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78화 (78/279)

14. 나사렘 ( 3 )

버려진 원형경기장.

먼 옛날 나사렘이 반역에 성공해, 자유를 누리던 시절. 힘찬 함성 아래 검투경기와 경마 따위가 벌어졌던 그 공간은, 지금은 버려진 채 폐쇄되어 있다. 이백 년 안쪽으로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엔 자연이 무성하기 마련인가? 그래서인지, 그 원형경기장은 어느새 온갖 나무며 잡초, 야생 꽃 따위가 가득한 뜨락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 접근이 금지되어 있기에, 또 온갖 짐승의 피를 먹은 경기장의 토양이 의외로 비옥했기에, 생겨난 안뜰이었다.

그 안뜰의 구석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이와 아셀라이였다.

"저, 그, 기대하게 만들고, 미안하다."

우물쭈물 사과하는 아셀라이. 이 원형경기장에 아이를 이끌고 온 것도 아셀라이였다. 그녀 정도의 지위가 아니라면, 여기 발을 들이민 것만으로 처벌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사렘에 들릴 때마다, 이 원형경기장을 자신 전용의 정원 정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나 아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일축했다. 뚫어져라 의뢰서를 바라보며. 그 일축은 뭔가 기분 나쁜 것을 표시했다기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자연스레 나온 것 같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이 책을 얻은 것만으로도 좋은걸요."

블로어 대신 덩그러니 남아 있던 의뢰서. 혹여라도 북서 자치령을 떠돌아다니는 생존자가 있을 때를 대비한 것인가, 레이븐사이드의 모든 구성원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그 의뢰서. 그것이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섬세한 삽화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듯한 말랑말랑한 감정이 울렁였던 것이다.

"흠, 그런가."

정신없이 책을 바라보는 아이를 보고, 복잡한 미소를 짓는 아셀라이. 곧 그녀는 하늘에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수업을 개시해도 되겠군."

수업. 그 말에 아이는 책에서 눈을 떼고 홱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 아셀라이로부터, 그녀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 주겠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진지하게 뭔가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연기하고 있는 연극적 기질의 충동적인 발로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었다.

"자, 간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로 진지한 가르침을 주어, 아이가 갑자기 성장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반기를 들기라도 한다면. 아셀라이는 자신의 적을 키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수업을 개시한다, 그런 말을 꺼낸 그 성좌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우선 신기, 마술을 허락받지 못한 우리가 사용하는 신기에 대한 기초적인 얘기를 나누어 보자.:"

손을 쳐든 채로,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는 아셀라이.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망토처럼 매달려 있던 나비검이 흩어져, 나무로 날아들었다. 나비검은 하나의 거대한 원반이 되어 나무를 베어낸다.

"신기, 그걸 다루어 마술사와 동등하게 겨루는 데에는 세 배의 노력이, 그걸 쌓는 데에는 아홉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력에는 목적성이 있으나 신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대로였다. 축적한 신기의 양이 한 위계만큼은 더 높아야, 한 위계 낮은 마술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그런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마력을 다루는 자는 그저 신이 설정해준 목적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지만, 신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신기의 형상과 본질을 정해주어야 해. 그래도- 그것이 완전히 처음부터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 가지 정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준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전대의 천재들이 연구해 남겨둔, 신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법이."

신기의 운용법. 그 계보를 설명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모두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기연이 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비록 (주로 나이 관련해서) 못 미더운 점이 있긴 해도, 아셀라이가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전사 중 하나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한다.

"세 가지라뇨? 두 가지 아닌..."

"쉿."

끼어드는 것을 막는 아셀라이. 그러나 아이는 무례한 줄 알면서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신기를 운용하는 법은 두 가지였다. 세 가지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우선 탈라사. 잊혀진 어떤 말로 바다라는 뜻이지. 이건 좋게 말해 뱃사람들, 나쁘게 말해 해적들이 그 기초를 닦은, 신기의 운용 방법이다. 신기를 외부에 방사하는 방법이지. 활, 대포, 그런 탄환에 신기를 어리게 하는 용도도 있고, 어설프게나마 바람, 번개와 같은 자연의 흉내를 내는 용도도 있다."

꽉, 주먹을 쥐는 아셀라이. 그러자 나무 하나를 잘라 둥둥 떠받치고 있던 나비검들이, 하나의 폭풍처럼 몰아치며 나무의 살을 깎아대기 시작했다.

"내 운용법도 그 계보를 되짚으면 탈라사에 속하지. 이건 전장에서나, 해상전 같은 특수 상황이나, 일대 다의 싸움이라거나. 그런 상황에선 강하지만, 아무래도 일대일에서는 약하다."

거기까지는 아이도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엇에 비해 약한가? 승부를 위해 만들어진, 무기술과 하나된 운용법. 비에르그. 그것보다 약하다. 비에르그, 그건 또 다른 고어로 산이라는 뜻이지. 네가 향하고자 하는 산맥의 나라, 기나센. 또 하레하둔 산맥. 그처럼 괴물과 더불어 또는 맞서며 살아가야 하는 산에서 발원한 기술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

그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부적으로 어떤 검결을 배우느냐, 어떤 검술을 연마하며 신기를 얼마나 축적해낼 수 있는가에 따라 그 계보가 갈리긴 하지만, 그렇게 검과 같은 병장기에 신기를 불어넣어 직접 싸우는 기술은 비에르그라는 이름 아래 종합되었다.

대표적으로, 레고르가 사용하던 푸른 신기. 대태도를 사용하던 검술. 그것도 비에르그에 속하는 것이었다. 기나센의 검은 대개 비에르그에 속했다. 아이도, 여러 검술 사범의 지도 아래 비에르그의 검술에 가까운 것을 수련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지금까지, 자신의 신기 운용법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비에르그의 계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 번째 운용법이 있다."

"그게... 뭔가요."

"재미있구나, 소년. 네가 이미 그걸 운용하고 있으면서, 그걸 나한테 되묻는 거냐?"

눈을 크게 뜨는 아이. 그러나 아셀라이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베루스. 그게 네가 사용하는 운용법의 이름이다."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신기의 운용법. 그것은 림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천년 전, 아주 강한 자들이 즐겨 사용했으나 지금은 실전된 무술이라고 했다. 그 특이점은 수련법에 있었다. 다른 계보의 수련법은 이렇다. 몸을 움직여 수련을 하며, 호흡을 내뱉고 빨아들여 동시에 미약하게 신기를 빨아들인다. 그것과 달리, 아이의 운용법은 묵상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신기를 빨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어떤 검술도, 어떤 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걸 한 번 마칠 때마다,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힘들었다. 아이가 초인적인 인내력이나 초인적인 육체, 둘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건 금지된 어떤 언어로, 방랑자라는 뜻이지."

"베루스..."

멍청히 중얼거리는 아이. 아셀라이는 또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나비검이 이제 자그마해진 나무토막을 가지고 여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랑자, 또는 아들. 뭐 그런 뜻이지. 결국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다른 운용법은 말이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신기의 힘을 제대로 끌어낸다고 말할 수 없다. 마력은 신이 그 목적을 설정해준 신기지. 비에르그 그리고 탈라사는, 신 대신 천재가 그 목적을 설정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걸 자각 없이 좇아갈 뿐이야. 그런데 네 운용법, 베루스는 다르다."

진지하게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말하는 아셀라이.

"베루스는 네가 스스로 그 목적을 만들어내기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도, 바다도 아니고, 방랑자다. 산을 오르는 것이나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알기 쉬운 목적성이 없다는 뜻이지."

"그런..."

"그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웅혼한 신기. 다른 이의 목적을 굳이 따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저 순수하게 신기를 모으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거지. 네 그 웅혼한 신기, 그건 베루스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정도의 축적량이야."

고개를 홱 돌려 옆에서 둥둥 떠다니는 림을 바라보는 아이. 그러나 림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자랑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형태 없음. 베루스는 그 운용법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연마하기에 따라 탈라스의 기술도, 비에르그의 기술도 전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검술을 지켜봤다. 그 속성이 다른 여러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도, 전혀 막힘이 없더구나. 그걸 보고 확신했다. 이 소년이야말로 방랑자, 그 잊혀진 길을 걷는 자라고."

그래서인가. 비에르그의 무기술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고정된다. 검술을 배운 자는 평생 검술을 배워야 하고, 창술을 배운 자는 평생 창술이 아니면 신기를 쓰지 못하는 식이다.

그래서 하나의 무기 형태에 익숙해지면, 죽을때까지 그 무기가 아니면 신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러 무기를 하사하는 신, 림의 사도가 되려면, 형태에 제약받지 않고 여러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 운용법은 베루스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억지로 가르친 거야?"

힐난하듯 림을 흘겨보는 아이. 하지만 림은 씩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결국 잘 되었으니 좋은 거 아니겠느냐, 어린 사도야.'

"사기꾼."

아셀라이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비검이 전달해준, 자그마해진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베루스가 아주 위대한 계보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이 실전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이유라면..."

"그 습득의 난이도도, 운용의 난이도도 말도 안 되게 높다는 것.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고 그걸 견뎌내는 것 자체가 천재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천년 전, 신기를 운용하는 체계가 제대로 서 있지 않았을 때에나 멋모르고 수련하는 사람이 있었지. 신기를 써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알려진 영역, 7위계와 맞서는 영역.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베루스를 수련해야 하지만, 그 난이도는 비에르그나 탈라스에 비해 천 배는 높고 얻는 것은 없지. 굳이 그런 힘든 길을 걷지 않아도 재능 있는 자라면 비에르그나 탈라스만으로 성취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니. 안정된 세상에선 아무도 익히지 않는 기술이 되어버린 거야. 그러니 잊혀버렸지. 이젠 그런 계보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희미해져 버렸다."

그 말을 끝내고, 아셀라이는 손에 쥔 나무토막을 집어 던진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조각상이었다. 아까 보았던 주교, 카사노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변형되어 새겨진 조각상.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걸 아주 안타까워 했다구, 소년. 그런데 여기서 겁도 없이 방랑자의 길을 걷는 계승자를 만났으니, 어찌 한 손 거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나."

뭐, 한 손 거든다기엔 한 손밖에 없지만. 아셀라이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웃었다. 아이도 얼결에 따라 웃는다.

"좋아요, 그래서 이 조각상이 그거랑 무슨 상관이죠?"

"음?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아셀라이는 눈썹을 치켜뜨더니, 주섬주섬 단검 하나를 던진다. 조각칼에 가까운, 아주 자그마한 생활용의 단검이었다. 아이는 얼른 그 조각칼을 받아들었다.

"대충 살펴보니, 이미 비에르그로부터 유래된 검술은 몇 습득한 모양이군. 나는 너에게 탈라사를 가르쳐주고 싶다."

"탈라사라면..."

"정확히 말하면, 신기의 끈을 만들어 검을 허공에 춤추게 만드는 기술. 어검술을 가르치고 싶다."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아이. 아셀라이가 사용하는 기술, 그것이 어검술이었다. 예리한 신기를 줄처럼 사용하여 허공에 검을 띄우고, 화살처럼 사용하는 것. 그 극에 달한 기술을 전수한다니,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

정말로 아셀라이의 어검술을 반, 아니 십분의 일만 흡수할 수 있더라도, 아이의 힘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게 틀림없었다. 5위계의 마술사 여럿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전혀 속성이 다른 마술사의 합공도 이겨낼 수 있을 지 모른다. 여러 검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혹여나 말을 놓칠까봐, 침조차 삼키지 않고 뚫어져라 아셀라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진정으로 너의 검, 베루스를 찾기 위해서는 비에르그 뿐만 아니라 탈라사의 검술도 배워야 하지 않겠나, 소년. 난 그걸 돕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아셀라이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거기에... 너는 무슨 마검을 여럿 다루는 모양이더군. 한 번에 하나만 사용해야 한다는 게 아깝던데, 어검술을 사용하면 두 개 정도는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되겠지. 엄청나게 전력이 상승하지 않겠나?"

"할게요! 그래서요?"

즉답하는 아이. 그 질문에, 아셀라이는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조각칼과 조각상을 가리키며 말한다.

"탈라사를 배우기 위한 첫 번째 과제다. 우선 이 조각칼을 사용해서, 내가 만든 조각상을 똑같이 만들어봐라."

"예?"

"탈라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비단을 짜는 것과 같은 섬세한 손재주가 필수야. 손재주를 기르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지. 내가 합격이라고 할 작품이 나올 때까지, 조각상을 깎아라."

눈을 껌뻑이는 아이. 그리고 아셀라이가 건네준 목조 조각상을 바라본다. 확실히 그런 방법으로 수련했는지, 목상의 완성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예, 알겠어요."

"아, 참고로 그 조각칼에는 극독이 발려 있다."

"예?"

그 말에 깜짝 놀라 조각칼의 끝을 바라보는 아이. 그리고 화난 얼굴로 아셀라이를 바라본다. 정말로, 조각칼의 끝에는 보라색 액체가 번들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셀라이는 유들유들하게 말할 뿐이었다.

"한 번이라도 헛손질을 해서, 손을 베면 입히면 죽는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조각하도록, 소년. 내 맘에 드는 걸 만들어야 잠을 자게 허락할 테다."

그리곤 원형 경기장의 객석으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제멋대로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 제안을 수락한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아이는 목재를 구해다 조심 조심히 조각상을 깎기 시작했다.

*

심야.

"미안하다, 손재주가 이렇게까지 없을 줄은 몰랐다, 소년."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이는 간신히 억지로 허락 비슷한 것을 받아 그 과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독이 묻은 조각칼로 어둠 속에서 해본 적도 없는 조각상을 조각하는 것, 그건 보통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었다. 대꾸할 기력도 남지 않았다.

"됐어요."

이 정도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는 듯 말하는 아셀라이의 사과. 그것을 짧게 만류하고, 아이는 비척비척 숙소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까 계속 레이븐사이드의 사람들이 그려진 의뢰서를 바라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아,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밤새워서 수련에 매진하고,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때가. 그게 몇 년 전이던가. 오래지 않은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기억과 지금 사이에 영원이 놓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누워 있으면.'

그때는 란페이가 몰래 방에 들어와서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몸을 씻기고 이불을 갈아주었다. 그 모습이 눈앞에서 갑자기 어른거렸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진다.

'왜 그냥 자는 척을 했던 걸까.'

일어나서 고맙다고, 한 번 안아달라고. 그런 어리광이라도 부려 볼 걸. 그런 마음, 세상에 홀로 남은 열여섯 살 소년다운 마음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치솟았다. 그럴 만큼 지쳐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환상 속에서 아른거리는 란페이의 품을 꽉 껴안는 아이.

그리고, 어째서인지 현실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촉감 때문에 눈에서 떴다.

"뭐야?"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자신의 품에는, 당황한 얼굴의 소녀가 안겨 있었다. 은발, 고양이의 눈을 연상시키는 노란 눈. 에바였다. 허공을 껴안는다는 것이, 어째서인지 이불 안에 들어있던 에바를 껴안게 된 것이었다.

"무, 무슨."

당황해서 손을 푸는 아이. 그리고 아이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의 그녀는, 아이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갑자기 덮쳐들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을 막힌 아이가 사방을 곁눈질로 살펴보자, 창문이 열려서 밤바람에 덜거덕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아이가 지쳐서 비몽사몽에 빠져 있을 때, 저 창문을 통해서 침대에 숨어든 모양이었다.

"쉬잇!"

입을 막고 손가락을 세우는 에바. 그 표정은 더없이 간절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알았으니 손을 좀 떼라는 뜻으로 등을 톡톡 두드리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손을 뗸다. 아이는 그제서야 숨을 내쉬고 말을 걸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작은 질문. 그것에 대한 에바의 대답은, 또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우리 동료들이 널 구하러 왔어! 빨리 달아나자!"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아이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눈을 껌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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