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순수 ( 5 )
아이에게 세상은 바다와 같았다. 악의로 가득찬 바다였다. 세상을 가득 감싸안아 사람의 입과 입을 오가고 어둠 속에 가라앉혀 익사시키는 그 하염없는 악의가, 어디서 시작되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주에게 정신을 빼앗긴 아이는 지금 가라앉고 있었다. 마음 속의 바다 깊숙히.
뱀이 그 몸을 깨물고 있었다. 온 몸 가득 밧줄처럼 뱀이 매달려 저 심해로 가라앉힌다. 아이는 멍하니 눈을 뜬 채로, 바다 표면에서 찰랑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다른 것이 스쳤다. 가시고기였다. 빼빼 마른 채로 알을 지키고 있었다. 팔에 매달려 있던 뱀 하나가 스윽 고개를 돌려 그 고기를 한 입에 집어삼켰다. 가시고기는 몸을 부풀려 마지막까지 투쟁하다 비명도 없이 스러졌다. 알은 이끼와 바위틈에 외롭게 남았다.
먹이로 태어난 것이 왜 먹이의 운명을 낳고서 또 먹이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삶을 견디어내는지,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깊은 바다에는 빛도 없었다. 심연에서 튀어나온 뱀들은 아이를 심연으로 인도해간다. 멀리서 흔들대는 푸른 바닷물이 흐리게 물러서며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응?"
그 물비늘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불길이었다. 교회가 무너지는 불길. 선주의 눈으로 보았던 것. 카사노가 일으켰던, 아주 작지만 큰 기적이 물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이미 허무에 물들어 완전히 망가진 영혼. 구원받을 길도 없는 악에 틀어박힌 영혼도 참회를 한다. 무언가를 지키려 애쓴다. 그 사실이 물 너머에서 일렁이며, 이 깊은 심해의 바닥까지 빛을 비추고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진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래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없었고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아이는 그 사실만은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 노력할 순 있었다. 아이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 다음에 나타난 장면 때문이었다. 물비늘은 그웬돌린에게 다가가는 선주를 비추고 있었다. 한 늙은 주교가, 완전히 망가지고 부서진 가운데도 일어서 지키려 한 그녀였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런 마음이 팔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깊은 수면 속에서 아이는 몸을 바로 세웠다. 뱀들이 아우성치며 몸을 눕히려 들었다. 뿌리쳤다. 어깻죽지를 물고 있는 놈의 목을 찢고 다리를 감싼 놈은 묶어서 내던지며, 위로 헤엄쳐 올라섰다. 빛을 향해서.
입에서 나온 뽀글대는 거품이 눈 앞을 가렸다. 팔을 크게 휘둘러 부수고 헤쳐나간다. 마침내 연파랑의 수면과 얇게 들이치는 물햇살이 눈 앞에 다가왔다. 아이는 뱀이 달라붙은 오른팔을 크게 후려쳐 물뱀떼를 떨쳐내고, 하늘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곧게.
"연자여, 이건 무슨 장난인가?"
현실. 선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허공에 용광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림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검은 허공에 둥둥 떠서, 그웬돌린의 심장을 노리고 내려찍은 선주의 검을 막아세우고 있었다. 탈라사, 아셀라이에게 배운 뱃사람의 기술. 어검술이었다.
선주의 몸 속에서 정신을 되찾은 아이가, 어검술을 이용해 용광을 꺼내어 그걸 막아세운 것이었다. 선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무튀튀한 머리를 길게 흩날리며 림을 바라보았다. 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할 뿐이었다.
'글쎄, 또 다른 순례자가 검을 요청하니 나는 주었을 뿐이야. 결착은 너희들이 짓는 것이겠지.'
"농담이 정말 많이 늘었군.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듯 마술사는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타협도 결착도 없어. 연자여, 그걸 알려준 건 그대 아니던가?"
림은 침묵했다. 용광을 거두어들이게 만들라는 선주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선주는 한숨을 내쉬고, 코람 데오를 세게 붙잡았다.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용광은 위태로웠다. 아이가 벼려낸 검은 선주의 검을 이겨내기 힘들어했다. 칼이 부딪힐 때마다 용광의 날은 삐걱대며 새겨진 용무늬가 일렁거렸다. 세 번째로 타격이 계속될 때마다, 코람 데오는 뼈 같은 흰 빛을 뿌리며 용광의 검날 전체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져 패배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버티어냈다. 한참이나 버티어냈다.
"끈질김 하나는 인정해주지."
선주가 질린 듯 말한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흐늘거리면서도, 굳세게 버티어내는 용광에 감탄 아닌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인내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사렘 어디에서나 보일 정도로, 높고 크게 솟아 있던 교회. 그 교회가 사라진 나사렘의 하늘은 맑고 시원했다. 그 시원한 하늘에 보라색으로 깔린 어스름, 그것을 녹이며,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여명이었다.
"응?"
선주의 눈이 놀람으로 일렁였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였던 용광의 검날, 그 전체에 황금빛이 찰랑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범상한 힘이 아니었다. 놀라서 코람 데오를 내던지고, 레바테인을 꺼내 가로막으려는 찰나. 용광 가득 매인 새벽빛이 쏟아져나왔다.
쾅!
굉음을 일으키고, 선주를 후려치고, 그러고도 모자라 연단과 교회의 폐허를 뚫고 아침해로 날아간다. 용광의 조건.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 조건이 새벽이 밝아 드디어 충족된 것이었다. 또 다른 조건은, 카사노가 채워주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소망이 그 늙은 주교의 흉칙한 눈에서도 어른거렸다. 깊은 마음 속에서 아이는 그것을 확인했다.
"커헉, 크흑, 허억..."
용광의 빛무리가 일으킨 빛의 파동. 그것이 걷히고 나서, 엎드려 켁켁대는 소년이 보였다. 머리털은 눈 같은 흰 빛이었다. 선주는 어째서인지 외신과 반쯤 결합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용광은 그것을 괴물로 판정했고, 힘을 발휘해 몰아낸 것이었다. 아이는 결국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어린 순례자야,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겨낼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하라고...'
림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아이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크헉! 뭐야?"
아이가 오른팔에 들고 있던 레바테인, 여전히 생물적인 모습으로 꿈틀대는 그 검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용광을 한 번 휘둘러 몰아내기에는 선주의 영혼은 너무 강하고 끈적였다. 아까와 상황이 반전되었다. 아이의 오른팔과, 오른팔이 쥐어잡은 레바테인이 날뛰며 자해하려 애쓰고, 아이는 다른 손으로 자기 자신과 싸움을 계속했다.
"큭!"
휘웅. 레바테인이 거꾸로 치솟다 번개처럼 궤적을 바꾸어 발등을 내려찍었다. 콱, 신발이 찢겨나가고 피가 크게 튀었다. 아이는 뒤로 넘어지며 어떻게든 오른팔과 레바테인을 억누르려 애썼다. 데굴데굴 구르며 온 몸에 먼지를 묻힌다. 그 때였다.
"어떤 옛날에서 찾아온 망자인가?"
금빛의 검이 날아들었다. 나비검이었다. 수천 개의 나비검이 사금처럼 반짝이며, 아이의 몸을 둥글게 휘감았다. 이윽고 그것은 천칭이 되었다. 천칭이 되어, 아이를, 정확히 말하면 아이의 손과 레바테인을 속박해 천칭의 저울에 묶었다. 인마궁 케이론. 그것의 진정한 모습. 죄의 무게를 달아 지은 죄의 무게만큼 벌을 주는 천칭의 형태였다.
"아셀라이!"
아셀라이였다. 나사렘 전체를 뒤엎은 대소동은 멀리서도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랭 반도로 떠났던 그녀가, 그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반갑게 말하는 아이. 하지만 아셀라이의 얼굴은 진중함과 무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천칭을 만들기 위해 꺼냈던 십자검을 다시 수납하고,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깃털을 뽑아들고, 저벅저벅 걸어온다.
"이미 죽은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에 개입해선 안 되는 법이야."
그 말에 레바테인이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금방이라도 포승을 풀어버릴 것처럼. 그 검명은 울부짖는 듯도 들렸다. 아셀라이는 무거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다른 쪽의 접시에 깃털을 올려놓았다. 끼이익, 천칭이 기울고, 아이의 팔을 휘감은 검은 기운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다..."
기운이 빠져 뒤로 쓰러지는 아이. 그 시야에는, 탁 트인 하늘 가득 솟아오르는 아침해가 보였다. 말갛게 고운 햇살이 탁 트인 나사렘을, 핏물이 사라진 포석을, 석제 난간과 누워 가르랑대는 에바를 지나 -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그웬돌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를 밝게 비추었다. 해낸 걸까. 내가 택한 길이 맞은 걸까. 그런 안도 섞인 의문이 눈꺼풀을 닫는다. 아셀라이는 조용히 그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축일의 밤.
그 밤은 그 아침해와 함께 끝을 맺었다.
*
크투차가 축일. 배고픈 이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자신의 살덩이밖에 없었던 성인을 기리고자 제정된 축일. 그 악몽 같던 축일로부터 이틀 후.
"정말로 더 상처를 정양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부담되서 그런 것이라면..."
그웬돌린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아침, 아이의 방이었다. 창살로는 뽀얀 햇살이 먼지의 움직임마저 느긋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이는 말없이 팔에 묶은 붕대를 풀어 보여주었다. 상처는 깔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탄탄하게 드러난 몸에 훌렁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꿴다.
가야죠.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이는 대답했다. 기나센의 에페 바체 시험, 세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한은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다. 여기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탓이었다. 그웬돌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긍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맞아! 상처 입었을 때, 겉으론 나은거 같아 보여도 진짜 나은 건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고 그랬어요."
그웬돌린의 허리께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한다.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 엘렌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셀렌이었다.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이 가득한 것을 보니 확실했다. 아이는 말없이 웃으며, 그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뜨끈한 체온이 두피를 지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가만히 그 쓰다듬을 받던 셀렌은, 갑자기 눈물을 그렁그렁 맺더니, 울기 시작했다.
꼬마아이들의 울음이란 원래 쉽게 전염되기 마련이다. 아이들로 가득찬 고아원은 느닷없이 울음으로 젖었다. 그 울음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멈추었다. 여기저기 휘둘려 나무조각을 열세 개나 더 깎아준 다음에야, 풀려나 언덕 위로 떠날 수 있었다.
"잘 가요! 천사님!"
합창하듯 배웅하는 꼬마들. 흡혈귀 꼬마들. 아이는 손을 흔들며, 작게 응대했다. 안녕, 미래의 광휘들. 그런 대답이었다.
그 아이들은 미래의 라디오소, 옛날의 그 기사단이 될 것이었다. 돌아온 아셀라이가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휙, 뒤돌아선 아이의 등에서 붉은 십자가가 펄럭였다. 아탕칼리의 계인이었다.
완전히 아이를 시험하는 것을 끝마친 아셀라이가, 자신의 제자라는 징표와 더불어 선물한 것이었다. 아나테마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탕칼리였으므로, 아이는 이제 합법적인 아나테마나 다름없었다. 제국을 걷다 죽을 염려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어젯밤 그 계인을 받기 위한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은 다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뤄졌다. 돌아온 아셀라이는 선주를 보았다. 수 많은 외신을 상대해보았던 그녀는, 알 수 없는 외신과 반쯤 결합되어 있는 선주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위험함은, 아이가 문제 없다고 보고하려던 종래의 판단을 뒤엎었다. 그녀는 에바와 아이를 모아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순수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런 것을 품고 그런 것에 휘둘린 이상, 나는 너희를 용인할 수 없노라고. 내일까지 너희들의 순수를 증명해라. 그런 으름장이었다.
돌려 말한 것이었다. 아셀라이가 생각할 때 순수를 증명하는 방법이라면, 싸움과 투쟁밖에 없었다. 내일 맞서 싸워서, 이기는 쪽이 올바른 것으로 정하자. 그런 의미였다.
선주가 위험하니 아이를 용납할 수 없다, 그 판단에는 근거도 있었다. 레바테인이었다. 선주가 사라진 뒤에도 레바테인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칼날을 일렁이고 요사한 붉은 빛을 뿌리며, 완연한 마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쐐기를 박아 넣은 게다. 림은 그렇게 말했다. 그 검을 쥐면 또 등골 먼 구석에서 선주가 말을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언제든 힘에 취했을 때 다시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포석이었다.
아이와 에바는 그 말을 듣더니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아셀라이는 말없이 끄덕였다. 일종의 포상이었다. 자신이 떠난 사이, 이 도시를 훌륭하게 지켜낸 것에 대한 포상. 공터에서 시험이 치러지기로 했다. 아셀라이는 십자검을 매만지며, 그 처음 만났던 공터에 걸터앉아 시험을 준비했다. 어떤 싸움일까, 저 둘이 힘을 합쳐 덤벼오면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면 죽일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의 준비였다.
그런 의문에 부딪힐 때면 아셀라이는 먼 옛날을 생각했다. 피의 갈망, 욕구를 문질러 지워버리고 정신을 무뎌지게 만드는 장생의 저주. 그것에 부딪혀서 인간이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잊어버릴 떄마다, 그녀는 흉내를 냈다. 먼 옛날, 십자군에서 마주한 소년.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던 소년의 흉내였다.
라디오소는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흡혈귀와 하나되어 힘을 합쳤다는 것은 후대의 조작이었다. 그건 그저 징집이었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흡혈귀 중 싸울 수 있는 자를 모아서 외신과의 싸움터에 몰아넣었다. 아셀라이는 그 가혹한 독전의 채찍을 휘두르는 일개 성기사였다. 담당한 흡혈귀는 소년이었다. 장난기가 많고, 그런 참혹한 상황에도 웃을 줄 아는 소년. 손이 놀 때면 항상 무언가 조각을 했다. 그게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물었더니 꿈을 말했다. 이렇게라도, 싸울 기회를 받은 게 즐겁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서 세상을 바꿔 보고 싶다고. 저주받은 운명을 태어난 자도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런 다짐으로 끝맺었다.
그 허무맹랑한 다짐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죽었다. 외신과 싸우다 죽었다. 아셀라이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거기에 몰아세운 아셀라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껴안고, 목을 깊게 깨물었다. 살아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그녀를 흡혈귀로 만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환했다.
이미 모든 감정이 메말라서, 흉내가 아니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그녀였지만, 이 기억만은 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아련한 혼돈이 세차게 피어올라 가슴을 두드리고 온 몸 가득 감정을 퍼날랐다. 슬픔이었다. 그게 그녀에게는 마지막 증거였다. 그녀가 인간이라는 증거. 아아, 오랜만에 되새기니 알았다. 아이를 보고 이유 없이 깊은 친밀감을 느낀 까닭을.
"시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저렇게 밝은 얼굴로, 인간이고자 노력하는 것. 그 세찬 부딪음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셀라이는 고개를 휘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벙쪄서 입을 헤 벌렸다.
"소년, 그게 뭐냐?"
그건 조각이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을 품 가득 들고 있었다. 에바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집어보니, 소중한 사람들. 자신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조각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중에는 아셀라이도 있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순수를 증명하라고 했잖아요. 제 생각에는, 이렇게 소중하게 여길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가장 올바른 증거... 거기서 말꼬리를 흐린다. 뭔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뜻이었다. 에바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쑥덕대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에 조금 밝아졌다 한 들, 이 두 사람은 바보였고 바보가 머리를 맞댄 결과는 이것이었다. 정답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답.
아셀라이는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진심으로 웃은 게 얼마만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아셀라이는 자신을 조각한 목상을 집어들고 뒤돌아섰다.
"소년, 고맙다. 가보로 삼으마."
"뭘, 그런... 당신한테 배운 건데요."
그리고 그 정답은 다른 대답으로도 이어졌다. 카사노의 손자. 대죄를 저지른 파계 주교의 직계이자, 흡혈귀가 되어버려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손자. 그를 아셀라이가 맡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놀라서 왜 심경이 바뀌었냐고 묻는 그웬돌린에게, 아셀라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나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게 다야."
그 주머니에는 아이가 선물한 목상이 소중하게 담겨 있었다. 흡혈귀 종자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라디오소의 부활을 뜻했다. 이제 그웬돌린이 맡은 아이들은, 진실로 광휘에 걸맞은 화합의 상징, 기사단이 되어, 나사렘의 밤을 지워갈 것이었다.
그녀가, 그리고 그 광휘가 있는 한. 어제 같은 밤은 다시는 오지 않을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딛는 사이에 비탈길에 접어들었다. 언덕에 매달린 나무는 그늘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나뭇잎이 부스럭대는 게 보였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불쑥. 그 나뭇가지 사이에서 무언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바였다. 아이가 떠난다고 할 때부터 같이 가고 싶다는 티를 내더니, 이젠 몰래 따라붙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자기도 기나센으로 가야 할 일이 있다나.
"오지 말라니까. 너랑 난 적인데?"
"헤헤헤,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정말로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달라붙어서 절대 의심하지 않는 그런 끈덕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칼라일에게 속아넘어가 희생자를 냈다고 죄책감에 떨던 그녀는, 아셀라이가 라디오소를 재건해 해결책을 찾았다는 말을 듣자 펑펑 울었다. 그리고 아이가 은인이라며 달라붙었고, 아이는 쳐냈다. 이제는 그 달라붙을 대상이 아이로 변한 것 같았다. 아이는 능청스럽게 달라붙는 에바의 볼을 밀쳐내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따라올 테면 멋대로 따라오던지."
그게 차라리 편해보였다. 재잘재잘 떠드는 에바를 뒤에 두르고,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걸었다. 언덕에 도달했다. 나사렘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 아이는 잔디 위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걸터앉아서 나사렘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높다란 교회가 무너진 자리. 거기에는 나뭇가지와 무명으로 두른 움막이 들어섰다. 재난으로 집을 잃은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아탕칼리의 수도사들과 성기사들이 분주히 일하며 피난민을 수발드는 것이 보였다. 그 하나하나의 움막은 커다란 교회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가 되어, 생명을 품고 밥 짓는 연기를 피워냈다.
교회가 사라져 탁 트인 나사렘의 하늘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하늘색으로 널따랗게 펼쳐진 천공의 가장자리에는 새털구름이 눈썹처럼 늘어졌다. 밥 짓는 연기가 줄지어 늘어서 코와 입을 만든다. 말갛게 개인 하늘은 하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 끝에 매달린 것은, 틀림없이 모두를 감싸안을 박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