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62화 (62/279)

12. An inquiry into the Nature ( 2 )

하늘에선 비가 쏟아진다.

"늦네, 그렇게 오래 걸리나?"

식당을 겸하는 여관. 그 테이블 한구석에서, 얼굴을 팔에 묻듯 엎드린 흰 머리의 남자, 아이가 창밖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히 얼마 전만 해도 툭,툭, 몇 방울 떨어지는 수준이었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지금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다나였다. 웨스벤으로 돌아와 머무르면서, 그녀는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장을 꾸리고, 마차 편을 예약하고, 언제 귀환할 예정이노라고 제도에 연락을 보낸다. 그 작업을 끝마친 게 어제. 그리고 오늘은, 그간 신세 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있다.

내일 아침이 되면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

벌컥, 가슴으로 밀치도록 되어 있는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여자가 빗물을 흘리며 달려온다. 두리번거리더니 씩 웃곤 아이의 앞에 앉았다. 그 손에는 기름종이로 잘 포장된 튀김빵이며, 파이 따위가 잔뜩 들려 있었다. 다나는 그것들 중 반달 모양의 빵 하나를 꺼내 아이의 입에 퍽 물려주었다. 팥이 들어간 빵이었다.

"자, 받아요!"

"이게, 우물, 뭔데요?"

"빵집에서 갑자기 저를 붙잡더니 여기저기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 뭐에요. 닳는 것도 아닌데, 그거 해주면 이것저것 먹을 거 챙겨준다길래 이렇게 받아왔어요. 잘했죠?"

뻐기듯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는 다나. 아이는 우물우물 빵을 씹어 삼키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요 며칠 동안, 아니 요 몇 달 동안 느낀 건데..."

"예?"

"의외로 엄청 이용하기가 쉬운 사람이네요, 당신은."

고작 빵 몇 개 때문에 이 빗속을 뚫고 달려왔느냐, 그런 어이없음을 담은 질문이었다. 다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져서는 와락 자기가 건네준 빵 더미를 빼앗았다.

"압수! 그럼 지엄한 명령에 따라 압수합니다. 이게 배고픈 게 뭔지 모르니까, 진짜!"

"원래부터 외부 음식물 반입은 금지거든요."

피식 웃는 아이.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옷 그렇게 젖어서 괜찮겠어요? 내일은 떠나야 하잖아요."

다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일으키곤 말한다.

"괜찮아요. 당신이 준 옷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2층, 다나의 방에 곱게 개어 있는 옷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진지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말한다.

"돌아가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 입을게요. 항상 기억하면서."

"중요한 일이라면..."

"무도회나, 모금회나, 강연회나. 뭐 많이 있거든요. 그때마다 같은 옷을 입고 가서 조금 창피했어요. 창피할 일이 아닌데도. 그런 거 있잖아요."

애써서 씩 웃는 다나. 어쩐지 안쓰러워진 아이는 무심결에 말할 생각이 없었던 것을 캐묻는다.

"저번에 그 호즈라는 여자, 그 여자가 당신을 밀어 넣은 사람인 거죠?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 혼자 돌아가도 괜찮겠어요?"

"음, 사실 안 괜찮지만,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는 아이에게, 다나는 방금 자신이 듣고 온 낭보를 들려주었다.

"제도로 돌아간다는 연락을 넣었을 때, 기쁜 회신을 들었어요. 어떤 소식통을 거친 건지는 몰라도, 나와 당신이 지난 두 달간 저 자치령에서 했던 일 몇 개가 중앙까지 흘러들어 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인 한 분이 저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하셨대요."

"성인이라면..."

"이번에 시성받은 분, 호노레 블뢰유. 성인 직에 올라선 사람은 반드시 어린 상좌를 뽑아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데, 그분은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으셔서 상좌를 뽑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두각을 드러낸 날 뽑아주겠다고."

"잘 됐네요!"

간접적으로, 재산도 배경도 없어 힘들어하던 다나의 일을 들어온 아이는, 함빡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그럼 그 성인이라는 분은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당신처럼 속이 시커메서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다거나..."

"내가 속이 시커멓다니요! 아니, 시커멓긴 하지만. 적어도 그 분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아는데요?"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어보았으니까요. 천 오백 페이지에 달하는 평화에 관한 책이었어요. 한 마디, 열 마디, 백 마디를 거짓말을 하고 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쓰면서, 그걸 전부 거짓말로 채운다는 건 불가능해요. 어떻게 애를 쓰더라도 자기 본심,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가 담겨버리거든요. 그리고 그분의 저서에 담긴 정신은, 최소한 전적으로 옳다고 하진 못해도 올바르려고 노력하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다나. 아이는 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성인의 제자가 되는 것, 그건 물론 다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그 제안을 수락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낸 것 때문에, 엄청난 질투와 모함을 받고 또 그걸 딛고 살아오신 분이죠. 그리고 대단한 정치적 기교를 발휘해서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성인 직위에 올라섰고요. 혹자는 그 정치적 기술 때문에 그분의 진심까지 폄훼하지만, 저는 정치적 기술과 선의는 양립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그렇구나... 당신의 선택이 그렇다면, 존중할게요."

다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든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그런 소망이 마음 속에서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이 어린 나이에 그런 직위에 오를 수 있던 건, 항상 옆에서 지켜봐주던 감시자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친구라면..."

"그분의 집행관이자, 성도 8궁의 일원인 단테. 단테 아길리오 님이 항상 그 분의 집행관으로 있었던 덕분입니다. 그러니까...음, 그,그,그그그...."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당신과 함께 제도로 가고 싶다. 지금 헤어지면, 먼 훗날까지 영영 이별할지 모른다. 그런 건 싫다. 내 죄를 들었으니 앞으로 나라는 죄인이 또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내 감시자가 되어 달라.

수 많은 말을 준비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말을 더듬는 다나. 아이는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문이 막혔나 이해하지 못해 얼굴을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다나가 말을 더듬고 있는 사이, 또 문이 벌컥 열린다.

"어!"

멀리서도 그 사람을 알아본 아이가 벌떡 탁상을 잡고 일어선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쏟아지는 폭우에 젖은 진홍색 법의와 금발. 그리고 굳게 다문 입을 하고 걸어오는 남자. 마레였다.

"여기에요!"

아이가 기다리던 두 사람 중 남은 한 사람은 마레였다. 이 여관은, 마레와 만나기로 한 여관이기도 했다. 얄궂게도, 그와 만나기로 한 날과 다나와 헤어지기로 했던 날이 겹쳤던 것이다. 다나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하려던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가, 그 자리인가."

어쩐지 시적으로 들리는 음성이었다. 비장함, 체념, 어떤 가라앉은 감정의 찌꺼기가 느껴지는 음성. 마레는 붉은 옷자락으로 푸른 빗물을 흘리며 천천히 이 곳으로 다가왔다. 유령처럼.

"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할 말이 있다. 여기선 할 수 없는 말이야. 나와라."

마레는 빗물이 떨어지는 손으로, 아이의 손목을 붙잡고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다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기세에 압도당해서, 다나는 멍하니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자리에는 다나 혼자 남았다.

혼자 남자, 망설임이 찾아왔다. 고개를 푹 숙이는 다나. 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까. 라달라리아는, 제국에 가득한 7학파중 그나마 힘 없는 민초들에게 가장 긍휼한 학파였다. 일곱 학파 중에서, 민중의 여론이 그나마 좋은 것은 라달라리아와 아탕칼리, 두 학파 뿐이었다.

분명히 저 사람에게도 용병의 삶을 살게 하는 것보다, 나와 함께 제국의 중심에서 출세를 도모하게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런데도 그게 어쩐지 제멋대로의 이기성을 포장한 생각 같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사실은 그냥 같이 있고 싶으면서, 그걸 숨기려고 이러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마지막 권유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제안할까, 말까, 고민하는 다나. 그리고 그들은 돌아왔다.

"어..."

마레의 얼굴에 가득하던 비장한 기운. 그것이 전염된 듯한, 딱딱한 얼굴로. 다나는 순식간에 바뀐 그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해 입을 벌렸다. 아이는 재빠르게 2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더니, 검을 가지고 내려왔다. 싸움의 준비였다.

"저, 저기, 당신, 어딜 가는 거예요?"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갑작스럽지만, 내일 아침이 아니라 여기서 이별하게 됐군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이. 정수리를 드러낸 채로 말한다.

"먼 훗날, 당신의 순례를 끝마치고 나서, 다시 저를 찾을 마음이 든다면. 기나센으로 와주십시오. 그럼 작별입니다."

휙 돌아서는 아이. 그리고 저벅저벅 여관 밖으로 나가버린다. 다나는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뒤쫓았다. 안 돼,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런 심정이었다.

쏟아지는 빗 속, 노란 등롱이 빗물을 둥글게 비추는 밤거리. 재빠르게 사라져 가는 흰 머리의 남자를 쫓아가 다나는 크게 소리 질렀다.

"잠깐만요!"

아이는 그 말에 우뚝 멈춰 선다. 다나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빠르게 뛰어가서, 그 옷자락을 붙잡았다. 같이 가요, 같이 제도로 가서 내 집행관이 되어 주세요. 그 말을, 거절당하더라도 꺼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

그런데 막상, 눈 바로 앞에서 그 흰 목덜미를 본 순간.

얼마 전 꾸었던 악몽이 떠오른다. 짓뭉갠 두부처럼 흥건한 달빛 아래서, 무방비한 흰 목덜미를 깨물었던 꿈이. 그것을 다시 바라보면서, 나와 함께 해달라. 나를 행복하게 해달라. 그런 말은 도저히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아이. 굳게 다문 입술로 이쪽을 쳐다본다. 다나는 그 옷자락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숙여 떨다가, 본심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마지막으로, 꼭, 꼭 행복해지시길, 바랄게요. 다음에 볼 때는, 이, 꽃이, 피어 있기를..."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흰 수국. 그것을 꺼내 건네준 것이다. 율사들이 작별할 때, 진심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에게만 주는 선물이었다. 멍하니 돌아선 채,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자, 다나는 흐느적거리며 언젠가 했던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빗속에서도 참 예쁘다, 누구, 누구 동생이길래 이렇게 귀여워요?"

아이의 목을 붙잡고, 그 귀 뒤에 꽃을 꽂아주었다. 먼 옛날 어떤 소년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볼을 붙잡고 힘차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아."

찬 빗물과 대조적으로, 입가에 번져가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망연히 서 있는 아이. 다나는 그 작별을 마치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작아져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결국 가 버렸네, 누나."

조용히 그 뒤를 부유하던 림이 놀랍다는 듯 말을 건넸다.

'뭐야, 알고 있었던 거냐? 언제부터?'

"그날 밤부터."

'그럼 왜 말하지 않았던 거냐?'

"네가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야."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림.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려 그 회화를 끝맺었다.

"그래서, 모든 걸 끝마치면 나한테 돌아오라고 그랬어. 칼슨 아저씨도, 레이븐사이드의 일원이니까, 판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건 나 하나뿐일 테니까."

'이거 참 안타깝게 됐군.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게냐? 저 마술사는 쳐 죽여야 하는데 말이다.'

재밌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림. 아이는 그 허벅지를 툭 때리며 말한다.

"처음 그 말 꺼낸 지 벌써 4년이야. 이제 그만할 때도 안 됐어?"

'글쎄. 하지만 10년이 걸려도, 100년이 걸려도. 나는 이 권고를 계속할 생각이다, 어린 순례자야.'

그렇게 혼잣말 같은 대화를 하고 있자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이를 불러세웠다.

"감동적인 이별은 마쳤나? 내 말이 맞지, 저런 여자들은 성가시다고 했잖나."

농담을 하려고 했는데, 기운이 없어서 비꼬는 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마레의 말이었다. 비에 젖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가자. 용을 죽이러."

*

종말의 용이 깨어난다.

빗속으로 마레가 아이를 끌고가서 들려준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용, 용이요?"

충인귀마용. 카나기가 마물을 분류하는 다섯 단계의 등급. 그 등급 중에서, 용종은 최상위에 속했다. 용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용기수는, 아지프의 마도사와는 다른 의미로 1인 군단이라 할 만했다.

그 용이 깨어난다. 하필 이 북서 자치령에서. 아무리 마레가 가져온 말이라지만,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레는 긴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원에게서 얻은 정보다. 그 낙죽장도의 안쪽에 있는 고등 암호문, 거기 적혀 있는 게 그런 내용이었으니 말이야."

거기에는, 왜 카나기의 선조들이 이 북서 자치령의 일부에 대대적으로 이주했는지가 적혀 있었다. 암호화해서 빙빙 돌려 말했지만 그 뜻은 간결하고도 강렬했다. 용이 태어나는 지맥, 용맥을 감시하기 위해서.

"애초에 북서 자치령이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카나기와 아지프가 세력을 투사하는 대리전의 전장이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럼 누군가는 먼저 여기에 세력을 형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카나기였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땅에 용맥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같은 형태가 되기 전, 그들은 원래 순수하게 마물이 태어날 장소를 찾아 거주하며 그 마물을 사냥하고 길들이는 자들이었다. 북서 자치령에는 용이 태어날 수 있는 용맥이 있었다. 그래서, 그 용맥을 감시하고 혹시라도 용이 태어난다면 하레하둔에 소식을 보내 그 용을 길들이거나 죽이기 위해서, 여기에 카나기는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네 그 칼, 그 칼에 따라붙던 전설도 그냥 전설이 아니었다. 그 종말의 용이 나타났을 때에 그 칼을 증표로 보여주고 하레하둔에 구원군을 요청하라는, 그런 일종의 징표였지."

환도에 새겨진 검은 용이 그런 의미였나. 아연실색하는 아이.

"뭐 신기를 빨아먹고 용이 태어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게 동화인 줄 알게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 그 진실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잊혀졌겠지."

마레는 빗 속에서, 불조차 붙이지 못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한다.

"그런데 지금 그 용이 태어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음모에 의해서."

"음모라면..."

"바우얀 아이신고르. 그 자식은, 아이신고르의 핏줄답게, 원래 이 땅에 카나기가 주둔했던 이유를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놈이 5위계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그냥 5위계가 되어서 고급 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딴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과정이었어."

토혈하듯 말하는 마레.

"5위계가 되어야만 갓 태어난 새끼용이라도 조련할 수 있으니 그랬던 거야."

"그,그 말은..."

"즉, 그놈의 목표는, 그 용맥에서 용을 태어나게 하여 그걸 길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용군단에 새로운 용이 한 마리 추가되는 것이니 공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72인의 용군단이 73인의 용군단이 되는 사건이니 말이야. 그 정도 공적은 되어야 패잔병 전부를 사면해주겠다, 그런 부담을 걸머지고 받아들여 줄 만 하지."

아이는 부르르 떨며 외쳤다.

"하지만, 당신과 제가 그 음모는 깨부쉈잖아요! 그 자식은, 그 개집을 잃어서, 이제 5위계로 올라서는 건 영영..."

"반쪽만이다. 반쪽만. 그 놈이 용을 길들일 5위계로 올라서는 건 막았지만, 용을 만들어내는 건 못 막았잖아."

어둡게 중얼거리는 마레. 아이는 입을 벌렸다.

"괴물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신기의 농도가 짙어지면, 승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던 그 괴물의 넋이 그 신기를 빨아먹고 육을 얻어 태어나지. 용도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다. 용맥에는 용의 영혼이 묶여 있어. 그걸 태어나게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신기가 필요하지. 그리고 지금 북서 자치령은 어떤 땅보다도 신기가 풍부한 땅이다."

"왜요?"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마술사가 계속 죽었으니까. 마술사의 몸에는 마력이 가득해. 마력은 목적성 있는 신기다. 그 목적을 조정하는 마술사가 죽으면, 마력은 목적을 잃고 신기가 되어 공중을 떠돌지. 이 땅에서는, 지금 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학살 때문에 어떤 때보다도 많은 마술사가 죽어 신기가 가득하잖나."

빗물. 빗물이 바닥을 때린다.

"바우얀은 그 신기를 집중시키는 주문을 안다. 용맥에 그 주문을 설치해, 사방에 가득한 신기를 모여들게 만들고, 그것으로 용을 태어나게 할 셈인 거야."

"어차피 자기도 조종 못 한다면서요! 못하는 용을 왜 태어나게 시켜요? 자기도 말려들어서 죽을 텐데!"

아이도 그건 알고 있었다. 워낙 많은 설화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용은 태어나면, 사흘 밤낮을 난동을 부리며 반경 내의 모든 생물을 주워 먹고 몸을 키운다. 갓 태어난 새끼용 상태일 때, 아직 난동을 부리기 전에 길들이지 못한다면, 그 용은 곧 광란의 살육을 벌일 것이다.

길들일 기술도 없는데 용을 불러낸다, 즉 그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마레가 대답한다.

"목숨을 바칠 정도의 비이성적인 행동, 그 이유가 되는 건 몇 없지. 복수다."

"복수?"

"그 여자 무반은 아마도 그 벼멸구의 연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 벼멸구 자식은, 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면 너와 내가 자기를 막으러 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그렇게 다가오면 용을 풀어서 같이 뒈지겠다는게 그 허섭스레기의 목적이다.

그래서, 아주 우회적인 방식으로...아주 불쾌한 중개인을 거쳐서, 이걸 나한테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이걸 너한테 전달하러 왔다, 이거지. 이야, 이런 걸 바둑에선 외통수라고 하던가."

침묵. 그리고 마레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파악하는 네 성향에 따르면, 너도 나와 같을 거다."

아이는 침묵하고, 고개를 숙였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정수리를 때린다.

"이 용맥의 위치는 웨스벤 바로 옆의 호수거든. 무슨 신령스런 호수라고 목탑이니 석탑이니 잔뜩 설치되어 있는 그 절벽 옆의 호수 말이야. 즉, 이대로 방치하면,"

마레는 심호흡을 하고 선언했다.

"웨스벤의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 용에게."

아이는 입을 벌렸다. 북서 자치령과 제국 사이에 절묘하게 위치한 도시, 웨스벤. 그 도시는 북서 자치령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관련된 인구만 몇만을 헤아릴 것이다. 그게 전부 죽는다면, 또 기반이 완전히 파괴된다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용이라니, 아직도 환상 속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는 괴물, 잔'크낫츠. 그 잔'크낫츠조차도 용종이 아닌 마종에 속했다. 그 산악 거인보다도 강력한 괴물과 맞서야 하는 건가, 단 둘이서?

그렇게 망설이고 있자니 마레가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리고 너도 이제 이걸 들어버렸으니,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침묵. 아이는 한숨을 내뱉는다.

"블로어를, 찾아달라고 했더니, 이딴 방식으로 찾아와요?"

"미안하게 됐다. 이야, 어쨌든 그 놈을 죽이면 블로어가 돌아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그리고 마레의 웃음과 닮은 설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외통수네요, 이 쓰레기 파계승."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은 용을 죽이러 빗속을 뚫고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북서 자치령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될 최후 결전의 장소.

바우얀이 기다리는 호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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