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94화 (94/279)

17. 순수 ( 2 )

-너는 유약하구나. 그대의 힘은 이상에 미치지 못해 너를 믿는 자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조언하건대 포기해라. 포기하고 도망쳐라. 그게 그나마 희생을 줄일 방법이다.

외신의 힘을 두른 유혼, 그것을 쥐어잡고 나서부터 계속 이랬다. 냉소적이고 어두운 말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스며나와 뇌를 울려댔다. 그 말은 흉칙하게 몸을 뒤틀어 뇌를 조여대며, 후려쳐 쫓아내지 않으면 아예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뇌의 주름마다 독숨을 불어넣었다. 한 마리의 뱀처럼.

"닥쳐!"

소리지르며 칼을 휘두른다. 하단을 노리고 둥글게 짓쳐들어오는 사슬에 검을 맞부딪힌다. 쨍! 큰 소리, 튀는 물보라. 쩔렁거리며 비틀대는 사슬. 유혼은 묵직했다. 용광과 달리 사슬을 튕겨낼 수 있었다. 사슬이 맥없이 물러나 천사의 가슴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아이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파고들어 유혼을 둥글게 휘둘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명이 터지고 핏물이 튄다. 사타구니부터 아랫배까지, 긴 상처를 만들어낸다. 그 상처 가득 샘솟는 핏물은 유혼에 빨려들어 그 검날은 더욱 시커매졌다. 이 칼날이 전부 검은 기운으로 차면, 그때가 최후의 일격을 날릴 때였다. 지금 유혼은 삼 할 정도 피를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천사는 상처를 입어도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아랑곳않고 어깨를 들이밀어 덮쳐오는 천사. 아이는 옆으로 굴러 피했다. 돌진한 천사는 창졸간에 광장의 끝까지 다다라 또 대리석을 하얗게 부숴 파편을 띄운다. 비산하는 돌조각을 바라보며, 아이는 유혼을 바르게 세웠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구나. 나라면 2격, 3격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횡베기를 한 다음 배면으로 돌아서 찌르고 빠져나오지 않은 것이냐. 수준이 처참하구나.

"제발, 닥쳐!"

계속 터지는 훈수. 거친 말로 쫓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말은 계속 무언가를 찾아내 머릿속을 물어뜯었다. 이 외신의 힘을 다루는 대가로, 머릿속에 들어앉은 이 이름없는 목소리는 계속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그냥 모든 의식을 내려놓고 내게 몸을 맡기거라. 네 나약함을 이겨낼 방편이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온갖 공허한 말로 아이를 모욕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다가도 훈수를 두고 유혹했다. 머릿속에 자신을 가장 격렬히 증오하는 적대자를 들어앉힌 느낌이었다. 이를 악물며 다시 싸움으로 몸을 던진다. 그게 이 목소리를 조용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 또다른 투쟁과는 별개로, 싸움은 순조로웠다. 세 사람은 삼각형을 이루며 천사를 포위했다. 각 꼭짓점이 번갈아 천사를 공격하며, 천사가 거기 반격하면 다른 두 방향에서 천사를 덮쳤다. 만약 한 꼭짓점이 위기에 빠지면, 다른 두 꼭짓점이 힘을 합쳐 구해냈다. 이것이 반복되며 아이의 유혼에는 피가 쌓여갔고 천사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천사가 이번에 노린 것은 에바였다. 몸을 낮춰 다리를 길게 베어내고 물러선 에바. 그녀를 노리고 사슬을 휘두른다. 휙 몸을 빼는 에바. 하지만 그 사슬은 높다랗게 솟은 기둥을 감쌌고, 천사는 그 사슬을 잡아당겨 순식간에 에바 앞으로 접근했다. 사슬을 들어올려 기둥을 뿌리째로 뽑고, 에바에게 내려찍는다.

쾅!

굉음. 기둥은 분수처럼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닥을 쪼갰다. 거기에 시야가 가려진 에바는, 순간적으로 사각에 몰렸다. 피할 수 없도록 두 방향으로 사슬이 날아들어 에바의 허벅지를 감싼다.

"악! 이거 놔!"

소리지르는 에바. 그 금색 눈이 분노로 번뜩인다. 천사는 먹잇감을 잡은 낚시꾼처럼 사슬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슬을 놓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등을 아이가 덮쳐들었기 때문이었다. 알다리엘의 어깨를 딛고 높이 솟아오른 아이가 천사의 등을 양단하다시피 크게 잘라냈다. 천사의 등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에바를 드디어 붙잡았다는 흥분에 젖어, 방어를 도외시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였다. 살점이 크게 잘려 혈관은 울컥대며 피를 토해대고 그 피는 유혼에 빨려들어간다. 놓친 사슬을 집어들고 뒤돌아서는 천사.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저 여자를 먹어치우게 놔뒀어야지. 그리고 포식의 중간에 더 공들여 목을 치고 등을 부쉈으면 되는 것 아니냐. 어리석구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아이는 천사에게로 덮쳐들었다. 분노해 뒤돌아선 천사의 가슴은 휑하니 열려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백옥처럼 빛나는 갈비뼈를 붙잡고 솟아올라, 그 가슴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심장에 유혼을 찔러넣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떨림, 선혈, 고통에 찬 비명이 쏟아져나왔다. 순식간에 유혼의 핏물은 칠 할까지 차올랐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입이 너무 깊어 심장을 끝까지 찌르진 못했다. 그 끝만 살짝 찌르고 빠져나왔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가한 어떤 공격보다도 더 심한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세상 전체를 떨쳐 울릴 듯한, 산사태라도 일으킬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고 사슬을 마구 휘두른다. 피해요! 그웬돌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에바, 아이, 그리고 그웬돌린은 모두 광장에서 벗어나 고지로 올라섰다. 생육의 천사는 심장에서 피를 흘리며 마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광장 전체를 부숴버리는 게 목적이라도 되는 듯 광란하며 사방에 마구 사슬을 내려찍는다.

한참이나 그렇게 혼자 난동을 부리던 생육의 천사. 제 풀에 지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쳐든다. 쿵! 커다란 무릎에 맞닿은 바닥돌이 부서져 거미줄같은 잔금이 퍼졌다.

그 눈에 문득 교회가 들어왔다. 수백 년 간, 나사렘의 중심에 서서, 살을 태우는 냄새와 피연기를 맡아가며 증축을 거듭한 개미집 같은 교회. 어떤 주교가 평생을 바쳐 세운 교회. 그것을 바라보던 천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인간의 말을.

"고오오오오... 고오오오오.... <너는 진멸하라>..."

뭐?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생육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그것의 입은 분명히 인간의 말을 말하고 있었다. 들어본 문구였다. 카사노, 그가 버릇처럼 읊던 어구. 오래된 성경에서만 사용하는 어구였다. 그것은 교회를, 자신이 앉아 있던 첨탑을 올려다보며 기괴하게 뒤틀린 카사노의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늘어놓는다.

"<너는 진멸하라... 진멸하고 진멸하고 또 진멸하며 한 점 미혹도 품지 마라>... <네 교회에 숨어들어 성읍 거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그들을 진멸하는 데 주력하라.>"

그 목소리는 교회와 공명하는 듯 들렸다. 화려한 귀금속으로 덧댄 교회의 장식, 그것이 천사의 얼굴을 어둡게 반사한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카사노의 정신. 젊은 날의 카사노의 증오와 분노 또 복수심을 떠올린 생육의 천사는 멍하니 계속 중얼거린다. 그 어조는 점점 광기어리고 소름끼치는 다짐으로 화한다.

"<잘 벼린 칼날로 그 생축의 내장을 도려내고 목을 벨 것이며 손톱을 뽑고 내장을 불태워 네 주께 바치라.>"

-뭘 멍하니 있는 거냐? 덮쳐서 죽여!

이번에만큼은 뇌 속 목소리가 옳은 훈수를 했다. 연단의 난간에 매달려 천사의 광기를 피하던 아이는, 유혼을 뽑아들고 뛰어들었다. 철벅! 물이 튀고 바짓단을 가득 적신다. 하지만 아이는 아랑곳않고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노리는 곳은 그 심장이었다. 불길한 예감, 저 광기에 찬 낭독이 끝나면 틀림없이 더욱 불길한 일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너는 진멸하라>, <진멸하라>, <진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간의 말은 다시 소름끼치는 이형의 비명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모습 또한 변했다. 그저 장식처럼 매달려있던 날개, 그 날개가 우화하듯 풍성하게 커졌다. 살가죽을 찢고 또다른 날개가 치솟고, 또 치솟아, 이제 네 장의 날개가 퍼덕거렸다. 네 장의 날개 사이에서 붉은 법의가 목도리처럼 나풀댄다. 그것은 새로이 탄생한 아기처럼 긴 비명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어린 순례자야, 조심해라! 이 놈이 아까 공양받은 제물, 그 흡수를 반쯤 끝냈다! 그래서 형태가 변한 거다!'

림의 고함. 생육의 천사는, 강력한 외신인 박애의 아이킬로스. 그것을 이 땅에 깃들게 하기 위한 화신체였다. 아직 미완성인 애벌레 상태인데 저렇게 강했다는 뜻이었다. 저것이 완전히 각성하면, 저 몸을 빌려 그 외신이 깃드는 구조였다. 그리고 저것은 지금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했다. 번데기 상태도 끝나면, 나사렘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해! 아이는 속으로 다짐하고 다시 유혼을 세게 붙잡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나 만만하지 않았다. 저것은 원래 카사노의 몸이었다. 그는 어쨌건, 마술사로 5위계에 오를 정도로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 방금 저것은 그 생전의 기억을 반쯤 되살린 듯싶었다. 그래서 전술이 크게 진화하고 말았다.

괴성을 내지르며 날개를 퍼덕여 날아오른다. 그리고 내려찍는다. 쿵! 바닥을 쳐부수고 다시 날아오른다. 쿵! 반복한다. 아이는 그저 옆으로 굴러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석제 난간이 부서지고 연단이 토막나 바닥에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다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날아오른 천사는 이번엔 허공에서 사슬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찍는 두꺼운 사슬, 그게 담은 힘은 무겁고 또 무서웠다. 광장을 쳐부수며 돌파편이 날고 바닥에는 둥근 홈이 계속 뚫린다. 척, 커다란 돌조각을 사슬로 붙잡아 내던진다. 쾅! 아이의 바로 옆에 돌이 박혔다. 투석은 계속되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제기랄, 림, 미제리코드!"

독의 단검을 불러냈다. 이게 지금 아이가 어검술로 다룰 수 있는 최대치였다. 미제리코드를 어검술로 쏘아내 맞부딪힌다. 독검의 천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생채기로 보라색 독이 퍼져나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이 치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허공에 떠올라 일방적으로 돌을 쏘아대는 것을 멈추는 천사. 그러나 그 다음엔 다시 온 몸을 망치처럼 내려찍기를 반복했다. 전세는 어느새 천사의 우위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탐색을 거듭하던 천사는 또 다른 전략을 세웠다. 그를 포위하던 세 명, 그 중 가장 약한 자를 노려서 먼저 쳐부수면 포위가 깨질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즉, 목표는 그웬돌린이었다. 교회의 첨탑까지 날개를 퍼덕여 날아오른 그것은, 온 몸을 탄환으로 쏜살같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급강하, 가속도를 받은 그 신속한 돌진을 그녀는 피할 수 없었다.

"고오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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