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56화 (56/279)

11. 별이 되고 싶은 소망 ( 4 )

적막.

그 외침 뒤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적막만이 두 사람을 감싼다. 멍하니 눈을 뜬 아이는 그 눈보다도 흐릿하게 중얼거린다.

"괴물,이요?"

뿌리친 손을 가슴께에 가져간 채로, 다른 손으로 붙잡고 떨던 다나는 아직까지도 정신적 외상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두서없이 외쳤다.

"왜, 왜 갑자기 그 사람들을 나서서, 저, 저 놈들이랑 싸워서 구하려는 건데요. 연극하다가 착각이라도 한 거에요? 당신 정말로 아탕칼리한테서, 의,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왜, 왜 죽으러 걸어 들어가려는 건데요! 싸우는 게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 이 땅의 가엾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난,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거짓말이야!"

째질 듯한 외침. 그 외침에, 인근의 숲을 이루는 수목의 작은 나뭇가지. 거기서 날개를 쉬던 새들이 우음(羽音)을 흘리며 날아오른다.

"전부 거짓말이에요. 내, 내가 미쳤다고 희생해서 여기 거름이 되려고 하겠어요? 난 그냥, 성명서랑 업적이 필요했던 거란 말이야. 당신도 대충은 알고 있는 거 아니었냐구요..."

그 말을 마친 다나의 입술이 물결치듯 떨린다. 온몸이 너무 떨려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무너지듯 아이의 품에 안기려 든다. 아이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성에 붙들리게 된 이유, 그것도 다 거짓말, 이었단 말이예요. 앙숙이... 나보다 훨씬 힘 센 앙숙이 같이 오게 돼서, 그 여자가 나를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놔서, 쫓겨나듯 나온 거였어요."

그 냉혹한 고백과 다르게, 품에 닿는 그녀의 감촉은 너무나 가녀리기만 하다. 다나는 변명하듯 덧붙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신이 이상한 거라구요. 당신은 대체 죽을 자리라도 찾고 있는 거에요? 왜, 왜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전장에 뛰쳐 들려고 하는 건데요."

아이는 멍하니 자신의 품에 안긴 다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라도 능란하게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얼굴. 그러면서도 밉지는 않았던 얼굴. 그 얼굴은, 지금은 부서지는 달빛과 그림자 아래 색채를 잃어 부옇게 뜬 것처럼 보인다.

다나는 아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한 번 더 거세게 파묻으며, 지금까지 쌓인 정을 믿고 애타게 부탁했다.

"제발, 지금까지 한 걸로도 충분해요. 나, 나는, 지금, 나도 죽도록 무서워요.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이 지켜줬으면 하는, 그런, 그런 건데. 그냥 저 해골들이랑 안 만나게, 도망쳐요... 같이, 안전한 곳으로..."

그리고 훌쩍이며 중얼거린다.

"그 사람들보다, 나를 지켜주면 안 될까요?"

서서히 얼굴을 들어올리는 다나.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라서 무너지듯 쓰러진다. 그의 눈동자는, 이 모든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까 마술사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감정하기 그지 없었다.

'이번엔 내 말이 옳았구나. 그 밤 함께 맹세한 서약을 기억하겠지? 검을 뽑아라.'

뒤에서 엄숙하게 선언하는 림. 아이는 환도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다. 망연하게 중얼거린다.

"결국 당신도... 마술사였군요."

다나는 파르르 떨다가, 휙 뒤돌아섰다. 무서워서 더 이상 아이를 볼 수 없겠다는 듯이. 흰 달빛이 분홍빛 머리터럭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를 창백하게 비춘다.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새하얀 종이 같은 목덜미를.

스릉.

엄지를 튕기자 검날이 빠져나온다. 한 마디 정도. 그러나 검을 전부 뽑아서, 이 마술사의 목을 베어 버리자니, 어쩐지 자신의 팔을 감싸는 주저함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림은 다시 엄숙히 선언한다.

'이 여자는 이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네 선의를 착취하고 이용했다. 그건 어떤 배신보다도 더 잔혹한 배신이라 해도 무방하지. 검을 뽑아라, 어린 순례자야.'

신과 나눈 서약. 그것에는 강제성이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은 다나에게, 등을 맞대고 앉는 아이. 그리고 검을 뽑아든다. 환도의 검면에 새겨진 검은 용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검집에서 검을 꺼내기를 거듭한다.

그러나, 그 검은 완전히 뽑히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서약의 강제력이 완전히 발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림이 내건 조건은 두 가지, 이 여자가 배신할 것, 그리고 해를 끼칠 것이었으므로.

이 여자는 마을을 배신하고 아이를 배신했을지언정, 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파악을 마친 림. 그 인간적인 신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흘린다.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냐?'

침묵. 망설임은, 사실상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림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뒤돌아선다.

'그래. 이 계집은 너를 배신했지만 너를 죽음의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았지. 최종적인 선택은 너에게 맡기마.'

한참이나 그렇게 등을 맞댄 채로, 등에서 전해져오는 자그마한 떨림과 체온을 느끼며, 반쯤 검이 뽑힌 검집을 응시하던 아이. 다나와 함께한 여러 나날들이 눈 앞에 스쳐지나간다. 실망한 때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는데. 결정을 마쳤다.

스르릉, 탁.

검이 입을 닫는다. 검날은 검집으로 되돌아갔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는 다나에게 짐짓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나는 악한 마술사는 전부 죽이기로 맹세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위선을 저지르는 사람부터. 당신의 고백을 듣고, 당신의 위선을 징벌하려고... 그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지만, 되새겨보니 위선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그 도박장에서 보여준 용기가 마음에 걸려 일단은 넘어갑니다."

다이너로 휘적휘적 걸어가, 자신의 짐을 집어 든다. 그리고 크게 외친다.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이.

"이번 한 번은 넘어갈 겁니다. 하지만, 다음은 없어요."

다나는 눈물로 희뿌예진 시야로, 연신 코를 훌쩍이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행장을 꾸리고,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고 쏘아붙인다.

"다음에 만날 땐, 적입니다."

그렇게 동행은 끝났다.

*

습격이 예정된 마을.

한 명의 남자가, 밤을 지새워 돌을 나르고 있었다.

쿵!

커다란 비석 같은 바위. 강가에서 주워온 커다란 바위가 바닥에 박힌다. 그것을 메다꽂은 자는 웃통을 벗어 던진 흰 머리의 남자. 아이였다. 그는 지금 습격이 예정된, 환도를 받았던 마을로 달려가, 몸을 바쳐 다가올 습격의 대비를 하는 중이었다.

"이거면 일단 1차 흉벽은 완성이고."

손을 터는 아이.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그 흉근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흐른다. 그 시야에는 자신이 지난 이틀 동안 밤새워 해온 작업의 결과물이 장엄하게 늘어서 있었다. 흉벽이다. 무장한 마을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투석을 하든 창을 찌르든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진지.

"윽."

멍하니 있자니 또 무언가가 떠올라 이를 악문다. 아이는 마치 그 생각을 떨쳐내려 하는 것처럼, 또 비척비척 움직이며 흉벽을 쌓고 진지를 구축할 만한 돌과 나무를 찾으러 떠났다.

밤을 새운 탓일까, 현기증에 시달리며 거석을 찾아 움직이는 아이. 그 뒤를 림이 따라간다. 그리고 속삭인다.

'정말로, 마을사람 중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게 목표여도 괜찮겠느냐?'

조금은 희생하는 것을 긍정하고, 전략을 짜는 게 어떻겠느냐. 그런 충고였다.

"응. 그렇게 할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어."

아이는 그 습격의 소식을 마을에 알린 뒤로, 그것을 스스로 목표로 삼고 가진 힘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마을을 요새화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마을에는, 과거 징집병으로 끌려가거나 장교의 교육을 받은 남자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병으로 조직해 전쟁의 대비를 하고 경험 없는 자들을 훈련 시키는 중이었다.

림이 다시 중얼거린다.

'500의 사람이 모이면, 물놀이를 열 번 나가도 세 명은 죽는다. 하물며 전쟁에서 500을 헤아리는 자가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바보의 만용 아니겠느냐.'

"나도 용병 나부랭이야. 사람이, 선량한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는 건 수없이 봐 왔어. 멍청한 소리지. 내가 억지를 쓰고 있는 것도 알아. 그래도, 써야만 하는 억지도 있는 거야."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바위를 발견했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신기로 온 몸을 강화해 그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 번쩍! 바위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검은 흙이 드러나고, 그 밑에서 몸을 숨기던 개미들이 뿔뿔이 달아난다. 림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그런 바보같음은 나도 그렇게 싫지 않구나.'

아이는 그 바위를 집어 든 채로, 천천히 움직여 다시 흉벽으로 향했다.

"와!"

"저, 저게 뭐야? 저렇게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혼자서 날라?"

"그렇군, 저랬으니 이틀만에 이렇게 훌륭한 진지를 혼자서...!"

어느새 흉벽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바위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 같았다. 쿵! 목표한 진지의 출입구 부분에 바위를 내려놓고, 아이는 그 바위의 그늘에 앉아 몸을 쉬었다.

"저, 저, 천사님! 목 좀 축이고 하세요."

그렇게 앉자마자, 누군가가 레몬즙을 섞은 물을 건네주었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이보다 한두 살 어릴 듯한 검은 머리의 소녀였다. 애써 싱긋 웃으며 물을 받아드는 아이.

"고마워요."

그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그리고 성호를 긋더니,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정말로 천사를 대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마레와 동행하면서 퍼진 소문, 그 소문 때문에 아이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천사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아이는 꿀꺽꿀꺽 레몬수를 들이키고, 흉벽을 매만지며 어둡게 중얼거렸다. 습격을 대비한 계산이었다.

"적의 수효는... 인골귀 350. 평범한 전력으로 치면 700이고, 뒤에서 아지프 마술사의 보조를 받으면, 1.5배수로 계산하니까. 실질적으로는 1050명. 천인대 급의 병력이라고 봐야 하는데."

거기다 3위계의 마술사와 4위계의 마술사들이 계속해서 날려댈 포격. 그것을 합치면 어쩌면 천오백으로 잡아야 할 지도 몰랐다.

"이 벽이랑 진지가... 200인분은 해준다고 쳐도. 부족해."

어둡게 중얼거리는 아이. 만약 그냥 순수한 대인전이라면, 아이는 고작 아지프 마술사 서넛에게 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무력한 어린아이와 아녀자, 노인도 포함된 마을 사람들을 지키면서 그들을 무찌르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열 배는 어려운 문제.

"병력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내쉬는 아이. 아이의 생각에, 그건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불가능한 것을 한탄해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좋아, 어떻게 한 줄이라도 더 둘러치고 참호 하나라도 더 파보자. 아이는 그런 생각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누군가가 아이를 불러세웠다.

"호위님! 허허, 70 평생에 가장 놀라운 일을 오늘 보게 되는군요. 이틀 만에 정말 이걸 다 축성하신 겁니까?"

촌장이었다. 그 바둑을 잘 두던 촌장. 그는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무언가를 엄청 중얼거리더니 아이에게 환도를 빌려주기를 청했다. 그리고 사람들 몇 명과 사라졌다가, 이렇게 돌아왔다. 아이는 멍하니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여기, 돌려받으시지요. 제대로 된 주인에게 이 검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환도를 돌려주는 촌장. 아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저 언덕 능성이에서,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버클러, 폴암, 펄션, 그런 민병대용 무기들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원군이다. 원군이 틀림없었다. 대충 잡아도 이천을 헤아리는 듯 했다. 아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촌장을 바라보았다.

"저, 촌장님, 저 사람들은 뭐에요...?"

"호위님의 명성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호위님에게 저희가 드린 이 검은 매우 특징적으로 생겼지요?"

환도를 툭툭 치며 말하는 촌장.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이걸 증표로 삼아, 아탕칼리의 인장을 받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힘을 합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라고, 우리가 몰살하면 그들 차례라는 명분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하필 우리여야 하는 이유로, 호위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그런..."

"사석도 뭉쳐서 이어지면, 생로가 열립니다. 바둑도 그럴진대 인간사도 그렇기 마련이지요."

당신에겐 우상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런 드미트리의 선언이 귀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이 촌장은 지혜롭게도, 그 자질을 십분 활용하여 이렇게 연합을 이뤄낸 것이다. 일개 마을의 촌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지혜였다.

그는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기보다는, 아이에게 공을 돌렸다. 겸양하며 정중하게 아이에게 목례를 올리며 말한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이는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이 울보의 눈에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선언한다.

"예.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게요."

습격은 어느새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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