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영생 ( 2 )
눈 먼 주교 그웬돌린. 그녀는 귀도 먹어버린 듯, 거절의 말을 듣고도 침묵했다. 설마 거절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느낌이 확 전해져오는 행동이었다.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가엾은 아이는, 당신의 동족..."
"그건 나병 환자들이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지한 행동이야. 또 예의 없는 행동이기도 하지."
"그럼, 당신께 빌건대 그 자비에 기대어..."
"그웬돌린 주교!"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찍는 아셀라이. 처음으로 보이는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탁자가 흔들리고, 촛불도 흔들린다.
"익숙하지 않은 모략은 진심보다 못한 법이야.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로 당신이 봉사의 정신, 그 한 가지 이유로 내게 그런 부탁을 했다면, 왜 아이들 전체를 맡아달라 하지 않은 건가? 내가 저 아이 하나만 데리고 여기서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올바른 지적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웬돌린이 개인적인 긍휼함으로 아이들의 구명을 바랬다면, 힘들더라도 아이들 전체를 맡아줄 것을 바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한 명만을 부탁했다. 부탁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그런 계산적인 이유는 긍휼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문 그웬돌린.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본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께서 이 아이를 종자로 삼아주신다면, 저는 그 사실을 명분으로 어떤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떤?"
"라디오소의 전통. 흡혈귀 중 신실한 자를 골라 성기사로 삼는 전통 말입니다."
그녀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특별한 예외로 결성되었던 흡혈귀의 성기사단. 그 명맥은 끊어져 옛이야기로 전승될 뿐이다. 하지만 그 옛 이야기에는 산 증인이 있었다.
단 한 명. 아셀라이 클라릿체, 그녀였다.
그녀가 죽지 않는 한 아직 그 전통도, 그 전통을 위해 마련된 모든 특례와 규율도 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주교에게 충분히 활용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다시 한 번, 이 나사렘에.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섬기는 기묘한 형태의 공존. 그걸 되살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가 어린 흡혈귀를 자신의 종자로 삼는다면, 그웬돌린은 그것을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라디오소, 그 전설 속의 기사단이 부활했노라고.
"그리고 그 이름을 팔아 카사노 주교에게 맞서... 이 아이들로 그 첫 번째 기수를 채울 생각이었죠."
만일 누군가가 이 아이들을 해치려고 든다면, 옛날 그 흡혈귀 십자군을 위해 만들어졌던 해묵은 조항들을 꺼내 반박할 생각이었다. 아셀라이가 그 과거와의 연결고리였다.
보라! 그 십자군을 위한 성기사였던 아셀라이가 이 기사단의 일원이다! 고로 이 기사단은 그 전설 속의 라디오소가 맞다! 고로 그 신성한 특례를 존중하라!
그웬돌린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반박할 말은 없었다.
"소년소녀 십자군인가? 참 대단한 계획이었군. 어린아이를 미끼로 나를 끌어들인다는 그 수단은 언제부터 준비한 건가?"
"구상은 예전부터 해 두었으나, 이것을 실현할 기회가 없어..."
"방금 준비했다는 뜻이군."
"예."
앞으로 나사렘의 모든 흡혈귀가 그 기사단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아탕칼리의 교회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촛불과 등잔으로 모든 뒷골목에서 밤을 지워버리겠다, 그런 선언처럼 원대하고 또 터무니없는 목표.
그 이상은 과연 존중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 실천의 수단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해서 자네가 얻을 건 무엇인가?"
날 선 아셀라이의 질문. 그러나 그웬돌린은 차분히 대답한다.
"저로 인해 더 안온해질 이 땅, 그리고 제가 죽어도 영생할 화합입니다."
아셀라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미치광이들 사이에선 주교복을 입는 게 유행이라고 했었지, 과연 유행이군. 카사노와는 다른 형태의 광신이 자네를 사로잡고 있어."
"칭찬 감사합니다."
"자네의 그 터무니없는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우리 둘 말고 달리 있나?"
촛불은 어느새 그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거의 녹아내린 초는 흰 눈물처럼 촛농을 흘리고, 그 뒤엔 그림자가 길게 고인다. 그웬돌린의 그림자도 일렁였다. 촛불이 완전히 꺼지고, 그 그림자가 어둠 속에 삼켜지고 나서야. 그녀는 드디어 대답했다.
"카사노 주교. 그분이 일 년간 다른 태도를 보일 때에... 혹시나, 협력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털어놓았습니다."
그 말에는 아이도 어이없다는 듯 그웬돌린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면, 서쪽 교회 입장에서는 동쪽 교회를 이단자로 생각한다 해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그 실책이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웬돌린. 이어 말한다.
"이것이 가감 없는 진실입니다. 그럼, 혹시 협력을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아셀라이는 말을 흐린다. 그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이 차가운 밤공기와 만나 바스라진다. 그웬돌린, 그 눈먼 주교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긴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땅의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 있었던 아름다운 화합. 그 유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증거물입니다. 부정하게 태어난 것은 그 삶으로 순수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에, 오히려 더 순수할 수 있다는 것. 그 궤변 같은 명제의 유일한 증인입니다. 당신이 죽으면, 이 세상의 모든 화합이 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시금 당신 같은 기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세월과 얼마나 많은 피가 필요할까요?"
과연, 어설픈 모략보다는 진심. 그것이 더 호소력 짙었다.
"그 화합이 대를 이어 전승되며 또 수많은 밀알을 맺을 수 있도록, 부디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아셀라이는 얼굴을 숙인다. 두 갈래로 나눈 긴 옆머리가 보리수처럼 드리운다. 창밖에 들이치는 희뿌연 달빛, 그것이 아셀라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비춘다. 아련하게.
"나는..."
그 비스듬히 쏟아지는 달빛의 길, 그 위를 먼지가 부옇게 떠다닌다. 그 방황하는 먼지의 움직임이, 어쩐지 아셀라이의 고뇌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대답이 떨어졌다.
"거절한다."
대답은 같았다. 그러나 표정은 다르다. 아까 그 얼굴이 담고 있는 것이 결연한 분노였다면, 지금은 어떤 슬픔이었다.
"그렇습니까."
의외로 상심하지 않은 듯 자그마하게 대답하는 그웬돌린. 아셀라이는 그 뒤 변명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최소한의 조력은 약속하지. 여기 이 녀석과 함께, 그 크투차가의 축일까지 이 교회를 지켜 주겠다. 그래도 괜찮겠지, 소년?"
씩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치는 아셀라이. 아이는 투명한 눈으로, 그런 아셀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은 어쩐지 허망해 보여서, 또 맞지 않는 배역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여서. 거절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예."
대답과 동시에 울리는 종. 자정을 알리는 종이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교회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흔히들 삶을 전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가정에서의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다고. 철이 들고 삶 대부분을 진짜 전장에서 살아온 아이는 은연중에 그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바뀌었다.
"대체 31인분 빨래를 어떻게 혼자서 다 했던 거지?"
펄럭이는 흰옷들을 빨래바구니에 거두어들이며 말하는 아이. 그 표정은 질려 있었다. 그는 지금 수도원의 일과를 돕는 중이었다. 일상, 그리고 육아의 험난함을 온 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그날 밤부터 식객으로 그웬돌린의 교회에 머물게 된 아이와 아셀라이. 그들은 곧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웬돌린의 일과를 보았다. 그리고 식객 된 도리상 그런 그웬돌린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보자, 이걸 다 한 다음에는 돼지 피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그 다음에도 이런저런 일이 가득하다. 한숨을 내쉬는 아이. 그 일과는 침대로 향하는 터널 같았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침대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당신! 당신도 좀 제대로 해요!"
아직도 저편 붉은 빨랫줄에 빨래가 잔뜩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 그 빨랫감들은 아셀라이가 걷기로 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입에 풀 한줄기를 물고서는, 푸른 풀밭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응? 난 이미 내 일을 끝마쳤다구."
"무슨 소리에요?"
"자."
누운 채로 까딱 팔을 움직이는 아셀라이. 그러자 손에 낀 케이론이 빛나고, 수십 장의 세탁물이 허공으로 치솟아 곧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겼다. 신기를 이용해 한 번에 일을 끝마친 것이었다.
"이, 무슨... 그럼 제 것도 해 주면 좋잖아요!"
그 말에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아셀라이. 그녀는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줍더니, 바닥에 직직 선을 긋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리나 보았더니 바둑판이다. 그녀는 땅바닥에 적당한 바둑판을 그려 놓고서는, 나뭇가지로 아이를 가리킨다.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 내기할까? 오목으로 대결하자, 소년. 만일 네가 이기면 앞으로 빨랫감은 전부 내가 처리해주지."
"지면요?"
"돼지 피 항아리를 받는 심부름, 그건 소년 혼자 하도록."
케이론으로 대충 처리할 수 없는 다음 일과. 그것을 처리하기 귀찮아 이런 내기를 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손해 볼 것은 없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빨랫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 아셀라이에게 다가간다.
오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얼굴을 찌푸린 것은 아셀라이였다.
"여기 두지 않으면 못 막는데, 삼삼이군."
"그렇죠."
"왜 삼삼이지?"
"삼삼을 두셨으니까요."
우문현답이었다. 아셀라이는 한 방 먹은 표정이 되었다. 아이는 씩 웃으며,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마레와 동행하던 시절, 밤마다 바둑돌로 이런저런 놀이를 했던 덕에, 아이는 이런 놀이에 꽤 강한 편이었다.
"그럼 제가 이겼으니..."
"연습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고, 본 게임을 시작해볼까?"
"예?"
치사한 억지였다. 정말로 어린아이나 부릴 법한 억지. 하지만 실랑이 끝에 아이는 그 억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셀라이가 질 때마다 그 연습게임은 횟수를 더해갔다.
"그럼 소년, 잘 부탁한다!"
"제발 나잇값 좀 하세요!"
다섯 번의 연습 게임 끝에 결국 아이는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도 연습 게임이라고 주장했지만, 아셀라이는 쏜살같이 달아날 뿐이었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 그게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였다.
교회에서의 일주일, 그 날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카사노와 서쪽 교회의 위협을 기다렸건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하루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그러나 아셀라이가 언제나 그렇게 어린아이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좋은 스승이었다.
"어디보자, 이거론 누굴 깎아 볼까..."
땔감을 사올 돈을 아껴야 했으므로 이 교회는 땔감을 직접 조달했다. 산에서 장작을 패 땔감을 조달하는 것, 그것 역시 아이의 일이 되었다. 아셀라이는 거기에 특별한 주문을 더했다.
"장작을 아궁이나 난로에 던져넣기 전에, 그것으로 조각상을 깎아 보도록. 손을 쓰지 않고, 신기로 도끼날을 움직여서 말이야."
수련의 일환이었다. 독 조각칼로 조각상을 깎게 시키던 그 수련과 같은 맥락이다. 신기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인 듯 했다. 성기사들과 싸우며 얻은 깨달음 덕분일까, 도끼날을 신기로 띄워 조각을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것은 다른 일이었다.
조각상의 소재를 찾는 일이었다. 하루에 쓰는 장작의 수는 오십여 개. 즉 오십여 개나 되는 소재가 매일 필요했다. 그렇게 많은 소재를 찾아내는 건 조각가에게도 어려운 일일 터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얼굴을 조각했다. 그 솜씨도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얼굴만 열 개를 조각하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다나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다나의 얼굴만을 조각했다. 그러자 조금씩 솜씨가 늘기 시작했다. 꽤나 그럴듯한 목조 조각상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아이가 원래 손재주가 좋은 편이기에 실력이 느는 속도도 빨랐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그때쯤 되자 이제 도끼날 정도는 정말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도끼로 아주 자그마한 눈썹까지 조각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한 아이는, 조금 더 어려운 것을 조각해보기로 결심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과 팔다리를 포함한, 전신 조각상을 조각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문제가 생겼다. 몸을 조각하자니 세밀한 부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조각하기 위해선 자료가 필요했다. 완벽한 얼굴, 그리고 엉성한 몸통의 조각상을 잔뜩 만들고 고민하던 아이. 그는 곧 자신이 자료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블로어의 의뢰서.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레이븐사이드의 일원들의 인상착의며 생김새, 주로 하는 머리카락 모양까지 모든 것이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또 함께 오랜 세월 부대꼈던 사람들인 만큼, 눈만 감아도 또렷하게 그 형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이는 사흘째부터 의뢰서를 옆에 두고 레이븐사이드의 사람들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블레어도, 잰슨도, 레고르도(*
조각을 끝내자마자 네 토막을 내 불 속에 던졌다.). 하지만 제일 많이 조각한 것, 또 공들여 조각한 것은 란페이였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때로는 불을 지피는 것이 아니라 조각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아이는 조각에 몰두했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조각상을 모아놓고 바라보면,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꺼내 거기에 내려놓은 것처럼 보여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어딘가에서 파도처럼 철썩이던 불안함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쩌면, 검의 수련보다 더 큰 뜻이 있어서 조각을 하라고 시켰던 걸지도.
아이는 턱을 괴고 자신이 만든 조각상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
그렇게 레이븐사이드 사람들의 조각을 만들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에겐 귀여운 협박자가 생겼다.
언제나처럼 란페이의 조각을 하나 만들어 올려놓고, 냇가에 가서 땀을 닦고 돌아온 아이. 그런데 돌아와 보니 뜻밖의 여자아이가 그 조각 앞에 있었다. 그웬돌린이 맡고 있는 아이 중 하나인데, 확실하게 기억에 있는 아이였다. 흔치 않은 특징, 쌍둥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쌍둥이는 붉은 머리의 쌍둥이 자매였다. 활달하고 말이 많은 쪽이 언니, 조용하고 숫기 없는 쪽이 동생이라고 했다. 언니 쪽이 엘렌이고 동생 쪽이 셀렌이라고 하던가. 그런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언니, 엘렌인 것 같았다.
왜 위험하게 바깥에 나왔니, 라고 아이가 말하기도 전. 엘렌은 눈을 빛내며 조각상을 집어 들고 아이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응?"
"당신, 천사죠?"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엘렌. 그리고는 으스대며 자신의 추론을 늘어놓는다. 아이의 생김새나 하는 짓으로 보아, 동화에 나오는 천사. 벌을 받고 날개를 잃어 떨어진 천사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들키면 영영 못 돌아가는 거죠? 그렇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엘렌. 아이는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그냥 웃으며 손가락을 세우고 쉿 이라고 말해주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엘렌. 대신 조건이 붙었다. 앞으로 아이가 떠날 때까지 매일 자신이 여기 찾아오는 것을 묵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묵인하지 않고 그웬돌린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치면, 아이가 천사라는 사실을 까발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뒤따랐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그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