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영생 ( 5 )
대검은 검을 베어낸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레바테인, 그 검날은 삿된 기사의 검과 부딪히고, 매캐한 검은 기운을 쳐부수고, 검날을 지저분하게 박살냈다. 척, 아이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다. 끝까지 휘둘러져 왼쪽에 다다른 레바테인, 그 손잡이를 세게 쥐어 잡았다. 손잡이의 까끌까끌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져온다.
바웅! 그대로, 휘두른 궤적 그대로 방향만 바꾸어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다시금 날아드는 참마의 대검. 그 거대한 칼날은 텅 빈 기사의 몸을 덮친다. 퍽! 둔탁한 소리. 검날은 갑옷을 깨부수고 파편을 날린다. 허릿살에 처박힌다. 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했다.
"윽, 뭐야!"
고함을 내지르는 아이. 끈적한 늪이나 수렁에 검을 휘두른 느낌이었다. 삿된 기사의 살점은 찐득했다. 그 찐득함에 처박힌 검날은 쉽사리 나아가질 못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손잡이를 더 세게 붙잡고 그 검날에 신기를, 베고자 하는 의념을 붓는다. 검날 위에서 불꽃처럼 춤추는 붉은 신기.
"사라져라!"
기합. 레바테인은 그 살점을 뚫고 삿된 기사의 상반신을 절단해냈다. 척추뼈를 토막낸 느낌, 그 불길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반 토막난 기사의 상반신은 뒤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ㅡㅡㅡㅡㅡㅡ!!!"
만족감을 느낄 틈은 없었다. 또 다른 삿된 기사가 덮쳐온다. 아이는 황급히 레바테인의 손잡이 끝으로 그 검을 막아냈다. 쩡, 쇠와 쇠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 삿된 기사의 검날은 손잡이를 치고 미끄러져 아이의 손을 노린다.
"윽!"
레바테인을 크게 휘둘러 물리쳤다. 바짝 당겨 쥔다. 이번엔 베는 대신 찌르기로 나섰다. 검날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벼락처럼. 어렵지 않게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이놈은 심장에 날이 쳐박혀도 죽지 않았다.
"ㅡㅡㅡㅡ!!!"
심장을 꿰뚫린 채로 아이의 얼굴을 깨물려 드는 삿된 기사. 누런 이빨, 그리고 역겨운 숨이 아이의 얼굴을 덮친다. 아이는 손잡이를 놓고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심장을 잃고도 죽지 않았다면, 상반신을 베여 두 토막이 나도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까 쓰러졌던 상반신이 토막난 기사. 반쪽만 남은 그것도 살아 있었다. 그가 검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이의 발을 덮친 것이다.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한 아이는 크게 청원했다.
"림, 미제리코드!"
그 손에 나타나는 십자형의 단검. 콱. 아이는 이 기괴한 상반신의 목에 독검을 박았다. 허벅지를 물어뜯는 그 몸뚱이에 독을 흘려 넣는다. 재생력을 가진 것을 죽이기 위한, 이 자비로운 단검은 과연 이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그 괴물의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바들바들 떨며 죽어가기 시작한다.
"ㅡㅡㅡㅡㅡ!!!!"
또 다른 공격이 아이를 덮쳤다. 날카로운 파공음. 익숙한 파공음이었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고 있다. 아이는 황급히 팔을 들어 그 화살을 막았다. 팔뚝에 화살이 박힌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세 번째 삿된 기사, 그가 쏘아낸 것이었다. 팔뚝 한가운데 박힌 볼트가 삼각의 꼬리를 흔들댄다. 하지만 아이는 그걸 뽑을 시간조차 없었다.
가슴에 레바테인이 꽂힌 기사. 그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손바닥에 입, 그리고 이빨이 돋아 있었다. 괴성을 지른 것은 그 입이었다. 뱀장어 같은 혀를 낼름대며 아이의 얼굴을 노린다. 그 팔뚝을 잡았다. 자신의 팔뚝에 꽂힌 볼트를 뽑아, 그 아가리에 쑤셔 넣는다. 이빨이 부러지고 피가 튀었다.
그 팔을 비틀어 꺾으며 돌진한다. 삿된 기사의 품에 안기는 듯한 돌진, 그 목표는 하나였다. 괴물의 가슴에 꽂힌 레바테인의 손잡이였다. 붙잡는다.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바닥에 쑤셔넣는다.
"ㅡㅡㅡㅡㅡ!!!"
흙이 튀고 돌을 쪼개고 또 피가 튀었다. 괴성을 지르며 온몸을 뒤트는 기사.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검게 물들인다. 그것은 생명을 왜곡하는 힘이 있는 듯, 그 피에 닿은 들풀 위에는 괴이쩍은 살점 조각이 생겨나 혈관을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끔찍하다.
아이는 이를 악문다. 탈라사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제리코드를 불렀다. 이놈들은 저번에 보았던 그 개보다 훨씬 진화된 형태 같아. 재생력도 훨씬 강한데.
고로 미제리코드를 찔러넣어야만 이놈들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침과 점액을 토하며 바둥대는 두 번째 삿된 기사의 입에 미제리코드를 꽂아넣었다.
"ㅡㅡㅡㅡㅡㅡ!!!"
등 뒤에 엄습하는 한기. 그것을 느낀 건 그 직후였다. 멀리서 석궁을 쏘던 삿된 기사가 덮쳐든 것이다. 육중한 무게가 뒤로부터 아이를 바닥에 깔아뭉갠다. 아이는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안간힘을 써 위를 바라본다. 삿된 기사, 그 외신의 힘으로 변형된 괴물의 얼굴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자세가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자는 갑옷도 제대로 입고 있지 못하다. 변형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었다. 갈비뼈가 바깥으로 덧자란 것인가? 배와 가슴에 하얗고 커다란 갈비뼈가 빼곡히 빛난다. 코끼리의 상아 같다. 그 얼굴에는 두족류의 촉수 같은 부정형의 종기가 아우성치고 있다. 옹송그린다. 절망을, 허무를.
"큭!"
아무래도 이것에는 바라보는 자의 정신을 부수는 마술적 힘이 깃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지러움, 그리고 무력감이 어딘가에서 치솟았다. 살점과 살점이 아우성치며 들끓는 소리, 그 소리가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들린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잠들 것 같다. 정신 차려! 아이는 입술을 정말 세게 깨물었다. 피가 흐르고 짭쪼름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피를 내니 정신이 돌아왔다. 주먹을 쥐고 그 얼굴에 강한 펀치를 갈겼다.
퍽! 깨져서 튀는 이빨. 다시 주먹을 갈긴다. 한 손으로는 그 놈의 목을 붙잡고, 손등에 피가 튀는 것도 그 촉수가 묻는 것도 아랑곳않고 계속 갈겼다.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그것은 다른 대응을 시작했다.
"ㅡㅡㅡㅡㅡㅡ!!!"
그것은 눈을 떴다. 그 수천 개의 촉수, 그 모든 것이 다 눈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 촉수 끝에 달려 있던 둥그란 것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아이를 바라본다. 정신을 공격한다. 이 개체는 이렇게 정신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개체인 모양이다.
"이상한, 짓거리, 그만 둬!"
끔찍한 생각이 혈관을 뜨겁게 흐르는 느낌. 견디기 힘들다. 고함을 내지르는 아이. 빨리 이 녀석을 죽여야 한다, 그 생각만이 뇌리를 가득 점했다. 아이는 손을 내뻗어 하얗게 도드라진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그것을 단검처럼 쥐고 마구 내찌른다. 피가 튄다. 뜨끈하게 흘러나온 창자가 아이의 배를 검게 물들인다. 비명에 찬 괴성. 하지만 이 놈은 괴성을 내지를 뿐 죽지 않았다.
"빨리, 빨리 이 놈을 죽여야."
하지만 어떻게? 이 놈들은 미제리코드를 사용해야만 죽일 수 있는데, 아직 미제리코드는 두 번째 기사에게 독을 불어넣는 중이다. 그 외에, 이 놈들을 죽일 방법은.
"아."
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내 힘을 쓰라는 말을.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청원하고 있었다.
"림, 유혼!"
츠츠츠, 그 손 안에 늑대의 이빨을 닮은 검이 솟아난다. 그것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존재를 지워버리는 외신의 힘, 위험하기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 힘을 사용한 것이었다. 검게 끓어오르는 유혼. 손잡이를 붙잡고, 크게 휘둘렀다.
부욱!
가죽북을 찢는 듯한 소리. 유혼은, 그리고 그 검날에 들러붙은 검은 기운은 마지막 기사의 목을 간단하게 베어냈다. 그는 다시는 살아나지 못했다. 존재를 지워버리는 힘이라고 했던가, 이건 미제리코드보다도 훨씬 더 깔끔하게 외신을 죽일 수 있구나.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쿨럭, 쿡."
그러나 어지러움은 끝나지 않았다. 외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마지막 괴물의 정신 공격 때문일까. 사방이 뱅글뱅글 도는 듯 방향감도 거리감도 없다. 만물의 색채가 흐리고 빛도 난잡하게 보인다. 물을 부어 망가뜨린 유채화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구역질 나는 몽환을 배경으로, 또 어두운 목소리가 요설을 늘어놓는다.
-보았나? 타자라는 것의 진정한 실체를. 모든 인간은 저렇다. 너와 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의 정신이 왜소하기 때문이다. 체념해라. 체념을 받아 들여라...
닥쳐, 중얼거려 물리쳤다. 아이는 간신히 유혼을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런 어지러움을 느낄 때에는, 어디까지나 뚫려 있는 탁 트인 하늘. 그 공활함을 응시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아아, 역시, 저 하늘에는 반만 뜬 눈동자 같은 반달이.
"어?"
없었다. 그 대신에 있는 것은 벽화였다. 지옥을 그린 벽화. 천장 벽화. 프레스코화. 아이는 자신이 어느새 나사렘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교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환각인가? 아까 그 괴물이 남긴 환각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것인가?
어디선가 늙은 음성이 들려온다.. 판사의 선고처럼 낭랑한 소리였다. 그러나 거기엔 한 줌의 광기가 어려 있었다.
"네 주께서 사람의 사이에 숨은 악종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교회의 벽면에 가득한 스테인드 글라스. 거기 새겨진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교회의 중심에 선 아이를 바라본다. 어둡고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아이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망쳐야 하는 것인가? 발을 움직이려는 아이는, 그제서야 자신의 발에, 팔에, 사지에 사슬이 매여 있음을 깨달았다.
"너는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다. 진멸하라. 진멸하고 또 진멸하라. 너에게는 오히려 자비가 없는 것이 낫도다."
잔인한 원시의 기도문. 그 낭독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나자, 교회의 천장에 새겨진 커다란 천사가 그림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푸른색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천사였다. 그 손에는 불타는 검이 들려 있다. 그것으로 묶여 있는 아이의 머리를 쪼갤 생각인 듯싶었다.
이게 대체 뭐야? 아이는 온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사슬은 쩔그렁댈 뿐 끊어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접근해오는 불의 검. 어느새 눈 앞까지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에 불그림자가 일렁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전혀 뜨겁지 않다. 그제서야 아이는 깨달았다.
"환술! 환술이구나!"
고함을 내지른다. 다음 순간, 아이는 다시 그 공터에 돌아와 있었다. 삼십 명의 성기사와, 세 명의 삿된 기사를 무찌른 그 공터에.
마레와 동행한 경험이 있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탕칼리의 마술사, 지치고 방심한 틈을 타 그가 환술을 걸어 현혹했던 것이다. 아주 고위의 마술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눈 바로 앞에 천사가 단검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환술 속에서 보았던 그 푸른 옷의 천사가.
"꺼져!"
재빨리 유혼을 휘둘러 천사를 물러나게 하는 아이. 그런데 몸이 무거웠다. 왜 그런가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사지에 수갑과 족쇄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 하나된 검푸른 사슬은 저 천사의 옷자락으로 이어졌다. 아이가 환술에 걸려 있는 동안, 사지에 묶어둔 모양이었다.
"자네 꽤 대단하군. 대단한 악마의 자식이야. 5위계의 마술사가 부리는 천사, 알다리엘에게 구속당하고도 움직일 수 있는 놈은 얼마 없는데 말일세."
절망의 천사 알다리엘. 눈앞에 선 푸른 옷의 천사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 강력한 천사를 부릴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그건 정해져 있었다. 공터 저편의 수림, 그 밑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 목에선 흡혈귀의 이빨을 모아 만든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자네가 죽으면, 특별히 어금니를 뽑아 이 목걸이의 한가운데에 장식해 줌세.
"카사노...!"
카사노 센모레노. 그 증오에 미친 주교가 아이를 잡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으르렁거리며 유혼을 곧추세우는 아이. 소리지른다.
"당신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아니겠지. 악마의 피가 섞인 아나테마라니. 내가 지금까지 사냥해온 모든 악의 무리를 응축한 것 같은 괴물을 나 혼자 어떻게 죽이겠나."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당연한 걸지도.
카사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방에서 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탕칼리의 심문관, 마술사, 성기사. 동쪽 교회의 모든 전력이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이들이 공터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다.
"거기에 그 사슬을 차고 있으니, 힘의 반도 쓰지 못하겠지. 늙으면 교활해지는 법일세.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웃으며 말하는 카사노. 과연, 그런가. 아이는 상황을 검토했다. 이 정도까지 적이 많다면, 아무리 이 마술사 살해의 사도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는 승리를 장담해서 싸움에 나섰단 말인가. 아이는 말없이 유혼에 신기를 밀어넣었다.
공터의 중앙에 오연히 서 있는 하얀 검사. 반달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무정하게 그를 비춘다. 일촉즉발의 상황, 모두가 아이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장난은 거기까지."
쿵! 큰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금빛 대검. 금빛 대검이 알다리엘과 아이를 이어놓은 사슬을 잘라낸다. 그 대검 위에는 한 사람이 올라타 있었다. 완벽한 성기사의 복장을 한, 외팔이의 검사가.
"너무 늦어서 찾아왔더니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었군? 나도 좀 참가해도 되나?"
아셀라이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녀가 찾아온 것이었다. 아이가 감탄, 그리고 감사의 말을 건넬 새도 주지 않고, 카사노가 흉험하게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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