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n inquiry into the Nature ( 5 )
파헤쳐진 묘.
바우얀을 찾아 아이와 헤어진 마레가,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그것이었다.
"이 놈들, 군대를 만들고 있는데."
파묘의 목적은 명확했다. 군대였다. 검은 흙 속에선, 가락지와 은장도가 빛나고 있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부장품조차 건드리지 않고, 시체를 일으키는 데에만 전념했다. 이건 아지프가 군대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군. 도굴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막대한 보수를 받았다는 뜻이고.
큰 보수 뒤에는 큰 음모가 도사린 법이다. 그렇게 판단을 마친 마레는 우선 아지프를 추적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일으킨 아지프의 탈주 마술사들을 발견해, 그들을 사냥하고 심문했다. 그 심문 끝에 마레는 한 권의 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의뢰서였다. 책으로 위장된 의뢰서.
그 의뢰의 주인은 조디악. 그들은 아지프의 군대를 조직해서, 야심을 내비치는 지역 토호와 귀족들을 몰살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귀족들 중에는 정식으로 아탕칼리에 입교를 선언하고 막내를 수도사로 바치며 십일조를 바치는 가문도 있었다. 의뢰서에 따르면, 그들은 이미 조디악에게 몰살당했다고 되어 있었다.
마레는 곰곰이 조디악이 이런 차도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이유를 유추해보았다. 그 예리한 두뇌는, 결론에 금세 도달할 수 있었다. 제 1, 2의 마술사 세력, 아지프와 카나기. 그것으로부터 안전한 이 땅을 차지해 자신의 텃밭으로 만들기 위한 술수가 틀림없었다.
"잡았다. 이거면 엄청나게 큰 약점이 되겠군."
아탕칼리의 신도, 그것도 푸른 피의 귀족을 죽였다. 탈주 마술사를 동원해서. 아마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만, 그런 술책은 들키면 두 배, 세 배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건 조디악의 재산을 압류할 또 다른 근거가 되기 충분했다.
엄청나게 큰 소득이자 공적이었다. 마레는 고민했다. 과연, 이것을 랭 교구에 보고하는 것이 맞을 것인가. 그러면 아마도 나한테 공적이 돌아오겠지. 어쩌면 더 이상 이렇게 험지를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하지만, 이 땅은.
고민 끝에, 마레는 그 책을 움켜쥐고 어딘가로 향했다. 랭 반도가 아니었다.
향한 곳은 검은 황금의 신전. 북서 자치령 한가운데에 세워진 조디악의 별장이었다.
"헛, 세상에서 제일 장엄한 관짝이군."
그 집 앞에 서서, 마레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통째로 황금을 쳐바른 듯 눈아픈 노란 빛으로 빛나는 집의 정면에는, 오직 장식만을 위한 장미창이 부옇게 뜬 햇빛을 투과시키고 있다. 이 안에 소니아 아바키렌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도, 문 앞에는 호위 하나 없다.
화려한 조각상과 분수 사이를 가로질러 그 앞에 도착한 마레.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그는 곧, 응접실에 앉아 있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소니아 아바키렌.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양어깨와 등에 기괴한 물건을 부착하고 있었다. 그건 투명한 관, 튜브였다. 그 튜브는 심장처럼 맥동하는 기괴한 기계와 연해 있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퍼 올리며 갈아 끼우고 있었다. 피를.
튜브와 기계는 혈관처럼 쉴 새 없이 소니아의 피를 퍼내고, 다른 무언가의 피로 그 몸을 채우고 있었다.
"헛, 별 미친 흡혈귀를 다 보겠군. 지금 온 몸의 피를 어린아이의 피로 갈아끼우고 있는 거냐?"
마레는 불쾌하다는 듯 말한다. 소니아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나이프를 움직여 자신 앞에 놓인 고기를 썰 뿐이었다. 그 고깃덩이는 분홍색, 날것이다. 진하게 피가 배어 나오는 그 고기를 입으로 가져간다. 그건 고래고기였다.
"고오오오오오..."
그 불쾌한 향락 같은 식사마저도 적의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레의 뒤에서, 누군가가 숨을 뱉었다. 레버넌트였다. 두 마리. 그들은 불청객을 배제하기 위해, 그 긴 팔을 휘둘러 마레를 붙잡으려 했다.
"어이쿠."
마레의 눈이 붉게 빛난다. 그러자, 레버넌트 두 마리는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의 몸을 긴 팔과 손톱으로 찢어발기도록 놔둔 다음, 두 놈의 머리를 붙잡아 서로 박치기를 하게 시킨다.
쾅, 그 소리와 함께 레버넌트들은 쓰러졌다. 마레는 피식 웃으며 저벅저벅 한켠의 셀러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척 보기에도 고급인 포도주 한 병이 피처럼 붉은 술을 찰랑이며 누워 있다. 소니아는 그 난리통 앞에서도, 느릿하게 고래고기를 먹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이에 안 맞게 손님 대접을 영 못 하는 아가씨군. 이거 내가 먼저 나서서 술을 권해야..."
멋대로 값비싼 적포도주를 꺼내려는 마레. 기선을 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깔끔한 손을, 희고 여윈 손이 붙잡는다.
"응?"
마레 자신이 그 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 손의 주인은, 하늘빛 머리카락을 한 실눈의 소년. 검은 율사복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는 뭐가 그렇게 재미난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한다. 최근에 어디서 된통 얻어맞기라도 한 듯, 그 볼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다.
"이거,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건 아가씨가 아니라 제 일이라서 말이지요. 자, 그런 싸구려보다는 이게 나을 겁니다."
싸구려라니? 척 보아도 300루덴은 되어 보이는 적포도주를 깎아내리고, 거의 검은 빛에 가까운 술병을 꺼내 드는 드미트리. 수천 루덴짜리, 백 년은 묵은 명주였다. 그것에 기선을 제압당한 것은 오히려 마레였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소니아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는 마레. 그리고 자신이 여기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최소한 랭 반도 일대에서 너희 족속의 모든 재산을 압류해버릴 수 있는 증거물을 손에 쥐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입수한 책을 보여주었다. 어설프게 암호화가 되어있는 그 책을.
"호오, 그렇군요."
두 사람의 가운데에 앉아서 턱을 괴고 웃는 드미트리. 그 실눈은 아직 한 번도 금색 눈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레는 물을 홀짝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이 발육 부진한 꼬마가 그 유명한 파계 율사겠지? 다른 곳에 있으면 불러들일 참이었는데 잘 됐군. 너희들이 잘 하는 걸 하자."
"예?"
드미트리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다. 마레는 선언한다.
"내기다. 너희들은 이 땅이 카나기와 아지프로부터의 안전지대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이 땅 전체를 자신들의 영지로 만들 셈이겠지. 그 야욕을 포기할 것. 그것을 걸어라. 나는 이 증거물을 걸겠다. 너희들이 랭 반도 일대에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만큼이나 값비싼 이 책을 말이야."
"호오오, 그럼 내기의 종류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바둑."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는 드미트리. 소니아는 바둑의 명수였다. 유명한 기사, 국수(國手)급이 오지 않는다면, 승리를 점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뭐, 별 의도는 없다. 요즘 혼자서 책을 보고 바둑 연습을 죽어라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혼자서 두자니 심심해서 말이야. 상대를 좀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마레의 계산이었다.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내기지만, 종목을 바둑으로 정한다면 좋다고 달려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니아가 바둑에서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계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카나기 이주민 촌장에게서 받은 바둑 책, 그 책에는 단 한 번이지만 반드시 통하는 비장의 기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보를 믿고, 소니아 아바키렌과 바둑을 두어 승리한다. 그리고, 드미트리와 소니아의 심장을 걸어 북서 자치령에서 조디악이 완전히 손을 떼게 만든다.
그게 이 저택에 발을 들인 마레의 목적이었다.
"흐으음...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내기의 종목을 바둑으로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맞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마레. 드미트리는 고개를 홱 돌려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식사를 마친 소니아는, 입술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품위 있게 닦고는,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걸로는 균형이 맞지 않아요."
"뭐?"
"그 책 하나와 저울질하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 북서 자치령에 투자한 돈이 너무 많다는 뜻이죠. 균형을 맞추려면 조건을 좀 더 추가해야겠는데요."
마레는 심각하게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주섬주섬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소니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여자를 앞에 두고 담배를 꺼내다니, 그다지 좋은 매너는 아니군요."
"여자? 아, 이 꼬마 여자였나?"
후우욱, 담배 연기를 드미트리에게 내뿜는 마레. 너는 여자가 아니라 괴물로 보인다, 그런 도발이었다. 하지만 소니아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마레는 중얼거린다.
"말해 봐. 그 조건이 뭔지."
"당신은 용 사냥에 나서주어야겠습니다."
"뭐?"
눈을 껌뻑이는 마레. 용이라니, 생경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깜빡임은 곧 어이없음과 분노로 변해 갔다. 바우얀은 마레가 자신을 추적해올 것이라 믿고 지나온 마을에 흔적을 남겼다. 이곳저곳에. 그 흔적들에 먼저 도착한 것은 마레가 아니라 조디악이었다.
조디악은 의도적으로 그가 남긴 흔적, 그가 남긴 서신 따위를 전부 가로챈 채, 여기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기일이 촉박해졌다. 중앙에서 5위계, 6위계의 마술사를 요청해 데려올 틈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또, 그런 고위의 마술사가 북서 자치령에 발을 딛도록 해서도 안 될 것이었다. 이 땅을 점하고자 하는 조디악의 야심을 눈치챌 것이므로.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이 땅이 박살 나면 해를 입는 건 나보다도 너희들 아닌가.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너는 자해를 과시하는 버릇이라도 있는 건가?"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며 강한 척 말하는 마레. 그러나 소니아는 빙그레 웃고 고개를 갸웃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레는 씹어뱉듯 말을 던졌다.
"정 그렇게 그 용이라는 게 염려되면 너희 둘이 가서 무찌르라고."
"그건 불가능하죠. 아이신고르, 그 자들은 죽기 직전 독한 저주를 뿜을 줄 알거든요. 저나 드미트리나, 조디악의 어떤 일원이라도 그 저주에 노출되어선 안 됩니다."
호로록, 술을 한 잔 따라 마시며 말하는 소니아.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바우얀의 계획을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거기에 조디악이 노출된다면, 카나기의 주적으로 찍힐 가능성이 있었겠지. 제국 내에선 최대한 존재감을 희미하게 지우고자 하는 조디악 입장에서 그런 부담은 짊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녀석을 사냥해주셔야겠죠."
"애초에 왜 나 따위가 그걸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백번 양보해서 그 놈이 용을 불러내는 걸 포기한다면 모를까,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그냥 피래미..."
"당신의 호위."
그 말을 끊은 것은 드미트리였다. 그는 반창고가 떨어질 정도로 세차게 입을 벌려 웃으며 말했다.
"그 흰 머리의 호위 말입니다. 두냐의 암살자를 쳐부수고, 아지프의 군대를 단신으로 막아서고... 그 자라면, 어쩌면 새끼용 정도는 처리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놈은 그냥 어린애다."
"그자는 당신과 꽤나 친밀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던데요?"
"헛소문이다. 그놈은 나를 쓰레기로 본다."
그 말을 듣고서야 마레는 이들이 용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알았다. 이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아이였다. 아이라면 용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청탁인으로 마레를 점찍은 것이었다.
마레는 아이를 끌어들이기 싫어 재빨리 그들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너무 빨랐다. 그 낌새를 눈치챈 드미트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휘젓는다.
"그렇게 부정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이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자는 싫어하는 사람과 두 달이나 동행을 견디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동시에 두 달이나 함께한 사람의 부탁을, 그것도 선한 목적처럼 보이는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그 녀석을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터에, 대가도 약속하지 않고 끌어들이라는 거냐? 인연을 창녀처럼 팔아서? 닥쳐라. 내기에 걸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것뿐이다. 빚을 져서 남의 것을 거는 우행은 저지르지 않겠어. 그런 건 내기에 걸 수 있는 품목이 아니다."
단호한 거절. 하지만 드미트리는 마레의 손을 잡고 은근히 권유한다.
"흠, 글쎄요. 어쩌면 굳이 저희가 당신을 끌어들일 것도 없이, 그냥 용이 태어나 이 땅을 폐허로 만들 거라는 정보만 전달해도 알아서 나설지도 모르죠. 설마 그럴까, 싶어 당신과 이렇게 먼저 접선하고 있지만, 당신이 거절하면 저희 쪽에서 단독으로 그 호위와 만나보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너..."
정말로 아이라는 인간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통찰이었다. 머리를 마구 흐뜨러뜨리던 마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어차피 이기면 된다. 용과 바우얀에 대한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좋다. 받아들이겠다."
박수를 치는 드미트리.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버넌트가 바둑판을 날라 다가온다. 그 바둑판을 접시를 막 치운 책상 위에 쿵 내려놓는다. 드미트리는 그 바둑판의 겉면을 매만지며, 내기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양측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기에 걸린 조건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는 상호 동의하에 내기 도중 변경될 수 있습니다. 마레 델피에로 님이 승리하게 될 경우, 소니아 아바키렌의 이름 아래 조디악은 북서 자치령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물립니다. 소니아 님, 맞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니아. 드미트리는 고개를 홱 돌려 마레를 바라본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조건을 확인한다.
"소니아 아바키렌 님이 승리하게 될 경우, 당신은 증거물이라고 칭하는 그 책을 조디악에게 넘겨주고,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바우얀 아이신고르 그리고 그가 만들려 획책하는 용과 맞서야 합니다. 마레 님, 맞습니까?"
입에서 흰 담배 연기를 흘리며, 조용히 고개를 젓는 마레.
"거기다 추가한다. 내가 승리할 경우, 너희는 가진 모든 세력을 동원해서 바우얀과 용을 막는다."
만일 마레가 승리하게 되어, 조디악이 북서 자치령에서 손을 떼게 될 때를 예비한 조항이었다. 느닷없이 추가된 조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드미트리. 홱 고개를 돌려 소니아를 바라본다. 그러나 소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협상술 한 번 치졸하시군요. 알겠습니다. 그 조건도 포함하겠습니다."
이것으로 파계 율사가 주관하는 유희, 내기는 성립되었다. 소니아는 백돌을 한 움큼 집어든다. 마레는 고민하다가, 두 개의 흑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집어 든 백돌이 짝수면 내가 흑돌, 선수로 시작하겠다. 그런 과정이다.
소니아는 자신만 보이도록 손바닥을 펴 백돌의 수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숙인다.
"선수는 그쪽이군요. 하세요."
좋아. 행운은 이 쪽이다. 마레는 심호흡을 하며, 기보에서 보았던 첫 수로 내기를 시작했다. 얼굴은 여유로움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은, 소니아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깨졌다.
"천원? 무슨 짓이야, 돌았나?"
천원(天元), 바둑판의 한중간.
바둑판의 모든 공간 중, 초반에는 가장 가치가 낮다고 평가되는 곳이다. 하물며 가장 중요한 첫수를 그것으로 시작하다니,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다. 소니아의 백돌이 바둑판의 중간에 놓이자 마레는 당황해 소리쳤다. 그러나 소니아는 빙긋 웃으며 천원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아니오. 나는 매우 제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의 승리는 확정되었습니다."
"뭐?"
"이 저택에 자신의 의지로 발을 디뎠다고 생각하셨겠지요. 나름 비장한 뜻을 가지고 말이죠. 그 순간, 이미 당신의 패배와 제 승리는 결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드미트리가 소리내어 웃는다. 소니아는 와인을 홀짝 마시더니 말을 쏟아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증거물이라고 들고 온 책 말입니다. 그 책, 담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에 비해 암호 변환이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페이지의 낱말 이어붙이기라니. 마치 기초적인 암호해독을 배운 사람이, 해석해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슨..."
"당신에게 너무 손쉽게 정보가 잇달아 꽂히지 않았나요. 우리가 이 땅을 영구히 우리의 영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건 극비입니다. 이 저택의 위치조차 극비죠. 그런데, 그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쉽게 당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나, 그런 의심은 해보지 않았습니까?"
마레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무슨 헛소린가 했더니 허장성세군. 뭐, 네놈들이, 내가 이 저택에 발을 딛고 내기를 신청하도록 유도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헛소리. 내가 그냥 이 책을 들고 교구로 돌아가면, 너희는 아무런 얻는 것 없이 피해를..."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희생정신으로 여기에 걸어올 것도, 그 조그마한 책자를 믿고 바둑으로 내기를 걸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나는 그걸 당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연이어 쏟아지는 소니아의 말에 손에 쥔 담배를 떨어뜨리는 마레. 소니아는 양 볼 가득 홍조를 띄며, 마레에게 상반신을 굽히고 말한다.
"왜냐면, 나는 당신의 권위자이며, 당신을 전공한 자. 당신의 유일한 이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네가 자유롭게 여기 도착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것은 모두 나의 안배였다. 여기서 이렇게 용 사냥과 자치령의 해방을 걸고 내기를 하는 것. 이 상황은 내가 유도해낸 것이다. 그런 선언이었다. 소니아가 손을 튕긴다. 그러자 드미트리는 품에서 어떤 책자를 꺼낸다. 그 책자의 겉표지를 본 마레는,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건..."
"「자연 상태에 대한 탐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그 책이었다. 마레가 대학에서 쫓겨나, 이렇게 심문관으로 떠돌게 만들었던 책. 아우렐리우스의 자비가 없었더라면, 마레가 십자가에 묶여 타 죽게 만들 뻔했던 책.
그 책이 왜 여기에 있나.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니아는 또다시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나는 이 책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깊이 탐독했어요. 당신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으로 말입니다. 나는 어쩌면 당신의 유일한 팬이라고 해도 좋겠죠."
"닥쳐! 이건 무슨 수작이냐?"
소니아의 손을 치우고, 다음 흑돌을 내려놓는 마레. 하지만 소니아는 이제 바둑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법열에 취한 듯한 들뜬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암송이었다. 마레는 입을 벌린다. 자신이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았던 것, 저 책의 초록에 적었던 내용 모두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소니아의 입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자연 상태에선 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물은 하루, 많더라도 사흘의 노동이면 생산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선악의 구분, 정의의 집행은 필요하지 않다.
만민이 무소유로 평등하다면, 다른 이에 대한 침해를 자신의 이득으로 환원할 방법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존재함을 가정해보라. 강한 자는 때로 악한 감정, 가학욕이나 질투 또는 분노와 같은 감정을 약한 자에게 풀 수도 있을 것이다. 약자를 매질하고 짓밟고 구타해 피해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약자가 피해를 입었기에 강자가 얻는 이익은 오직 휘발적인 감정의 만족에 그치며, 감정이 휘발되고 나면 강자 역시 손해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강자라면 점차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성숙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상태에서 약자는 강자로부터의 공격을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고로 자연 상태에서 그들은, 합일된다.
그러나 돈이 발명되면 이는 달라진다.
재산권, 즉 돈이 존재한다면, 강자는 드디어 다른 이에 대한 침해를 자신의 이익으로 환원할 방법을 얻게 된다.
이 방법의 이름은 착취다.
약자를 폭력으로 위협해 자신 소유의 토지, 자신 소유의 자본에 종속시켜 노동케 할 수 있다면, 약자에 대한 침해는 그 크기만큼의 이익으로 강자에게 귀속된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던 합일은 소멸한다. 그들은 나뉜다. 계급으로.
고로 자연 상태를 벗어나 재산권과 그 재산권을 보호하는 국가가 성립된 후라면,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약자는 법을 갈구한다. 정의를 갈구한다. 재산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약자는 항구적으로 강자에게 그 생을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 갈구는 곧 성문화된 선악이라는 쌍둥이의 회임을 알리는 입덧과도 같다. 착취하고자 하는 악의, 그 악의는 그 악의를 통제할 정의와 같은 배에서 같은 연원으로 잉태된다."
거기까지 들은 마레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장을 끝마치며 자신이 적었던 말을.
"즉, 돈은 악의에게 깃들 곳을 제공하는 육체이다..."
소니아는 소리높여 웃는다. 돈은 생의 양도된 본질이다. 그녀의 가슴에서 빛나는 펜던트, 그 펜던트에 적힌 조디악의 경구가 비웃듯 반짝인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책의 전문을 암송함으로써 보여주려고 하는 듯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개인적인 숭배심과 애정 역시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종교는 태어나려는 정의이다. 우리 교단에게 요구된 것은 즉 재산권이 만들어내는 악의 통제였다. 자연 상태의 습속과 보다 가까이 있었던 원시의 성자들이, 화폐를 극도로 증오하고 때로 폐지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돈의 속성과 무관치 않다. 우리 종파의 총의 역시 그 원시적인 증오를 현대적 언어로 짜 올린 것에 지나지 않게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눈썹을 씰룩거린다. 마레를 바라보며. 마치 노래를 같이 불러달라고 청하는 소녀 같은 동작이었다. 마레는 느닷없이 최악의 형태로 만난 자신의 독자를 보고, 망설이다 조용히 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라면 그건 증오보다는 위대한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소니아가 재빨리 그 뒤의 말을 잇는다.
"필자도 전제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동의한다. 완전히 자유롭게 방임된 화폐는 악의를 증식시키는 맹수가 된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그 결론에 대해서는 현행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악의를 정교하게 통제당하는 화폐는, 때로 그 어떤 자연물도 해낼 수 없는 아름다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뒤에 뒤따른 내용은, 마레가 아이에게 회한을 털어놓듯 설명했던 그 부분들이었다. 악하게만 보였던 것들, 돈이 만들어낸 비극이 결과적으로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보이지 않게 세계를 진보하게끔 했던 사례들. 그 사례가, 소니아의 입에서 계속해서 쏟아진다.
마레는 괴로운 심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소니아는 마침내 최종장의 맺음말을 읊기 시작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그것을 존재하도록 이끈 주의 뜻이 임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맞받아달라는 듯, 또 마레를 보고 싱긋 웃는다. 둘은 서로 마지막 맺음말을 한 문장씩 맞받았다.
"돈에 깃든 뜻은 죄의 대속이다."
"독생자가 질곡 속에서 오히려 빛나듯 그것 또한 그렇다."
"세계의 모든 악의를 그 황금빛 몸에 받아내어, 악의가 빠져나간 인간의 몸에는 오직 자유의지만을 남기도록. 세계의 빚을 대속하도록.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생을 영위해도, 은하의 행성들이 그러하듯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것."
"그것이 화폐의 존재의의이다. 그 뜻을 이뤄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 그런 정교한 제거의 예술이야말로 국가가 나아가야 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말을 마친 것은 소니아였다. 그녀는 마치 어떤 웅장한 연극을 관람하기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상체를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 정중한 경의는, 그것을 표한 자의 속성 때문에 조롱이자 모욕으로만 느껴졌다. 마레는 적의로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당신의 이론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북서 자치령에 저희가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이 아무것도 없는 땅에 주둔하며 고용을, 선순환을, 투자를 이뤄낼 텐데요.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지칭한 아름다운 기적 아니겠습니까."
소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제서야 마레는 이 여자가 이미 내기에서 이겼다는 소리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기권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가치한 수인 천원을 택한 것이고. 마레는 어이가 없어 돌을 짤그락거리며 화를 풀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너희처럼 어떤 제도도 인권도 준수하지 않는 놈들이 행하는 투자 따위 무가치해. 나는 너희 같은 족속들에게 무기를 들려주려고 그런 책을 쓴 게 아니었어."
"흐으음, 그렇습니까?"
"만일 너희 같은 족속들이, 내 책이나 내 이론을 근거로 스스로의 악행을 정당화하며 이렇게 몸을 불려왔다면, 너는 나의 그릇된 피조물이자 과오라고 해도 좋겠지. 너는 내 손으로 치워야 할 오물이다. 돌을 집어라."
그러나 그 반응까지도 예측했다는 듯, 소니아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빼며 말한다.
"3할."
"뭐?"
"드미트리, 내기의 조건에 이걸 추가하세요. 소니아 아바키렌이 승리할 경우, 향후 조디악은 이 땅에서 벌어들인 이익의 3할을 북서 자치령에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환원한다."
"예, 추가되었습니다."
드미트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한다. 이제 소니아는, 승리하고 저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심장이 터져 죽게 된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선언했다.
"사실 2할 4푼만 되어도 당신이 여기서 기권할 거라고 계산했습니다만, 개인적인 열정과 경의를 담아서 3할로 올려드렸습니다. 어때요? 이래도 저희가 북서 자치령에 있는게 독이 됩니까?"
멍청히 그 선언을 듣던 마레. 고개를 숙인다. 눈앞에는, 하얀 바둑돌과 두 개의 검은 바둑돌이 보인다. 바둑판이라는 세계, 그 위에는 그것만이 존재한다. 둘, 그리고 하나. 정연한 가로줄과 세로줄 위에, 흑과 백. 하나와 둘이라는 숫자로 갈무리되어 나열된 병정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마레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돌을 집어던진다.
기권의 선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