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영생 ( 1 )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주교 그웬돌린. 그녀는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그마한 꼬마 하나를 무릎에 앉힌 채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밤이었다. 불청객이었던 성기사들을 치우고 아이와 아셀라이가 들어선 후, 밤이 찾아오기까지. 세 사람은 아이 돌보기를 해야만 했다.
이 교회는 한 명의 수녀가 돌보는 고아원 같은 꼴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웬돌린 크리스틴, 그녀는 어째서인지 수많은 고아를 이 교회 안에 숨기고 있었다. 아이와 아셀라이가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자, 벽장에서, 마룻바닥 밑에서, 책상 밑에서 쏙쏙 얼굴을 내민 꼬마들. 그 수는 서른에 달했다.
그녀가 주교복 대신 수녀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교회에 머물고 있는 아이들이 묻히는 침이나 눈물 따위의 더러움을 감히 주교복에 입힐 수는 없어서였고, 또 하나는 이 교회에 그녀 외에 남아있는 성인이 없어서였다.
"제가 이 아이들을 맡겠다고 했더니, 극렬하게 비난하곤 서쪽으로 떠나갔지요. 이해합니다. 자칫하면 화형대에 매달릴 테니 말입니다."
이 교회에 찾아온 아이와 아셀라이는, 변절자를 추적하기 위해 그녀를 추궁한다는 본래 목적을 이루기 전에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웬돌린을 도와 그 수많은 아이들의 저녁을 차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끝마치고 이불을 덮어주자 어느새 시간은 밤이었다. 그제서야 이렇게 촛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추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알겠군, 주교.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이 도시에서 암약하는 흡혈귀의 무리에 협력하는 변절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걸 추궁하기 위해 자네에게 찾아왔지. 왜냐면."
자못 준엄하게 추궁하는 아셀라이. 그웬돌린은 담담히 대답한다.
"제가 피의 노예, 흡혈귀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겠지요? 변절자가 있다면, 저보다 유력한 용의자는 없을 테니."
"그래, 그렇다."
"직접 보니 어떠십니까? 제가 변절자인 것 같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촛불이 일렁인다. 아셀라이는 그웬돌린의 무릎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꼬마를 노려보고 말한다.
"저 꼬마는 흡혈귀 아닌가."
충격을 받은 아이. 깜짝 놀라서 유심히 그 꼬마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웬돌린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셀라이는 더 따지듯 묻는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어. 아직 흡혈을 해 본 적이 없어 그 피가 옅지만, 인간 아닌 것들의 자식이 많이 섞여 있더군. 왠가? 왜 그런 것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인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면."
스릉. 아셀라이의 오른팔이 금빛으로 부서진다. 그리고 곧 하나의 검 형상으로 뭉쳤다. 아셀라이는 그 손잡이를 척 붙잡아 그웬돌린의 목 끝에 들이댔다. 그녀의 하얀 목이 검날에 반사된 촛불을 받아 황폐하게 빛난다.
"나는 여기서 그대를 즉결 처분할 수밖에 없다."
침묵. 움직이면 깨져버릴 것 같은, 살얼음 같은 긴장 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이나 그렇게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는, 그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 후, 그녀는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요즘 미치광이들 사이에서는, 칼 대신 묵주를 들고 주교복을 입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카사노, 그는 미쳤다. 그런 선언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열한 살때 흡혈귀에게 양친을 잃고, 그 자신도 죽기 직전 아탕칼리의 성기사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영혼을 평생 증오로 들끓게 하였지요. 랭 반도의 대교구에서 열다섯에 서품을 받은 후, 그 분은 자원해서 이 나사렘으로, 죽음과 그림자의 도시로 향했지요. 그렇게 도착한 그는 그 증오에 신앙이라는 옷을 입혀 섬겨왔습니다."
무려 칠십 년 동안이나. 그처럼 기계적으로, 또 경이로울 정도로 흡혈귀를 사냥한 자는 여태껏 없었다.
"그분이 발령되기 직전, 이 나사렘의 교구는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모종의 흡혈귀의 무리, 그들이 주교를 매수해 주일마다 횡음한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황금을 찔러넣어 타락시킨 상태였지요. 카사노, 그 분이 그 시대를 끝맺었습니다. 직접 검을 들고 뜻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이 전 주교의 목을 치고, 끝나지 않는 전쟁을 시작했죠."
그러나 때로는 타락이 순수보다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 순수가 치닫는 것이 광기라면 더욱 그렇다.
흡혈귀의 무리, 아마도 루나틱 커넥션으로 추정되는 그들이 교구를 매수해서 얻었던 이득은 딱 하나.
"끔찍한 제도를 유명무실화했던 것이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흡혈귀를 찾아 중앙의 교회 앞에 매달아 불태운다는, 인신 공양 같은 제도 말입니다."
교구가 타락해 있던 동안, 그 교회 앞에서는 흡혈귀 또는 흡혈귀로 의심받는 인간 대신 제웅이 불탔다. 그리고 카사노가 실권을 잡게 되자, 다시 사람이 불타기 시작했다. 주일의 예배가 끝나면 나사렘의 시민들은 강제적으로 그 끔찍한 화형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피할 수 없었다. 예배에 빠지면, 다음에는 저 화형대 위에서 예배에 참가하게 될지도 몰랐으므로.
"그분의 광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지요. 그분이 나사렘의 어둠을 멸한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저지른 일들의 목록을 뽑아 두루마리에 적으면, 이 교회에서 새는 빗물을 다 닦아내고도 남을 겁니다. 우연히 이 도시에 머물 일이 있었던 저는, 그분을 견제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에 자원했습니다."
조용히 말하는 그웬돌린. 아이는 뚫어져라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안대로 가려진 얼굴을.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 그녀의 말은 완전히 진심인 것으로 보였다.
"제가 여기에 발을 내딛은 건 오 년 전입니다. 그로부터 오 년, 그중 사 년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목적이 전치되어, 나사렘 시민들의 밤을 지키는 것보다 흡혈귀를 근절하는 것을 더 우선한 카사노의 방식. 칠십여 년이나 계속된 그 편벽한 광기는 알게모르게 반발의 씨앗을 많이 파종했다. 그웬돌린이 부임하자, 그 씨앗은 개화했다. 그들은 그웬돌린을 중심으로 뭉쳤고, 그것이 이 도시에 두 개의 교구가 들어앉게 된 원인이었다.
"저희는 그 화형식, 그 번제에 무고한 희생자가 매달리는 것을 막는 데 진력했습니다. 그 결과 번제는 종전에 비해 열에 하나 수준으로 줄어들었지요. 매달린 자들도 피의 갈증에 빠져 살인을 저지른, 화형이 마땅한 자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간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카사노 주교 본인이 번제를 금지했습니다."
그 때 그웬돌린은 드디어 카사노가 말년에 맑은 정신을 되찾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은근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교구의 일 대신 손주와 놀아주는 것을 즐기고. 각종 저술과 이 나사렘을 덮고 있는 부당한 악습들을 개선하는 연구에 힘썼다고.
"그 분도 늙으셨지요. 주와 마주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드디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되찾으신 것이라고... 그 불행한 사고가 없었을 때, 그분의 삶이 취했을 형태를 늦게나마 되찾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렇게 일 년을 책과 씨름하며 소일하던 카사노는,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교회 앞에 십자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일 년 동안 축적한 광기를 한 번에 터뜨리듯, 더욱 진하고 표독스럽게 번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전부 연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일 년이나 번제가 일어나지 않자, 조용히 숨어 살던 흡혈귀들도 느슨해졌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던 그들의 경계심이 틈을 보였고, 주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매달았습니다."
몇백 년 동안이나 밤거리의 괴물들과 공생하면서, 아탕칼리와 그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흡혈한 적 없는 자들은 이빨을 뽑고 가둘지언정 목숨은 빼앗지 않는다는 규칙이었다. 그러나 일 년간의 침묵에서 돌아온 카사노는, 보란 듯이 그 규칙마저 깨버렸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무고한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색출해 죽이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런 짓을."
"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유추할 수 있을 뿐."
그웬돌린의 유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축양.
인위적으로 신이 좋아하는 행위를 하여, 마력을 모으는 금기. 카나기의 잔당들이 했던 그 끔찍한 짓. 그웬돌린이 생각한 카사노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그분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년간, 삶을 정리하려는 듯한 행동을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막상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죽기 싫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무슨... 당신들은 영생을 믿잖아요! 죽고 나면 영혼은 불멸해서 천국인지 뭔지 하는 곳에 가니까, 안 두려운 거 아니었어요?"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 역시 태어나 살고 늙고 죽습니다. 영생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보니 그웬돌린에게는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충격적인 말을 당연한 것처럼 하는 재주. 아셀라이가 그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게 아탕칼리를 섬기는 자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그녀는 촛불이 붉게 비추는, 어린 꼬마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 분은 젊어서 5위계에 다다른 이후로, 아직까지 6위계에 오르지 못하고 계시지요. 이상할 것 없는 일입니다. 그 문은 아주 좁으니 말이죠. 그 상태로 천수를 다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 삶을 정리하던 중, 이런 결론에 도착한 게 아닐까 합니다. 나는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았다, 6위계에 오르면 육체의 수명도 늘어난다. 그런 결론 말입니다."
"그래서 축양을 하려고 한다고요? 그건 걸리면 공적으로 찍혀 죽게 되는 일 아닙니까! 오히려 명을 재촉할 것 같은데요?"
아연해서 말하는 아이. 그웬돌린이 답한다.
"흡혈귀, 순수하지 않은 것을 멸하는 건 분명 우리의 주께서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번제는, 합법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지요. 그럼 적당한 핑계를 대서, 적당한 날 대량으로 흡혈귀의 목숨을 끊는다면. 합법적인 축양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년 동안 삶을 정리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카사노. 그렇게 일생을 반추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이 천국의 바늘구멍을 뚫기에는 너무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늙은 육체를 잠깐이나마 인세에 더 붙들려 노력하는 것으로, 노력의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분은, 정말로... 거의 모든 나사렘의 집안들 이 잡듯이 뒤져, 흡혈귀를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까지도 말이지요."
그것이 그웬돌린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합리적이었다.
"저는 그것을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아이들만이라도 제가 보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명분을 잃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말입니다. 그웬돌린은 쓸쓸히 덧붙였다. 그것이 이 교회에 한 명의 수녀, 그리고 수십 명의 어린아이만 남게 된 배경인 듯했다.
"그 합법적인 명분이라는 것은... 십오 년마다 다가오는, 성 크투차가의 축일. 백이십년 전 십자군에서 삿된 것과 맞서다 희생한 그 성인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카사노 주교는 그 성인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여지껏 나사렘에서 있었던 어떤 번제보다도 거대한 번제를 올릴 생각입니다."
"성 크투차가의 축일이라면... 일주일 뒤로군."
아셀라이가 중얼거렸다. 그웬돌린은 체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그 실상은 자신의 마력을 키우기 위한 축양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누가 거기에 반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셀라이는 그러나 그 말이 품고 있는 미묘한 울림을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부탁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 막아 달라는 건가? 내가?"
"아니오, 저도 제가 하는 짓이 종단의 규범에서 벗어난 일인 줄은 알지요. 어찌 감히 그런 일을 부탁드리겠습니까, 다만, 조금 다른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웬돌린은 이렇게 흉험한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 모르고 잠자고 있는 꼬마. 그 꼬마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한다.
"이 아이를 맡아주십시오."
"이유는?"
"인마궁께서는 이런 아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군. 그 이유는?"
침묵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웬돌린은, 결코 침묵으로 말을 끝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년도 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야만인과 외신의 침략이 일어났을 때. 인류의 운명이 미증유의 위기에 처했을 때. 아탕칼리를 중심으로 십자군이 결성되었지요."
그 말에 아셀라이의 눈초리가 흔들린다. 아이는 갑자기 그웬돌린이 왜 그런 옛날 얘기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 때 인류는, 모든 이성은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흡혈귀 중에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 비록 몸은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나, 그 영혼은 빛을 섬길 자세를 가진 자. 그런 자들을 가려 뽑아 따로 성기사단을 꾸렸다는 얘기가, 비사로 교단 내부에 전해지고 있던데 말이죠."
"너..."
"빛을 섬기는 자. 라디오소. 그 어원은 광휘 따위가 아니라, 원래 그 흡혈귀의 기사단이 아닌지요. 그리고, 인마궁께서도 그 시절의 사람이 아니신지."
그렇다면 이 사람은 열 아홉도 아니거니와, 스물 아홉도 일흔도 아니고. 아이는 경악에 찬 얼굴로 아셀라이를 바라보았다. 아탕칼리의 교단 내부에서도 일부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들이 치부라고 생각해서 숨기고 있던 역사. 그것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셈이었다.
"그 근거는?"
"당신께는 옛 사람들의 정취가 풍깁니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정취 말입니다. 갈등도 증오도 없이 하나로 단결된 인류, 아아,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해 본 영혼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질투가 일 정도로 고아한... 그리고, 그렇게 인류가 뭉친 사건이라곤 이백여 년 안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없는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그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어."
"그래서 저는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 아이를, 당신의 종자로 삼아주십시오. 이 아이 뿐이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태어날 나사렘의 모든 죄 없는 흡혈귀를, 저주받은 육체를 타고 태어난 자들을, 당신과 같은 성기사로 길러 주십시오. 아니,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이 아이들만이라도, 손 닿는 안에서라도 구해주십시오. 그것이 제 청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이 동쪽 교회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성기사가 이 교회에 함부로 불을 지르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명백했다. 얼마 못 가, 난파한 배처럼 부서지겠지. 그 전에 이 아이들만이라도 거두어달라고, 자신의 감정을 담아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간곡한 부탁이 아셀라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녀는 한숨을 내쉰다.
"그래,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더 잘 보이는 것도 있기 마련인가 보군."
수긍하는 아셀라이.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그웬돌린을 노리고 뽑혀 있던 검을 거두어들인다. 나비검은 의수의 형태가 되어 다시 팔에 달라붙었다. 그녀를 변절자로 지목한 것, 그 의혹을 거두겠다는 뜻이었다.
"저, 그 말뜻은, 제 청을 들어주시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아이가 듣기에도 그렇게 들렸다. 아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아셀라이의 성품으로 미루어 지켜보았을 때, 그녀는 이런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거절한다."
여지도 주지 않는, 분명한 거절의 선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