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68화 (68/279)

2권 후일담 #2. 성상

아탕칼리의 도시, 아스마디.

그 중심에는 섬이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물로 둘러쳐진, 동그란 섬. 출입을 어렵게 하려 네 개의 도개교로 가로막힌 그 땅은, 하나의 대성당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이의 보혈을 본따고자, 연홍색의 벽돌로 지어진 대성당. 그 대성당은 아탕칼리의 중지(重地)였다.

성당의 사면을 감싸듯 들어찬 값진 색유리. 정오가 되면 그것이 빛을 여과해 온 성당을 밝은 오색으로 찬란하게 채색한다. 천장에 빼곡한 것은 성경을 그린 아름다운 천장벽화. 높이 40미터의 천장, 그것 가득 그림을 그리려다 세 명이 떨어져 죽었다. 그런 프레스코화였다.

그 성당에 발을 들이미는 자를, 미적 경외심으로 압도해 신앙심으로 충만하도록 만들겠다는 의지, 그런 의지마저 느껴질 정도로 장엄한 풍경. 그 풍경에서 이질적인 것이 하나 있다.

성당의 중앙에 놓인 성상이었다. 아탕칼리의 잠자는 주를 표현한 성상. 두 팔 벌린 채 얼굴을 숙여 잠자는 그것의 가슴에는, 결코 미술품이 아닌 물건이 박혀 있었다. 검이었다.

누군가가 감히 이 대성당에 침입해, 그 가슴에 검을 꽂아넣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을 꽂아넣은 자는,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젊은 사내였다.

"주여, 당신은 죽었습니다."

먼 옛날, 비가 오던 날. 심야. 붉은 옷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는 손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성당에 발을 들이밀었다.

"모든 산맥에서 눈사태를 일으키며 울려 퍼지는 비명. 이 절망과 악덕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조차 당신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치 않다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듣는 이라고는 성당의 중심에 놓인 성상밖에 없는데도.

"당신께 우리는 밤잠을 설치게 할 수조차 없는 풀벌레와 미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까? 당신의 꿈을 떠다니는 나비와 비눗방울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흰색. 창밖이 흰색으로 물든다. 번개였다. 굉음을 일으키며 터진 번개의 빛이, 색유리를 거쳐 남자의 뺨을 기괴한 색조로 염색한다.

"당신이 잠자는 동안 자리 잡은 이성이라는 이름의 미혹! 그것이 모두를 홀렸습니다. 모두들 진보를 믿으나 그 진보는 어린아이로부터 성숙한 인간으로의 진보가 아니라, 돌칼로부터 철검에 이르는 진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번개에 맞추어, 그는 뇌성 같은 목소리로 절규한다. 한 발자국, 점점 더 성상에 다가간다. 그 뒤로 남는 긴 물자국.

"지평의 끝부터 끝까지! 계몽이 섬뜩하게 번뜩이는 오늘, 전쟁터가 된 이 땅 위에선 오직 까마귀만이 승리를 구가합니다!"

어느새 성상의 앞까지 다다른 그. 빗물에 젖어 길게 늘어진 금색 앞머리 뒤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녹색의 눈이 광기로 빛난다.

"우리는 이제 눈을 뜨고도 꿈에서 깨려 자해해야 합니까?"

그 귀에선 녹옥이 박힌 십자가가 어둡게 짤랑이고 있었다. 그는 성상의 얼굴을 붙잡고 악을 쓰듯 소리 지른다.

"아직도 들리지 않습니까? 당신의 깃발이 군기로 매달려 허무에 나부끼다 스러지는 소리가? 사토장이들이 그 깃발을, 쓰레기가 되어버린 당신을 파묻으며 흐느끼는 것이?"

물론 대답은 없었다. 성상은 조각된 그대로, 팔을 벌려 기다릴 뿐이었다. 금발의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던진 검을 뽑아들어, 비스듬히 쳐든다. 성상의 심장을 노리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콰직, 성상을 뚫고 검이 쳐박힌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오늘까지 그 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검은 제거되는 일 없이 이 성당과 불편하게 하나 되어, 곱게 삭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오늘. 색유리의 푸르고 노란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고 바닥에 신비스레 감도는 정오.

금발,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또 성당에 들어섰다. 끼이익, 불편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그 자는 마레였다.

"아니?"

문을 열자마자, 놀라서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이 성당은 그 폐쇄성 때문에, 비밀스런 재판을 진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마레는 재판을 받으러 이 곳에 왔다. 고로 죽음을 각오하고 이 성당에 들어섰는데, 이 성당 안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만 남아 있었다

"다 어디 가고 왜 아우렐리우스께서만 여기 계십니까?"

성인을 보는 예를 가볍게 표하고 말하는 마레.

성당의 안에는, 백오십이 넘는 나이에도 아직 오십 대처럼 보이는 성인. 그리고 6위계의 마술사이자, 아탕칼리의 6위계중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자. 베노스 아우렐리우스. 성 아우렐리우스만이 서 있었다. 성상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모두를 물렸다."

"어째서입니까?"

"나 혼자 네 말을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성상 옆의 의자에 포개어지듯 앉는다. 그리고 자그마한 책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는다. 그는 곧 요구했다. 마레가 저지른 일의 해명을.

북서 자치령에서의 일을 마치고 랭 교구에 복귀한 마레. 그를 기다리는 것은 대질 심문관들과 종교재판관들의 횃불이었다. 그는 웃으며, 양 겨드랑이를 붙들린 채 교회의 지하로 끌려갔다. 그 지하에서 마레는 어떻게든 논리를 짜내어 마레와 아이 모두를 살릴 방안을 궁리했다. 몇 번의 경위서를 제출하면서, 사건을 정교하게 다듬어 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재판일이었다.

그런데 재판 대신, 단 한 명이 기다린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재판관보다 무서울지도 모르지.'

성 아우렐리우스, 그의 지혜는 때로 예지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고 정교했다. 세속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되면서도 우아함을 잃는 일이 없었다.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우렐리우스의 눈. 허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부엉이의 것을 닮은 녹색의 눈이다.

'어쩔까? 변호하기 위해 짜온 논리를 늘어놓을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할까. 고민하던 마레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두 시간여 동안. 북서 자치령에서 있었던 일을, 아이와의 만남을, 카나기와 아지프와 조디악의 일을 늘어놓는 마레. 소니아 아바키렌과의 대담도, 자신이 보았던 것과 유추했던 것도, 전부 쉬지 않고 늘어놓는다. 아우렐리우스는 성상 옆에 앉아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그도 하나의 성상인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제가 보고 겪고 행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드디어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마레. 아우렐리우스는 그것을 듣고, 잠시 눈을 감더니, 조용히 말한다.

"자라난 것은 그 아이뿐만이 아니다. 너도 이제야 성숙한 모양이구나."

"예?"

"혹여나 나를 원망하고 증오와 원한을 풀러 광야를 헤매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잘 딛고 이겨냈군. 찬사하마."

중지에 머무르던 마레를, 억지로 심문관으로 쫓아낸 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은 큰 모욕이 될 수 있었다. 마레는 아우렐리우스가 그 사실을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자는 그걸 깊이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놀라서 입을 벌리는 마레.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이 아우렐리우스의 입에서 나온다.

"혹시 이 검이 언제부터 여기에 꽂혀 있는지 알고 있느냐."

날카로운 눈으로 검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꾸짖듯 말하는 아우렐리우스. 마레는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한다.

"분명히, 백여년 전...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정확히 백 년 하고도 스무 해 전의 일이지. 내가 꽂았다."

"예?"

눈을 크게 뜨는 마레. 하나하나가 국보로 지정된 대성당의 기물. 그 기물을 파손했다는 것은, 크나큰 죄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저지른 자가 아우렐리우스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무심한 눈길로.

"야만인의 땅에 깃든 악을 정화하기 위해 떠나는 주의 군대를 십자군이라 하지. 백이십 년 전에 그 마지막 십자군이 있었다. 그건 알고 있겠지?"

"예, 역사로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선봉에 내가 있었다."

마레에게 들은 이야기의 값을 이야기로 갚으려는 걸까?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백 이십 년 전, 십자군에서 겪은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주의 이름 아래 적힌 어떤 글도, 어떤 계율에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오직 확신으로 가득했다. 매일매일 그 윤리를 준수하며 기쁨을 느꼈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또 글줄을 쓰기보다는, 몸을 바쳐 실천하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학문의 길이 아니라 기사의 길을 택했다."

눈을 크게 뜨는 마레. 아우렐리우스는 저명한 책을 여럿 남긴 학자였다. 그런 그가 수도사가 아니라, 기사단의 일원으로 신앙을 시작했다니? 처음 듣는 비사였다. 아마 이를 아는 사람은, 지금은 열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야만인과 외신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했다. 그것들은 이 땅에 새어 나온 악이라고, 어떠한 의심도 없이 정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태도를 가진 내가 전장의 선봉에 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 기꺼이 선봉의 붉은 서코트를 두르고 말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무엇을..."

"허위를. 이 세계의 진실을."

눈을 감는 아우렐리우스.

"십자군이라는 이름 아래 당도한 야만인의 땅.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저 벽화에 그려진 악마나 용이 아니었다. 그저 척박한 땅을 어떻게든 갈아 먹고 사는 추방당하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유목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 그게 다였다."

"그, 무슨..."

"그 혈통에 신기를 가지고 있는 자. 그 자들은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지. 태우고 토막냈다. 우리가 그들을 제국의 바깥으로 내몰았다. 내몰린 그들은, 외신이라는 위험한 존재의 곁이 차라리 우리의 곁보다는 안전했기 때문에, 추운 사막을 견디며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거야. 그게 다였다. 우리가 그들에게 야만을 강요했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끊이질 않았다.

"우리의 군세가 다가오자마자,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공물을 준비해 납짝 엎드렸다. 현지에서 몇 대째 십자군에 종군한다던 이들 역시, 익숙하다는 듯 그것을 받고 약탈과 강간, 폭력을 자행했다. 성스러운 전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짧은 침묵. 다시 입이 열린다.

"성스럽다는 이름 아래 구축 당할 오롯한 악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게야. 살아가는 한 모든 문명인은 언젠가 악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나는 열셋 때 수음을 하고 하녀에게 그것을 들키자 돈을 주어 매수한 일이 있다. 그 후 한 달 동안, 번개가 칠 때마다 그게 나에게 꽂히지는 않을까 두려워 떤 일이 있다.

나도 그럴진대 누구나 그렇겠지. 문명은 악행을 강요한다. 풍요하기 위해서 다른 이의 것을 빼앗기를 강요하며 원시적 충동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하나의 조각상처럼 다스리길 강요하는 것이다. 인간인 이상 언제나 그것을 지킬 순 없다. 누구든지 살면서 한 번은 윤리를 어길 게다. 그 죄악감은 공포로 싹트지.

공포... 언젠가 우리의 문 앞에 들이닥친 야만인이, 우리가 저지른 죄를 징벌하고 말 것이다, 그런 공포 말이야. 내가 번개를 두려워했듯이, 야만인이 우리의 도시를 불태우는 악몽에 떨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는 마레. 그 말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유사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 계기는 달랐으나.

"십자군. 그건 그저 그 공포에 떠는 이들을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선함을 주로부터 증명받은 영웅이, 그 공포의 화신 같은 이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불태우고 짓밟아 완전히 멸절했으니, 편히 잠자라. 그런 기만에 불과했던 게야. 실제로 하고있는 건 비열한 학살과 약탈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우선 놀라 그 약탈을 말렸다. 그랬더니 부관이 주장하더군. 이 자들을 믿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굴복한 척하지만 그 속은 우리에 대한 원한과 살의로 가득하다고 말이다. 이들은 외신과 살을 섞어 처녀를 바치고 그 힘을 얻었으며, 원할 때 그들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아니며, 고로 이들을 다치게 해도 죄될 것은 없다고."

눈을 감는 성인. 다시 눈을 뜬 그의 눈동자엔 회한이 가득했다.

"지금의 나라면 그 말을 물리쳤을 테지만, 그 때의 나에겐 그런 지혜가 없었다. 당혹하며 내 군막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뿐이었지. 그리고, 외신이 실제로 다가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살점의 괴물이, 나를 제외한 모든 선봉대를 먹어치웠다. 나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야만인들이라고 무사하지 못했지. 모두가 죽은 듯 보였다. 단 한 명의 아이를 제외하고."

검을 매만지는 아우렐리우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 그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이들은 정말로 외신을 불러들이는 주문을 알고 있었구나. 우리의 군대가 도착하자 외신을 불러들인 것이구나. 그 증명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사내아이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검의 손잡이를 붙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말뚝을 꽂았다. 너희 종족이 저 삿된 것을 불러들여 우리를 죽였느냐고. 그 아이는 울면서 자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우리 중 그런 것을 아는 자는 한 명도 없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말뚝을 꽂았을 때에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다섯 번째에서야, 그 대답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 아이는 같은 대답을 남기고, 피를 너무 흘려 죽었으니 말이다."

곧 죽을 자가 거짓을 말해 무엇하겠나. 즉 그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 아이가 진실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미혹과 의심과 증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작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내가 비열한 살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실은 한 사람의 신실한 성기사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죄책감, 그리고 절망이 그 몸을 지배했다. 그 길로 그는 랭 반도로 돌아왔다. 운하를 헤치고 아스마디의 심장, 이 대성당으로 걸어들어와, 신의 성상에 검을 꽂았다. 그게 백이십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칼을 뽑아 다시 내 심장에 꽂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검은 뽑히질 않더군."

너를 이대로 죽게 허락하지 않겠다, 그런 선언이라도 하는 듯이, 이 검은 신기를 아무리 불어넣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이 성상의 가슴에서 검을 빼내려 노력했으나, 성공한 자는 없었다. 그래서 이 검은 또 다른 기적의 상징으로서, 이렇게 성상의 가슴에 꽂혀 보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에 떨며 잠든 내 꿈에 대천사께서 찾아오셨다. 네가 진정으로 네 마음에 한 점의 거리낌도 없는 날, 너는 저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 이 검을 뽑을 수 있는 자는, 그렇게 부정한 자신조차 거리낌 없이 긍정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결코 악인은 아닌. 그런 자인 게다.

아우렐리우스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어 마레를 바라본다. 손잡이를 매만지던 손을 놓는다. 마치,

"네가 뽑아 보거라."

그런 말을 하려는 듯이.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마술적인 힘이 있었다.

마레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힘을 주어, 뽑는다.

스르릉.

그 검은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아우렐리우스는 깊은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이 결코 뽑지 못했던 검, 그 검을 손에 쥔 얼굴을. 어딘가 젊은 날의 자신을 닮은, 그러나 그것보다는 조금 성숙한 얼굴을.

그 재판의 날에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기대했다. 교조화된 윤리. 그 윤리에 몸뚱이와 선의 하나만을 가지고 부딪는 모습을 보며, 젊은 날의 자신을 보았다.

그래서 그를 심문관의 길로 내몰았다. 이미 책과 글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워, 자신이 이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대하면서.

이 성상에 말뚝처럼 꽂힌 죄를 뽑아 주기를. 염원했기에.

아우렐리우스는 선언했다.

"이것으로 재판의 결과는 정해진 것 같구나. 주의 이름에 걸고,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후견인. 성인의 직위를 얻었기에 학장에 올라설 수 없었지만, 오히려 학장보다도 높은 권위를 가진 아우렐리우스. 그가 마레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결혼할 수 없는 성자, 그를 후견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거의 그의 양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마레는 그 선언에 놀라, 검을 쥔 채로 아우렐리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차게 색유리에 부딪는 투명한 햇빛, 그 햇빛이 아우렐리우스의 얼굴을 미술품처럼 비춘다.

"너뿐만이 아니다. 너와 함께 했다던, 그 카나기의 공적이 되었다는 소년. 그 소년 역시 보호하겠다."

"진심이십니까? 그는 아나테마입니다. 아니, 이런 말을 제가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러기를 바랬지만..."

"진심이다. 내가 그 죄로 말미암아 배운 것, 그것은 하나의 진리였다. 계몽 또한 계몽되어야 한다는 진리 말이다."

천천히 걸어가 마레의 어깨를 붙잡는 아우렐리우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의 사상을 털어놓았다.

"윤리란 해묵은 계몽이다. 인간을 주인으로 발돋움하게 도와야 할 그것은, 고이고 쌓여 권위와 하나되며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 진정으로 윤리에 봉사하고자 하는 자는, 윤리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윤리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조화된 윤리. 누군가 정해놓은 선과 악. 옳고 그름. 그런 모든 것을 항상 의심하면서, 가장 실용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그런 간단하지만 올바른 깨달음을 압축한 말이었다.

즉, 아나테마를 죽여야만 한다는 법칙. 그것 또한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네 말처럼 그 소년이 그토록 성자와 같은 거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오히려 그를 우리의 검으로 포섭하고 싶구나. 그는 어쩌면 성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리는 성좌를 둘 가지고 있지. 만약 셋이나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아탕칼리는 그 어느 때보다 융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나기가, 이미 공적이..."

"여기에는 지금 그 구스루 아이신고르가 와 있다."

지금 이 곳에는, 길 아잘록을 종교재판에 회부하기 위한 협조. 그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구스루 아이신고르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 추문의 당사자가.

"제 3자에게 전달한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당사자에게라면 그럴 일도 없겠지. 지금 그에게 말해 너와 그를 해하지 말라고 못박을 생각이다.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카나기 전체를 적으로 돌릴 부담은 없습니까?"

"없다. 지금 그들은 우리에게 빌어야 하는 처지야."

미소를 짓는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그는 책을 한 권 보여주었다. 저자의 이름에 렘 로피아델, 그런 이름이 적힌 동화책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번에는 책 대신 동화를 한 편 썼더구나.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내가 재판 대신 너와 독대하기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동화는, 아이와 북서 자치령의 이야기가 적힌 동화였다. 현실을 그대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윤색되어 있었지만, 마레가 아이를 보며 깨달은 것이 우화의 형태로 갈무리된. 좋은 동화였다.

"네 책은 아름다우나 이성의 도구였다. 동화는 인간의 도구지. 책을 쓰기에 앞서 동화부터 쓰려 했다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 말대로라면, 이 동화의 주인공은 네가 보았던 그 소년이겠지?"

"예, 맞습니다."

"그럼 그 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이 선언을 끝으로, 마레가 고민하던 모든 것. 북서 자치령에서 안고 돌아왔던 모든 근심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한한 기쁨과 감사함에 사로잡혀서, 마레는 정중하게 아우렐리우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까의 것이 성인에게 올리는 예였다면, 이번에 올리는 예법은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이었다. 인자하게 웃는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뒤돌아선다.

"가거라. 써야 하는 글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던 건가, 마레는 다시 한 번 탄복하며, 성당의 밖으로 빠져나갔다. 밝은 발걸음으로.

성당에는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성상만이 남았다. 아니,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이야기는 전부 들었는가?"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리는 아우렐리우스. 그러자, 천장 벽화에서 한 명의 사람이 떨어졌다.

"좀 지나치게 연극적이지 않습니까? 뭐, 당신이 워낙 좋은 배우니 보기 그럴듯했습니다만."

황금의 사자가 그려진 백의. 성기사의 옷. 그것을 입은 여기사였다. 그 가슴에는 사수자리의 별자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성도 8궁, 인마궁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키고 싶으셔서 이렇게 쥐새끼의 일을 저에게 시키셨나이까? 위대하신 성인 전하."

"닥치게."

"그런 말을 쓰셔도 됩니까? 성인이?"

웃는 그녀. 그녀의 왼팔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외팔이였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텅 빈 소매를 바라보며,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아나테마를 척살해야 할 아탕칼리, 그것이 오히려 아나테마를 받아들인다는 일은 쉬이 결정할 일은 아닐세. 그 자가 정말로 순선한 자인가, 그 사실은 교차검증이 필요하겠지."

"아, 그 검증할 사람으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말귀가 빨라서 좋군."

아우렐리우스는 그녀에게 명령장을 던져주었다.

"지금 당장 그 소년을 추적하게. 그리고 그 소년이 정말로 그 동화에 나오는 자 같은 품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계인을 선사하게.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아탕칼리의 교회는 그녀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특급 명령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척살하게나."

그 명령을 할 때만은, 지엄하게 굳은 성인의 표정 그대로였다. 여기사도 그 말에 얼굴을 굳히고,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을 받든다.

성상은 빛을 받으며 무표정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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