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애 ( 5 )
중앙 교회는 높은 언덕에 있었다. 그 높은 언덕에 또 높다랗게 솟은 교회, 그 꼭대기에 걸터앉은 생육의 천사. 그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는 짙고 또 많았다. 쏟아진 피는 나사렘의 달밤을 가득 적셨다. 피는 고였고 또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지에 있을 때에는 그나마 발목에서 철벅거렸던 그것은 밑에선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세차게.
그웬돌린의 교회는 낮은 곳에 있었다.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의 구역에 있었다. 피의 강은 그런 곳일수록 세차게 흘렀다. 아이는 어둠 속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경주하듯 그웬돌린의 교회로 뛰어갔다. 바짓단을 함뿍 적신 핏물에선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마술의 냄새였다.
"윽!"
핏물은 점점 더 깊어졌다.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구덩이에 발목을 들이밀었다가 빠질 뻔 했다. 길따란 레바테인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안 되겠어, 아이는 마른 땅을 밟기로 했다. 피에 잠긴 건물의 난간을, 창문과 벽돌 틈을 잡고 올라가 지붕에 올라섰다. 지붕을 밟으며, 또 지붕과 지붕 사이의 어둠은 뛰어 건너며 날랜 표범처럼 달려나가는 아이.
흘깃 옆을 쳐다보았다. 붉은 강은 모든 것을 삼키고 휩쓸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고행 석상도, 부러진 난간도, 나뭇가지와 건초 수레 따위도 구별없이 뒤엉켰다. 그것들은 잠기고 부유하길 반복하며 떠내려간다. 밑으로. 특이한 침전물도 있었다. 곱추였다. 곱추이자 노숙자인 것처럼 보였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시체였다.
번제에 참가하지 못했고 가족도 없었기에 무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죽은 듯했다. 이미 익사해 눈을 허옇게 뜨고 달밤을 쳐다보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머리에는 가로등에서 쏟아진 기름과 피가 섞여 흥건하다. 부정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받지 못했을 세례를, 전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받은 것이었다.
"응?"
안쓰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는 의문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것이 움찔거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 속에서 기괴하게 몸을 뒤틀더니 몸을 일으켰다.
생육의 천사의 핏물, 그것의 마술적 힘이었다. 온 몸에는 붉은 혈관이 감자 뿌리처럼 빽빽히 자라나 튀어나와 있다. 그 괴물은 기묘하게 목을 꺾었다.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크고 또 혐오스럽게 입을 벌리곤, 갑자기 아이에게 달려든다. 그 등에는 아까 보았던 생닭의 날개 같은 것이 세 개나 자라나 있었다.
"이게!"
지붕 포석을 돌가루로 쪼개며 달려드는 괴물. 저 핏물에는 시체를 괴물로 만드는 힘이 있었고 또 그 괴물은 인간을 덮치는 모양이었다. 재빨리 반격했다. 아이의 레바테인이 호선을 그렸다. 그 뱃살을 찢고 긴 창자를 갈라냈다. 하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고 싯누런 이빨을 들이밀었다.
"ㅡㅡㅡㅡㅡ!"
"닥쳐!"
아이는 그 쩍 벌린 입에 대담하게 주먹을 쑤셔넣었다. 퍽! 가죽북을 두들기는 소리. 둔탁한 타격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충격에 눈을 희번득대는 괴물. 연이어, 아이는 입에서 주먹을 뽑아내고 목을 붙잡았다. 쾅! 지붕에 내려찍는다. 정사각형 포석이 부서져 사방에 돌가루를 날렸다. 그렇게 세 번 정도 들이받은 다음, 옆 건물의 창문에 힘껏 집어던졌다.
쨍그랑! 괴물은 스테인드글라스를 깨부수고 안으로 쳐박혔다. 성경의 성찬식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져 흩날린다. 접시가 있어야 할 부분이 박살나 검은 구멍이 생겼다. 그 안에선 기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기에는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림, 미제리코드!"
아이는 헐떡이며 자비의 독검을 불러냈다. 조심히, 잘 조준해서. 그 신음이 흘러나오는 곳에 미제리코드를 화살처럼 쏘아보냈다. 어검술을 수련한 성과였다. 미제리코드는 입을 벌린 사도의 얼굴을 꿰뚫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푹, 그 심장을 찌른 촉감이 느껴졌다. 바둥대는 소리, 그리고 잦아든다. 확인사살을 끝마친 것이었다. 다시 어검술로 미제리코드를 불러들였다. 홱 날아오는 단검의 손잡이를 확 붙잡았다. 그 검의 끝자락에는 찐득한 검은 피가 덩어리져 들러붙어 있었다.
"정말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나사렘 전체가 저 괴물한테 먹히겠는데. 아이는 불길한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저 괴물은 꽤 강력했다. 시체가 저 괴물이 되고 저 괴물이 시체를 만드는 순환이 하룻밤이라도 계속된다면, 나사렘의 수만 명의 운명은 뻔했다. 그 뻔한 운명을 막기 위해 아이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참상과 마주했다.
"이건, 이건 뭐야!"
어둠 속에서 소리지르는 아이. 그 앞에는 병원이자 구빈원이었던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외벽 전체가 뜯겨나가 피와 살점 범벅이 되어 앙상하게 드러난 그것을, 건물이라고 부를 순 없었으니까. 어떤 거대한 짐승이, 건물 전체를 한 입 베어먹어버린 듯한 참상이었다.
'어린 순례자야! 저기 생존자가 있다!'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림. 그 말대로였다. 그 끔찍한 참상의 구석에 배를 붙잡고 앉아 있는 생존자가 있었다. 위태로웠다. 그 앞에는 들개와 까마귀 시체가 뒤엉켜 일어난 듯한 괴물이 세 마리나 있었다. 이빨을 번뜩이며.
"후으읍!"
심호흡. 그리고 그 성기사를 향해 높게 도약했다. 아이가 지금 올라탄 건물은 높았고 구빈원은 낮았다. 덕분에 알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착지와 동시에 늑대 괴물 대가리를 짓뭉개 바닥에 쳐박고, 레바테인을 길게 휘두른다. 퍼덕이며 달려드는 까마귀의 부리와 날개를 베어내 쳐부수고, 그 벌떡이는 심장에 독검을 찔러넣었다. 또 다른 늑대가 달려들자 붙잡아 목을 비틀어 바깥에 내버렸다.
푹! 어검술로 확인 사살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늑대 괴물은 하얀 발만 핏물에 동동 띄운 채로 시체가 되어 떠내려갔다.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사태는 모두 정리되었다.
"괜찮습니까?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사태를 정리하고 생존자에게 다가가는 아이. 그제서야 아이는 그가 성기사임을 알았다.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기에 먼발치에선 몰랐던 것이다. 그는 경련하는 눈꺼풀을 간신히 붙잡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교회... 교회로 가 주시오... 그곳에 끔찍한... 악적이 있소..."
떠듬떠듬 말하는 성기사. 그 안구가 우유를 부은 압생트 같은 텁텁한 녹색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녹내장이었다. 이 자는 반쯤 시력을 잃었기에, 생육의 천사가 몸을 일으킬 때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쫓아왔다고 했다. 끔찍한 괴물을, 그웬돌린과 함께.
"칼라일이 명을 내렸을 때... 그의 부두목, 그 오른팔은 살점을 먹지 않고 자결했소. 그의 시체가 핏물에 잠기자, 태어난, 강하고 끔찍한... 괴물이, 그 괴물이... 인간이 인간을 노리듯, 그것은 흡혈귀를 노리고... 쿨럭."
피를 토하며 경련하는 성기사.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참상을 만들어냈을 그 괴물은 이 구빈원의 가엾은 자들을 모두 먹어치웠던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음 희생양을 찾아 떠나갔을 것이다. 이 자는 그 괴물을 저지하려다 이런 꼴이 된 것이고, 그웬돌린은 그 괴물을 쫓아 계속 움직였을 것이다.
"부디... 자비를... 자비를... 나는 그렇게 되기 싫소."
희미하게 떨며 핏물을 가리키는 성기사. 이미 부상이 깊어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장에 미제리코드를, 깊게 찔러넣고, 뽑았다. 확실하게. 그 경련이 완전히 가라앉고 시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눈동자는 슬픔 또 분노를 담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도약한다. 다음 지붕으로, 교회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십여분 후. 마침내 도착했다. 교회 인근의 낡은 저택, 그 지붕에. 아이는 지붕에 올라선 채로 자신이 일주일간 묵었던 교회를 바라보았다. 교회는 푸르스름한 둥근 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마술 방벽이었다. 알다리엘이 날개를 펄럭이며 그 마술 방벽을 지키고 있었다. 지킨다라, 무엇으로부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괴물이었다. 칼라일의 오른팔, 그것이 변해 태어났다는 괴물. 늑대의 상반신을 가진 인간에게 거대한 박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그 괴물은 붉은 피막을 번들거리며 손톱이 길게 자라난 팔로 방벽을 마구 할퀴어댄다.
이 핏물에서 태어나는 괴물들은 살아있는 것을 죽여 생육의 천사에게 바치는 의무를 지고 태어나는 듯했다. 이 괴물은 흡혈귀였고, 보다 특이한 의무를 지고 태어났다. 흡혈귀를 죽일 의무였다. 그리고 지금 이 나사렘에서 가장 흡혈귀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은, 교회였다. 그웬돌린의 교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그웬돌린, 그녀의 새된 목소리가 밤공기를 뚫고 아이의 귀를 때린다. 그녀 역시 알다리엘의 옆에서 안간힘을 다해 마술 방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재빨리 여기 돌아온 모양이었다. 엘렌이, 셀렌이,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허리춤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괴물, 온갖 괴물들이 그 마술 방벽을 둥글게 둘러싸고 두들기고 있다. 이 가난하고 더러운 거리를 핏물이 휩쓸어 태어난 괴물들, 그것이 다 몰려들어 있는 듯 했다. 그 수는 대충 헤아려도 수백에 달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이는 잠깐 그웬돌린을 의심했었다. 지붕 위에 올라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자, 그 의심은 눈녹듯 사라졌다. 그 맹인 주교는 정말로 종족의 화합 같은 낭만을 믿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주교복을 입은 것이었다. 지킬 보람이 있는 사람이야.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냐, 어린 순례자야?'
"구해내야지. 약속했잖아."
'무슨 약속을?'
"싸우지 않으면, 부모님이 필요하지 않게 될 거라는 약속."
엘렌, 그리고 셀렌과 나눈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지금 그웬돌린을 끌어안은 채로, 손을 맞잡고 울며 서로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림은 피식 웃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웬돌린, 그녀는 어쨌든 5위계의 마술사였다. 그녀를 여기서 구해낸다면, 박애의 천사를 무찌를 때 큰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에바, 나, 그리고 주교까지 가세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아이는 침착하게 아래를 노려보았다.
수백의 괴물, 그리고 하나의 강대한 괴물이 교회를 둘러싸고 공성을 하고 있다. 오금이 저려 주저앉을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것들을 무찌르려면, 어떤 검이 제일 좋을까. 그런 생각. 한 번에 세 마리쯤 베어넘기면서 전진해야겠는데, 그러려면.
"림, 유혼."
고개를 끄덕이며 유혼을 건네주는 림. 아이의 손에 늑대의 이빨을 닮은 검이 솟아났다. 찌이익, 옷소매를 찢어 검 손잡이와 손을 천천히 묶고, 이빨로 단단히 동여맸다. 지금부터 일어날 난전에서, 혹시라도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한 방비였다.
"가자!"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며. 아이는 건물 지붕에서 벼락처럼 떨어져내렸다. 유혼은 시린 검영을 흘리며 우아하게 목뼈를 토막냈다. 첨벙! 괴물의 목이 잘려 핏물에 잠긴다.
"어! 어, 어!"
멀리서 반가운 탄성이 터졌다. 눈물 범벅이 된 엘렌이 아이를 알아보고 탄성을 내지른 듯했다. 아이는 떨어지며 단번에 네 마리의 괴물을 토막치고, 사뿐하게 착지했다. 콰직! 유혼이 베어내 바닥에 나뒹구는 팔뚝 하나를 세게 짓밟는다.
괴물들의 적의가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으르렁대는 소리도 들린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기분좋게 들렸다.
"조금만 기다려!"
무리를 지어 달려드는 들개 같은 괴물들. 유혼을 붙잡고 거기 마주 돌진하며, 아이는 우렁차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