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86화 (86/279)

15. 영생 ( 6 )

그 외침은 칼 부딪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사수자리의 성좌, 그가 검을 휘두르자, 망토는 금빛으로 부서져 수천 개의 칼로 변했다. 아주 작은 칼날들. 그것은 수십 개의 검으로 변하더니, 쏜살같이 날아가 수십의 성기사 그리고 천사를 쓰러뜨렸다.

"개입하지 마시오!"

목소리를 쥐어짜 외치는 카사노. 그 앞에 무슨 말이 몇 마디 더 있는 듯하나, 들리지 않는다. 아셀라이는 십자검을 뽑았다. 아이를 흘깃 바라본다. 제자는 한눈에 그 뜻을 알았다. 유혼을 꼬나쥐고 자세를 취한다.

십자검에 나비검을 둘러 대검으로 만들고, 앞장서 달려드는 아셀라이. 알다리엘에게였다. 푸른 천사는 불타는 검을 들어올려 막는다. 하지만, 후속타는 막지 못했다.

"사라져라!"

아셀라이의 검을 막느라 열린 하체, 그것을 노리고 유혼이 날아든다. 푸확! 유혼은 신기에 물들어 피 젖은 송곳니처럼 번들거린다. 알다리엘의 몸을 난도질한다. 치렁한 후드가 찢겨나가고, 반투명한 육체가 부서져 흰 연기를 뿌린다. 연기는 자욱하게 치솟는다. 하늘로, 희뿌연 반달을 향해서.

"고오오오오!!!"

천사도 비명을 지르는가. 또 고통을 느끼는가. 알다리엘은 몸을 뒤틀며 날개를 폈다. 사슬로 감긴 날개였다. 그 사슬을 흔들어 두 사제를 쫓아내려 들었다. 검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인가? 사슬을 휘두른다. 검을 휘감으려는 듯이. 아이는 먼저 나서 유혼을 크게 휘둘렀다. 유혼에 사슬이 몇 바퀴나 감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셀라이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맙다, 소년!"

탈라사, 뱃사람의 기술이라고 했던가. 그처럼 자유분방한 신기. 금빛의 신기가 아셀라이의 십자검 가득 차오른다. 아셀라이의 빈 팔뚝, 거기에 반투명한 팔이 생겼다. 그 팔로 손잡이를 쥐어 잡고, 거대한 호를 그리며 알다리엘을 덮친다.

쾅!

칼을 휘두르는 소리. 그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공터를 울린다. 충격파가 터져나가 나뭇잎을 떨게 하고 잠든 다람쥐의 밤잠을 깨워 도망치게 한다.

"고오오오오!!"

연기를 흩뿌리는 알다리엘. 마지막 도끼질을 당한 고목이 쓰러지듯, 쓰러진다. 옆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 가슴팍에선 푸른 구슬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영핵이었다. 저것만 부수면 이 놈은 이제 행동불능이다. 아셀라이는 그 커다란 천사의 몸뚱이를 밟고 올라가, 등에 비끄러맨 또다른 검을 꺼내들었다. 사방은 숨죽이고 있었다.

성좌,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술사 아닌 8인의 하나. 강하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그것을 본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술사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허명으로 여기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성좌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이다. 5위계의 마술사를, 또 그 천사를 숨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찌르는 것을. 6위계 중에서도, 마탑의 학장 급은 되어야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강함이었다.

"그럼 작별이군."

검날을 세우는 아셀라이. 노리는 것은 영핵이었다. 사위어가는 어둠 속 칼날만이 반짝인다. 고요가 찾아왔다. 그것을 꽂아넣으려는 찰나,

"죽은 자가, 산 자의 일에 개입하지 마시오!"

카사노가 외쳤다. 처음에 외쳤던 그 말이었다. 아셀라이가 보여준 무위 때문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카사노는 자신의 말을 아셀라이의 고막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카사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눈매를 세우고 꺼낸 말. 하지만 거기에는,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 카사노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말을 잇는다.

"이미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금기라고 말했소. 틀렸소? 당신의 영혼은 이미 늙었소! 150년이 넘도록 살아있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이빨을 보이며 외치는 카사노. 그 목에선 흡혈귀의 이빨, 그 목걸이가 번뜩인다. 호선을 그리며. 그 모습은 어쩐지 가슴팍에도 입이 하나 달린 것처럼 보였다.

"150년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열 아홉인데."

"처음에, 나는 당신이 찾아온 것을 알고 당신을 죽이려 들었소. 하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알겠더군.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걸. 당신은 이미 죽었소."

"뭐?"

"내게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영혼은 이미 죽었소. 주께서는 하나의 영혼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소. 주께선 육에 집착해 장수를 탐하는 자에게 벌을 내린단 말이오. 영혼 안에서부터 내파하도록. 이미 모든 것을 질리도록 경험해서, 어떤 것에도 열의를 가질 수 없도록 말이오. 다시 말해도 괜찮겠소? 당신은 죽었소. 영혼이 죽었소."

미친 듯이 폭론을 내뿜는 카사노.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작은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쏟아졌기에, 어째서인지 가슴에서 그 말이 터지는 듯 보였다. 폭론은 이어진다.

"피로하고 마모되고 닳아빠져서, 이미 어떤 슬픔도 어떤 기쁨도 누릴 수 없는 상태요. 그래서 연기를 하고 있겠지. 연극조로. 그 어울리지 않는 소년 흉내, 그것이 증거요. 나는 흡혈귀의 전문가요. 그것은 영생, 그 저주받은 가짜 영생의 전문가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오."

그 미친 주교는 과장되게 손을 내뻗는다.

"칼라일! 당신의 증세는 그 저주받을 짐승들의 조직, 그 우두머리와 똑같소! 그 자는 내가 올 때 이미 죽어가고 있었소. 영혼이 죽어서, 그저 방탕과 향락에 젖어 피 속에 누워 있을 뿐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고 그 뱃심엔 철학도 무엇도 없었소. 내가 그 자 앞에 나타나자,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내 흉내를 내기 시작했소! 내 흉내를 내어 내가 목자를 사목하듯 그 삿된 것들을 이끌기 시작했소! 어느 날, 마주친 날,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물었지. 영혼이 이미 죽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더군. 이미 불이 꺼진 행성처럼, 다른 영혼의 빛을 받아야만 육을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게 말로요. 그게 당신 같은 가짜 영생자의 말로고 당신도 마찬가지요! 그 역겨운 몸뚱이로 대체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오?"

침묵하는 아셀라이. 그 틈을 틈타, 카사노는 알다리엘을 거두어들였다. 푸른 연기로 변해 녹아내리는 알다리엘. 얼음을 흩뿌린 듯 냉기와 연기가 매캐하게 퍼져나간다. 아셀라이는 연기 사이에 서 있었다. 입을 다문 채였다. 시간이 흐른다. 대답한다.

"글쎼, 적어도 당신은 아니겠지."

"흉내를 낸다는 것은 시인하는 것이오? 이미 죽어 나자빠진 시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오?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소?"

"아니, 어린아이를 매달지 못해 환장한 미친 늙은이나, 그런 주제에 외신으로 동료를 욕보이는 치매 환자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 말을 듣자 광소를 터뜨리는 카사노. 역겨운 반응이다. 아이는 중얼거렸다. 림을 향해서였다.

"곧 새 검을 만들어야겠는데. 준비해줘."

'여부가 있겠느냐.'

투명한 눈으로 대답하는 림. 아직 아탕칼리의 검은 만들지 못했다. 그걸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제물은 저 늙은이였다. 아이가 소리쳤다.

"잘도 가짜 영생이니 장수니, 그딴 말을 꺼내는군요. 당신도 죽음이 두려운 것 아닙니까? 두려워서 그런 핑계를 대고 내일, 축일 날 축양을 하려고 한다는 것,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오, 그래, 그럼 고발하거라. 축양하고 외신의 힘을 빌리고 온갖 추잡한 짓을 했다고 고발해. 나는 그저 참을 수 없을 뿐이다. 내가 그 빌어먹을 흡혈귀 쪼가리보다, 일찍 죽는다는 것을, 결국 그 놈에게 승리했다는 여지를 주는 것을. 만약 그 놈을 잡아다 죽여주면, 바로 당장에라도 자결해주마."

비아냥조. 연극적인 말투였다. 아이는 일축했다.

"거짓말. 그 다음에는 다음 핑계를 찾아내겠죠. 살아야만 하는 핑계 말입니다."

콰콰콰, 아이가 내뻗은 유혼에서 신기가 흘러넘친다. 어깨넓이로 벌려 섰다. 언제든지 덮칠 수 있도록.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카사노는 이상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시하고, 아셀라이를 쳐다보며.

"뭐라고 떠들어도 좋소. 하지만 내일, 성 크투차가께서 지켜보시는 축일, 그 날에 있을 일만큼은 내 일생의 모든 것을 바쳐도 이루어내야만 하오.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주께 부끄럼 한 점 없소. 당신들이 그것을 방해하게 할 수는 없소."

"그럼 막아보라고. 간다."

츠츠츠, 일어나는 나비검들. 그것은 하나의 성운을 이룬 듯 보인다. 두 사람을 둘러싼 카사노의 교회의 사람들은 놀라서 몸을 움츠린다. 하지만 카사노는 달랐다. 여전히 광기 어린 얼굴로 말한다.

"제안하지. 그 눈먼 여주교, 그녀가 보호하는 아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겠소. 앞으로도 계속. 당신이 떠난 후에도 그것은 지켜질 것이오. 대신 당신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떠나 주시오."

"의미 없는 제안이군. 여기서 네 그릇된 교회의 총원을 전부 죽이면, 자연스럽게 그들은 안전해지는 것 아닌가?"

"의미 없지 않소. 당신이 떠난 후엔 어떻게 할 것이오? 새로 주교가 부임될 때마다 족족 다 죽일 작정이시오?"

입을 다무는 아셀라이. 그의 말대로였다. 카사노는 계속 말을 잇는다.

"영구적인 안전을 약속하겠소. 그 대가는."

"뭔가, 네가 여기서 저지른 모든 사특한 죄들을 랭 교구에 보고하지 말고 숨겨달라, 뭐 그런 건가?"

"반대요. 여기에서 떠나서, 당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 랭 교구에 보고하시오. 오늘 당장. 그게 내 조건이오."

그 말에 놀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셀라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셀라이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자가 직소한다면, 흡혈귀와 축양이야 어찌 넘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외신의 힘에 손을 댄 것은 변명이 불가능했다. 그 총책임자 카사노는 운 좋아야 화형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더니 말한다.

"그 눈먼 주교가 당신에게 건넨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들었소. 이뤄줄 순 없는 제안이겠지. 나는 이해하오. 당신도 나를 이해하시오. 내일 축일에 일어날 일, 그게 내 모든 것이오."

그 말을 듣자 아셀라이의 표정이 흐려진다. 그 말은 어떤 큰 울림으로 그녀에게 닿은 것 같았다. 그웬돌린의 제안,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나. 그녀에게 카사노의 제안은 이렇게 들렸다. 그웬돌린의 방식대로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방식이라도 따르라는. 그런 말로 들린다. 카사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제안을 건넸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저울이 있다 들었소. 뭣하면 그것으로 나를 시험해도 좋소."

그것까지 알고 있는가? 카사노는 그 말을 마치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는 듯이.

대치가 계속되었다. 아이는 아셀라이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카사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줄기의 바람이 어색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또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수십 명을 감싸고 지나간다. 한참 후에야, 아셀라이는 대답했다.

"받아들이지."

그것으로 그 이상하고 답답한 대치는 끝이 났다. 그웬돌린이 보호하는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셀라이가 축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제안. 그 제안을 받는 것으로.

*

그날 밤.

"진짜 떠날 거에요? 시험은 어쩌고요?"

"통과한 셈 치자. 축하한다, 소년."

아셀라이의 방이었다. 몰래 떠날 생각인지, 불도 켜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을 아이가 급습해 들이쳤다. 열린 창문에선 파르스름한 밤빛이 쏟아져 방 한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떠나야지. 떠나야겠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셔츠의 단추를 끼우는 아셀라이. 아이는 아까 카사노가 한 말 중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물었다.

"이미 죽었다니, 그딴 비난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정확한 비난이다."

딱 잘라 말하는 아셀라이. 아이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늘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녀가, 지금은 슬픈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하루만에 어른이 되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말대로야. 그 말대로지. 흡혈귀는 흡혈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 그저 인간처럼 살다 인간처럼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교단은 그들을 반드시 배제하기로 결의했어. 그 이유가 뭔지 아나, 소년?"

"그 이유라는 게..."

"미치기 때문이야."

딱 잘라 말하는 아셀라이. 아이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닫았다.

"살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백 년 동안 그 사람에게 살구만을 먹인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그걸 좋아할 수 없겠지. 마찬가지다, 소년. 사랑하는 것도 즐거워하는 것도, 다 그 살구와 같아. 두 번째, 세 번째, 백 번째가 되면 더 이상 좋아질 순 없는 거야. 산다는 건 점점 좋아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게 죽어가는 거지. 마침내 모든 것에 싫증이 날 때, 더 이상 좋아할 게 없어졌을 때, 그 때 인간은 떠나지. 주께선 그렇게 안배한 거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조였다. 착 가라앉은 어조. 감춰두었던 본심을 꺼내는 것처럼, 돌연한 돌변이었다. 일부러 소년 흉내를 내고 있었나, 그래서. 아이는 입을 다물고, 그 하얀 입이 읊조리는 것을 들었다.

"백오십 년이나 살면, 이제 모든 것이 싫어져. 형체 있는 것일 수록 싫어지지. 그래서 해본 적 없는 것을 탐닉하기 시작한다. 살인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아귀지옥을 헤매다 재앙을 일으키고 죽는 흡혈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교단은 흡혈귀를 배제하기로 마음 먹은 거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건, 일반론이잖아요."

읊조리는 아이. 자그맣다.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작은 항변인지 알고 있기에 그렇다. 아셀라이는 마주 대답했다.

"글쎼, 나도 모르겠군. 나도 백 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자신이 없어. 매일매일이 희미해. 이런 우스운 연기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그녀가 마지막 라디오소인 이유.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라디오소인 이유. 그건 그녀가 성좌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라디오소는 모두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백 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유리관에 들어가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 대성당 지하에 봉인되어 있는 것을 택했다. 언젠가 십자군이 다시 일어날 때, 그때에만 깨어나 싸울 것을 결의하며.

내심, 그녀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지쳤기 때문에. 말라죽은 오이처럼, 쓴 맛 외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삶에 질려서.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이 성유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으니까."

성좌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 일 년 정도, 다른 자에게 맡긴 일이 있었으나 그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저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던 것도..."

"이제 알았나? 소년. 너는 유망해. 충분히 유망하지. 나보다 강해져서, 내게서 이걸 빼앗아가줄 수 있을 정도로."

케이론을 흔드는 아셀라이. 제자에게 이것을 물려주고 유리관에 들어가기 위해. 그래서 그녀는 굳이 아나테마인 아이를, 적인 소년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던 것이다. 환멸할 지도 모르겠군. 아셀라이는 마지막 단추를 꿰며 그렇게 생각했다. 중얼거린다.

"그 주교의 제안을 받아줄 수 없었던 이유도 그거야. 나도 장담할 수가 없었거든. 어쩌면 내일이라도, 미쳐버려서, 내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행동을 한 끝에 유리관에 갇힐지도 모르니..."

그리고 말문이 막혔다. 등을 감싸오는 감촉 때문이었다. 아이였다. 울면서 끌어안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가지 마세요."

침묵하는 아셀라이. 우는 건가, 나를 위해? 어깨를 적시는 축축한 눈물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참 눈물이 많은 녀석이었다.

"계속 바보처럼 놀아 드릴게요. 억지를 써도 받아줄게요. 열아홉이라고 우겨도, 믿어 줄 테니까. 지지 마세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삼십 년인가, 그 안쪽으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감정이었다. 격렬한 감정. 사람을 울며 사랑하며 나뒹굴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것은, 치솟던 도중 어떤 두꺼운 벽에 가로막혔다. 다시 가라앉는다. 저 바닥으로. 아셀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꾸려놓은 짐을 들고, 달빛이 비치는 문간 앞에 섰다.

"미안하군."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마지막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내일, 성 크투차가 축일. 광장에 숨어들어 카사노를 감시해 달라는 당부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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