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애 ( 4 )
에바는 바둥댔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서없는 말을 흘린다.
"버리지 않아, 이젠 버림받지 않아, 아아, 자애로운 주인님..."
"정신 차려!"
그 이마를 두 손으로 붙잡고 크게 박치기를 했다. 불꽃이 튀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머리를 가진 아이의 눈앞에도 잠시 불티가 번쩍였다. 에바도 만만찮은 돌머리였던 것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뭐, 뭐야?"
빨갛게 변한 이마를 부여잡고 눈을 치뜨는 에바.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다급하게 그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피에 잠긴 나사렘을, 완전히 망가진 크투차가 축일의 정경을 보여주었다. 에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네가 그렇게 믿던 대장이 저지른 짓이야."
아이는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에바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온통 붉게 물든 사방을 바라보았다. 에바와 아이는 그나마 정신이 강인한 축이었다. 박애의 아이킬로스, 그것의 화신에게 완전히 현혹당한 시민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드높이 치솟은 교회를 끌어안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교회를 깔고 앉은 생육의 천사, 그 중에서도 가슴에 뚫린 입, 그 속에서 빛나는 심장에 파먹히기 위해서였다. 생육의 천사는 제물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민들은 죽고 있었다. 개미집을 오르는 개미처럼 사지를 기괴하게 뒤틀며 교회에 기어오르고 도착해 파먹히거나 떨어져 핏물에 잠기고 있었다. 죽은 시체는 핏물 속에서 떠올랐다. 괴물의 모습으로. 생육의 천사를 아주 작게 축소한 듯한 괴물이었다. 그것은 다른 시민을 덮친다. 한마디로, 지옥도였다.
"이런,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울먹이는 에바. 자신의 목적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굳이 칼라일이 에바를 치워두려고 했던 것도, 계획의 진상을 알면 그녀가 반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속았고 속은 건 자랑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도와."
"뭘, 뭘?"
"저걸 죽이는 것을."
아이는 딱 잘라 말했다. 단호했다. 이럴 때는 단호한 것이 오히려 위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야만인의 땅에서 세상을 먹어치우는 외신, 그 화신이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용급이었다. 다 자란 용급. 아이 혼자 그것을 무찌르는 건 무리였다. 아이와 거의 호각으로 다투었던 에바의 조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알았어."
에바도 그 뜻을 알았는지,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맹이 결성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동맹의 첫 번째 적이 결정됐다. 괴물이었다. 카사노의 살점을 파먹던 흡혈귀, 생육의 천사가 탄생하며 내장이 녹아 죽은 흡혈귀들로부터 탄생한 괴물이었다. 그것은 연단에서 뒤엉켜 싸우던 성기사를 노리고 있었다. 생육의 천사에게 홀린 성기사들은 본능으로 그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아!"
그 중에서도 가장 맹렬하게 싸우는 자가 보였다. 올슨이었다. 정신을 찾은 건 아닌 듯했다. 그저 무의식으로, 눈을 희게 뒤집은 채 방패와 검을 휘두른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청하고 달음박질쳤다. 괴물을 무찌르고 올슨을 제정신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자!"
에바도 빠르게 뒤따랐다. 순식간에 올슨과 괴물이 싸우는 곳에 도착했다. 괴물의 날개는 손질하다 말고 썩힌 닭날개처럼 보였다. 그 날개를 레바테인으로 후려친다. 쫘자작! 뼈가 부서지는 소리. 골수와 진물이 튄다. 올슨에게 사슬을 휘두르던 괴물은 괴성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
고통에 찬 괴성에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가로로 둥글게 베어 허리를 쪼개고 피를 울컥대는 심장을 찌른다. 찌르고, 깊게 찔러넣은 검을 뽑는다. 촤아악! 분수처럼 튀는 피. 재빠른 발동작을 따라 물보라치는 핏물. 그것을 뚫고 다시 한 번 레바테인이 덮쳐든다. 이번엔 아래턱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정신이 몽롱해지는 비명을 지르는 입. 그 아랫턱을 둘로 쪼갠다. 잘린 턱뼈가 바닥에 떨어지고 붉은 입천장이 드러났다. 괴물은 손에 매달린 사슬을 휘둘렀다. 피한다. 그 사슬을 붙잡고 힘겨루기를 한다. 잠시 유지되는 대치. 그 균형이 깨졌다. 마무리 일격이 들어갔다.
"죽어!"
에바였다. 괴물의 등에 올라탄 그녀가 다리로 그 괴물의 목을 휘감고 완전히 뒤틀어버린 것이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터지고 괴물의 목이 180도로 회전했다. 끔찍한 얼굴이 에바를 노려본다. 에바는 기형검을 그 뒤틀린 낯짝에 쑤셔 넣었다. 콱! 코뼈를 부수고 깊이 틀어박힌다. 핏물이 튀어 에바의 뺨을 적신다. 괴물의 붉은 눈동자가 허옇게 변했다. 괴물은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펑! 쓰러지면서도 크게 핏물이 튄다.
"이, 이 부정한 것! 죽어라!"
그때 또다시 공격이 날아왔다. 올슨으로부터였다. 사슬을 붙잡고 있던 아이는 하마터면 일격을 허용할 뻔 했다. 당황해 돌아보니 올슨의 눈은 허옇게 자위가 뒤집혀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 입술이 무언가를 말한다.
"너희가 감히 오백 년 역사의 나사렘을 없애게 둘 것 같으냐!"
챙! 아이는 황급히 레바테인을 들어 그 검을 막았다. 검과 검이 부딪혀 불똥이 튀었다. 축성한 은으로 만든 올슨의 진은검은 핏물과 밤빛을 서늘하게 반사했다. 거기에는 푸른 신기가 가득 맺혀 있었다. 정신을 잃은 이 자에게는 아이가 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고함쳤다.
"그만! 정신 차리세요!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조력자에요!"
"죽어라!"
막무가내였다. 기사단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생육의 천사에게 기어들어가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다른 종류의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찔러오는 올슨. 아이는 레바테인의 손잡이로 그것을 쳐날려 막았다. 과연 한 도시의 기사단장답게 꽤 수준이 높은 자였다. 헤어지기 직전의 레고르 정도는 되는 듯했다.
한 발자국 물러난 올슨은, 검을 경건하게 쳐들어 얼굴을 가리곤 말한다. 긴 선언을.
"주께서 명하시길 너는 진멸하는 칼날처럼 세계악을 불사를 광휘를 두르고... 두르고... 이교도의 심장으로 케이크를 만들되 계란 케이크는 닭모이로 쓰기에 좋지 않으니 포도주였다. 포도주를 마시니 이게 고양이의 살이라 마녀의 치질 치료에 좋았더라..."
마레가 준 성경을 틈틈이 읽었던 아이는 그게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성경 구절이었다. 뒷부분이 괴이쩍게 뒤틀려 있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가 빠르게 괴이쩍고 우스꽝스럽게 변해간다.
"치질 치료를 위해서는 너는 생각날 때마다 엉덩이에 힘을 주어라!"
괴성을 내지르며 큰 거합베기를 날려오는 올슨. 무슨 아주 멋진 구절을 외치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한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마주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칼과 칼이 마찰해 열과 빛을 흘린다. 그 불똥이 번뜩일 때, 아이의 머리에 불현듯 하나의 발상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레바테인을 길게 휘둘러 올슨의 앞머리를 베어냈다. 금발 몇 가닥이 잘려 허공에 나풀댄다.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는 올슨.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귀에 이것을 때려박았다. 아탕칼리의 신도라면, 누구나 알 수 밖에 없는 구절이었다. 습관으로 익숙할 구절.
"...이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아..."
멍하니, 무의식적으로 그 뒤를 되받는 올슨. 그의 눈에서 넘실대던 광기가 빠르게 잦아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몸 속에서 길을 잃고 폭주하던 신기가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이 보였다. 성서를 읊었던 것은, 이성을 되찾고자 했던 그의 무의식적인 노력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도움으로 한 절을 완창하자 방황하던 정신은 안식을 찾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검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잠시뿐이었다.
검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첨벙 핏물 속에 잠겼다. 그도 어지럼증에 쓰러지려 할때, 아이의 묵직한 팔이 그 팔짱을 끼고 일으켜세웠다. 올슨은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후욱... 후우욱... 내가, 무슨... 일을...?"
"올바른 일을 하셨습니다, 단장. 그리고 이 도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마치 성기사와 같은 말투로 그 어깨를 붙잡고 말하는 아이. 아이는 빠르게 올슨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올슨의 얼굴이 분노와 참담함으로 떨렸다.
"주교... 당신은 왜, 왜 그 빌어먹을 흡혈귀 따위를 믿고! 차라리, 차라리 나와 상담했더라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올슨의 얼굴. 그러나 그런 비감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교회에선 사람들이 심장에 파먹히고 또 추락해 죽어가고 있었다.
"당신의 사례로 보았을 때 믿음 깊은 성기사들, 신심 깊은 자들은 쉽게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이 여자와 함께 성기사들이 정신을 되찾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민들을 구해 대피시켜 주십시오. 저걸 바라보지 않게 주의하면서."
늠름하게 말하는 아이. 저 박애의 괴물을 물리치는 것도 좋았지만, 그 전에 시민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아이의 선량한 마음은 우선순위를 그렇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나사렘의 전문가인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때는 적이었지만, 이 하얀 검사는 그런 은원에 사로잡힐 성품이 아니었다.
"이래 봬도 이 녀석은 꽤 강한 녀석이에요. 아니, 입니다. 함께라면 괴물을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지?"
"응? 응. 따를게. 나는 멍청하니까, 네가 시키는 대로 따를게..."
"이 곳의 일이 정리되면 내 쪽으로 합류해 줘. 끝나는 대로 저걸 죽이러 가야 하니까."
"응!"
에바는 칼라일에게 속은 충격 때문인지 이번에는 전적으로 아이의 말을 따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올슨은 눈을 파르르 떨며 에바를 바라보았다. 에바는 쭈뼛쭈뼛 올슨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관록 있는 올슨은 그녀가 두냐의 마술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두냐는 조디악의 편, 즉 적이었다. 왜? 한 조각 의심이 피어올랐다. 올슨은 아이에게 물었다.
"알겠소. 알겠지만 확인할 것이 있소. 당신은 누구시오? 신분을 알려주시오."
"저는 귀 교단의 성도 8궁, 인마궁 아셀라이 클라릿체. 그녀의 제자입니다."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이는 어검술로 칼을 붙잡았다. 핏물 속에 잠긴, 올슨의 진은검이었다. 어둡게 흐르는 핏물을 뚫고 불쑥 솟구쳐 아이의 손에 부드럽게 감긴다. 척, 아이는 엄숙하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훌륭한 어검술이었고, 아셀라이의 제자라는 훌륭한 증거였다. 올슨은 감격에 차 그 검을 건네받고 다른 한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랬군! 주의 뜻과 안배가 있었군! 아아, 모든 일이 끝나고 함께 포도주 잔을 나누길 기대하겠소!"
아이는 그 손을 맞잡으며, 피식 웃었다.
"포도주 말고 주스로 하지요."
"왜? 사양할 이유는..."
"술은 치질에 안 좋으니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헛기침을 하고, 에바와 함께 다른 괴물들에게로 달려가는 올슨. 그 올슨을 뒤로 하고 아이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불길한 기운이 파도치는 곳이었다. 그 옆에는 강력한 마술사의 기운도 넘실댔다. 5위계의 마술사, 그웬돌린 크리스틴. 그녀의 기운이었다.
눈먼 주교인 그녀는 생육의 천사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서쪽이었다. 그녀의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왜 그곳에 갔지? 아이는 빠르게 교회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