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01화 (101/279)

18. 역마차 ( 3 )

제국의 끝에는 국경 도시들이 있었다.

제국의 국방은 전통적으로 아지프의 몫이어서, 국경의 도시들 역시 전통적으로 아지프의 세력권이었다. 국경 도시에 위치한 아지프의 마탑주들은 그 도시의 군사권을 쥐었고 특별세를 거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제국, 그 국경선을 따라 죽 늘어진 아지프의 마탑에는 세금의 수레가 끊이질 않았고 병사와 실험체의 징집이 멈추지 않았다. 그 마탑의 행렬이야말로 아지프를 확고부동한 최강의 세력으로 만드는 원천이었다. 때로 사람들은 탄식하곤 했다. 저 마탑의 행렬은 제국을 지키는 것인가, 포위하고 있는 것인가.

국경 도시의 중앙에는 흰 마탑이 비죽 솟아 있었다. 환골탑을 본딴 마탑이었다. 은마차 차창 밖으로도 그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이 일행을 태운 은마차는, 어느새 제국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아이와 에바가 워낙 열심히 달렸던 덕에, 또 은마차가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인 덕에 일정엔 여유가 생겼다. 사흘은 남을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비죽 솟은 흰 마탑, 그 탑그림자를 바라보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는 아이를 에바가 포갰다. 어깨를 붙잡고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으며 물어본다. 에바의 아랫턱의 울림이 두개골로 전해져 소리가 웅웅 울렸다. 아이는 그냥 조용히 탑을 바라보았다.

그저 분노에 삼켜지지 않도록, 복수를 절제하기로 마음 먹은 아이였지만 아지프는 달랐다. 그들의 표식과 상징을 볼 때마다 어떤 분노가 가슴 속에서 치솟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에서 뛰어내려 달려가서, 저 탑을 일층부터 꼭대기까지 전부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 뭐냐, 벌써 내 힘이 필요해진 것이냐?

머릿속의 심연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선주였다. 어쩌면 그걸 알고 있기에, 선주는 하필 레바테인에 자신의 쐐기를 남긴 걸지도 몰랐다. 꺼져. 아이는 속으로 읊조리고 시야를 낮췄다. 마탑 대신, 마차의 앞에 놓인 황톳길을 보기 위해서였다.

"응?"

아이의 눈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었다. 황톳길에 철푸덕 쓰러져 있는 사람.

"어? 뭐야?"

에바도 똑같은 것을 발견해서, 차창을 두드려 마차를 멈추었다. 재빨리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쓰러진 사람은 흰 머리의 여인이었다. 진초록빛 클록을 뒤집어써서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었다. 그 피부는 얇고 투명해서 희미하게 실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다.

"괜찮아요? 물, 물 가져와!"

에바는 호들갑을 떨며 물과 베개 따위를 찾았다. 그러나 아이는 잠시 그녀를 골똘히 쳐다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가자."

"응? 왜! 너 그런 사람이었어? 이런 사람을 여기다 버려두었다가 나쁜 놈들한테 당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기는. 그 놈들이 혼쭐이 나겠지."

아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는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금 정신을 잃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가슴이 가르랑거리는 폭만 봐도 명확했다.

'바로 얼마 전에 길에 몸을 던졌어.'

이것도 확실했다. 왜냐면 그녀는 수레바퀴 자국 위에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국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 있었다. 앞서 마차가 지나가고 나서 여기에 드러누웠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자해공갈인가, 아니면 마차에 얻어 타기 위한 전략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께름칙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의 흰 손이 불쑥 에바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갑자기 연신 감사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서 정신을 잃고 수레에 깔려 죽을 뻔했는데, 구해 주셨군요."

"응? 아, 네, 아직 뭐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지만..."

"정말 생명의 은인이에요. 감사드립니다."

빙긋 웃으며 과장된 말을 흘리는 여자. 그 얼굴은 어쩐지 가면 같았다. 속으로는 낭패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순진해서 이러면 걸려들 거라고 했잖아요? 말대로 안 되는데?'

그녀는 라달라리아의 성녀, 호노레 블뢰유였다. 재판을 앞두고, 아무도 판결을 내릴 수 없도록 인주와 도장을 빼돌려서 그녀와 다나는 달아났다. 그리고 아이를 앞질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앞의 국경 도시가 호노레의 재판이 다루는 도시였고 이 도시의 마탑주가 피고인이었다. 이 기막힌 우연을 이용하기 위해, 조금 극적인 연출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출은 지금 들켜서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조금 더 멋지게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었는데...'

이를 앙다물고 원래의 계획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정신을 잃은 채로 마차 속으로 옮겨질 것이었다. 그 다음엔 이 마차가 국경 도시에 마차가 도착하고,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합리한 검문에 이 일행이 당하고, 그 때 멋지게 정체를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연출해 자신의 부탁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첫 단추부터 망가져버렸다.

"정말로 은인이십니다. 그래서, 은인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점을 쳐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호노레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황급히 계획을 변경했다. 점술가 흉내였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풀어졌다. 아무래도 이제 의심을 좀 덜어서, 그냥 이상한 호객 행위를 하던 여자 정도로 인식이 바뀐 모양이었다.

"예!"

꼬리가 있었으면 흔들었을까, 그럴 정도로 눈을 빛내며 에바가 손을 붙잡았다. 호노레는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점쟁이 흉내를 내게 되었다.

곧 마차 안에 호노레가 들어섰다. 에어비스와 비제는 마뜩찮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점 내용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날림이었다.

"당신은, 그러니까, 음... 추위를 안 타죠?"

에바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한다. 그냥 에바의 복장을 보고 추론한 내용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저런 말이면 나도 하겠다, 싶은 별 거 없는 추론이지만 에바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네!"

"그리고, 어, 많이 먹죠?"

"와,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야 저기 널브러진 네 가방을 보고 알았겠지. 아이는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멍하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지프의 마탑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말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가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당신의 점도 봐 드릴까요?"

호노레였다. 에바와 소꿉장난 같은 점을 끝내고 아이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아이는 거절하려다가, 들려오는 말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당신은 이제 십칠야의 끝에 다가섰군요. 그렇죠?"

눈을 부릅떴다. 십칠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성인이 되는 17세, 그 일 년 전부터, 소년은 마법처럼 연달아 중대한 사건과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인생 전부를 결정하게 된다는 전설. 그 일 년은 마치 밤과 같으며, 만나게 되는 일들도 꿈과 같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열 일곱번째 밤이라고 불리었다.

어쩌면 그 전설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지난 일 년간, 아이의 인생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와 기적이 잇달아 찾아왔다. 슬픈 것도 있었고, 좋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은 한가지로, 아이를 어떤 끝으로 끌어올렸다. 유년의 끝으로.

기나센에 다가가면서, 아이는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리숙함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 유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삶의 길을 정해 죽 일주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호노레의 말은 그런 고민에 젖어 있던 아이의 심금을 울렸다.

"어떻게 그걸?"

어쩌면 그냥 관용구를 꺼낸 걸지도 모르지만, 아까 전에 에바에게 했던 것과 같은 때려맞추기식으로는 불가능한 말이었다. 아이가 정확히 열 여섯이고, 열 여섯이 된 때부터 많은 것을 경험했노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호노레는 그저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원래 있어야만 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기나센을 뜻한다면 맞는 말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지금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 왔고, 그걸 훌륭하게 극복해냈습니다. 그렇죠?"

훌륭한가, 자평하긴 쑥스러웠지만 고난을 견뎌낸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호노레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두 손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이제 당신의 십칠야에는 단 하나의 고난과 단 하나의 만남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리운 얼굴을 만나게 될 거에요. 그리고, 그 만남은 당신의 밤을 개벽하고 당신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겁니다. 그렇죠?"

이건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미래의 일이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스스로를 굳게 다스려, 고난과 만남을 준비하세요. 그럼."

호노레는 그렇게 말하고, 달리는 마차문을 열었다. 말릴 새도 없이 마차 밖으로 휙 사라져버렸다. 아이와 에바는 깜짝 놀라 마차를 세우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호노레는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뭐지? 대체..."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아이는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마차에 들어섰다. 머릿속은, 호노레가 남기고 간 의뭉스러운 말로 가득 찼다. 만남, 그리운 얼굴. 에바에게 한 말과 달리, 그 말은 분명한 진정성과 마력을 담고 있었다. 호노레가 제도를 떠나기 전, 신전에서 정식으로 받은 예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진정성은 아이에게 전해졌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계속 그것을 생각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고,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은마차가 다시 움직인다. 멀어져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호노레는 풀숲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는 녹색의 나뭇잎이 어지럽게 묻었다.

"조금 비틀어졌지만, 어쨌든 포석은 잘 깔아둔 모양이군요."

한숨을 내쉬고 머리에 묻은 나뭇가지를 털었다.

*

은마차가 국경 도시에 접어들 무렵, 일행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비제였다.

"저기 저게 뭐지?"

수북히 쌓인 파목 더미를 가리키고 말했다. 도시의 초입에는 마차가 한 가득 주차되어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상할 것 없지만, 내용이 이상했다. 모두가 텅 비어 있던 것이었다.

"이상하군. 여긴 딱히 보급이 필요할 지점도 아니라서, 저렇게 많은 마차가 있을 이유가 없는데..."

아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진상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은마차가 교량을 건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가 다리를 막아세운 것이었다. 인골귀들이었다. 인골귀들이 움직여 퇴로를 끊었다.

"뭐야?"

에바가 송곳니를 곤두세우고 훌쩍 뛰어올랐다. 마차 천장 위로. 둘러보니 이미 사면이 포위된 상태였다. 능숙한 솜씨였고 교활한 포위였다. 한두 번 이런 짓을 해본 게 아닌 듯했다. 그 마차로 한 명의 남자가 말을 몰며 다가왔다. 아지프의 로브를 입고 있는 자였다.

"정지! 제국민들이여, 정지하라!"

그리곤 태연하게 마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일행의 신분을 확인한다. 마술사가 없는가, 그것만을 확인하는 듯했다. 아이가 두르고 있는 아탕칼리의 계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민 끝에 말을 이어간다. 건방진 어조였다.

"지금 이 도시는 제국민의 안위를 위해 총력을 다해 분투하는 중이다. 그래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들리는 마차 하나당 한 명씩은 군무에 봉사해야 해. 너희들이 애국심 깊은 제국민이라면, 저항하지 말고 한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도록."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지금 이 국경 도시는, 세력도가 복잡하게 뒤얽혀 난장판인 상태였다. 이 어이없는 징병령은 그 여파 중 하나인 듯했다. 비제가 사납게 저항한다.

"우리는 제국민이 아니오. 그저 통행증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는 아노덴 그리고 기나센의 국민이오. 당신들을 위해 피를 흘릴 이유는 없소."

"그래? 그럼 뼈가 되어 모두 함께 봉사하는 것도 좋다. 선택해라."

마술사는 예상한 일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손가락으로 텅 빈 마차의 산을 가리킨다. 그 주위를 해골의 병사가 가득 감싸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해골은, 원래 저 마차에 타고 있던 손님인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챈 에어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결국 소용이 없군요."

아이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마차에서 내리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아지프의 흰 마탑이 크게 와닿았다. 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레바테인을 불러내어 손에 쥐었다.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레바테인이지만, 손잡이 감촉만은 이전보다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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