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00화 (100/279)

18. 역마차 ( 2 )

마차 여행은 편안했다. 아이와 에바가 탄 마차는 은마차라는 마차로, 스무 명은 들어앉을 수 있는 공간에 네 사람만 받는 고급 마차였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탈 수 있었다. 아탕칼리의 계인을 본 직원이 멋대로 배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차삯도 비쌌다.

하지만 비싼 값은 톡톡히 했다. 여러 마법적인 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괴물의 피가 섞인 준마 여덟이 끄는 마차는 구릉을 지나도 흔들리지 않았고 멈춰설 때도 갑작스럽지 않았다. 객실 한가운데에는 빨간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그 중앙은 놋쇠 화로를 넣을 우묵한 공간이 있었다. 이따금씩 마부석에 앉은 하인이 들어와 불을 갈아주고 갔다.

에바와 아이는 감자의 속을 파고 치즈를 넣어 꼬챙이에 꿰어선, 그 화로에 구워 먹었다.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구릿한 냄새가 나면서도 쫀득했다. 에바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치즈를 주욱 늘려 먹었는데, 자그마한 치즈는 거의 에바의 얼굴만큼이나 늘어났다. 늘어난 치즈가 끊어져 콧등을 때렸다. 콧등 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책을 읽던 에어비스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이는 손바닥을 하얗게 펴고 불을 쬐었다. 여행은 쾌적했다.

거의 하루종일 얼굴을 맞대고, 같은 공간 안에 들어 있으니 새로운 두 동행객들과도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제와 에어비스가 자신들보다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아 놀랐다. 비제는 아이보다 두 살 많았고, 에어비스는 한 살 많았다. 멀리 아노덴의 용병 학교에서 수학하고, 성인이 된 다음 그 곳에서 이 년, 일 년간 갖은 임무를 하다 기나센으로 향한다고 했다.

"학교를 다녀요? 그럼 본가가 기나센에 있나요?"

용병 학교라고 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용병 명가에 한해서 그런 것도 존재했다. 주로 유서 깊은 용병 가문의 서자나 차녀 따위가 가는 곳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학생이기에, 학비도 꽤나 비싼 것으로 알았다. 비제와 에어비스의 신분을 그렇게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가 따윈 없다. 그나마 큰 형한테는 본가가 있었지만... 없어졌고."

서로 말을 통하고 나서부터 비제는 말투를 바꾸었다. 처음 보았을때 그의 인상은, 스물 너다섯은 되어 보였었는데, 그게 어른들 속에서 부대꼈던 비제가 스스로를 연출한 것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있었는데 없어졌다니? 에바가 이해하지 못해서 금색 눈을 크게 떴다. 캐물으려 들었다. 아이가 그 입을 콱 틀어막았다. 곁눈질로 눈치를 주었다. 본가가 없어졌다는 건, 용병단이 전몰해서 해체되었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과거를 헤집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에어비스가 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사실 우리도 기나센에 가는 건 이번이 두 번째거든."

"예?"

"죽은 큰오빠가 거기에서 일하면서, 우리 학비를 내 줬어. 나이 먹으면 시험을 봐서, 기나센에서 용병 자격을 딴 다음 같이 일해서 갚으라고 말하곤 말이야. 이젠 죽어버려서 갚을 길도 없지만."

아노덴은 기나센에 종속에 가까운 동맹 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높이 솟은 아발랑센 산맥은 물산이 부족했고 사람 먹을 풀이 자라기 힘들었다. 오직 양과 소가 먹을 풀만 가득 자랐고, 그래서 이 산맥은 목동의 산맥이었다.

목동은 험한 일이다. 늘 말 안듣는 짐승들을 힘으로 다스려야 했고, 밤에는 양을 노리는 늑대와 괴물들에 맞서야 했다. 풀을 뜯기는 데에 정해진 영역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목동간의 다툼과 내전도 흔했다. 아발랑센 산맥은 수십 개의 주로 찢어져서 느슨한 자치조직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살던 중, 누군가가 그 목동들의 더 좋은 쓸모를 발견해냈다. 용병이었다. 이들이 닦은 건강한 육체와 싸움 기술, 그리고 전투의 기술들은 전쟁터에서 더 보람차게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전란의 시대를 맞아 그 수십 개의 주는 곧 용병 국가가 되었고, 용병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수십 개의 주는 각각이 국가가 되었다.

국가는 곧 바깥에서 배워온 전쟁을 안에 피로하기 시작했다. 통합을 위한 몇 차례의 내전이 뒤따랐다. 기나센은 그 내전의 두 커다란 승자 중 하나였다. 북부의 많은 주를 통합해 나라를 세운 것이었다. 또 다른 커다란 승자는 삭센, 남부의 주를 통합해 세운 나라였다. 두 나라는 앙숙이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옷과 같은 습속을 공유하는데도 그랬다.

아노덴은 작은 승자 중 하나였다. 기나센의 영세 동맹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자그마한 왕가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자치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거의 자발적으로 기나센에 녹아들어서, 이름만 다른 나라일 뿐 거의 모든 제도를 공유했다. 그래서 아노덴에서 용병 자격을 딴 사람은, 기나센에서 시험을 치른 뒤 기나센의 용병이 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 기나센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벌써요? 아니,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너무 어린 거 아니에요?"

본국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아이가 물었다. 두 사람은 어렸고, 자격 시험은 스물 셋까지를 연령 제한으로 삼았다. 신기를 수련하려면 보통 스무 살이 넘어야 하기 때문에, 연령을 꽉 채워서 응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상 외로 기나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군? 그래, 너는 무슨 일로 가는 거야?"

"그건, 음... 비밀이에요."

아이는 자기가 안고 있는 복잡한 사정을 떠올렸다. 바깥에 떠벌려서 좋을 일은 없는 것들이었다. 비제는 피식 웃고 대답했다.

"마찬가지야. 비밀이다."

점심 때, 저녁 때에 마차는 멈추었다. 너무 오래 말을 달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마차에만 있어서는 갑갑하기 때문이었다. 조수는 말에 들러붙은 보푸라기며 흙먼지 따위를 솔로 닦아냈고, 마부는 말편자를 손보았다. 마부석의 하인은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했다. 막 어린아이 티를 벗은 주황머리의 여자애였는데, 요리 솜씨가 변변치는 못했다. 조미료를 써본 적이 없어 후추와 향미유를 다룰 줄 모르는 듯했다.

"줘 봐, 내가 해 볼게."

"저, 저, 손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는..."

"괜찮아. 그냥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일인걸."

둘째 날부터, 보다 못한 에어비스가 나섰다. 그녀는 요리가 취미라고 했다. 식칼을 받아 솜씨좋게 채소를 채썰고, 알맞은 농도로 전분과 향신료를 풀었다. 하인이 옆에서 안절부절하다 물을 쏟아도 화를 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구나, 아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뼈째로 생선을 우물우물 씹던 에바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도울게! 도울 일 없어?"

그리고 에바는 도울 거면 맛보기를 도와달라는 말(사실상 도움이 안 되니 사라지라는 말이었다.)에 속아 다시 식탁에 앉았다. 비제는 한숨을 내쉬며 칼을 닦고 있었다. 눈을 감고 칼을 어루만지고, 칼을 어루지만고 눈을 감고. 계속 반복한다. 그는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한 탓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에페 바체 시험을 처음 치를 땐 저랬는데.'

이 남매는 자꾸 먼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쩌면 이 남매가 아니라, 가까워지는 기나센이 레이븐사이드의 기억을 헤집어대는 걸지도 몰랐다.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초조한 사람처럼 긴장했었는데, 지금은 기일을 맞추는 것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5위계의 마술사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는데, 설마 에페 바체 시험관으로 6위계나 성도 8궁이 나올 리는 없으니까.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검. 그리고 의념에 대해서."

비제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묵상하듯 눈을 감는다. 아, 아이는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신기였다. 검에 신기를 휘돌게 만드는, 산악의 검기. 처음 그걸 깨닫게 될 때 저 두 가지를 생각했었다. 아직 열여덟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비제는 지금 그 깨달음의 초입에 있는 모양이었다. 시험을 보기 전, 어떻게든 검에 신기를 밀어넣는 걸 성공하고 싶어 초조해하는 것일 테고.

'아, 그래서.'

에어비스가 농담처럼 계속했던 말이 떠올랐다. 둘째 오빠는 천재라고, 학교에서도 수석과 차석을 도맡아 했었다고 그랬었지. 참 남매애가 깊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그럴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큰 형을 잃었다고 했었지.'

그럼 이 사람은 갑자기 맏이가 된 셈이었다. 기나센에는 아직도 동생이 둘 더 남아있다고 했다. 그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뻗었다. 형을 잃은 동생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가슴 한 켠이 시큰해졌다. 갑자기 맏이와 가장의 짐을 지게 된 사람의 중압감을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검에 대해서만 몰두해야 하는 외로움을 생각했다. 도와주고 싶다, 갑자기 그런 동질감과 연민이 솟아올랐다.

"저기, 내기 안 해볼래요?"

아이는 식사용의 포크를 집어들고 말했다. 마른 천에 기름을 발라 검날을 닦던 비제는, 오른 눈을 살짝 떴다가 감았다.

"장난할 시간은 없어. 미안하지만."

"이래도요?"

포크에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이미 신기를 자신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아이에게는, 날이 있는 것이면 뭐든지 검으로 삼을 수 있었다. 비제가 눈을 부릅뜬다. 잠시 후, 아이와 비제는 포크를 서로 맞대고 어린아이 장난 같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몸에 신기를 불어넣는 것과, 검에 힘을 불어넣는 것. 둘은 다르지 않다. 몸이 단순한 살덩이가 아니듯 검도 단순한 쇠붙이가 아니며, 몸 속에 혈관이 있고 근육이 있어 의념이 그것을 타고 흐르듯 검의 길에도 피가 흐르고 마음이 흐르며 떄로는 의지가 흐른다. 그런 사실을 아이는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자그마한 놀이처럼 보였지만, 포크와 포크의 대련에 그 뜻을 담으려 애썼다. 며칠간 관찰한 바에 따르면 비제는 충분히 그것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포크로 하는 장난 같은 비무는 삼십여 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아이가 평온한 반면, 비제는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얼굴이 푹 젖어 있었다.

"끝입니다."

아이가 선언하자, 비제는 축 늘어져서 포크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숲그림자가 어지럽게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에서도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높은 산의 그림자가 하늘까지 뻗쳐 푸르게 어른댔다. 그 커다란 산그림자가, 처음부터 마음 속에 있던 것이, 방금의 대련으로 은근히 보이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간부터 식사를 하라는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의 장난을 보고 있던 에어비스가, 급히 달려들어 비제의 어깨를 주물렀다. 비제는 여동생이 따라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입을 닦고선 말했다.

"고맙다. 아니,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지도 모르겠어. 너는, 아니 당신은..."

"그냥 말 낮추세요."

"너는... 뭐지? 무례한 질문이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런 경지는, 기사로 수급 삼백을 취했다는 교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마차는 늦게 출발했다. 땀에 젖은 비제가 인근의 호수에 가서 멱을 감는 김에, 다 같이 호수에서 차가운 물에 몸을 씻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던 에바가 호수로 첨벙 뛰어들어, 입에 은비늘이 반짝이는 물고기를 물곤 머리를 쑥 내밀었다. 옷 말릴 걱정을 하는 아이가 책망하자, 물을 한 움큼 쥐어 아이의 얼굴에 내던지곤 호수 속으로 쏙 들어갔다. 뿌린 물보라에선 무지개가 부서져 빛났다. 마차에 들어앉아, 화톳불에 옷을 말리면서, 아이는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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