 인정하는 걸 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약식으로 선고를 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유죄로 만들어 신벌을 내리게 하려 애썼다. 그런데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하다니.
이건 장기적으로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판관 임용의 혈투를 앞둔 다나에게 있어, 이건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아이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걸요. 그럼 제 잘못이죠."
벼락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꼬마는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엉거주춤 사과 자루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리고 허둥거리며 말했다.
"예쁜 누나, 형,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도망쳐야 해. 소란을 일으켰으니까, 그 놈이 올 거야."
갑자기 예쁜 누나로 호칭이 바뀐 건가. 다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꼬마는 웃을 때가 아니라는 듯 다급하게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 놈?"
"나, 나 같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 상단 놈들이 괴물딱지 같은 걸 데려다 여길 순찰하게 시켰단 말이야. 빨리, 빨리 도망쳐야 해."
그때였다.
"ㅡㅡㅡㅡㅡㅡ!!!!"
괴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꼬마는 히이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영장류의 짐승처럼 길다란 검은 팔로 땅을 짚으며, 한 마리의 괴물이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황금색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는 환도를 스릉 뽑아들고 두 손으로 붙잡았다. 다나는 다시 검지를 치켜들고 그 괴물을 가리켰다.
"집행관! 이 자들은 법률이 정하는 소작률을 아득히 초월하는 소작률을, 자신들의 사적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강요해왔으니, 명백히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률은 그대의 폭력에 당위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아이의 환도에 황금빛 빛무리가 어렸다. 율사가 범죄자를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집행관에게 줄 수 있는 가호였다. 마술을 무력화시키는 가호.
"악을 징치하십시오!"
크게 내질러지는 환도. 그 한 번의 종베기로 승부는 났다. 괴물은 가면째로 몸이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괴물은 아이가 익히 아는 괴물이었다. 칼날로 가슴을 헤집은 아이는 그 가슴에 어김없이 새겨져 있는 문구를 중얼거렸다.
"돈은 생의 양도된 본질이다."
쓰러진 괴물은 레버넌트였다. 사과를 훔치던 꼬마는 안심해서 다나의 품에 달려들었다. 다나가 따뜻한 표정으로 꼬마를 다독이는 동안, 아이는 딱딱한 표정으로 이제 먼발치로 보이기 시작하는 델로른을 바라보았다.
조디악.
그들이 어쩐 이유에선지, 델로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