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n inquiry into the Nature ( 4 )
새들이 날아오른다. 비를 뚫고.
어느새 비는 잦아들었다. 사그라든 빗물에 날개가 젖을 염려보다, 저 용에 대한 염려가 더 큰 듯했다. 삼각의 편대를 이루어 달아나는 검은 새 떼. 그것을 용이 덮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불.
우스무의 입에서 피를 닮은 불꽃이 치솟는다. 섬뜩한 붉은 빛. 그 불길은 달아나는 새의 행렬을 덮쳐, 시꺼멓게 그슬렸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떼 아래로, 우스무가 달려들어 입을 벌린다. 꿈틀이며 움직이는 긴 몸뚱이.
아이는 그 신화의 한 장면을 잘라낸 듯한 뒤틀림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뭐, 뭐 하는..."
"성장을 시작하는 거다. 지금부터 저놈은,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 집어먹으려 들 거야. 저건 아직 다 자란 상태가 아니거든. 개구리로 치면 지금은 올챙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올챙이요? 저게?"
"그래. 그러니 지금 죽여놔야 해. 지금, 저렇게 미숙한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성장을 끝마치고 나면, 6위계 이상이 와야 승산이 있다."
치이익,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그리고 후끈한 열기가 아래로 쏟아진다. 우스무가 탄생하며 치솟은 호수의 물이, 용이 내뱉은 불꽃에 기화되어 검붉은 연기로 화했기 때문이다. 그 채도는 짙고 어둡다.
매캐한 연기로 자욱한 시야 속에서, 오직 둥둥 떠 있는 것은 용의 두 눈. 노릿한 눈동자가 빛난다.
그 눈동자에 배여 있는 것은 적의, 그리고 허기였다. 노려보는 것은 두 사람. 이 용은 다음으로 잡아먹을 생물로, 아이와 마레를 택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세 발톱으로 갈라진 발, 그 발을 크게 내려찍는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아이는 황급히 칼을 불러냈다.
"레바테인!"
깡!
은백색의 대검이 나타나 용의 발을 후려친다. 레바테인은, 용의 발톱과 발톱 사이 갈라진 틈에 쳐박혔다. 그리고 훌륭히 진로를 가로막았다.
"흐으읍!"
기합성, 그리고 신기를 끌어내 레바테인에 붉게 두르고 올려친다. 레바테인의 무거운 은백색 칼날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발톱 사이의 근막을 찢어발겼다.
"ㅡㅡㅡㅡ!!!"
우스무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 태어나고 처음으로 느껴본 아픔이었다. 그 비명을 듣고서야, 아이는 이것도 생물이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위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발톱을 잘라내야겠다! 속으로 결심하고, 레바테인을 크게 휘두른다. 텅! 큰 소리와 함께, 발톱 하나가 반쯤 잘려나간다.
"ㅡㅡㅡㅡㅡㅡ!!!"
우스무는 다시 한 번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고는, 자우룩이 피어난 연무와 수증기 뒤로 몸을 숨겼다. 달아나려는 건가? 겨우 이걸로? 아이는 어이가 없어 레바테인을 곧추세운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제기랄, 달아나!"
그리고 그건 오판이었다. 혹시라도 용에게 환술을 걸 수 없나 시도하던 마레가, 소리를 내지르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를 붙잡고 바닥에 깔아뭉갠다.
슈우우욱!
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아이가 있던 자리에, 검 같은 비늘이 날아와 박힌다. 그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수의 비늘이 화살처럼 쏟아져나왔다. 연기 뒤에 숨어서, 고슴도치처럼 비늘을 곤두세우고 비늘을 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화살이 쏟아지는 듯한 파공음이 울린다.
"석탑, 석탑 뒤로 몸을 숨기자!"
마레는 아이를 붙잡고 방향을 지시했다. 정신을 차린 아이는 마레와 함께 간신히 쏟아지는 비늘의 비를 피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저것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속임수를 사용한 것이다. 고통으로 달아나는 척하고, 연기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큭, 으윽."
"괜찮아요?"
몸을 숨긴 뒤. 그제서야 마레의 허벅지에 꽂혀 있는 비늘을 발견한 아이가 황망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끌고 움직이다가, 비늘 하나를 피하지 못한 듯싶었다. 옷을 찢고 살에 틀어박힌 비늘에서는 피가 진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뽑을게요, 하나, 둘..."
"끄아악!"
비명과 함께 살을 찢고 비늘을 뽑아낸다. 그 비늘은, 잡을 곳 없이 모든 면이 절단면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비늘을 뽑아낸 아이의 손도 살짝 베어 피가 새어나온다. 그것을 살펴보며, 마레가 중얼거렸다.
"이 비늘... 하나하나가 검에 가까운데. 손잡이 없는 검날."
"예?"
"그것도 카나기의 검이야. 이게 꽂혔을 때, 이 검날에서 흘러나온 어떤 것이 내 마력과 반응해 폭주하는 게 느껴졌다. 카나기의 기술이지. 저 용은 카나기와 아지프의 마술사들이 죽으며 남긴 신기로 몸을 짜 올렸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속성이 몸에 병존하는 것 같아. 우욱."
울컥, 피를 쏟아내는 마레. 아무래도 이 비늘에는, 마술사에게 특히 독으로 작용하는 무언가가 함유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내 역할은, 라그엘을 지원하는 데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그거면 충분해요!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어요!"
아이는 소리 지르며 다시 일어났다. 한바탕 몰아친, 비늘검의 폭풍. 사방에는 검은 비늘이 바닥에 꽂혀 번들거린다. 아이는 절뚝이는 마레를 부축하고, 재빨리 구석에 놓인 석탑 한 구석까지 뛰어갔다. 우스무는 그동안 꼬리를 휘둘러 안개를 몰아내고, 두 사람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아이가 마레를 안전하게 숨기고 그 옆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ㅡㅡㅡㅡㅡㅡ!!!!"
마침내 아이를 발견한 우스무가 다시 울부짖는다. 채찍처럼 떨어지는 꼬리.
"큭!"
옆으로 몸을 굴러 피한다. 꼬리는 지면을 후려치고, 지반은 부서진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쩍 갈라져 둘로 쪼개졌다. 예리한 절단면으로 쪼개진 지반이, 이빨처럼 번들거린다. 아이는 꼬리는 피했으나 그 균열에 휩쓸렸다. 절벽에 매달리듯 그 균열 하나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찰나.
-후우우우웅
우스무가 볼을 크게 부풀리는 게 보였다. 또 그 핏망울 같은 빛의 불을 쏟아내겠다는 뜻이었다. 황급히 균열 위로 뛰어오르는 아이. 잠시 후, 균열의 갈라진 틈 가득 진홍색 불꽃이 쏟아졌다.
"훅, 후우욱."
촌음. 촌음의 차이였다. 지면의 균열 전체에 용암을 들이부은 듯 불이 넘실거리고, 열풍이 몰아친다. 굴을 파고 숨어있던 토끼가 형체도 찾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게 보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불꽃에 휩쓸릴 뻔했다.
"ㅡㅡㅡㅡㅡ!"
우스무는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다시 거대하게 몸을 뒤틀며, 비틀린 곡선으로 전진하는 흑룡. 그 비늘 덮인 꼬리는, 이번에는 위태롭게 서 있던 목탑을 후려쳤다. 10층은 될까, 원래 이 호수에 잠든 신령스런 존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목탑이었다.
퍼억!
한 번 후려친 것만으로 그 목탑의 기둥이 부서졌다.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목탑. 목탑이 쓰러짐에 따라 먼지와 흙이 솟아오르고, 그 목탑의 팔작지붕은 불이 넘실거리는 균열에 닿아 새빨갛게 타오른다.
매캐히 솟아오르는 먼지, 그리고 불티. 우스무는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을 희번뜩대며, 건방진 흰 먹잇감을 찾았다. 깔렸나, 깔려 죽었나. 이동한다. 스르륵 목을 움직여 자신이 무너뜨린 목탑 가까이로.
그리고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ㅡㅡㅡㅡㅡㅡㅡ!!!'
라그엘의 새장에 올라탄 아이였다. 날개를 퍼덕이며, 먼지구름을 뚫고 날아오른 라그엘. 그 라그엘이 들고 있는 새장 속에서 칼을 쥐고 기다리던 아이는, 우스무의 머리가 가까워지자 힘차게 도움닫기 하며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레바테인이 악룡의 콧잔등을 뚫고 깊게 박힌다.
"윽!!"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흔드는 우스무. 아이를 떨어뜨리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레바테인을 꼭 쥔 채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레바테인을 박차고 달린다. 목표는 눈. 거의 아이만큼이나 거대한 노란 동공이었다. 품에서 환도를 뽑아들고, 그 눈을 깊게 째낸다.
"끼이이이이이익!"
이게 진심으로 내지르는 비명인 걸까. 소름 끼치는 고음의 비명을 내지르는 우스무. 한 번 더 몸을 비튼다. 쿵! 이번엔 절벽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어떻게든 아이를 떨어뜨리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망막을 찢은 환도에서 손을 떼지 않고, 또 다른 검을 뽑아냈다.
"재생되고 있어."
용에게는 재생력이 있다. 그럼, 그걸 막아둬야겠지. 아이는 미제리코드, 불멸자를 죽이기 위한 단검을 꺼내 그 벌어진 상처에 꽂아넣는다. 그리고 신기를 부어, 독으로 변환시키고 흘려보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구 몸을 뒤트는 우스무. 절벽에 쿵쿵 머리를 짓찧는다. 괴로움을 떨쳐버리려는 목적도 있는 듯 했다. 그 난리통 때문에, 절벽 일부가 움푹 패여 동굴이 되었고 뾰족한 돌조각은 우박처럼 아래로 쏟아진다.
"윽, 제기랄!"
미제리코드의 손잡이는, 그 난동을 견디기엔 너무 짧았다.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이. 그때를 때맞추어, 우스무는 다시 온몸의 비늘검을 곤두세웠다. 360도, 사방으로 터지듯 퍼져나가는 검비늘. 그중 서너 개는, 분명히 떨어지는 아이를 노리고 발사되었다.
텅ㅡ!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온 라그엘이, 새장을 휘둘러 그 비늘을 쳐냈다. 그리고 안전하게 아이를 받아낸다. 저번에 그 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 고마워."
로브 뒤의 검은 음영에 인사를 건네고, 새장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이. 그러나 안심할 틈은 없었다. 한쪽 시야를 잃은 우스무는, 다시 온몸을 뒤틀며 꼬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거대함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꼬리가 석탑을 후려친다. 목탑의 옆에서 대칭쌍을 이루듯 서 있던 석상, 그것이 부서지며 기우뚱 옆으로 떨어진다. 그 석탑은 라그엘이 체공 중인 하늘을 노리듯이 정확히 덮쳐든다. 재빨리 옆으로 날아서 피하는 라그엘.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마레가 아래에서 전황을 살피며 조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야말로, 우스무가 바라던 것이었다. V자 형태로 무너진 석탑과 목탑. 그 때문에, 뒤로 물러설 공간이 막혀 버렸다. 우스무는 한쪽 눈으로 피를 흘리며,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웃었다.
이렇게 탑을 무너뜨려서, 날아다니는 존재라 하더라도 이 일격을 피하지 못하도록, 운신의 폭을 좁혀 몰아넣는 것. 그게 그의 사악한 지혜가 바란 것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는 우스무. 입천장 가득 피안화의 색 같은 섬뜩한 붉은 빛이 맺힌다.
"저, 저건..."
지금까지 내뿜었던 불보다도 훨씬 농밀하고 섬찟한 붉은 빛. 아이는 저게 뭔지 알고 있었다. 저건 혈사포였다.
-쿠우우우우웅!!!
탑과 탑 사이 고인 공간, 그 공간 전체를 점하도록 용의 혈사포가 쏟아져나온다. 일전에 마을에서 보았던 혈사포도 거대했지만, 그 거대한 혈사포를 수십 배는 크게 부풀린 듯한 장대한 일격이었다. 탑의 일부가 녹아 부서진다.
아지프와 카나기의 마술사의 시체로 짜낸 용, 우스무. 그 악룡은, 카나기의 검을 온몸에 두르고, 입으로는 혈사포를 쏘아댈 수 있는 형상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쉬이이이잇..."
본능에 따라 처음으로 쏘아본 일격이었지만, 그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우스무는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진 혀를 쉿쉿거리며,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우스무의 뱃속에서부터 쏟아져나온 혈사포, 그것은 거의 6위계의 마술인 굉혈포에 가까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완전히 성장한 상태였다면 굉혈포와 같았을 것이다.
혈사포는 탑 두 개가 맞닿은 부분을 완전히 먼지로 깨부수고, 그 뒤도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전부 지워버렸다. 하나의 거대한 지우개가 혈사포가 지나간 곳만 전부 지워버린 듯 깔끔한 일소였다.
그러나 우스무는 곧 한쪽 눈을 곤두세웠다. 그 지워진 자국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였다.
혈사포를 얻어맞기 직전, 라그엘은 아이가 들어 있던 새장을 궤도 밖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깔끔하게 혈사포를 얻어맞고, 영체가 부서져 흩어졌다. 그 덕분에 간신히 혈사포의 궤적에서 벗어난 아이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저기에 서 있던 것이다.
흰 머리를 휘날리며, 입술을 깨물고. 한 손에는 은백색의 대검을 든 채.
"쉬이이잇..."
우스무는 혀를 휘두른다. 저것은 내 한쪽 눈을 부숴버린 인간. 맹렬한 적의가 솟아오른다. 방금 자신이 일으킨 파괴를 목격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이것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다시 쏘면 저놈도 먼지가 되겠지.
쿵!
무너뜨린 석탑과 목탑의 끄트머리를 붙잡는다. 한 손은 석탑, 한 손은 목탑으로. 그리고는 목을 길게 내뻗고, 오시하듯 지면을 바라본다. 한 사람만이 서 있는 지면을.
이 각도라면, 어차피 피할 곳은 없을 거다. 우스무는 입을 크게 벌렸다. 츠츠츠츠, 그 입에 다시 농밀한 핏무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양 손에 움켜쥔 채로, 자신을 향해 형성되어가는 그 빛을 오연히 바라보았다.
-저게 혈사포라면.
쿠우우우웅! 우스무의 입에서 형성을 마친 혈사포가, 다시 쏟아져나온다. 아이는 정면으로 고개를 쳐든 채 그것을 바라보고, 레바테인의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깨부수지 못할 리가 없다!
지난 4개월 간, 수십 명의 아지프를 죽이고 그 심장을 흡수한 검. 오직 아지프를 죽이기 위한, 마술을 깨부수는 검. 레바테인. 그것이 은백색 날을 번뜩였다. 흰 검날과 붉은 혈사포가 충돌한다.
"큭!"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은백의 대검. 그리고, 그 열풍압에 휘말려 옷소매가 찢어져 바람에 흩날린다. 하지만 아이는 이를 악물고, 대검을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레바테인이 그 목적한 궤적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내열을 견디지 못하고 주홍색으로 깨지고 말았다.
"아."
그러나, 그것은 혈사포도 마찬가지였다. 그 주문을 레바테인에게 양단당한 혈사포는, 마치 붉은 공기처럼 흩어져 사방에 흩뿌려진다. 흩뿌린다. 신기를.
아이는 달려나가며, 도약대처럼 솟은 바위를 밟고 뛰어오르며, 레바테인이 짓부순 신기의 안개 한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림, 유혼!!!"
고함. 손이 달아올라 부서질 것 같지만, 아이는 폐부를 쥐어짜내 고함을 내질렀다. 스윽, 그 손에 짐승의 이빨과 같은 검이 치솟는다. 탐욕스럽게 신기를 빧아들이는 초승달 같은 검날. 아이는 격통을 참으며, 그 유혼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악룡이 쏘아낸 것이 물이라면, 이건 고드름을 얼려내 쏘아붙인 것일까. 우스무가 쏘아낸 혈사포의 신기를 전부 빨아들인 유혼은, 그것을 초승달 모양의 검기로 빚어내 발사했다. 혈사포의 그것보다도 몇 배는 진한 붉은 빛이 넘실댄다.
"ㅡㅡㅡㅡㅡㅡㅡ!!!"
비명을 내지르는 우스무. 세상을 쳐부술 듯 날아든 붉은 검기, 그것에 반응하지 못해 몸을 다친 것이다. 우스무의 목을 베고 검은 피를 흘리게 만든 그 검기는, 절벽에 쳐박혀 우스무가 만든 것보다도 몇 배는 거대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쫘자작, 유혼은 그것을 쏘아내자마자 일을 다 했다는 듯 부서진다. 손잡이까지 부서졌으니, 유혼도 레바테인도 몇 시간은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반격당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떡하니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우스무. 그 검은 용은, 저번에 그 평원에서 아지프의 4위계가 그랬듯 불의의 일격을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르륵, 그르르르륵..."
핏물을 가르랑대는 우스무. 그 목은 반쯤 찢겨 너덜거리고, 쏟아지는 검은 피가 연기로 변해 새어나간다. 단순히 몸을 다친 것이 아니다. 미제리코드에 의해 재생력이 억제되었고, 기혈이 뒤틀렸다. 악룡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인간이 홀로 용을 몰아세운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그러나 현실이다. 아이의 비인간적인 전투감각이 빚어낸 위업이었다. 아마 비슷한 일은 백 년, 아니 천 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혈사포다. 그러면 이것은, 역이용할 수 있다. 아이가 이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그엘의 새장에서 떨어지자마자, 혈사포를 유도하기 위해 그 한가운데로 당당히 움직인 것이다.
그 전투감각과 경험을 이기는 것은, 아무리 용이라 하나, 갓 태어난 것에게는 무리였다.
"후우우욱... 후우우욱...."
그러나 아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있는 신기를 전부 밀어넣어 레바테인을, 그리고 유혼을 휘둘렀다. 크고 작은 부상도 입었다. 몰려오는 구토감과 무력감 때문에 탈진할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고, 멍한 상태로 간신히 눈을 치떠 용을 노려보고 있다. 피를 토해내는 우스무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어린다.
저놈도, 지쳤다.
우스무는 스르륵 몸을 움직여, 모든 석탑과 목탑이 무너진 와중 유일하게 꼿꼿이 서 있는 커다란 탑을 향해 날아올랐다.
"쉬이잇... 쉬이이이잇..."
한 번에 꺼낼 수 있는 검의 수는 두 개까지. 세 개를 연달아 꺼내면, 가장 오래된 것은 흩어진다. 유혼과 레바테인을 사용하면서 두 개의 검을 꺼낸 탓에, 우스무의 눈에 꽂혀 있던 미제리코드가 사라졌다. 그래서 용의 상처는 서서히 재생을 재개하고 있었다.
저 하얀 놈은 날개가 없다. 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위에서 몸을 기대고 쉰 다음, 재생을 마치고 죽인다. 우스무의 본능이 만든 결론. 우수한 결론이었다.
"이 자식..."
그것을 알아챈 아이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반쯤 죽어 너덜너덜할 때, 지금 숨을 끊어야만 했다. 지금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다. 잠깐 상대해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용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높은 지능을 가진 영물이었다. 아마 다시는 혈사포를 사용하지 않겠지.
아이는 어질어질한 몸을 이끌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탑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세 개의 검은 다 사용했고, 환도는 잃어버려서, 어떠한 무장도 없는데도. 오직 스스로의 몸뚱이를 믿고.
"하아압!"
탑의 벽면에 달라붙는 아이. 마지막으로 서 있는 가장 거대한 탑. 이 탑은 북서 자치령에서 구천을 헤매는 귀신을 진혼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악령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 벽면에 빼곡하게 검을 든 귀졸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 하나하나가 계단이 된다. 아이는 그 석상을 붙잡고, 석상을 밟으며, 용이 몸을 뉘인 채 쉬고 있는 탑의 끝을 향해 기어오른다. 벌레처럼. 날아오르기 위해 우선 등반하는 무당벌레처럼.
"ㅡㅡㅡㅡㅡㅡㅡ!!!"
처형인의 접근을 눈치챈 걸까. 우스무는 기진맥진한 가운데도 저항을 시작했다. 온 몸에 가득한 검의 비늘, 그것을 부풀린다. 쏴사사사삭! 예리한 파공음이 울려 퍼지고, 그것은 아이를 향해 쏟아졌다.
"큿!"
효과가 있었다. 날아든 수백 개의 검의 비늘, 그것들 중 하나가, 아이의 어깻죽지를 뚫고 박혔다. 순간 힘이 빠져 떨어질 뻔한 아이.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귀졸의 석상을 붙잡는다. 하필 붙잡은 부분이 칼날이라, 손을 베여 그 손뼘에서 피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
눈은 그 귀졸의 얼굴과 맞추고 있다. 귀졸의 무서운 얼굴은 엄하게 꾸짖는 듯하다. 이만한 일로 무릎꿇지 말라고.
"좋아!"
아이는 기합을 내지르며, 우렁차게 소리쳐 모든 어지러움을 털어버리고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날아든 높은 바람이 등줄기를 스친다. 몇 번이나, 검의 비늘이 날아온다. 하지만 아이는 두어 개의 검비늘을 더 얻어맞으면서도,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탑의 끝까지 기어올랐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침내 도달한 탑의 끝. 그러자, 악룡은 몸을 쉬던 것을 멈추고 조그맣게 날아오른다. 아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은 힘이 없었으나, 그 상처의 끝에선 새살이 돋고 있었다.
탑의 끝에서, 달빛을 맞으며, 아이는 어깨에 꽂힌 검비늘을 뽑아들었다. 마레가 이건 카나기의 마검과 비슷하다고 했지. 모든 검을 잃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검 비슷한 거라곤 이게 다였다.
이게, 과연 저 용을 끝장낼 수 있을까? 그저 비늘이?
어쩌면 그저 개죽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솟아오르는 두려움. 그러나 아이는 그걸 물리치고 붉은 신기를 불어넣는다. 용의 비늘 가득 붉은 빛이 넘실댄다.
"후욱.. 후욱..."
달은 오직 아이만을 비추고 싶기라도 한 듯, 백골 같은 흰빛을 뿌린다. 아이는 달빛을 조명으로 석탑의 끝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리를 활처럼 굽힌 채, 용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용을 눈앞에 두고 떠오른 순간.
아이의 귀에 음성이 들렸다.
'훌륭하다. 나의 어리지만 늠름한 사도야.'
'너는 새 검을 받을 자격을 충분히 증명했구나.'
후웅, 작은 소리와 함께 아이의 손에서 금빛의 휘황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손에 쥔 그 금빛의 무언가를 세차게 휘둘렀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굉음. 그리고, 휘황한 금색의 빛이 용을 휩쓸었다. 아이가 휘두른 검, 그 검에서 뿜어져나온 빛이었다. 한밤중이지만,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한 찬란한 밝은 빛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명. 우스무는 그 빛을 맞으며, 마치 해돋이에 어둠이 녹아내리듯 새하얗게 부서져 쓰러졌다. 그 뒤에는 물이 전부 말라붙어 텅 빈 구멍, 호수였던 자국만이 움푹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용은 쓰러졌다. 결국, 한 사람의 인간은 용과 대적해 이 땅을 구해내고야 말았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 용이 쓰러진 거대한 공동 앞으로 떨어진 아이는, 멍청한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이건, 환도잖아. 내가 썼던, 그거..."
마을에서 선물 받았던 검. 그 검이었다. 그것과 완전히 같은 형상이다. 아니, 조금 달랐다. 이 검의 검면에 음각되어 있는 용은, 검은색이 아니라 금색이었다. 날개를 접고 다가온 림은 조용히 그 귀에 속삭인다.
'용살의 검, 용광. 그게 네가 처음으로 만든 검의 이름이다.'
"뭐?"
'저번에 분명히 이런 것과 같은 형상으로 검을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용살검, 용광.
요도 유혼이 카나기의 무반을 죽이는 검이라면, 이건 문반, 그리고 문반이 통제하는 괴물을 죽이는 검이었다. 그 괴물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용이다. 이것은 용을 만나면, 하루에 단 한 번. 태양과 같은 빛의 검기를 쏟아내 용을 죽일 수 있는 공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그 설명을 듣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 중얼거린다.
"하지만, 저번에는, 이건... 전설이 아니라고. 동화라고, 안 된다고 그랬잖아..."
'네가 동화를 전설로 만들었다.'
지난 4개월간, 몇 명이나 사람을 구했을까.
전쟁에 휩쓸려 고아가 된 아이를 한 명 구했다. 패잔병에게 약탈당하던 마을의 사람을 수십 명 구했다. 조디악의 흉계에 휩쓸린 사람을 수백 명 구했다. 사과밭을 잃고 망령이 될 사람들을 수천 명 구했고, 아지프에게 학살당할 사람을 수천 명 구했다.
마지막에는, 웨스벤의 수만 명을 구하기 위해 홀로 용과 대적했다.
그 모든 일을 해내면서도, 단 한 번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 행위는 실로 영웅적이었다. 영웅의 이야기는 이미 온 북서 자치령에 퍼졌다. 영웅은 그저 막연할 뿐인 동화에 실체를 부여하는 자다.
아이의 행보는 전설로 남아, 수백 년이나 입과 입을 오가며, 고통받는 자에게 희망을 주겠지. 그 고행의 언덕에 남아 있던 동상들처럼.
'그건 이렇게 훌륭한 검을 만들어내기 충분한 전설이 되었다. 복수 대신 선택한 선행의 길. 그 외로운 길을 걸어온 보상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어둡게 살아온 선주가 만든 일곱 개의 검. 그 검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아이를 닮은 검. 용광이라는 검의 인상은 그런 인상이었다. 림의 설명을 들은 아이는, 드디어 찾아온 승리감에 활짝 웃으며, 대자로 드러누웠다.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비가 그쳐 맑게 개인 밤하늘이. 아이는 그 별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별하늘을 가리는 얼굴이 있다. 마레였다.
"결국 해내고야 말았구나. 혼자서 용을 죽이다니, 누구한테 말해도 안 믿어줄 거다."
"혼자라니요, 당신도, 도왔잖아요."
"아니, 난 한 게 없다."
그렇게 말하는 마레. 그리고 아이는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우스무가 죽었는데도, 마레의 얼굴은 여전히 그 여관에서 오랜만에 보았을 때처럼 어둡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혹시 아까 다친 거, 뭐 죽어야 되는 부상이라거나 그런 거에요?"
피식 웃는 마레. 그러나 여전히 인상은 어둡다. 마레는 발을 질질 끌며, 아이의 옆에 벽처럼 박혀 있는 목탑의 잔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죽어야 하는 부상... 그래, 그것도 주님의 뜻이겠지."
"예?"
"됐다, 왔군."
뿌우우우우!
벌떡 몸을 일으키는 아이, 들어본 적 있는 뿔나팔 소리였다. 그 도박장에서, 도박장 지하의 투기장에서, 전투의 개전을 알릴 때 쓰던 뿔나팔 소리. 잠시 후, 그 소리에 대응하듯 사방에서 무언가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용광을 다시 집어 들고 사방을 바라보는 아이. 그 표정은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밀려들고 있는 것은, 원숭이처럼 긴 팔을 하고 황금의 가면을 쓴 괴물들이었다. 레버넌트, 그리고 간간이 섞여 있는 황소 모양의 망령, 미트라스.
그것들이 군단처럼 밀려들어 사방을 감싸고 있다.
"뭐죠? 이건, 뭐..."
그리고 아이는 마레의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마레의 얼굴에는, 당혹함이나 놀람이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우우우우우우!!!"
"정말, 그 여자도 더럽게 성질이 나쁘군. 여기서 드러낼 필요는 없을 텐데, 내 퇴로조차 막으려는 건가."
마레는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꺼내기 싫은 말, 힘든 말을 할 때 취하는 그의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우우우우우!!"
미트라스 셋이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접근한다. 쿵! 석탑이 서 있던 자리에, 그것을 세운다. 다른 레버넌트와 미트라스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건축 자재 같은 것을 가져와서, 기초공사와 건축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는 미트라스가 옮긴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검은 뱀이 그려진 여자의 흉상.
미트라스가 운반한 것은, 그 도박장에 세워져 있던 저주스러운 흉상. 소니아 아바키렌의 흉상이다.
"저, 저게, 왜, 대체..."
"그야 당연하지. 나에게 바우얀의 말을 전한 불쾌한 중개인, 그리고 이 용을 죽여달라는 의뢰의 의뢰주."
마레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한다.
"그게 저 여자거든."
"당신, 그게 무슨 소리에요!"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지르는 아이. 레버넌트들이 잠시 이쪽을 돌아보더니, 적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터파기와 기초공사를 시작한다. 마레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엉거주춤 일어서며 말한다.
"다시 말해주마. 바우얀 아이신고르를 제거해달라고 나와 너에게 의뢰한 것, 그리고 막대한 보수를 약속한 것, 그건 조디악이다. 아니, 막대한 보수를 약속받은 건 나 혼자지. 너는, 그냥 이용당한 거고. 그 목적은 하나다."
그리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북서 자치령 전체는, 이제 조디악의 땅이 될 거다."
멍한 아이의 귀에 잡다한 설명이 들어온다. 조디악은 제국 안에선 여러 규제로 견제받고 있다. 자치령은 제국에 연해 있으나 제국이 아닌 땅이다. 이 곳에서라면, 마음껏 군사를 기를수도 있고 불법적인 사업을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전쟁금지령에 의해 카나기와 아지프로부터 안전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 눈독을 들이고, 자신의 영지나 다름없게 만들기 위해서, 금지령이 떨어진 순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저 용을 마지막으로 이제 조디악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은 없다. 이미 이 땅은 조디악의 것이 되는 것으로,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여기는 신기가 모이기 좋은 땅이니, 저 놈들은 이제부터 여기에 사소필렌의 신전을 짓지 않을까. 기일이 촉박해 우리가 용을 죽이길 기다렸다 바로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에서 울리는 건 한 마디 뿐이었다.
-우리는 동료가 될 겁니다. 반드시.
드미트리의 마지막 말. 그게 이런 뜻이었던가. 그보다 더 충격인 것은 배신. 마레의 배신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마레는 웨스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디악에게 이 땅을 안전한 상태로 바치기 위해서. 아이가 아나테마라는 걸 알고 있어서. 이용하려고 접근했다는 게 되었다.
자조하듯 웃으며 중얼거리는 마레.
"어떠냐, 이용당하고 말았지?"
상상하지도 못한 배신의 충격에 입을 벌린 아이는, 마레의 마지막 말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저항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다. 풀밭에 흩어지는 진홍색 법의.
"왜요, 왜, 왜 갑자기 이런 짓을..."
"변명하지 않겠다. 죽여라."
입가에 남은 연기로, 자신을 깔아뭉갠 아이의 얼굴에 도너츠를 날려보내는 마레. 그 연기가 걷히고 얼굴이 드러난다. 이 울보는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레는 어이없다는 듯 말한다.
"많이 성장했나 했더니 하나도 안 자랐군. 마술사를 다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나 같은 허섭스레기를 죽이는 데에도 울면 어쩌려고 그러나."
파르르 떠는 아이의 입꼬리. 그리고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토해낸다.
"변호... 스스로를 변호해보세요."
"변호하기 싫다. 죽여라. 그것도 주의 뜻이겠지."
"하세요!"
멱살을 붙잡고 그 몸을 일으키는 아이. 마레의 앞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감싼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레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와 헤어졌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소니아 아바키렌과의 대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