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애 ( 3 )
그웬돌린을 가리키며 말하는 칼라일. 그웬돌린은 갑자기 연이어 일어난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황망한 기색이었다. 칼라일은 그녀를 삿대질했다. 눈을 붉게 번뜩이며 손을 위아래로 흔든다. 그러자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던 흡혈귀들이 튀어나와 무대를 감싸 지킨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칼라일은 긴 말을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이 자는 기어코 깨닫고 말아버린 것이다. 종족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풍랑에 아비를 잃은 고아가 바다에게 복수하겠다며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일년간, 카사노는 번제를 멈췄다고 했다. 그웬돌린은 그가 변한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했다. 그것은 틀렸다. 정말로 변했던 것이다.
그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알 길 없는 계기로 변화한 그는 그 일년 간, 격렬히 후회했다. 증오로 점철된 삶을, 자신이 빚어낸 희생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돌이킬 방법을 찾고자 애썼다. 찾아냈다.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자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려 했다! 이 늙은이는 염치없게도 내게 찾아왔다. 그대 일족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노라고, 저 눈먼 계집이 만든 허황한 계획을 들려주었다!"
흡혈귀의 기사단을 세우는 것. 그 계획을 뜻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상을 가능케 할 힘이 없었다. 카사노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 그 힘을 만들어주려 했다.
"이 광인 짓거리를 만민 앞에서 저지르고, 이 역겨운 시체더미와 함께 괴물로 변한다. 교구의 모두가 그 괴물을 무찌르려 들지만 역부족이겠지. 그 때 우리가, 흡혈귀의 군세가 가세하는 것이다. 가세해서, 기적적으로, 주교였던 괴물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고향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러면 끔찍한 이단을 배출하고 또 방임한 서쪽 교회는, 그웬돌린에게 정치적 생명을 내맡길 수밖에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두 교구는 하나로 합쳐지고, 그웬돌린은 명분을 얻는다. 흡혈귀의 기사단을 세운다는 구상을 실현할 명분을. 흡혈귀가 그보다 더한 악, 외신을 무찌르는 데 힘을 보탰으므로.
불만을 가진 자가 있을 수 있으나, 한 주교의 너무나 극적인 파멸 탓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렇다. 증오의 화신 같은 자의 말로가 저랬다. 어찌 강경책을 계속 주장하겠는가...
기어코 아셀라이를 내쫓으려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아셀라이가 여기 머물며 단독으로 괴물을 무찌른다면, 흡혈귀의 기사단을 세울 명분을 잃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죄업을 장작 삼아서, 화합을 낳으려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에바가 칼라일에게 들었던 진실이었다. 그녀는 카사노가 변해서 태어날 괴물. 그 괴물을 무찌르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여기 잠입했던 것이다.
"그럼, 왜, 왜 여기서 그걸 떠벌리고 있는 건데?"
에바의 얼굴을 보고 고함치듯 말하는 아이. 에바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개를 젓는다.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이것은 정치적 모략이었다. 그리고 모략은 드러나면 의미를 잃는다. 이미 저것을 떠벌려 버렸으므로, 카사노의 희생은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그웬돌린이 그것을 사주했다는 의심을 받아 공격받는 게 더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카사노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짓밟은 자. 칼라일은 광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 아래에선 성기사와 흡혈귀 무리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개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너 혼자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나는 이 끝나지 않는 형극 같은 삶에 버려두고..."
그 눈은 불안하게 번들거렸다. 아이는 그 얼굴을 보며, 아셀라이의 회한을 떠올렸다. 오래 살면,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이미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밖에, 자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이 자는 카사노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했다.
"너 혼자 속죄해 뉘우치고 승천하는 걸 내가 그냥 둘 것 같으냐!"
그럼, 카사노가 죽으면. 비추는 자가 없어져버린 거울 신세가 되면. 아이는 입을 벌렸다. 어쩐지 칼라일의 다음 행동이 짐작이 가서였다.
"안 돼. 달아나게 둘 수 없어."
칼라일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면서, 또 울면서, 계속 그 괴상한 추모사인지 사모곡인지 모를 광언을 내뱉어댔다. 두 손으로는 피가 나도록 깊이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는다.
"알이 깨져서 비로소 완성되듯이, 너라는 악도 처참히 부서져 찬란한 괴물의 탄생으로 끝나야 해. 네가 쌓아올린 죄의 계단 그 꼭대기에서 떨어져 박살나야 해. 어정쩡한 속죄나 참회 따위로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홱. 망토를 드러낸다. 그 안에는 새장이 숨겨져 있었다. 새장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옷차림으로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카사노, 그의 손자였다! 그는 이 계획을 칼라일에게 제안하면서, 인질로 자신이 사랑하던 손자를 건넨 것이었다. 칼라일은 새장의 문을 열어, 그 어린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히죽 웃는다. 긴 송곳니가 어둠에 번뜩였다. 그는 마지막 선언을 마쳤다.
"너는 네 죄 속에 영생하라!"
그리고는, 손자의 목덜미를 깊게 깨물었다. 안 돼! 누군가 소리질렀다. 바둥거리는 손자는 축 늘어졌다. 그것으로 그 손자는 흡혈귀가 된 것이었다. 이미 정신을 잃어 혼탁한 시야로 부들거리던 카사노는, 그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오오오오...."
우는가? 이미 카사노는 시체더미와 하나되어, 과생장한 고깃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저런 존재도 울 수 있단 말인가. 칼라일은 자랑하듯 흡혈귀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자손 비슷하게 되어버린 손자를 보여준다. 그리고 걷어차 내던졌다. 카사노는, 카사노였던 괴물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 손을 짓밟는다. 칼라일의 발이.
"우리 함께 영생하자, 이 모든 도시의 시민과 함께, 나사렘의 밤을 영원히 즐기는 거야. 나는 달아나고, 너는 쫓고..."
미친 소리였다. 미친 소리에 걸맞는 미친 행동이 뒤따랐다. 그는 품에서 단검을 집어들더니, 카사노의 심장에서 부글거리는 살덩이 하나를 뜯어냈다. 먹는다. 우적거리며.
"이, 이 정신 나간 자식!"
올슨이 놀라 소리질렀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라일은 자신도 괴물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눈을 번뜩이자, 그가 흡혈귀로 만든 커넥션의 흡혈귀들이 카사노의 살덩이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살을 파먹는다. 그 기괴한 만찬이 끝나자, 계속 증식하던 살덩이는 크게 터졌다.
핏물이 해일처럼 치솟아,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무언가가 핏물을, 연단을, 연기와 보라색 꽃풀더미를 헤치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야가 드러났을 때.
모두의 눈 앞에는 괴물이 서 있었다.
'어린 순례자야! 눈을 감아라! 저것을 보아선 아니 된다!'
림의 다급한 비명. 늦었다. 아이는 보았다. 그 괴물을 바라보고 말았다...
없다. 살갗이 없다. 이것은 겉과 안이 뒤집힌 생명이다. 살갗은 안으로 침잠하고 검붉은 근육과 새하얀 골수가 표피에 부유한다. 거인을 닮은 괴물이었다. 기화한 피로부터 솟아난 수증기 뒤에서 눈을 번뜩인다. 그 가슴에는 흰 갈비뼈가 황폐하게 솟아 있었다. 부서진 신전처럼.
그것은 부글거린다. 병동의 오물 구덩이에 익사한 나병 환자의 가죽을 벗겨 화폭에 쳐바르면 저렇게 될까? 기형아가 낳은 기형아에 꿀을 발라 가마솥에 넣고 구워버리면 저런 피부가 될까? 보는 것만으로도 광기가 스며든다. 눈에. 보지 말아야 해. 눈돌릴 곳은 있는가?
답은 그것의 가슴에 있었다. 어둠이었다. 가슴에 뻥 뚫린 어둠. 괴로움을 피하려 그것을 응시했다. 그 어둠 주변엔 입이 있었다. 한 몸처럼 매달고 다니던 흡혈귀 이빨 목걸이, 그것이 변해 생겨난 입이었다. 그 입에는 안식이 고여 있었다. 자궁 속의 어둠 같은 안식. 정신을 먼
옛날로 인도한다. 어둠, 밤, 자정.무성하게우거진수림이하얗게부서지는달빛아래로고요히그림자를드리울무렵.수해의틈새로,자그맣게굽이치는황톳길을따라, 한 대의 마차가 달린다. 유령처럼. 어디로? 폐허를 향해서? 황혼을 향해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끝은 탄생이었다. 탄생, 모든 비극의 시작을 뜻한다. 실수였다. 그 어둠은 들여다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안에선 심장이 들끓고 있었다. 창조와 파괴가 윤회하고 있었다. 심장은 살을 만든다. 그 심장의 주위로 새살이 돋고, 그 즉시 부패하고, 그 모든 것이 순환한다. 이것은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은 비명을 내질렀다. 귀곡성 같은 비명이었다. 그 선율이 뇌수를 후려쳐 들끓게 한다. 갑자기 영감이 번뜩였다. 위대한 계몽이었다. 세계 평화,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모두 저 갈빗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 갈빗대 속에 들어가서, 갈빗살을 파먹고 파먹다 저 살더미의 일부가 되어 파먹히는 것이다! 영구 동력이었다! 흥분과 감격이 찾아왔다. 이름을, 이 떨림에 이름을 붙여야 해.
저것에 이름을 붙였다. 생육의 천사라고. 이제야 그것의 전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기이하게 뒤틀린 천사였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힘줄과 근섬유로 이루어진 사슬을 휘두른다!
아, 십자가는 찢어지지 않았다. 그 어깨에는 아직도 붉은 법의가 매달려 나부낀다. 허무에 내건 깃발처럼.
유혹한다. 뭇 생령을. 아직도 그대는 인세를, 사랑을, 화해와 속죄 같은 거창한 낭만을 믿고 있는지! 오라, 피안으로 오라.
그렇게 말을 건네온다. 입과 하나된 심장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말과 언어보다도 깊은 울림으로 뜻한 바를 전달해왔다.
"아, 보입니다. 이 굶주리고 목마른 밤에도, 선명하게 빛나요. 당신의 아름다운 심장이..."
그 먹음직스러운 심장이. 중얼거렸다. 무의식이었다. 그에 응하듯 그 가슴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성혈이다. 그 심장을 가득 덮고 있는 개구리의 알 같은 눈알,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피눈물. 거대한 홍수처럼 쏟아지는 피눈물은, 곧 모두의 발목께를 적실 정도로 고였다. 나사렘은 피에 잠겼다.
아이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것이 견딜 수 없이 불쌍했다. 걷는다, 당신과 하나되려.
'어린 순례자야! 정신을 차려라!'
그것으로 광기는 끝났다. 시야가 환하게 밝아왔다. 림의 고함 덕분에 아이는 정신을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의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뎅! 교회의 금속 종지기, 그것은 범종을 크게 두들겼다. 꾸짖듯이. 뎅! 뎅! 연이은 종소리. 사방에서 일어나는 흐느낌의 파도를 뚫고 그 둔탁한 종소리가 아이의 고막을 후려친다. 가쁜 숨을 내쉬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철벅, 엉덩이가 피에 젖는다.
"저, 저게, 무슨."
'저건 외신의 화신체다. 얼굴 없는 아이킬로스, 박애의 아이킬로스.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녀석이다. 그 칼라일이라는 놈은 자신을, 그 주교를, 그리고 이 나사렘의 모든 생명을 제물로 저걸 불러내서,'
림은 한 호흡 쉬고 선언했다.
'이 도시의 모두를 합일시킬 생각이다.'
성 크투차가가 계약했던 외신, 그 정체가 저것이었다. 저것을 불러내기 위해 칼라일은 오늘을 결행일로 정한 것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저것은 바라보는 자의 정신에 환술을 걸어,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환술에 걸린 자들이 사방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시민들은 울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성가를 합창하는 듯이 들린다. 아이는 아직도 떨리는 눈꺼풀을 부여잡고, 그 괴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교회의 첨탑을 왕좌처럼 깔고 앉은 그 괴물을.
얼굴 없는 아이킬로스, 그 화신인 생육의 천사. 제물로 무엇이 바쳐졌는가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그 화신이 이번에 택한 모습은 천사였다. 카사노와, 칼라일과, 그 모든 것을 합쳐 강림했기에 그 특성을 이어받은 듯 했다. 어쩌면 저 안엔 아직 카사노의 정신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의 아이처럼, 나사렘의 시민들은 울고 있었다. 울며 그 생육의 천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크투차가 축일의 번제를 보기 위해 운집한 시민들은 이제 자청해서 그 번제의 제물이 되러 걷고 있다.
"아!"
그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바였다. 엉엉 통곡하며 네 발로 기어가고 있다. 아이는 재빨리 달려가 그 목덜미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