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아 아바키렌의 흉상이 무너진다.
"하나, 둘, 영차!"
도박장 앞을 장승처럼 지키고 있던 흉상, 그 가슴께에 로프를 걸고,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그것을 잡아당겼다. 몇 번 당기자 힘없이 바닥에 굴러떨어져 부서지는 흉상. 일어나는 환호성. 이것은 델로른이 조디악의 마수에서 드디어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로 마지막이군요."
다나와 아이는, 그 희망찬 줄다리기의 끝자락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상이 무너진 것을 보며, 아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다나와 아이는 정신없이 그 뒷수습을 위해 움직였다. 도박장을 치우고, 창관에 머물러있던 건달패를 치우고, 예정대로 돈을 나누어주며, 다나는 새롭게 재구성된 마을의 경제사정에 꼭 맞는 내규를 만들어주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다.
마침내 충돌의 여지를 없앤 멋진 내규를 완성했을 때, 뢰프와 이리나 그리고 주민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나를 맞이했다. 그 손에는 한 더미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성명서였다. 마을 주민 중, 아직 입교의 선언을 하지 않은 자들이 모두 모여 서명을 해 주었던 것이다. 400장 중 무려 300여장의 서명이 완료되었다. 다나는 그것을 보며 (잠시 뒤돌아섰다가) 눈물을 흘려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 동상이 무너지는 것으로 델로른에서의 마지막 작업은 끝난 셈이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이 델로른을 떠나기 전 맞는 마지막 날이었다. 어쩐지 지난 열흘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줄을 붙잡고 멍하니 있자니, 갑자기 신음 소리가 들렸다. 다나였다.
"아야아..."
"어, 왜 그래요?"
"아, 아파서요. 너무 손힘을 세게 주셔서..."
가녀린 척 중얼거리는 다나. 아이는 화들짝 놀라서 로프에서 손을 뗐다. 확실히 다나의 손은 빨갛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안그래도 초인적인 손아귀 힘을 가진 아이인데, 무의식적으로 너무 세게 힘을 준 모양이다. 아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 손을 붙잡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많이 아픈가요?"
"네에에... 많이 아파요..."
"어, 어떻게 하지, 연고라도 구해올까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다나. 그러더니 손을 아이의 앞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울듯이 말한다.
"호오 해주세요."
"호, 호?"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했다. 다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프다는 듯 손목을 부여잡곤 중얼거렸다.
"아, 너무 아파서 손이 떨어질 것 같아..."
"그만 해! 오글거려서 못 보겠다, 이 언니 이제 보니까 완전 불여우야!"
당황하는 아이 옆에서 배를 잡고 웃으며 딴죽을 날리는 이리나. 그 옆에는 뢰프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리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이에게 달라붙어 안긴다.
"오빠, 언니, 이제부터 두 사람을 위한 송별회를 열 건데, 물론 참석할 거지?"
아이는 활짝 웃으며 수락했다. 그 뒤에서, 다나는 몰래 침을 퉤 뱉는다. 림은 그 옆에서 부유하며, 유심히 다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
송별회는 거의 사과 잔치였다.
사과 파이, 사과 주스, 사과즙으로 마리네이드한 칠면조 고기부터 사과주까지. 사과의 고장 다운 기술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영글어있던 사과를 따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던 농민들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물밀듯이 달려들어 사과를 수확하고, 이렇게 풍성한 요리들로 가공해내었다. 그중 제일 별미는 특별한 꿀을 바른 사과로 만든 사과파이였다.
"자, 자, 한 사람당 하나씩만 먹을 수 있어요! 부족하니까 욕심부리지 맙시다!"
"네!"
병아리처럼 합창하는 어린아이들. 어린아이들에게 단연 인기다. 한 입 먹어본 아이는 그게 그럴만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설탕 없이도 어쩌면 이렇게 달콤하고 산뜻한 맛을 낼 수 있을까.
노란 커스터드 크림 사이사이마다 꿀에 절인 사과가 보석처럼 박혀 바삭바삭한 크러스트에 담겨 있는 사과 파이. 정신을 차려보니, 막 먹기 시작한 것 같은데도 자기 몫으로 떨어진 하나를 다 먹어버렸다. 조금 아쉬워서 손가락을 빨고 있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 내 것도 먹을래?"
자기 사과를 도둑질하던 그 꼬마였다. 자기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파이를 들고와서는, 아이에게 내민다. 아이는 빙긋 웃으며 거절했다. 말하면서도 아쉬웠는지 망설이던 기색이었던 꼬마는, 빈말로 아쉽다는 말을 하곤 자기가 게눈 감추듯 파이를 먹어치웠다.
한 쪽에서 뢰프는 계속해서 술을 거절하고 있다. 이제는 술을 끊기로 했다는 것 같았다. 턱을 기대고, 그 송별회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길한 음성이 울린다.
'어린 순례자야, 그렇게 방심할 때가 아니다.'
림이였다. 다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림.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그 여자가 몰래 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 꽃 따러 간 거겠지."
'안일하게 굴지 마라! 네가 그렇게 안일하게 굴 때마다 가장 통렬한 배신이 돌아왔잖나.'
림은 그렇게 호통을 치고는, 손가락을 내밀어 바깥을 가리켰다. 다나가 사라진 곳이었다.
'쫓아가라. 어쩌면 저 여자는 횡령을 저지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농민들에게 정말로 돈이 다 돌아갔는지, 확인했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아이. 자신은 숫자에 강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림의 손짓을 따나 바깥으로 나섰다.
다나는 나무 뒤에서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히, 히이익!"
아이를 발견하자 사신을 본 것처럼 안색을 파랗게 질려 뒤로 넘어지는 다나. 그 모습을 보고 아이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살인자인 건가? 배신을 꾸미고 있던 건가? 아이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그게, 저, 숙녀의 비밀이랍니다? 꽃, 꽃을 따고 있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허용된 것보다 많은 것을 탐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었죠?"
도박장의 배당금 중에서, 다나와 아이는 원금만 가져가기로 합의했다. 도박장의 돈은 그동안 조디악에게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피해보상금으로 쓰여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나는 은근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합의를 깨고, 농민들의 돈을 횡령했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 싫어 돌려 말한 것이었다. 다나는 그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더니,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마나,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세요. 지금이라도 돌이킬 기회는 있습니다."
"두, 두 개... 먹었습니다."
"예?"
눈을 끔뻑이는 아이. 그런데 다나는 계속해서 새빨간 얼굴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저 사과파이, 어렸을 때 한 조각의 조각만 먹어보고.... 한번도 제대로 된 큰 조각은 못 먹어봐서... 맘껏 먹어보는 게 소원이어서... 1인당 한 개인데, 몰래 더 달라고 부탁해서 두 개 먹었습니다."
뭐지? 아이가 어이없어하며 계속 다나를 쳐다보고 있자, 다나는 그 눈초리를 다르게 이해했는지 말을 더했다.
"사, 사실, 세 개..."
"네, 개..."
"알았어요, 다섯 개! 다섯 개 먹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파이 다섯 개를 쳐먹는 돼지예요, 이제 속 시원해요?"
비명처럼 내지르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는 다나. 그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이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다예요?"
"네! 솔직히 챙긴 건 여섯 개인데, 다섯 개보다 많이 먹는 건 물리적으로 무리여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는 책망하듯 림을 돌아봤다. 어이가 없어진 림은 잠시 얼떨떨해져 있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 이 건에 대해서는 내 잘못을 인정한다. 이 계집한테도 이 마을에 한해서는 뭔가 지켜야 할 신의가 있나 보군.'
그리고는 뒤돌아 사라졌다. 아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뒤돌아서 있는데,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손길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다나였다.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다나가, 자신을 덮쳐서는 넘어뜨리고 위에서 짓누르고 있었다.
"이걸 들킨 이상, 아이 씨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요. 자, 이걸 먹어주고 공범이 되어야겠어요."
남은 한 개째의 파이였다. 그걸 억지로 아이의 입에 쑤셔 넣는 다나. 아이는 얼떨결에 입에 들어오는 파이를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다나는 활짝 웃으며 말한다.
"자 이걸로 당신도 공범입니다?"
입가에 남은 맛은, 시고도 달콤했다.
*
다음날 아침,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는 조용히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정말로? 이렇게 쉽게 가는 거야? 더 있다가 가지. 창고 빌려줄 수 있는데."
아쉬운 듯 다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중얼거리는 이리나. 다나는 그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곤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떠나야지요. 아직도 법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거짓말. 그냥 우리가 방해돼서 그러는 거지? 빨리 저 오빠 자빠뜨려야 되니까, 그러려면 둘만 있어야 되니까."
"아가씨가 그런 말 하면 못쓴답니다."
머리를 콩 쥐어박는 다나. 이리나는 못내 아쉬운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먼 옛날, 다나가 이 집에서 의탁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이리나는 쑥스러운 듯 다나의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팽 풀었다.
"고맙다.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최선을 다 할 것을 맹세하겠어. 너희들이 전해준 행복. 절대로 함부로 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내도록 하겠다. 또, 대대로 너희들의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어."
열흘 전의 그 주정뱅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쑥한 차림새로, 두 사람을 배웅하는 뢰프. 이 역시 옛날에 보았던 그 순박하고 늠름한 농부 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나가 정해준 내규를 들고 와서, 점검을 받기 시작했다.
"예, 예, 3항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17항을 보면 돼요. 셀카트리 계수라는 건데, 예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비고의적 피해 발생 시 이런 식으로 피해액을 산정..."
마지막으로 자문을 해 주는 다나. 뢰프는 이제부터 자작농 조합의 조합장이 되어서, 그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그렇게 설명을 듣던 뢰프는 한 손으로 수첩을 탁 접었다.
"그럼 이걸로 마지막이군. 마지막으로 전해주고 싶은 충고나 조언 같은 건 없나? 마을의 훈령으로 만들어 새겨두겠다."
"음, 있어요. 마을에 대한 게 아니라, 뢰프 씨에 대해서요."
"나?"
눈을 끔뻑이는 뢰프. 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도록, 뢰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말한다.
"두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우선 사람을 좀 잘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그랬죠? 솔직히 살면서 두 번째로 들어본 말이라 감동했지만... 틀렸어요. 나는 전혀 착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반대죠."
"무, 무슨 소리야."
"그리고 두 번째도 역시, 사람을 좀 잘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수양딸로 맞으려던 사람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해요."
"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뢰프. 다나는 하얀 손가락을 세워 쉿,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몇 년 전, 다른 아이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밝은 척하다 몰래 뒷동산에 숨어 서럽게 울던 다나. 그 날은 다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 앞에 계란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나타났던 뢰프가 했던 동작과 정확히 같은 동작이었다.
밝은 척하다 숨어 소리없이 숨죽여 울고 있는 다나 앞에 나타난 뢰프는, 너처럼 영리한 아이라면 수양딸로 삼아줘도 된다는 말을 꺼냈다. 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흡혈귀다. 흡혈귀라는 걸 들켜버리면, 이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뢰프에게만, 숨기고 있던 꿈을 말했다.
율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그, 그럼, 너는, 하지만 머리색이..."
"쉿!"
다나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세우고는, 종종걸음으로 뢰프에게서 멀어져갔다. 레오가 이끄는 다이너에 올라탄다. 멀리, 찬란히 피워오는 아침 햇살이 비추는 푸른 들로 사라져간다.
"진짜 가버렸네. 더 있다 가지..."
속상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돌아보는 이리나. 그리고 놀랐다. 팔이 잘리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아버지가, 울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뢰프의 얼굴에서는 한 줄기의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손은 하염없이 배웅을 하고 있다.
한 쪽뿐인, 하지만 두 팔보다 커다란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는 다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