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60화 (60/279)

11. 별이 되고 싶은 소망 ( 8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칼자루를 움켜쥐고 멍하니 그 고해를 듣고 있을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념도 품지 않은 듯이.

"망설이나요? 그건, 당신이 내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아직 몰라서 그래요."

이 반응조차 예상했다는 듯, 다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책을 낭독하듯 스스로의 죄상을 더욱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자백은, 어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여자가 첫 살인을 저지른 건, 열 살 때의 일입니다."

열 살이 되던 해.

그 해는 이 여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유독 여름이 더워 포석이 갈라지는 일이 많았던 해.

흉작이 3년이나 이어졌다.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그 방향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지배하는 자들은,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지시했다. 흉작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늘상 있던 일이었다. 그 이유가 자연재해든, 부패와 학정이든, 분노와 원망이 거리마다 가득 퍼지면 그들은 애꿎은 이를 붙잡아 십자가에 매달고 불을 질러 죽였다.

그러면 재미난 축제라도 열린 듯 거리 가득 모인 군중은, 마치 자신의 원망과 절망이 그 나무못에 매달려 불타기라도 하는 듯, 광인처럼 기뻐하며 돌을 던지고 성가를 불렀다. 도덕의 껍질을 뒤집어썼지만, 거기에 자리한 것은 그저 원시적인 파괴의 충동이었다.

이 여자의 부모는, 그 충동의 제물이 되기에 적합한 형태로 태어났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이미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오면서, 그런 마녀사냥의 기간을 일곱 번이나 견디어냈고, 그걸 가능하게 해 주었던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으니까요."

그 조력자는 양조장을 운영하는 친구였다. 계율상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혹여나 그 주향에 취할까 두려워, 신심 깊은 심문관들은 양조장의 지하에는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녀사냥의 날이 오면, 부모와 딸은 그 친구의 양조장 지하에 숨었다. 일주일 정도 거기서 밤을 지새고 나면, 다른 곳에서 만족할 만큼 수확을 거둔 심문관들은 떠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 유난히 무더운 해는 달랐다.

"너무 더워서, 그 자가 운영하던 포도원의 포도나무 절반이 말라죽어 버렸어요. 열매는, 열과했구요. 삼 년이나 흉작이 계속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이전 해까지는 나무가 죽지는 않았는데... 한 그루를 키워내는 데 몇백 루덴이나 드는 포도나무가, 말라죽어 버린 거에요."

그는 절망했다. 절망한 자를 위로하는 건 언제나 노름과 술이었다. 노름에 빠진 그 자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삿된 것의 소재를 밝혀 고발하는 자에게는... 현상금이."

다나는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 없는 듯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세게 스스로의 손을 쥐어 잡았던 손이, 힘없이 떨린다.

"현상금이... 현상금이."

"이해했습니다."

아이는 조용히 그 흰 손을 잡아주었다. 떨던 다나는, 메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들이닥쳤다. 십자가를 짊어진 종자를 거느리고, 한 손에는 횃불을 들었으며, 진홍색 법의를 입은 아탕칼리의 심문관들이. 배신을 알아챈 그 여자의 부모는 황급히 딸만은 숨겼다. 썩은 포도주가 가득한 오크통 속에. 이 창고의 주인이 게을러 술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붙잡혔다.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들은 못을 박았고, 그들은 또 사납게 딸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물었다. 부모는 생살을 찢겨 말뚝에 몸을 내주면서도, 애원도 반성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딸의 위치를 들킬까 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술통 속에서, 아주 작게 난 틈을 통해서. 딸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수색이 시작되었죠. 설마 썩은 술 안에 잠겨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신히 들키지 않을 수 있었어요.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난 모양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 그들은 부모님을 십자가에 매단 채로 사라졌죠."

그들의 행방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대대적인 화형식의 선전이 있었다. 망토로 몸을 가리고 부랑자들 사이를 전전하던 딸은, 혹시라도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으로 광장에 갔다.

"그건 함정이었어요. 나를 잡기 위한 함정."

언뜻 자비로운 미소를 지은 듯한 늙은 수도사. 그는 초주검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부모를 보고, 이들도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라며, 짐짓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그리고 선언했다. 혹시라도 이들의 딸이 나타나 부모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면, 이들은 풀어주겠노라고. 또 소리쳤다.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들은 너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이라고.

어린아이의 판단력으로 그 자비로워만 보이는 선언을 의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몸을 덜덜 떨며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분명히 고문을 당해서 의식을 잃은 듯 보였던 엄마가... 갑자기 눈을 뜨고 소리쳤어요."

달아나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 달라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

그 애절한 비명은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딸의 발을 붙잡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입을 막았다. 황금과 비단으로 몸을 감싼 화형대 위의 수도사와는 달리, 허름하고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감싼 신부였다. 그는 낌새를 보고 이 어린아이가 그 딸임을 눈치채고, 딸을 보호해 추적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준 것이다.

"그 사람은... 나를 길러주겠다고 했어요. 수녀로 살면 평생 나쁜 짓은 못하겠지, 그런 말을 하면서."

그 품에 매달려 울고, 조촐한 야채 스프와 딱딱한 빵을 정신없이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 딸. 낮에 보았던 참상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서, 서성이다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보았다. 탁자에 놓여 있는 것을.

노름빚의 독촉장. 그리고 그것을 갚기 위해 쌓여 있는 동전 자루였다.

이 착하디 착해 보였던 늙은 신부는, 흉년의 절망 때문에 전염병처럼 퍼져가던 도박에 심취해, 이렇게 빚을 졌던 것이다.

다나는 부르르 떨며 말을 이어갔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물론... 그걸로 끝일 수도 있어요. 그 도박 빚을 청산한 걸로, 손을 씻고 다시는 손을 안 댈 수도 있어요. 이 사람은 착한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엄마 아빠의 친구라는 사람도... 도박에 빠지기 전엔 그랬단 말이에요."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년에 또 흉년이 이어져도 착한 사람일까?

또 도박으로 스스로를 탕진했을 때. 카드놀이로 수천 루덴의 빚을 지고 자살의 충동을 느끼며 귀가했을 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무력한 어린아이를 그대로 놔둘 만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든 신부의 목줄기를 물어뜯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

"그게 제가 저지른 첫 살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살인도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갈래 길에 섰을 때.

한쪽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모질게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선택만을 거듭했다. 마음속으로는, 스스로를 연민하면서.

"추하게, 세상 탓을 했어요. 우리 부모님한테 세상이 자비를 보이지 않았듯이, 나도 그렇게 하겠다. 나에겐 그럴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렇게 되새기면서요.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랬을지도 모르는 모든 길을 내 손으로 불태우고, 가장 어둡고 외로운 절벽으로 스스로를 몰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된 자기연민은 어떤 죄로 인해 정합성마저 잃었다. 다나는 자신이 지었던 죄 중에서, 가장 아픈 죄를 힘겹게 토해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변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지막까지 저를 좋아하고, 저를 위해주었던... 동생을, 저한테 아무런 해를 끼칠 가능성조차 없었는데, 희생시키고... 달아난 일입니다."

그 행위만큼은, 사람을 믿지 못해서 그랬다. 부모님이 그런 교훈을 주었다. 그런 변명으로도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생은 착했다. 어떤 극단적인 염세주의자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그런데 그 동생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동생은... 만약 자라났다면, 당신과 비슷한 나잇대에, 당신과 비슷한 생김새일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 아닐까, 그런 망상도 했지만, 내 죄를 덜기 위한 무책임한 망상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그 모순을 직면하는 순간, 이 여자는 자신이 해왔던 일의 추함과 악함을 깨닫고 하염없이 울었다. 늘 그래왔다.

"법전을, 공부할 때마다. 그 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목덜미가 떠올라 죽도록 괴로웠습니다. 매 페이지를 열 번은 읽어서...전부 외워야 하는데. 모든 페이지마다 내가 해왔던 일밖엔 적혀 있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어떤 벌을 받아야 할지 늘 생각해왔습니다."

쓰이기 위해서 다른 이의 악덕이 필요한 책.

법전은 슬픈 일기다.

"이 죄인한테는 편안한 죽음조차 사치겠지요. 어떤 형벌이 적합할까요? 화형, 책형, 거열형, 아니면 간살, 모살, 고살?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 결론을 내렸어요."

다나는 갑자기, 억지로 웃어 보이며 눈을 떴다. 그 눈에는 깨진 유리잔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작은 물방울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가장 믿던 사람에게 비참하게 배신당해서 죽는 벌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나한테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흰 손이, 뺨을 매만진다.

"너무 착해서, 이런 쓰레기같은 여자도... 배신 못할 거잖아요."

아이의 심홍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비추는 불빛처럼 그 얼굴을 바라본다. 그 얼굴을 우러러보는 것조차 죄스러워서, 다나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엄숙히 선언한다. 기소를 끝마치는 선언이었다.

"나는 자기연민에 시달려, 내 삶 전체를 약자와 노예의 시체만이 가득한 폐허로 내몰았습니다. 자기연민은... 가장 큰 죄입니다. 그것은 세계관을 암시합니다. 나를 제외한 세계가 모두 악의로 가득하며, 내가 행하는 죄과는 정당하다는 비틀린 자기확신을. 실제로, 겉으로는 순수한 악으로 보이는 어떤 타자의 겉껍질을 박피해보아도 그 속은 자기연민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이런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 여자가 범한 것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현실의 모순에 부딪혀 불행히 살아가는 모든 순선한 이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 여자가 행복해지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그저 번성한 악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에까지 성공하여 독버섯처럼 완성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심한 듯 또렷이 외쳤다.

"집행관님, 그대의 율사로서 마지막 부탁입니다."

이것으로, 선고는 끝이 났다.

"이 악을 징치해주십시오."

다나는 이 말을 마치고, 눈을 감고 되새겼다.

그 흐붓한 달빛 아래서 달아났던 밤을, 그 끝나지 않는 밤을 지새우며 살아왔던 삶을.

학교에서의 나날은 외롭고, 친구도 없고, 괴롭기 그지없었지만.

내가 저지른 죄를 고발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이 한 번의 기소를 해내기 위해 지금까지 그걸 견뎌왔다고 하면, 의미가 있었던 거야.

다나는 그렇게 되새기고, 칼날이 쉽게 범할 수 있도록 흰 목을 뻗어 드러냈다.

*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모든 선언을 듣고, 조용히 묵상하듯 눈을 감고 기다리던 아이는, 잔잔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검사로서 자기 자신을 기소한 거죠?"

끄덕. 힘없는 끄덕임이 동의를 대신했다.

"그럼 변호는요?"

"변호는...없습니다. 보충의견이라면 있습니다."

빠르게 선언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고백이, 동정을 사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면하게 하지 못하도록.

"보충의견입니다, 재판장님.

이 죄인은 오직 거짓과 기만만으로 대지를 밟아 살아왔으며, 그 친우라곤 근심과 곤궁밖에 없는 자로, 다른 이의 동정을 사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데 아주 능합니다.

이미 이 자에게 위선은 성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스스로조차 하는 말이 위선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자백조차 동정을 사 빠져나가기 위한, 자신마저 속인 사기극일지도 모릅니다.

이 자는 갱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그 심장은 차갑게 식은 화로와 같아, 더운 피 대신 타고 남은 재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런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선의로 충만한, 질서의 회복을 바라는 준엄한 판관은,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증스런 악인을, 절대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이런 죄악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녀가 자살만은 하지 않은 것. 그것은, 모든 죄는 우선 재판을 거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눈을 더 세게 감는다.

머리에 검이 닿는다. 그러나, 검의 날 부분은 아니었다. 손잡이였다.

통,통,통.

그 손잡이로 법봉을 두드리듯 다나의 머리를 두드린 아이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모든 죄인은,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는 있습니다. 변호 측조차 없어서 이게 무슨 재판이 될 수 있나요. 이 재판은, 피고가 제대로 된 변호인을 데려올 때까지 유예합니다."

"예?"

눈을 껌뻑이는 다나. 그리고 사납게 소리친다.

"장난하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쉽게 용서되면 안 되는..."

"용서한 적 없습니다. 유예에요. 나는 당신에게만이 아니라, 지금껏 마주친 모든 악인에게 스스로를 변호하도록 기회는 주었습니다. 돌이켜보세요."

찬찬히 입술을 씹으며 과거를 곱씹는 다나. 그 말대로였다. 아이는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일견 어설프고 바보 같아 보이는, 자신의 행동. 그 행동의 이유를.

그것은 우선 4개월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막 아라딘폴 성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내 분노를 어디 부딪혀야 할지 몰라서 마구 날뛰는 파도 같은 상태였습니다."

림에게 서원하고 막 마술사 살해의 사도가 되었을 때. 아이는 밤잠도 줄여가며 마술사의 추적과 살해에 골몰했다. 제일 먼저 그 눈에 들어온 것은, 전과를 올리고 귀환하던 한 무리의 아지프 마술사 분대였다.

4위계 하나와 3위계 둘로 구성된 분대. 아이는 일주일 동안 그들을 추적하며, 그들 모두를 쳐죽이는 데 성공했다. 둘은 잠자는 동안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심장으로부터 레바테인을 만들어냈다.

"그들을 죽이고 나서...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카나기의 패잔병이었어요."

이상한 패잔병이었다. 3위계의 무반이었던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무슨 아이냐고 물었더니... 카나기의 진중에서, 병사들과 마구 잠자리를 가지다 아이를 낳고 죽었던 하녀. 그 하녀의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자신의 아들도 아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구의 아들도 아닐 것이다. 이 땅은 이런 아이에게 아버지를 주는 법도를 구비하지 못했다. 카나기가 패전하고 축객령을 들으면서, 이 아이의 존재는 더더욱 희미해졌다. 그 무반은 그 아이를 도시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패전을 끝으로 내 삶은 의미가 없어졌고, 나는 죄인이 맞으며, 그것만 마치면 스스로 배를 갈라 죽겠노라고.

"내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아요?"

침묵. 다나는 침묵했다. 아이는 조용히 유혼을 불러내어, 그 짐승의 이빨 같은 시린 빛을 바라보았다.

"무시했습니다. 별, 희한한 변명을 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요."

그 심장으로 유혼을 만들었다. 그리고 숲에서 야영을 하던 밤. 의외의 불청객을 만났다.

"그... 어린아이였어요.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깎은 돌칼을 들고서는, 잠자는 나를 암습해서 죽이려고 들었어요. 아빠의... 복수를 하겠다고."

그 무반은 아마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반은 이 아이의 아버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것은 맞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출신도 부모도 고향도 없어 존재가 희미한, 이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아마 그 사람은 세계였을 것이다.

세계를 잃었으므로, 이 아이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덮쳐왔다. 복수를 위해서.

"그 녀석을 제압하고, 왜 그랬느냐고 물었죠. 복수하겠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버렸더니,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더군요. 때가 되면 죽이겠다면서요. 어느 날 너무 성가셔서 붙잡고 크게 혼냈더니, 울면서 묻더군요. 왜 너는 우리 아빠를 죽였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느냐고."

해줄 말이 없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했을까요? 내가 더 강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네 아비는 그렇지 못했다. 이 세상은 원한과 악의로 가득하다, 그런 말을, 나도 몸서리치도록 싫은 말을. 아마도 이 아이의 삶을 결정해버릴 텐데, 들려줘야 했을까요."

그러기는 싫었다. 힘없이 끌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세상을 가득 덮고 있는 수렁 같은 악의의 사슬. 그 사슬을 이루는 한 마디가 되어, 나락으로 끌려들어 가는 그런 무력감.

한참을 망설인 끝에,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적어도 그가 스스로를 변호할 수는 있게 말을 들어줘야 했노라고.

"그래서... 저는 이 검이 싫어요."

아이는 그 사람과 그 어린아이가 떠올라서, 유혼이 계속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그 아이를 인근의 도시까지 데려다주고, 맡아줄 사람을 찾았죠. 그러니 그 아이도 저를 용서하더군요. 책을 만드는 인쇄공이 되고 싶다고 해서... 인쇄소에 돈을 주고 맡겼습니다. 헤어지기 직전 그 아이가 물었어요. 형은 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매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헤매느냐고."

분위기가 조용해졌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다시 풀벌레가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혼자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나는 분명 이 세상에서 마술사를 없앨 겁니다. 그건 나 자신을 걸고 신께 서원했어요. 그래도, 그게 그저 원한의 해소나 증오의 표출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위대한,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소망해요."

힘이 그저 힘보다 위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건 정의다.

"그래서... 어설프고 바보같지만, 내 정의를 만들었어요. 착한 마술사는 나중에 죽이고, 나쁜 마술사부터 죽이겠다고요."

아마 그 정의는 망가질 것이다. 망가지고, 깨지고, 부서지면서, 그리고 회복되기를 거듭하면서. 더 정교한 형태를 찾아갈 것이다.

침묵이 이어졌다. 다나는 그 말을 곱씹던 와중, 어느새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아이도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예쁘죠?"

"당신이요? 네. 예뻐요. 질투 날 정도로."

"아니, 나 말고... 저 하늘이요."

막 레이븐사이드에 거두어졌을 때. 아이가 제일 궁금해했던 것은 저 별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글을 배우자 마자 천문학에 관한 책을 살펴보았고, 실망했다.

"거기에는 이상한 것밖에 없었거든요. 무슨 별이 1등성이니 2등성이니, 누가 어떤 별자리에 속하니 속하지 않느니. 뭐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든 말든 저 별들은 그냥 꿋꿋이, 자신을 태워서 빛나고 있는데. 왜 무관계한 타인들이 자기가 멋대로 균정한 법도에 어긋나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떠드는 걸까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문명에 길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해묵은 인위 역시 자연의 일부로 여기기 마련이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다나를 보며, 아이는 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재판도 나한테는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왜 새빨간 타인들이, 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붙잡고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결정하는 걸까요. 정말로 그런 걸 따지고 싶다면..."

마무리.

"그 죄로 피해를 준 자에게 직접 가서 물어야겠죠."

아이는 천천히 다나의 몸을 일으켰다. 분홍색 머리칼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엉거주춤 몸을 틀게 시켜, 자신에게 기대도록 만든다. 함께 하늘을 더 잘 올려다보기 위해서.

"선언합니다. 당신이 제기한 재판은 제 재량으로 유예할게요. 당신은 이 세상을 순례하면서... 당신이 직접 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의견을 구하세요. 앞으로 당신의 삶은 고행이 될 겁니다."

"나 같은 게, 그래서는..."

"당신은 자기연민이 악하다고 말했지만, 자기혐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혐오의 가장 뚜렷한 증거니까요. 내 밖의 세상 모든 것이 악하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자아가 더없이 악하다고 믿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당신은 우선 당신의 죄로 피해입은 사람들을 찾아가세요."

다나는 아이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로, 그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어느새 그 선언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의견을 듣고,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혐오하지도 않는 공정한 법관의 마음가짐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제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또 스스로를 고발해 보세요. 그 날까지 이 판결은 유예합니다. 됐나요?"

긴 침묵. 지금까지의 모든 침묵을 합친 것보다도 긴 침묵이 끝난 후에야, 다나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훌쩍, 재판장님, 훌쩍,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만약 이런 형태의 결론이 아니라, 그저 값싼 연민에서 비롯된 용서가 돌아온다면. 다나는 아이가 자신을 용서해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돌아가는 길에 절벽에서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형태로 생을 선고받은 기분. 기쁨도 슬픔도 아닌 그 양가감정에 휩싸여서, 다나는 계속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훌쩍였다.

한참을 그렇게 훌쩍이던 다나는, 문득 쑥스러움을 덜기 위해 질문한다.

"그래서, 당신은 그 아이가 한 질문의 답을 찾았나요? 뭐가 되고 싶은 건가요."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 다나. 아이는 여전히 멍하니 별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별이 되고 싶어요."

"예?"

"어차피 저는 그렇게 똑똑하지 못하니까, 바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악의로 가득해서 모두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바보보다는...그래도, 어딘가에는 선의가 있다고 믿는 바보가 되고 싶어요.

이 땅에 가득한 원한과 악의에서 벗어나서, 두둥실 떠올라서, 저 우주까지 날아가서...

바라보는 사람 하나를 위한, 작은 빛밖에 주지 못할지라도. 스스로를 태워 겨울밤을 비추는.

그런 별이 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을 때, 별이 되고 싶다. 이런 대답을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취급을 받을까. 바보라는 비웃음을 사겠지.

하지만 이 들판과 이 별하늘 아래서, 별이 되고 싶다는 소망.

그 소망은 어떤 소망보다도 더 아름답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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