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사렘 ( 2 )
그 비명을 배경으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거 손님 접대가 늦었군. 미안하오."
진홍색 법의를 입은 한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지하실로부터 응접실까지 이어진 계단, 그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서. 빛이 일부러 닿지 않도록, 유리창의 위치를 조정해 응접실 한 켠에 고인 어둠. 그 어둠을 건너오듯 천천히.
그 그림자에 고여 있을 때에는, 아주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촉광이 흔들리는 촛대 아래 도착했을 때 드러난 그의 모습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였다.
"나사렘의 서쪽을 맡고 있는 주교, 카사노 센모레노라고 하오."
늙었으나 기력 있는 목소리. 그리고 태연자약하게 앉는다. 아이와 아셀라이가 앉아 기다리는 책상 저편에.
"응?"
아이는 무례한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 법의는 원래 그렇게 진한 붉은빛이 아니었다. 그 색채를 짙게 만든 것은 피였다. 짙은 핏자국이 법의의 하단을 붉게 물들였던 것이다. 그가 지하로부터 걸어온 길을 따라, 선혈이 떨어져 긴 선을 그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말로 아이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목걸이는 뭐죠?"
목걸이. 그가 목에 십자가를 매달아 함께 차고 있는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에는, 짐승의 이빨 같은 것이 둥글게 매달려 있었다. 카사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이 땅에서 감히 주에게 반기를 든 인외의 무리의 이빨이오. 그놈들 중 제법 영글어 수확할 가치가 있는 놈을 퇴치했을 때, 그걸 기념하려 하나씩 뽑아 목걸이를 만들었소."
즉 그는 이 교구에 머무르며, 계속해서 나사렘의 흡혈귀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빨을 뽑아 목걸이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목걸이의 끝에 있는, 유난히 색이 하얀 송곳니를 자랑하듯 보여주며 말한다.
"이건 당신들을 맞이하기 전, 저 지하에서 새로 잡혀 온 녀석을 고문하다 뽑은 이빨이오. 어떻소? 크기가 제법 크지 않소?"
"당신!"
아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카사노는 여전히 투명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자는 원래 그런 자였기 때문이다.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아탕칼리의 주교, 5위계의 마술사, 카사노 센모레노. 그는 일생을 흡혈귀를 죽이고 박멸하는 데에 바쳐왔다.
"무언가 문제라도?"
그렇기에 아이의 분노가 전혀 이해 가지 않는 듯 했다. 몇십 년 전 있었던 반란과 소동에서도, 그는 눈 깜짝하지 않고 학살에 가까운 진압을 지시했다.
"소년이 흡혈귀가 아니라면, 화낼 일은 없는 것 아니오. 이 목걸이가 화려해질수록, 내가 사목하는 시민들의 밤은 안전해진다오. 이 목걸이는 오히려 내가 얼마나 주의 뜻을 실천하는 데 성실했는가를 증명하는 좋은 증표가 되어준다고 생각하오."
그 증오는 조금 유별난 데가 있었다. 주의 뜻, 격률, 그런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어떤 개인적이고 끈적한 광기 같은 것이 얽힌 듯한. 아셀라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짓고 말한다.
"그러니 당신이 이런 궁벽한 곳에 처박혀 있는 겁니다. 아니, 이곳이 아닌 어떤 도시도 당신 같은 광인을 받아주지 않겠지요. 하지만 주의 뜻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뜻?"
"주께서는 사체의 훼손을 금합니다, 거기에 고문도 저항하지 않는 무력한 자에게는 금하고..."
"그거라면 당신도 어겼을 텐데."
"그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도 그렇소. 나는 근거까지 댈 수 있다오. <너는 무당을 살려주지 말 지어다>, <네 교회에 숨어들어 성읍 거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그들을 진멸하는 데 주력하라. 잘 벼린 칼날로 그 생축의 내장을 도려내고 목을 벨 것이며 손톱을 뽑고 내장을 불태워 네 주께 바치라.> 옛 성경의 말씀이오. 당신도 이 정도 근거는 댈 수 있지 않소?"
아직 아탕칼리의 교리가 구체화되기 이전, 원시적인 신화와 뒤섞여 있던 때의 경전. 그 몇 구절을 가져와 야만적인 폭압을 정당화하는 것. 그것은 중앙 교구가 제거하고자 애쓰는 가장 큰 악습이었다. 아셀라이가 주먹을 쥐며 소리 지른다.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카사노, 이 성의를 입은 흡혈귀 사냥꾼은 그 주름 가득한 얼굴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길게 일축했다.
"원래 모든 해석은 자의적인 법이오. 그리고 이건 자의적인 해석일 뿐만 아니라, 나사렘 교구 모두의 해석이기도 하오. 만약 당신이 토론을 원한다면 사흘이라도 받아주겠소. 그런데 그걸 원해서 찾아온 것 같지는 않구려. 무슨 일이오?"
여전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카사노를 노려보는 아셀라이. 아이 역시 카사노를 노려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카사노는 그런 아이와 아셀라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 말한다.
"칠십 년 전에 볼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구려. 미색도, 그 정신도. 시간이 당신만 비껴서 흐르는 모양이오. 그래, 아직도 소년 취향인 모양이오?"
"예?"
"내 손주도 이 소년만큼은 아니지만 미색이 고운데, 무서워 빨리 숨겨야겠소. 허허."
그 말은 농담이었으나, 농담이라기보다는 비꼼과 공격처럼 들렸다. 아셀라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다.
"칠, 칠십 년이라니, 무슨..."
놀란 아이가 뭔가 말을 꺼내려 하기도 전에, 아셀라이는 빠르게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랭 교구에서 여기로 보낸 소포가 있을 겁니다. 나에게도 중요하지만, 이 소년에게 더 중요한 소포지요. 그걸 받아가려고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이유도 없었군. 아랫사람을 부르겠소."
거뭇하게 때가 탄 은종. 그것을 짤랑 흔드는 카사노.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맨 위만 반질반질하게 깎은 소년 수도사 한 명이 걸어들어온다. 공손하게.
"마레 델피에로, 그런 이름으로 랭 교구에서 보낸 소포가 있을 것이다. 가져오너라."
그 말에 다시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떠나는 수도승.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로 가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곱게 잘 포장된 꾸러미를 하나 들고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책상에 꾸러미를 내려놓는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아셀라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이게 뭐죠?"
"네가 음, 좀 피치 못할 이유로 유품을 그 수사에게 맡겼다면서. 이제 그게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돌려주려고 여기 다시 발송했다. 원래 내가 맡아 뒀다가, 시험을 통과하면 주려고 그랬지."
"아!"
그 말에 아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마레가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안에 블로어가 있다는 소리네요?"
"그래, 그 단장의 검인가 뭔가 하는 그거."
설레어 하는 아이. 그 반응에 아셀라이는 기쁜 듯 웃으며 소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그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다.
"뭐야?"
그 안에는 블로어가 없었다. 대신, 몇 장의 그림 묶음이 있을 뿐이었다. 아이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그림이었다.
"이건..."
마레와 처음 동행했을 때, 마레가 보여줬던 의뢰서. 그 의뢰서에 참고자료로 첨부되어 있던 그림이었다. 그림 하나하나가 아주 상세하다.
"뭐야, 이거? 왜 이것만 있는 거야?"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아셀라이. 마레가 여기에 소포를 부칠 때, 아셀라이 본인이 중간에 한 번 그것을 가로채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검 한 자루와, 쪽지 하나밖에 없었다. 이것을 정당한 주인에게 주라는 쪽지.
그런데 그 내용물이 감쪽같이 바꿔치기 되어 있는 것이었다. 성난 아셀라이는 사납게 카사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죠? 소포의 내용물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여기 보관된 물자의 관리 책임은 당신에게 있지 않습니까. 명백히 소포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해명하십시오."
그 말에 무심한 듯 눈을 뜨고, 아셀라이를 바라보는 카사노.
"거부하오."
"예?"
"당신에게는 그런 것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소. 당신은 비록 지위가 있다 하나 외인으로서의 지위, 주를 호위하는 성기사로서의 지위가 있을 뿐이오. 내부 감찰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 거부하오."
"말조심해서 골라 하십시오, 카사노. 그 말은 다르게 들릴 여지가 있습니다."
"무슨 여지 말이오? 내가 당신이 하는 말이 생트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뭐 그렇게 들릴 여지 말이오?"
"카사노 센모레노!"
"그래, 당신의 더러운 동족들이 철 가시로 가득한 관 속에서 울부짖었던 이름, 카사노 센모레노. 그게 나요. 무슨 여지인지나 제대로 말하시오. 무슨 여지 말이오? 당신이 생트집을 잡아, 당신의 더러운 동족을 위해 이 나사렘 교구를 헤집어놓으려고 한다, 뭐 그렇게 내가 생각하고 의심하고 있다는 여지 말이오? 바로 맞추셨소."
"이..."
더러운 동족,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십자검을 빼 들어, 카사노의 목에 들이대었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 검면을 붉게 비춘다.
아이는 더러운 동족이라는 말 때문에 놀라 아셀라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여자가 흡혈귀였단 말인가, 그런 놀람 때문에.
하지만 카사노는 여전히,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한 무색의 눈으로. 아셀라이를 응시한다.
"언제 어른이 될 생각이오?"
"그, 저, 죄송합니다!"
그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의외의 참가자가 나타났다. 수도승이었다. 여기에 소포를 가져온 수도승이, 사태가 심각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황급히 불러온 어린 수도승. 그 꼬마아이는 얼굴을 파랗게 질려서 떠듬떠듬 뭔가 말을 하려 들었다. 눈에서는 겁에 질린 눈물이 조금씩 새 나오고 있다.
"얘기해보렴, 무슨 일이니?"
아이가 그 손을 잡아주며 말한다. 그러자 차츰 떨림이 가라앉은 꼬마는, 더듬더듬 그 소포의 내용물이 바뀐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 저, 낮에... 대주교께서, 그, 지하에서 맡으신 일을 하고 계실 때.... 사람이 왔습니다. 얼굴을 가린 사람이요. 마레 델피에로라는 사람에게서, 소포가 왔을 거라고... 받아가야겠다고..."
카사노가 맡은 일이라는 건, 자랑스레 말한 흡혈귀를 고문하는 일이겠지. 카사노는 입술을 무겁게 닫았다가, 다시 추궁한다.
"그래서 네가 건네주었다는 말이냐? 왜 나를 부르지 않고."
"그렇지만, 대주교께서는, 그, 일을 할 때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그것 말고 이유는 없느냐."
다시 말하는 카사노. 최소한, 그것으로 아셀라이가 감찰을 위해 억지로 트집을 잡고 있다는 의혹은 사라진 셈이다. 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사과하겠소. 주의 이름으로."
"그렇다니 받아들이죠. 다음은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건 사과. 그건 이 건으로 자신을 고발한다면, 변호 없이 처벌을 받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 정도까지 사과하니 기분이 좀 누그러져서, 십자검을 수납하는 아셀라이.
그러자 꼬마도 기운을 얻었는지, 차츰차츰 자세한 정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왜, 왜 그걸 그렇게 그냥 넘겼느냐고 물으신다면... 그 사람, 대리인이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검의 내력도, 마레라는 사람도, 그리고... 증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이 검의 정당한 주인이라는 증표를요."
"그게 무엇인데?"
"저, 저 그림과 의뢰서입니다. 저것은, 기나센의 어떤 용병단의 보물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이며 생김새, 특성까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모를 법한 내용까지 다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넘겨주었습니다."
그 말에 제일 놀란 것은 아이였다. 심각한 얼굴로 의뢰서를 바라본다. 아셀라이는 묻는다.
"그 말이 진실이냐?"
"예... 진,짜에요."
잰슨이 장어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블레어가 면도를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는 사실이나. 그런 사소한 버릇까지 전부 적혀 있다. 이런 걸 보여주면, 당사자라고 믿지 않는 게 더 힘들 것이다. 거기에 정당한 주인에게 주라는 쪽지까지 들어 있으니, 이 수도승도 어쩔 수 없었겠지.
아이는 수도승을 추궁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꼬마아이는 자신의 실책을 모면한 것이 기뻐, 울면서 아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카사노는 그 말을 듣고 또 특유의 꿰뚫어보는 듯한 무심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또 오길 바라겠소."
그렇게 카사노와의 대면은 끝이 났다. 엉망진창으로.
서쪽 교회에서 벗어나, 묵을 곳을 향해 떠나는 길.
아이는 의뢰서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아셀라이의 곁을 걷고 있다. 어찌나 의뢰서에 집중했는지, 길을 걷다 벽에 부딪힐 뻔한 것을 아셀라이가 간신히 막은 게 세 번이나 될 정도였다.
"소년, 차라리 어디서 좀 쉬다가 가는 게 낫겠다."
그럼에도 아이가 의뢰서에서 눈을 뗄 생각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제안하는 아셀라이. 아이는 그 말을 따랐다. 널찍한 공터에 두 사람이 앉는다.
"그럼 누구지? 대체 누가 네 검을 탐내서 가져갔단 말이야."
아셀라이가 중얼거렸다. 마침, 아이는 레이븐사이드의 모든 인물의 인상착의며 특징이 세세히 적혀 있는 의뢰서, 그 의뢰서의 마지막 장을 읽는 중이었다.
"어."
거기에는 이질적인 문장이 한 줄 적혀 있었다. 방금 막 적은 듯, 잉크의 색조차 새로운 문장이.
-부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이건..."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디악, 그 놈들이다.
그 말이 드미트리가 했던 말과 닮았기에, 아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