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Bookmaker ( 4 )
투기장엔 피와 눈물 그리고 짙은 회한의 향내가 배여 있었다.
"낙서... 유언인가."
도박장 가운데에 달걀처럼 움푹 패인 투기장. 그 투기장의 지하 대기실에 갇혀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아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투기장의 벽을 매만졌다. 올록볼록한 낙서가 느껴졌다. 자신보다 이전에 여기서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이 남긴 낙서였다.
'4만 루덴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응?"
더듬어서 촉감으로 글자를 읽던 아이의 손에 그 해답이 닿았다.
'5만 루덴을 들고 도박장에 들어간다.'
피식 웃는 아이. 그다음에는, 키 커지는 방법과 공짜 황금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답이 적혀 있었다. 레버넌트가 되면 키가 커지고 연성금 가면을 받는다는 걸 이용한 농담이었다. 해학의 형식을 빌린 짙은 후회가 손끝에 묻어나는 듯 했다. 이걸 쓴 사람은 지금 어떤 꼴이 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말린 거겠구나."
아이는 회반죽을 칠한 벽의 서늘한 촉감을 느끼며, 벽에 기대듯 앉아서 방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계획대로, 세상 물정 모르는 가출 귀족 아가씨처럼 도박장에 들어선 아이의 소지금을 모두 빼앗은 뒤, 이리나는 그녀를 투기장에 쳐박아 주선 대금을 받으려 했다. 투기장에 들어가서 지정된 세 번의 검투극을 마치고 승리하고 나오면 된다. 그런 꼬드김을 들려주는 이리나.
"그렇게 돈 다 잃어버리고 집에 갈 생각이야? 응? 보니까 언니 검도 차고 있는데. 세 번만 이기면 전부 다 갚고 원금까지 찾을 수 있어."
아이에게서 빼앗은 루덴을 흔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는 이리나. 아이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되는데, 그렇게 여비를 전부 잃어버리면 혼나는데..."
"그럼 뭘 그렇게 망설여. 예쁜 언니한테는 아가씨용으로 더 약한 놈이 나온다니까? 예쁠수록 더 약한 놈이 나와. 언니 정도면 뒷산 산토끼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거지. 그리고 말인데, 언니 검에 자신 없어? 그렇게 자신 있게 차고 다니는데?"
"있어요!"
"그럼 해도 되겠네? 감사하라고. 내가 돈 벌수 있는 방법 언니한테만 특별히 알려줬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도저히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오히려 이리나에게 감사하는 아이. 이대로 투기장에 끌려가서 검투극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로막는 의외의 손아귀가 있었다. 이리나의 옆에서 싸구려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모자를 쓴 타짜였다.
"개 같은 년아. 뢰프 자식이라고 해서 손버릇 더러운 것도 봐줬더니 갈수록 가지가지 하잖아! 어이, 아가씨, 이 말 무시하고, 여비는 내가 빌려줄 테니까 그냥 집으로 튀어."
"켁,켁, 이거 놔!"
버둥거리는 이리나. 타짜는 핏발 선 눈으로 이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어, 왜 그러시는 건가요?"
오히려 당황하며 말리는 아이. 타짜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건 말이지, 빚을 진 데다 더 살아봤자 살 의미도 없는 혈혈단신 범죄자 새끼들이나 쳐 하는 거라고. 백 명이 지하검투장에 끌려가면 살아 돌아오는 놈은 한 놈이나 될까? 그런 지랄이야. 아, 그래, 여자한테는 덜 가혹한 적을 내주고 꼬드기려고 배당도 높게 잡긴 하지.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뭐, 뭔데요?"
"남자는 망령으로 만들고, 여자는 옆에 목욕탕에 창녀로 팔아버리니까. 창녀로 팔 건데 몸에 상처 입으면 안 되잖나. 그게 이유의 끝이야."
타짜는 그렇게 말하며 이리나를 의자에 쾅 내려찍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까지 아가씨는 전부 사기도박을 당한 거라고. 그래서 계속 쳐발리고 150루덴이나 되는 돈을 한달음에 잃은 거란 말이야. 그리고 이제 속아서 몸까지 쳐 팔릴 뻔 한 거야. 아무리 좆같은 쓰레기 타짜라도 인간이길 마지막까지 포기한 새끼 아니면 그런 거 주선은 안 해. 그 전까지 사기 짓거리를 거들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씨발년아 그래도 할 짓이 있지!"
"어쩌라고!"
악을 쓰는 이리나. 그리고 자신의 쇄골부터 목이 선명히 드러나도록 옷을 살짝 찢어 보여준다. 거기에는 선명한 흉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제 레버넌트가 붙잡은 자국이었다.
"그럼 씨발, 이 여자는 창관에 팔려가면 안 되고 나는 된다는 거야?"
"뭐?"
그 흉 자국을 보고 놀란 타짜가 눈을 껌뻑거리자, 이리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우리 집에, 그 괴물딱지가 왔어. 조금만 더 상환 기한이 지나면 나를 잡아가서 일하게 시키겠다고..."
그 말에 숙연해지는 도박꾼들. 그래서 갑자기 생전 안하던 호구 호객까지 하기 시작한 건가, 그런 깨달음이 들어간 숙연함이었다. 이리나는 벌떡 일어나서 타짜를 밀쳐 앉게 만들고 표독스럽게 소리 질렀다.
"어차피 이 여자는 웨스벤의 부호나 어디 멀리 귀족집 기사집 따님이거나, 그런 거겠지. 그럼 창관 끌려가도 손님 받기 전에 울고불고 짜면 본가에서 몸값 보내주고 풀어줄 거 아니야. 근데 나는? 나한테는 지금도 어디서 술 쳐먹고 있는 외팔이 아빠밖에 없는데? 내가 이렇게 처음 잃기 싫다고 울면 아저씨가 내 몸값 내줄거야?"
"그건...아니지만..."
"그럼 참견말고 닥쳐! 어이, 아가씨! 다 들었지? 이 영감때매 다 초 쳐버렸지만,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 난 아가씨 박아넣고 받을 주선비 100루덴이 목숨만큼 중요하니까 해야겠는데. 아가씨는 정말 이길 자신 없어?"
이렇게 난리통이 일어난 바람에, 사람들의 이목은 전부 이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이가 사실 남자라고 의심하거나 이게 계획적으로 투기장에 들어가기 위한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지배인마저도.
오히려 지배인은 아이의 미색을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듯 보였다. 지하 투기장으로 손님을 안내하는 하인을 불러서, 아이의 입에서 한 마디만 떨어지면 바로 투기장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언질을 주고 있는 듯했다.
연기력이 대단한데, 이게 전부 연기인가. 아이는 속으로 감탄하며 싱긋 미소를 짓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름 검에는 자신이 있답니다. 이길 거에요."
그래서 지금 아이는 이렇게 투기장 지하실에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어제 세운 계획대로였다. 오히려 초과 달성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이가 호구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도, 이리나가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므로.
아이는 투기장 대기실의 철문 너머로, 슬쩍 배당이 시작되고 있는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선 몸을 빈틈없이 숨긴 다나가,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세한 계획을 입안한 것은 다나였다. 그녀 역시 일단 이룬 절반의 성공을 기뻐하고 있으나, 안심한 기색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소니아 아바키렌의 도박장이 언제나 호황인 이유는, 그 특이한 지급 보증 방식에 있었다. 그들의 도박장 내에서의 도박행위에는 전부 파계 율사의 가호가 걸려 있었다. 가미온을 섬기는 5위계의 파계 율사이자, 소니아 아바키렌의 최측근. 드미트리 즈다예비치의 가호였다.
그래서 도박장은 반드시 그 설명된 룰을 준수해야만 했고, 도박장과 개인과의 도박에서는 사기를 치면 안 되었으며, 그 지급은 심장이 터지는 형벌에 의해 준수되었다. 즉 마법적인 방법으로 신용이 확실하게 확보된 상태이니, 호황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그걸 거꾸로 이용하는 거에요."
어제, 다나는 어디서 도박장용의 룰 북을 들고와서는, 페이지를 어근 하나하나까지 씹어먹을 기세로 뚫어져라 분석하며 말했다.
"모든 법은 악용할 여지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걸 메꾸는 게 율사의 일이지요. 법도 그럴진대, 도박장 내규 따위에 허점이 없을 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 악용의 여지는 지하투기장에 있었다. 지하투기장에, 여자 검투사가 나올 경우. 그 배당방식은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북메이킹 방식. 도박에 걸린 금액에 배당률이 연동되는 패리뮤추얼 방식과 달리, 미리 배당률을 고정해놓은 책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는 방식이었다. 패리뮤추얼 방식과 다르게, 이건 도박장에 직접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기에 거의 채택하지 않는 방식이다. 확실히 이것은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방식을 준수해야만 하는 이유도 뻔하죠."
여자 검투사가 행하는 승부일 때에 한해서, 배당은 이상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박장 측에 건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1.01배만을 가져가도록. 그리고 수수료가 16%이니, 이건 걸어서 이겨도 손해가 되도록 기괴하게 구조가 짜여 있었다. 그렇게 고정해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아무도 여자 검투사에게 돈을 걸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잃어버리게 되는 최소 배당액의 15%, 3루덴은,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관람비였다. 아리따운 여성이 검투장에서 흉맹한 괴물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기 위한 관람비. 이런 일그러진 구조는 반드시 언젠가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었다.
지금, 투기장에서, 다나는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배당표를 천천히 읽어가는 다나.
여자 검투사가 30분을 버티는 경우에 대하여, 배당 1.01대 8.
여자 검투사가 2시간을 버티는 경우에 대하여, 배당 1.01대 15.
그리고, 여자 검투사가 승리하는 경우에 대하여.
"배당, 1.01대 30. 여기에 1523루덴을 걸겠습니다."
"1523루덴? 저 여자한테 1523루덴을 걸겠다고?"
놀라서 소리 지르는 지배인. 주변의 이목이 전부 다나에게 몰렸다. 1523루덴은, 카나기 잔당의 성채를 털고 그들이 비축한 돈을 털어서 모은 돈 전부에, 다나의 돈 전부를 더한 금액이었다. 주변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액을 승산 없는 도박에 거는 사람은 없을 테니, 뭔가 승산이 있겠다. 그런 승냥이같은 눈빛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시기가 절묘했다. 돈을 거는 것이 마감되기 정말 직전에 이것을 내걸었기에, 다나 외에는 아무도 아이의 승리에 돈을 걸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다나가 일으킨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검투극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이는 창살 너머로 다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매만진 낙서를 보고 중얼거렸다.
"4만 루덴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 보여줄게요."
검투장의 저 편에선 레버넌트 한 마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린아이로 만든 레버넌트일까, 지금까지 아이가 베어 넘긴 레버넌트보다 유난히 왜소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것은 아이를 발견하자, 저편에서부터 손을 이용해 맹렬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ㅡㅡㅡㅡㅡㅡㅡ!!!"
"이제 그만 편히 쉬기를."
아이는 그 녀석이 다가올 때까지 검도 뽑지 않고 있다가, 단 한 번의 거합으로 그 레버넌트를 반토막 내어버렸다. 텅! 새빨간 빛이 검날 가득 어리고, 힘을 잃은 레버넌트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첫 번째는 무조건 압도적으로 이겨달라고 했지? 이제 두 번 남았다.'
일부러 엄청나게 태연함을 가장하며 환도를 납도하는 아이. 그와 동시에, 다나의 기행 때문에 투기장에 쏠려 있던 이목이 일제히 반응했다.
"이게 뭐야? 저 아가씨,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이 생겨 가지고!"
"저, 저런 아가씨한테 거액을 건다고? 심지어 성공했다고? 이거 계획 아니야?"
"부수기다! 도박장 부수기를 들어온 거야!"
"뭐? 부수기? 조디악의 영업장에? 미쳤군!"
"그, 그럼, 저 아가씨는..."
위에서, 다나는 생긋 웃으며 두 손을 벌리고 있었다.
"자, 그럼 30대 1 배당률에 따라 45,690루덴, 수수료 제하고 38,379루덴 하고 60피오. 지급 예정 목록에 걸어주시겠어요? 선지급도 가능하다면 부탁드립니다."
둘이 팀인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부수기, 그건 가끔 타짜로 뭉친 팀이 도박장을 털어먹기 위해 딜러를 후려칠 계획을 세워 덮치는 것을 뜻했다. 이번 경우 그 속성이 조금 달랐지만, 사람들은 이 둘이 그 부수기를 하려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선지급 요청 사유는, 음, 개평을 나눠드리고 싶거든요. 여기 이 분들에게."
상주하는 도박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발언. 도박장 부수기를 하려는 자들이 항상 하는 행동이었다. 맥락상 그것은 자신이 도박장을 부수러 왔음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말에 구경꾼들은 전부 흥분의 함성을 내질렀다.
아이를 앞장서서 투기장에 밀어넣었던 지배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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