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후일담 #1. 제도
제도는 영원했다. 제국의 모든 땅을 굽어볼 수 있도록, 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이 도시는 시간에 침식되지 않는 듯했다. 비가 내려 돌담을 쓸어내리거나 토사가 흘러내려 바닥돌을 파먹으면 사람들은 매년 그 돌조각을 갈아치웠다. 물도, 햇빛도, 어떤 자연도 여기에 시간의 무늬를 새기지 못하는 것이어서, 때로 이 도시는 어떤 흐름 속에 멈춰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궁은 그 중심에 있었고 그 뒤편엔 법정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법정이었다. 성녀 호노레 블뢰유는 그 법정의 판사석에 서 있었다.
"그러니, 이 사안을 아지프 내부의 일로 보아서 재량권을 인정해달라는 말입니까?"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변호측. 호노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연일 말도 안 되는 재판에 휘말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문제를 일으킨 아지프를 방치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변호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피고, 정확히 말하면 피고의 대리인을 보고 지끈대는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 전부터 계속 이런 상황에 부딪혔다. 어떤 모략의 결과인지, 아니면 늘상 있는 권력투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지프 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숙청. 그것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현상이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군소 마탑들의 비리가 갑자기 줄줄이 드러나 사방에 뿌려졌다.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진실도 섞여 있었고 그 진실을 담보로 적어낸 거짓과 음해도 섞여 있었다. 그러면 민심을 근거로 아지프의 거대 마탑들은 몸을 일으켜 숙청에 나서거나, 회유했는데, 그 몸짓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성을 띄고 있었다.
'학장 선거인가?'
아지프의 학장 선거는 흉험했다. 입후보하고, 당선되지 못하면, 죽는다. 희생의 학파답게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학장 선거는 전쟁이었다. 이 자들, 현재 학장을 배출해 권력을 쥐고 있는 서부 마탑은 라달라리아를 원군으로 골랐다. 자신들에게 회유되지 않은 군소 마탑을 공격해달라, 그런 부탁을 고발과 회유로 청해온 것이었다. 이 아지프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호노레 일인이 맡기로 일임되었다. 그것이 성인의 일이었다.
군을 출병시켜 남부의 아지프를 토벌하는 것은, 그것은 문제가 없었다. 호노레는 거기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이었다. 이 자들은, 자신들과 연이 닿은 군소 마탑에 한해서는 죄를 사해줄 것을 청한 것이었다. 재량권을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그런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그 청탁은 윗선을 거쳐 호노레의 귀에 들어왔다.
그럼 명분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형평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호노레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윗선은 조용히 호노레를 응시하도 말했다. 잃을 것은, 성녀의 명예 뿐이라고. 호노레는 입을 다물었다.
'30대 초반에, 거저 성녀 자리를 주는게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을 했는데.'
계획적이었다. 윗선에서는 어떤 격랑을 예견하고 있었고, 그래서 방패막이로 내세우기 위해 호노레를 성녀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떤 아지프의 군소 마탑은 제국의 군대로 엄벌하고, 어떤 마탑의 횡포는 방치한다.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격렬한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성녀라는 직위의 무게가 그것을 막아세운다. 막아세우지 못하면, 호노레 혼자 명예를 잃고 야인으로 돌아가면 된다. 성녀를 제물로 아지프와 라달라리아의 결속은 강해진다. 말은 않았지만 그런 청사진이 호노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노레를 조여오는 것은 그 청사진이었다.
'안 돼. 그런 식으로 소모되려고 나는 이걸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이를 앙다물었다. 부리가 흰 쏙독새의 가면을 뒤집어쓴 피고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태연했다. 호노레의 손에는 나무 망치가 들려 있었다. 문득 충동이 일었다. 이 망치로 저 가면을 깨부수고 죽을 때까지 두드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나무망치는 그저 모조품이었다. 이 작은 망치로는 숨을 집을 지을수도, 적을 깨부술 수도 없었다. 호노레는 법봉을 크게 내려찍었다.
"유예! 피고인의 태도가 불량하므로 재판은 유예합니다!"
대리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 씩씩대며 돌아서는 호노레의 뒤로 냉소와 비웃음이 터졌다. 다들 호노레가 몰린 궁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도, 이 정지된 도시에서 변화는 적이었다. 호노레는 두각을 드러냈고 활보했으며 자신의 무늬를 세계의 계단에 새기려 들었다. 그런 계단은, 갈아치우는 것이 이 곳의 도리였다.
"썩어 빠졌어! 불결해! 무사안일해!"
호노레는 하얀 율사복을 휘날리며 백옥을 바른 회랑을 걸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또 적당히 여기저기 줄을 대 놓았다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들만 안위를 지키면 된다는 건가?"
분명히 어떤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있었던 카나기와 아지프의 충돌, 연이어 일어나는 숙청과 정치적 격랑, 제국 전체를 포위하듯 외곽에 손을 뻗쳐대는 조디악의 행보, 모든 것이 어떤 전주곡을 연주하는 듯 들렸다. 그런데 그 변화가 다가오자 라달라리아의 수뇌부가 하는 짓이라곤, 중립과 공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모든 구세력에 팔을 뻗치는 것 뿐이었다. 호노레가 볼 때 그건 그저 보신주의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름 후에는 결론을 내야 하는데."
우뚝. 자신의 방 앞에 멈춰선 호노레는 서늘한 대리석 벽에 흰 이마를 기댔다. 세공사탕처럼 희고 길게 늘어진 머리가 얼굴을 면사포처럼 가리웠다. 그 머리에는 아카시아가 풀잎쨰로 매달려 있었다.
"단테... 당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단테 아길리오. 성도 8궁의 일원으로 알데바란의 주인이자 그녀의 집행관이고, 또 그녀의 어려서부터의 친우인 남자. 그는 호노레의 명에 따라 남방의 아지프 마탑을 숙청하기 위해 떠나 있었다. 그녀와 그를 찢어놓으려는 계략에 보기 좋게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강짜를 부려서라도 이 난국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녀에겐 지금 그럴 무력조차 없었다. 망망대해에 배도 없이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마로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이, 그래도 기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이렇게 격정적으로 행동할수록 그녀의 적들은 더 좋아할 것이었다. 호노레는 밝게 표정을 바꾸고, 뺨을 두 번 친 다음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선 그녀가 새로 들인 제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성녀님! 재판은 잘 진행되셨나요?"
곱게 틀어올린 분홍 머리의 여자가 밝게 웃으며 맞았다. 방금 전까지 다과의 준비를 하던 모양이었다. 다나 아니스, 얼마 전 북서 자치령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특별히 제자로 삼았던 여자였다. 호노레는 웃으며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 아이를 굳이 들였지.'
그녀의 출신은 천했고 가난했다. 현실에서는 추할 수 있는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만은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났다. 그 아름다움은 명가의 규수인 호노레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겠다, 그런 생각으로 접근해 제자로 맞았다.
'남 탓할 일이 아닌 걸지도. 나도 같은 사고방식이었으니.'
그녀는 작게 자조의 한숨을 내쉬고 차를 마셨다. 좋은 솜씨였다. 자신이 탄 것과 거의 같은 방식이었다. 공통점이었다. 이 여자와 자신은 공통점이 많았다. 이런 취향도, 사상도, 그리고 항상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까지도. 호노레는 어색할 정도로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는 다나를 마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 말하면 죄를 묻지 않겠어요, 다나 양."
"네?"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다나. 정말로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어찌나 뛰어난 연기였던지 하마터면 호노레는 농담이었다고 말을 철회할 뻔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그 부드러움 속에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또 부정하면 다음에는 어조가 부드럽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함.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의심이 많아서 말이죠. 인주를 쓸 때에 저는 항상 비밀 서랍에 있는 걸 꺼내 씁니다. 일반 서랍장에 들어 있는 건 색깔이 살짝 다르죠. 정보를 요구하는 문서는 수백 장이 있으니 몇 개쯤 더 발행해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인의 색깔이 다른 문서가 몇 개 있더군요."
그제서야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다나.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저... 저... 죄송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든 소식을 알고 싶은 생이별한 은인이 있어서..."
"뚝."
"네."
호노레의 한 글자에 바로 울음을 멈추는 다나. 호노레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웃음이 나왔다. 매도 맞을 거면 먼저 맞는게 낫다는 판단에서인가, 다나는 재빨리 자신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정보를 모아 펼쳐놓았다. 그리고 호노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나사렘. 그 흡혈귀의 반역향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는 일은 알았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결국 아탕칼리에 의해 수습되었노라고 공표되었고 범행은 루나틱 커넥션의 단독 범행으로 알려졌다. 아무도 별달리 그 발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호노레도였다.
다나는 달랐다. 멀리 떨어져서도 아이를 그리워하던 그녀는, 나사렘의 일을 전해듣고 문득 그가 기나센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사렘이 그 동선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기우일까, 직감일까, 그녀는 몰래몰래 호노레의 이름으로 정보원을 풀어 그 진상을 조사했다. 예상대로의 진상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이 소년이 박애의 아이킬로스, 그 괴물의 화신체를 죽였다는 말입니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 앞에 놓인 정보들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소년은 거의 먼 옛날의 이야기에나 나올 영웅이었다. 아연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는 호노레. 다나는 의기양양해서 대답했다.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고작 열여섯이?"
"네! 그리고 말이죠."
갑자기 얼굴을 발갛게 붉히는 다나. 이건 알아볼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붙잡고 몸을 배배 꼬면서, 두서없이 그 사람이 자신을 북서 자치령에서 도와주웠던 집행관이라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굉장히 배배 꼬아서,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이 여자는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연인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이것도 닮아 있었다. 단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저랬다. 그리고 호노레는 왜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공격했는지 또 다른 이유를 하나 알게 되었다. 내장이 살짝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노레는 헛기침을 해서 그 자랑을 중단시켰다.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입맞춤을 남기고 영원한 작별을..."
"그만! 알겠어요."
지금은 그런 말을 들을 시간이 아니었다. 거물들이 또다시 뒤얽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천 년 동안이나 쥐죽은 듯 잠자고 있는 세계, 뒤집힐 준비를 하지 않는 모래시계, 센디엘. 그것이 끓어오르고 있다. 서막이 오르고 있다. 그런 예감이 호노레를 가득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아탕칼리는 이미 그 소년에게 접근을 했다는 말이죠. 그럼 다나 양은 정말로 평생 그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얼굴이 파래진다. 곯려 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진실을 품고 있었다. 호노레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나도 저런 일로 고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웃음이었다. 차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호노레는 차를 홀짝 들이키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문책은 하지 않을게요. 오히려 상을 줘야겠군요. 앞으로도 사람을 풀어서 계속 그 소년 주위를 주시해야겠어요."
다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저, 성녀님. 당신의 제자로서 여쭙습니다. 요즘 성녀님께서는 밝은 척 하지만 수심에 잠겨 있는 게 눈에 보입니다만..."
아, 그런가. 자신이 다나의 위장을 뚫어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자신의 위장을 뚫어볼 수 있었다. 호노레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봇물 쏟듯 털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이 함정을. 중간중간에는 격정적인 욕설도 섞였는데 다나는 거기에 놀라지 않았다. 대충 본성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제자로 당신을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안 좋게 됐어요. 아마 일이 끝나고 나면 나를 공박하는 투서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더럽혀진 내 위명을 몰아내고 새로운 얼굴이 들어서겠죠."
성녀의 제자라는 직위를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얼마 못 가겠군요. 호노레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나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책상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다나가 그렸던 아이의 예상 동선과, 호노레가 가져온 숙청될 군소 마탑의 지도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다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둘을 집어들더니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 잠시만요!"
계획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호노레에게 다가갔다. 속닥이는 목소리로 그 계획을 전한다.
"그런... 폭력적인... 아니, 하지만."
그 말이 진행될수록, 호노레의 눈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밀 서랍에서 인주를 꺼내 쾅, 휴가를 제출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재빠른 행동력이었다. 다나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해 얼떨떨해 할 정도였다. 가벼운 율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호노레는, 살갗을 가리도록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다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다나 양."
"정말로 괜찮겠어요? 아니, 말을 꺼낸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어봤자 엿 같은 놈들한테 면죄부나 발행해 줬다가 엿같이 죽을 운명. 어차피 엿될 거면 내 손으로 엿 만들어버리는 게 낫죠. 안 그래요?"
둘은 그렇게 문서 하나만을 남기고 제도를, 정지한 도시를 떠나 마차에 올라탔다. 온 법원이 뒤집어진 것은 다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