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애 ( 2 )
"당장 그 발언을 취소하십시오! 취소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외침. 그웬돌린의 의지는 결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주변의 시민들이 놀랄 정도로 결연했다. 시민들의 사이에는 언제나 유리가 있었다. 불투명하고 그을음에 질식한 색유리였다. 유리는 그 너머의 이웃을 기괴하게 뒤틀어 비추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그런 다른 종류의 시각 장애로부터는 자유롭다는 것을 뜻했다. 눈 앞에 가득한 시체의 더미가, 잔디꽃으로 부자연스럽게 장식된 그 산더미가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천사를 불러내고 한 발짝 내딛었다.
"이 나사렘에 자리한 교구, 그 주교의 적법한 권한으로 명합니다! 모든 주교는 교구를 돌보며 이단과 광신을 다스리고 재판할 권리 또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단이라 생각합니다!"
종교 재판. 주교의 고유한 권한인 그것을 행사해 카사노를 가로막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럴 작정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충동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충동. 두려움에 떨던 시민들 중 절반은 희망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아탕칼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어두운 까닭은,
"아, 그거야 이단의 눈에는 올바른 목자가 이단으로 보이겠지. <또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들어본 구절일 것이라 생각하오."
이것이었다. 카사노 역시 주교이기 때문이었다. 차갑게 맞받는 카사노. 그 역시 그웬돌린을 이단으로 지목하겠다는 뜻이었다. 준비된 말인 듯 청산유수였다.
"주교복을 입은 자가 이단이라니 역사에 길이 남겠군. 흡혈귀와 붙어먹기라도 한 것이오? 당신은 희대의 탕녀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그 말에 분노로 떠는 사람이 있다. 아이였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고 나서려 한다. 에바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뭐? 당장 나서지 않으면, 살인이라도 날 것 같은..."
"기다리라니까."
투명한 눈이었다. 아이는 잠시 그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검을 집어넣고 팔짱을 꼈다.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 재판의 판결은 화형 아니면 무죄겠지. 얄궂군. 굳이 열자면 동시에 열 수 밖에 없을 것 같소. 약식으로, 이 자리를 재판정 삼아야 할 것이고. 한 명이 판결을 받으면, 다른 이에게 판결을 내릴 자가 불타 사라져버릴 테니 말이오."
시체꽃의 산 정상에 서서, 재로 덮인 장작불 같은 하늘을 등지고 선언했다. 단순한 선언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고함쳤다.
"나는 우리 교회의 전우들을 배심원으로 요청하겠소. 모두 올바른 판결을 도울 수 있는 올바른 자질 또 자격을 가진 자들이오. 당신은 내세울 배심원이 있으시오?"
"저는..."
입을 다무는 그웬돌린. 영세하기 그지 없는 동쪽 교회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카사노는 광포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없군. 무슨 상관이겠소. 당신이 정말로 주의 뜻을 따른다면, 기적을 일으켜 불타는 십자가에서 그대를 꺼내주지 않겠소. 당신을 시작으로 이 양떼 사이에 숨은 늑대들... 부정한 무리 삼천, 아니, 오천, 아니, 일만을 불태워 죽여야겠소!"
웃는다. 미친 사람처럼. 정말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의 행동이었다. 아이는 아연해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뭇 시민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에바는 달랐다. 그녀는 아직도 신중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팔꿈치를 붙잡고 잡아당긴다. 혹시라도 튀어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과연 그렇겠군요. 주교. 아니, 이단자."
그렇게 실성한 사람처럼 웃느라, 카사노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목에 다가온 칼날을. 한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칼날이, 날카로운 검끝을 반짝이며 카사노의 목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의 편일 것이라 생각했던 기사단, 또 아탕칼리의 마술사들. 방금 그가 재판의 배심원이 될 것이라 선포한 자들이 오히려 그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명분이 없기에 망설였지만, 이제 명분이 생겼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정신을 차린 카사노는 자신의 정면에서 검을 들이대는 자에게 소리쳤다.
"올슨! 이게 무슨 짓인가! 내 가장 충직하고 믿음직한 친우인 그대가!"
광기의 편린인가? 그 외침에는 은근한 기쁨이 배여 있는 듯 들렸다. 올슨이라고 불린 자, 나사렘의 기사단장은 청동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한다.
"그 우정은 다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성인의 축일을 핑계 삼아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말입니다. 눈감으려 했습니다. 패배한 동료들에게 삿된 피를 뒤집어씌워 괴물로 만들 때에도, 그들의 행실이 나빴기 때문이라며 눈감았습니다. 우정이 우리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학살마저 눈감을 수는 없습니다. 주교, 당신은 변했습니다."
"뭐라고! 감히 나에게 논쟁을 거는 것이오! 무부 따위가!"
"그 말도 예전의 당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겠지요. 저는 당신의 증오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증오는 순수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 자신의 야욕 따위를 위해 이용되는 순간 그것은 독이 섞인 호수처럼 볼품없는 악에 다름아닙니다. 당신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말문이 막힌 듯 몸을 떠는 카사노. 기사단장 올슨은 고색창연한 진은검을 세우고 선언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나 포박을 받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말년의 노욕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망친 자들의 목록에, 그 이름을 더하지 말아 주십시오."
"닥쳐! 이제보니 자네도 흡혈귀였군! 그 혈관 속에 더럽고 사이한 것이 숨어 뱀처럼 흐르고 있어!"
"그 무슨 모욕입니까! 당신을 따라 수백이 넘는 적을 도륙한 나에게!"
"나는 알 수 있소! 늙고 나약해지면 죽음이 무서워 엉엉 울면서 목을 물어달라 빌 것이 틀림없소! 잠재적인 흡혈귀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들의 편을 든단 말이오!"
최대한 상황을 수습하려는 올슨의 제안. 그러나 카사노는 막무가내였다. 싸구려 연극의 악역처럼 이해 불가능한 악을 견지하며 난동을 부렸다. 그는 팔을 휘둘러 알다리엘에게 명한다. 그 말 없는 천사는 사슬을 휘둘러 올슨을 후려쳤다. 그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 싸움을 바라보았다. 무대 위의 활극을 바라보듯이. 아니, 촌극이었다. 저번에는 그토록 강했던 카사노는, 지금은 힘 없고 기력 잃은 듯 쉽게 패배했다. 가슴과 목에 여러 대의 칼을 맞고 피를 흘렸다. 알다리엘은 일곱 라그엘의 창살에 찔려 푸른 연기를 토하며 엎어졌다. 그 상황을 중재한 것은 그웬돌린이었다.
"그만, 그만 하십시오, 형제여.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카사노의 목을 찌르려는 흥분한 장검을, 그웬돌린의 알다리엘이 가로막았다. 카사노는 경련했다. 경련하며 피 묻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건!"
아이가 고함을 질렀다. 에바가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고함에 주목하지 않았다. 연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카사노가 꺼낸 것은, 외신으로 변하는 물약이었다. 그는 이빨로 그 뚜껑을 제거하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그것을 들이켰다. 알다리엘의 사슬을 얻어맞아 얼굴 반쪽이 피에 젖은 올슨이 고함을 내질렀다.
"주교! 기어이 스스로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넣을 작정이시오!"
카사노는 웃었다. 득의한, 그리고 어딘가 해탈한 듯한 구석이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점점 변해간다. 쇳소리로, 금속성의 소리와 짐승의 소리가 섞인 기묘한 울음 같은 웃음으로. 육체가 변이하고 있기 떄문이었다. 온 살갗이 들끓고 수포와 종기가 터지고 재생되기를 반복하며, 점점 살덩이가 부풀고 있었다.
"당장 전부 그 단상에서 내려오세요!"
그웬돌린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눈 앞에서 탄생해가는 괴물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사전에 준비라도 해 두었던 것인가? 카사노의 몸을 촉매로 강신하려는 외신은 카사노만을 제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마술식이 숨겨져 있었다. 그 밑에 쌓인 흡혈귀의 시체도 전부 흡수해 양분으로 삼는 마술이.
충인귀마용. 괴물을 분류하는 카나기의 전통적인 척도. 그 척도로 보았을 때, 최소한 귀급의 괴물이 탄생하려 한다. 그웬돌린은 그렇게 느꼈고 경고했다. 카사노를 공격하던 교회의 사람들은 놀라 연단에서 내려왔다.
"시민 분들은 대피하십시오!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힘을 보태 주십시오! 괴물이, 끔찍한 재앙이 탄생하려 하고 있습니다!"
원군 요청. 이것을 기다린 것인가? 에바는 드디어 팔짱을 끼다시피 붙잡던 아이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때가 되었다는 듯이. 그러나 아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석연치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돌발적인 카사노의 광기, 그것으로 일어난 촌극 같은 일들. 모두가 흐릿했다. 정말로? 늙은 마술사가 그렇게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힌단 말인가? 그리고 에바는 왜 이걸 예측한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그런 의문이 맴돈다.
그 해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아, 결국 여기까지 왔군. 오랜 숙적이여."
칼라일이었다. 시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가, 훌쩍 텅 빈 연단 위로 올라선 것이다. 거대한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다. 그는 이미 반쯤 괴물같은 살덩이로 변이한 카사노 옆에 턱 올라섰다. 하늘을 쳐다본다.
이미 일몰은 완연히 끝나가고 있었다. 지평 아래 잠기려는 석양이 찌르는 듯한 선연한 붉은 빛을 사방에 뿌려댄다. 그 최후의 불꽃을 등지고, 칼라일은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들어라! 시민들이여, 나는 이 자가 저지른 끔찍한 죄를 고발하려 이 자리에 섰다!"
백내장 환자처럼 흰 막에 뒤덮여 부글거리는 카사노의 눈. 그것이 그 말에 눈을 부릅뜬다. 그리고 칼라일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감정이 거기 담겨 있었다. 당황이었다. 칼라일은 구둣발로 그 얼굴을 짓밟고, 말을 이어간다.
"그 죄의 이름은 속죄다! 이 자는 비겁하게도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치려 들었다! 파멸로!"
칼라일은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그 모습은 어쩐지 방금 전까지의 카사노를 똑 닮아 있었다. 에바는 처음 보는 칼라일의 모습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대장을 살펴본다. 그 얼굴은 결코 고고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칼라일은 성량을 북돋아 계속 무언가를 떠들기 시작했다. 카사노의 계획에 관한 진상이었다. 에바가 철썩같이 믿고 있던 진상이기도 했다.
"저 가증스러운 눈 먼 계집이 이 땅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서였지? 그래, 이 빌어먹을 놈은 그때 부서졌다!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