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후일담 #3. 산양 사냥
살얼음과 매화 향이 희게 사부작대는 산길.
세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여자아이가 그 산길을 걷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 명의 어른만이 걷고 있다. 여자아이는 그 중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너무 추워요."
"추울 줄 몰랐나. 그러길래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사람 속도 모르고! 바보 멍청이!"
화난 듯 등을 두드리는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는, 구스루 아이신고르의 딸이자 이신 아이신고르의 손녀. 유얀 아이신고르였다.
그녀가 업혀 있는 자, 싸늘한 인상의 미남. 그는 레고르 보르지아. 연금되어 있던 방에 유얀이 길을 잃고 헤매다 들어온 이후로, 어째서인지 의남매 비슷하게 되어버린 레고르였다.
"허허, 그렇게 오라비에게 어리광부리면 못 쓴다."
그 앞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것은 카나기의 학장 부자, 이신과 구스루다. 이신은 뽀드득 눈을 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유얀은 그 말을 듣고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더니, 품에 들고 있던 눈덩이를 꺼내 이신의 등에 던졌다.
'헛, 저게 맞을 리가 없지.'
레고르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신 아이신고르, 이 오래된 6위계의 대마술사의 몸에선 마력이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레고르처럼 기감이 예민한 사람의 눈에는, 거의 그 푸른 기운이 형체를 이루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 자가 호흡처럼 두르고 있는 마술 방벽에 생채기를 입히기 위해서만도, 거의 하나의 군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과 다르게 눈덩이는 이신의 뒤통수를 차갑게 때렸다. 퍼서석, 부서지는 눈덩이 소리. 이신은 옷에 눈이 들어가 차가웠는지 펄쩍 뛰었다.
"예끼! 이 놈!"
"꺄악! 오라버니, 지켜주세요!"
바로 몸을 숙이고 배시시 웃는 유얀. 레고르는 그 광경이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을 벌렸다. 앞서 걸어가던 구스루는 그런 둘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한다.
"제발 그만 좀 귀여워하시지요. 버릇 나빠집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 곧 있으면 정상입니다. 유얀. 너도 오빠 등에서 내리거라. 정상 정도는 네 발로 밟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그 말에 쪼르르 레고르의 등에서 내려오는 유얀. 저 멀리 산맥에 가리운 또 다른 산봉우리들이, 그 산봉우리들의 그림자가 거멓게 펼쳐진다. 네 사람은 지금 등산을 하는 중이었다. 하레하둔의 가장 낮은 산 중 하나를 골라서.
유얀 덕에 연금상태에서 벗어난 후, 레고르에게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유얀이 애완동물을 잃어버려 울며 매달릴 때 함께 눈 덮인 산을 헤매며 찾아주기도 했고,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하며, 쿠르누이 보르지아와 잠시 만나 대련을 하기도 했다. 가장 결정적인 일은, 유얀을 노린 암습이 있었을 때 상처입어가며 그녀를 지킨 것이었다.
그런 일을 거치며, 레고르의 신분은 '연금된 인간 증거물'에서 굉장히 진보해 있는 상태였다. 거의 빈객에 가까운 수준으로.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존재의 조력이 있었다.
'어린 순례자야, 언제나 마음을 놓지 말거라. 어린 계집이라도 아이신고르는 아이신고르. 어떤 흉악함을 저 얼굴 뒤에 숨기고 있을지 모른단다'
"뭐냐, 이제 어린아이까지 질투하는 거냐?"
'너무해...'
레고르의 사슴 같은 목을 두 팔로 휘감고 있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에단. 헤카톤 케이레스의 몸에서 빠져나와 레고르의 곁에서 머물던 에단이, 모든 위기의 순간마다 예보를 해주었던 덕분에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레고르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팔자에 안 맞는 어린아이 보모 따위 질색이다. 하지만 이 여자애가 지금 내 생명줄이니 이렇게 붙들고 있는 거 아닌가. 그 정도 사리판단도 못 하나?"
'그건 거짓말이다!'
"나 참, 무슨 의부증 걸린 아내도 아니고. 꺼져라."
'이제 좀 살 만해졌다고 나를 버리려는 것이냐?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다정하게 하루종일 나하고만 이야기하고서? 내 사도가 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느냐. 실망했다. 네 운명의 주인은 실망했어.'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을 하는 에단. 검은 머리를 길게 나부끼며 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꽤나 볼만했지만, 레고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레고르는 후욱 하얀 숨을 내쉬고 말했다.
"누가 네 운명의 주인이냐. 꺼져라, 망령."
에단은 울상을 지으며 멀리 사라져 갔다. 레고르는 에단을 쫓아내고, 마지막 발을 내디딘다. 그러자 절경이 펼쳐진다.
"우와!"
유얀이 하얀 숨을 토해내며 폴짝폴짝 뛴다. 눈이 오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저거 봐요, 저거!"
확실히 절경이었다. 왜 아침부터, 이 두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쳐 레고르를 끌고 산행에 나가자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절경. 눈 덮인 산허리 아래로 매화가 가득 피어 꽃과 향기를 흩날리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바람이 거세져도, 저 매화는 전부 떨어져 버리겠지.
"어떤가? 늙은이 취미에 어울려준 보람 정도는 되는 경치 아닌가?"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는 레고르, 그 곁에 다가오는 이신. 이신은 레고르의 어깨를 툭 치며 껄껄 웃었다. 레고르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닙니다. 당신 같은 분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아첨하지 말게. 아, 혹시 담배가 고프지는 않나?"
눈을 껌뻑이는 레고르. 이신은 사람 좋은 할아버지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산 정상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런 용도를 위해서인지, 팔각정 하나가 맵시 있게 설치되어 있었다.
"저기에는 장죽도 화로도 있다네. 자네도 꽤나 골초인 모양인데, 나도 아들놈도 그래서 말이야. 저기서 좀 쉬는 게 어떻겠나."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이신의 쪽빛 도포 자락을 뒤따랐다. 정자에는 과연 놋쇠 화로와, 잉어 장죽이 구비되어 있었다. 장죽에 연초를 가득 담아, 새빨갛게 불붙이고 내뱉는 이신.
"허허, 피곤한 모양이야. 벌써 잠들어버렸군."
장죽이 화로에 달궈지는 그 시간, 그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유얀은 잠들어버렸다. 레고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거의 절반은 레고르의 등에 업힌 채로 올라오긴 했어도, 어린 나이에 이 산을 오르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레고르는 엷게 웃었다.
"그러니 무리해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무리해서라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겠지."
이신은 장죽에서 입을 떼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내가 자네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야."
"예?"
바짝 긴장해 기세를 일으키는 레고르. 하지만 이신은 그런 말을 꺼내고도 껄껄 웃을 뿐이었다.
"이 산의 정상. 여기는 내가 지금까지 정적들을 처리해 온 장소일세. 이렇게 산책을 함께하자고 불러내서는, 산 끝에서 죽여서 저 벼랑 밑에 던져넣었지. 저 산허리 아래의 매화가 저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어쩌면 인간의 시체로 자양을 충분히 흡수해서인지도 모르지."
"..."
"유얀도 우리의 핏줄이다. 아이신고르, 그 저주받은 철혈의 핏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듯하나, 어렴풋이 깨달았을 게다. 이 산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함께 올라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억지로라도 따라붙은 걸세. 나와 구스루가 자네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그리고 지금은 유얀이 잠들어 있군, 안 그런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을 치뜨는 레고르. 하지만, 그 눈썹은 곧 늘어진다.
"그럼 죽일 마음이 없으시군요."
"오, 왜 그런가?"
"정말로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이미 저는 목이 잘려 나뒹굴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겠죠. 해만 되는 일이니."
그리고 대범한 듯 자신 몫의 장죽을 꺼내 입에 가져다댄다. 맞담배다. 감히 카나기의 학장과 맞담배를 하려 하다니, 상당히 대범한 행동이었다. 이신은 껄껄 웃었다.
"허허, 그럼 내가 무슨 득이 있어 이런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나?"
"제 신뢰를 얻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제가 특례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테고."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구스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니야. 난 그냥 훤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네."
훤화. 떠들썩한 잡담이라는 뜻이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구스루. 레고르는 그와 반대되는, 가라앉은 눈으로 여전히 이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옛날에는 그런 걸 좋아했지. 모든 말 하나하나의 배후에 목적이, 의도가, 무언가 거미줄의 타래 같은 끈끈하고 정교한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되짚어 추찰하는 놀이를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달라. 지금은 그저 무의미한 새의 지저귐 같은 말이 좋다네. 그냥 잡담이 하고 싶은 게지."
희게 연기를 내뿜고 먼 산을 바라보는 이신. 구스루조차 그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입을 벌렸다.
"정말로 그냥 동네 할아버지가 되어버리신..."
"예끼, 이 놈."
"아! 머리에 불붙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장죽으로 구스루의 이마를 후려친다. 그리고 산봉우리로 둘러쳐진 지평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바닥에서 이 산의 정상까지 올라오는 데에 세 시간 남짓이 걸렸지. 그리고 지금 올라가는 것을 멈추었어. 느낌이 어떠한가?"
"휴식으로... 편안한 것 같습니다."
"그래, 세 시간. 그 정도 올라간 뒤에 정상에서 정지하는 것. 그렇게 찾아오는 정지란 달콤하기 그지없지. 그럼 좀 더 오래 등산을 한다 치면 어떤가."
후우욱, 연기를 내뿜고 말을 잇는 이신.
"오 년, 십 년, 아니 팔십칠 년을 계속 무언가를 향해 걸어 올라간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는 것일세. 그자에게는 이미 올라가는 것이 하나의 삶이고, 삶의 대부분을 그런 운동 방식으로만 경험해 버렸지. 눈을 뜨면 그는 항상 무언가를 짓밟고 올라가고 있는 상태였던 게야. 그래서 정지가 낯설어. 또 두렵다네. 가만히 멈추어서면, 올라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자신이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버리니 밀이야."
"아버님..."
구스루는 그 긴 시간을 걸어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카나기의 정점이라는 곳을 향해, 평생을 걸어 올라가고 지켜낸 사람의 이야기를.
"결국 산의 끝에 오르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려와야 하거늘."
"흰 소리 그만하고 본론을 얘기하십시오."
"이 놈!"
또 장죽으로 구스루를 후려치는 이신. 그 모습이 희극적이어서, 레고르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왔다. 이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를 카나기의, 아니 아이신고르의 일원으로 입적시키고 싶다네."
"예? 저는 떠돌이입니다. 그리고 용병이자 신앙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검과 신기를 갈고닦는 것만으로도, 4위계에 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이건 어려서 신앙을 받은 자가 5위계를 이루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세. 라달라리아의 집행관이나 아탕칼리의 성기사, 뭐 그런 것이 되었어도 크게 성공했을 게야. 그러니 그건 흠이 되지 않는다네."
이신은 장죽을 화롯불에 칼처럼 꽂아놓고 말한다.
"거기다 유명한 무반인 쿠르누이와 어느 정도 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완전히 무관계한 외인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네가 유얀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일세."
그제서야 레고르는 이신의 제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눈썹을 폈다.
"제가, 유얀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를 해 달라,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 말대로일세. 뭐, 유얀이 성년이 되고 난 이후에는 결혼하는 것도 좋겠지. 뭣하면 10년 뒤를 기한으로 약혼을 가약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네."
"안 됩니다! 누구 딸을 마음대로!"
"이 녀석은 멍청이니 무시해도 좋네."
그리고 이신은 놀란 눈으로 레고르를 바라보았다. 레고르 역시, 구스루 못지않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비명이라도 지른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나?"
"아니, 아닙니다. 귀 옆에서 이명이 울려서."
귀를 후벼 파는 레고르.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정말로 아파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신은 문제 삼지 않았다. 레고르는 그런 이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왜 하필 저입니까? 아이신고르의 딸이라면, 훨씬 더 좋은 혼처가..."
"없어. 불행하게도 저 아이는 너무 늦둥이로 태어났단 말일세."
한숨을 내쉬는 이신.
"내가 얼마나 더 오래 학장직을 붙들고 있을 수 있을지, 이건 이미 미지수야. 어쩌면 내일 수명이 다해 하늘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이런 상황에서 어리디 어린 손녀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이상성욕자가 아니면 정치적으로 아이신고르의 위광을 이용하고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뿐이겠지. 나는 그게 너무나 걱정된다네."
"아버지...속으로 그런 걱정을..."
"아들이라고 있는 놈은 이렇게 덜떨어졌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네. 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배경이 있어도 속이 검은 자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편이 되어줄 반려나 가족 같은 것이라고 말일세. 저 아이는 자네를 참 진심으로 따르는 모양이더군. 자네도 그게 싫지 않은 듯 보였어. 그래서 이런 제안을 결심했다네."
다시 장죽 불을 벌겋게 뻐끔대는 이신.
"죽을 때가 되니 이제 후회한단 말일세.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그래, 권력을 쥐기 위해 어떤 일이든 저질렀던 삶. 그 결과 너무 많은 업을 쌓아버렸지. 이 몸이 언젠가 그 업의 대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무섭지 않네만,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나. 내게 걱정이라곤 그것뿐이라네."
그리고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이 모든 게 그저 늙은이의 헛소리일 수도 있어. 그러니 마음이 동하지 않거든 거절해도..."
"하겠습니다."
"뭐?"
"그 약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신은 빙그레 웃으며 장죽을 입에서 꺼내 탈탈 털었다. 그리고 레고르가 내민 손을 굳세게 붙잡고 흔들었다.
"잘 부탁하네, 손서(孫壻)."
그리고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귀를 깨물고 고함이라도 지르는 듯, 레고르가 정말로 얼굴을 고통스럽게 찌푸렸기 때문이었다.
*
카나기, 그 학장에게만 허락된 방.
방음의 마술이 걸린 병풍으로 가로막혀 있어, 절대로 어떤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 이 방에서는, 지금 한 부자가 대면을 하고 있었다.
"아버님, 그 말이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유얀과 그 떠돌이 놈을 약혼시키겠다고요?"
구스루와 이신이었다. 이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구스루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꺼낸다. 낮에 이신이 했던 말도 어딘가 이치가 닿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신은 피식 웃더니, 바둑돌을 바둑판에 딱 내려놓으며 바로 부정한다.
"이 놈, 너까지 속아버리면 어쩌자는 말이냐."
"그 말뜻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와 그놈이 한 말 모두를 통틀어 모두가 거짓이었어. 그놈도 보통내기는 아니더군. 거짓말인 걸 대충 알고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뭐, 그렇게 되도록 설계했으니."
충격적인 말. 그런 말을 꺼내면서 수염을 쓰다듬는 이신. 그리고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눈치챈 것일지, 그게 제일 의문이군. 역시 이 이신 아이신고르의 손녀씩이나 되는 사람을 노리는 데에, 고작 4위계의 마술사를 보냈다는 게 작위적이었나. 그걸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작위적이지. 그래, 스스로의 공훈에 취하지 않는 종류군."
"예?"
"사람의 경계가 언제 제일 느슨해지는지 아느냐? 보상을 받을 때다. 영웅은 원래 괴물에게가 아니라 미녀와의 잠자리에서 죽는 법이지."
"그, 그 말씀은."
"유얀의 암살을 사주한 건 나다. 적당히 약한 놈을 골라 사주해두면 그놈이 막아줄 줄 알았지. 신중한 놈이야. 아마 그 전까지 신에게 서원도 하지 않다 그때 한 모양이던데."
갑자기 들려온 충격적인 진실 때문에, 구스루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신의 말은 끊어질 줄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이 쪽이 빚을 진 것처럼 연출한 뒤에, 은혜를 갚는 것처럼 나서서 옭아매둘 생각이었던 게야. 그런 부랑자를 손서로 맞는다는게 이상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빚이라도 만들어서 균형을 맞추어두어야,"
딱! 백돌을 내려놓는다. 백돌로 호구를 만들어 흑돌 하나를 옭아매며, 말하는 이신.
"그 놈이 아나테마라서 붙잡아두려고 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침묵하는 구스루. 이신은 껄껄 웃으면서 덧붙인다.
"아탕칼리가 네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은근히 협박해올 때에는 조금 놀라웠다만, 결국 그것도 우리에게 좋게 작용했지. 같은 이치다. 방심이란 그렇게 무서운 게야. 그 놈들은 우리가 그 약점 때문에, 아탕칼리에게 조금이나마 통제되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 앞으로 그 어리숙한 수도사 놈들은, 내 장단에 놀아나는지도 모르고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레고르를 아나테마로 이용하려는 계획. 이신이 이 계획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구스루는 그 약혼 제의에 그런 뜻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내 반응조차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구스루는 진심으로 놀라 이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었다. 그런가, 그것조차 속이는 것에 이용하려는 생각이었나? 구스루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또 벌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10년 후의 약혼 따위,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그놈은 몇 년 후에 죽을 예정이니 말이야."
"몇 년 후라면..."
"길 아잘록. 그 자를 사냥할 때, 그는 우리의 검이 되어줄 게야. 그리고 길 아잘록과 양패구상하거나, 살아남는다면 토벌당하거나, 그렇게 되겠지. 우리의 공식 입장은 그 자가 아나테마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는 게 될 걸세. 그자는... 길 아잘록을 아나테마라고 고발하러 온 아탕칼리의 수도사들에게, 우연히 붙들려, 우연히 아나테마라는 사실을 들켜 죽게 되겠지. 우리는 무지의 피해자가 되고 말이야."
껄껄 웃는 이신. 구스루는 질려서 말한다.
"이미 아탕칼리의 협조를 구할 때, 그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바쳐서 설득해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그게 정치다."
"그리고 아잘록을 잡는다는 것은..."
이신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구스루에게 이런 말을 해주어도 되나, 이런 망설임이 담긴 동작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그래, 너한테만은 말해주어도 괜찮겠지."
침묵을 깨고 연기를 토해내는 이신. 그리고 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둑판을 이해를 돕기 위한 교재로 사용하면서.
바둑판의 돌이 모두 동나고, 그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구스루는 완전히 탄복한 눈으로 이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맞습니다, 이거면 아무리 7위계의 마술사라고 하더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지프의 군소 마탑들이 쓸려나가는 건 기정사실이구요, 아, 세력도 터무니없이 약해지겠군요!"
"거기서 끝이 아니지 않느냐?"
"예! 우리 공생의 학파가 센디엘 첫 번째 학파로 올라서는 것도 명약관화입니다!"
이게 한 사람의 뇌에서 나올 수 있는 모략이란 말인가? 구스루는 새삼 경이를 바라보는 눈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센디엘의 모든 것은 민주적이거나, 공화적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 지향이라도 해야 한다. 제국이 건국되면서, 태초에 라달라리아의 7위계 율사가 선포했던 법령 때문에. 모든 종파는 선거 제도로 학장을 뽑아야만 했다. 형식적인 지향이라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제도하에서, 3선에 성공한 자는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그 몇 없는 실례 중 하나. 이신 아이신고르.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
"아침에 그 사내에게 했던 말 중 더 큰 거짓말은 그것이지, 산에 올라가고 나면 내려와야 한다니, 그 무슨 망발인가. 정상에 도달하고 내려올 것이 걱정이라면, 오르지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산에 도전하면 되는 것 아닌가."
"거대한 산이라면..."
"뭐, 세계의 일통은 어떨까. 그런 것 말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이신 아이신고르. 구스루는 그 광오한 목표를 듣고 안색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이신은 여전히 빙긋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 이신 아이신고르는, 그런 삶의 방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가 바둑판 위의 바둑돌을 치우며 말한다.
"길 아잘록, 그는 귀조의 왕 세네터와 계약하는 대가로 거짓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지. 그 때부터 나는 그 자의 숙적이 내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네. 왜냐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자가 할 수 없는 일이 단 하나 있거든."
"그게... 뭡니까?"
"정치."
이신의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자, 그럼 이제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게야."
그는 구스루와 함께, 이 정치적 모략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우리의 가장 큰 대사냥, 산양 사냥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산양 사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