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수레바퀴 ( 2 )
싸움은 굉장히 빠르게 정리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검붉은 포격이 아이와 에바에게 날아들었다. 마골귀가 죽은 걸 알아챈 마탑주가 적습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격은 레바테인 앞에 힘없이 깨졌고, 아지프의 마술사는 대인전에 능하지 못해 두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다.
세 번, 세 번의 공방 끝에 결착이 났다. 마탑주는 마구잡이로 바닥에 마법진을 뿌려댔다. 밟으면 얼어붙어 몸이 바스라지는 마법진이었다. 간단히 피했다. 마탑주는 당황해서 혈사포를 난사했다. 짧은 시간 동안, 붉은 빛무리가 열 다섯번이나 터져 사방을 쳐부쉈다. 간단히 피했고, 접근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 등판에 레바테인을 꽂아넣은 것이다.
푹. 등골에 처박힌 레바테인이 아랫배를 뚫고 빠져나왔다. 가죽부대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났다. 왈칵, 마탑주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나왔다. 아이는 손잡이를 잡고 그 등을 세게 걷어찼다. 검이 뽑혀나오며 마탑주는 바닥에 쿵 부딪혔다. 그게 끝이었다. 싱거운 싸움이었다.
'어쩌면 네가 그만큼 강해진 것일지도 모르지.'
싱거웠다고 자문하는 아이에게 림이 조용히 말했다. 아이는 반론하지 않았다. 문득 아지프의 마술사를 처음 죽였을 때가 떠올랐다.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났다. 분명히 옳은 일을 했을 것이고, 정당한 복수를 행했을 터임에도, 까닭없는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이 가슴의 짙은 밑바닥에서 뭉클거렸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무뎌짐이 정말로 강해진 것인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마탑주의 얼굴은 무책임하도록 평온했다. 보기 싫었다.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에바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이는 그 보기 싫은 주검의 심장에 레바테인을 꽂아넣고 공양의 주문을 외웠다. 화르륵, 시체가 불타오르며 살 익는 냄새가 났다. 이 자의 마력이 림에게로, 자신의 레바테인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보기 드문 마술사인 5위계를 죽였기 때문인가, 레바테인의 검날이 더욱 강하고 예리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마 이제는 6위계의 공격도 한 번, 아니 두 번은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는 그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이가 가진 어떤 다른 검보다도 강한 힘이 레바테인의 검날에선 맥박치고 있었다. 께름칙했다. 그 힘의 절반은, 자신이 아니라 선주의 것이기 떄문이었다. 오래 검을 잡고 있자니 또 말을 걸어온다.
- 몰랐나? 너는 아직 내 검의 힘을 절반도 끌어내지 못했다. 한번 더 형태를 바꾸어 연마되었을 때, 너는 마술사 살해의 신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터다. 조언해주마. 그 가증스러운 계집을 죽여라. 방심했을 때 접근해서 내게 몸을 맡겨라. 6위계의 심장 하나면, 라달라리아의 검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게다...
"닥쳐."
레바테인을 허공에 던졌다. 이 검에 쐐기를 박아넣었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였다. 선주는 시도때도 없이 자신을 유혹해왔다. 무엇이 날 이 자와 갈라놓았을까. 어쩌면 그 이름지을 수조차 없는 뭉클거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자료를 모아가자."
호노레의 부탁이었다. 마탑주를 죽이고 나면, 그 방을 뒤져 재판의 자료로 쓸 수 있는 문서들을 모아줄 것을 부탁했었다. 벽에 달린 철문은 차가웠다. 드르륵, 문을 열자 마장고가 드러나며 악취가 풍겨왔다.
"윽!"
후각이 예민한 에바가 먼저 반응했다. 퀴퀴한 구린내가 가득 풍겨나오고 있었다. 살 썩는 냄새에 화학적인 시약의 냄새가 뒤섞여 콧구멍 속에서 날뛰었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휘저으며 마장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 주인님?"
초입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어린아이였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고아원이나 가난한 구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듯한 인상이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옷이었다.
'이 꼬마는... 아지프의 마술사군. 아무런 마술도 교육받지 못한 듯하지만.'
아무래도 조수 겸 실험체로 쓰기 위해서, 억지로 아지프를 섬기게 만들고 가두어 둔 듯했다. 조수는 갑자기 아이와 에바가 등장하자 굉장히 당황해서 물어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주인님은요? 호, 혹시, 무슨 명령을 받고 오신 건가요?"
아이는 말없이 그 조수를 가둔 쇠창살을 우그러뜨렸다. 조수를 가둔 감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살풍경한 침대와 녹슨 변기가 같은 곳에 놓여 있었다. 아이는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조수는 얼굴을 경련하더니, 바로 아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당신이 제 주인인 셈이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쓸모를 호소해왔다. 자료를 찾는 데, 자신이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이 어린아이가 살아남아 온 방식인 듯했다.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얼굴이 밝아진 조수는 곧 두 사람을 이끌고 저장고의 이곳저곳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마탑주가 개인적인 재산을 축적해놓은 창고였다. 이 변새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그러모은 재산이 어두운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마술 도구였다. 사형수의 손에 수정을 발라 만든 마술 도구가 보였다. 인간이 만지기 힘든 촉매를 다룰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윽."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아이는 그게 진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내던졌다. 정상적인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루덴 금화자루 한 개를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파이어 두 알과 자수정 하나를 챙겨 나누어가졌다. 여비였다. 빠져나오면서 그 저장고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놔두었다. 나오기 직전 에바가 구부러진 단검 하나를 찾아내어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고기를 따뜻하게 자를 수 있도록, 자동으로 달궈지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말로 그런 용도일까?"
"아니면 뭔데?"
에바가 그걸 몹시 가지고 싶어하는 눈치이기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칼이라는 것에 원래 용도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고기를 써는 데 사용한다면 고기 써는 칼이 될 것이었다. 조수는 팁을 거절했다. 조용히 다음 장소로 두 사람을 안내할 뿐이었다.
"윽, 이건."
고문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실험실일 지도 몰랐다. 놋쇠로 된 황소, 금속 목마, 사슬 채찍 등 온갖 물건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아마 이 현장에서, 지하에서 이루어졌던 것과 같은 각종 실험이 일어났을 것이다. 조수는 책상으로 안내했다. 이 책상에서, 매일 뭘 끄적거리다가 여기에 집어넣는 것을 봤어요.
그 말대로였다. 서랍에서는 비인도적인 실험의 증거가 잔뜩 나왔다. 최근 강제로 징집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도 물론 있었다. 이건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 내용을 훑어나가던 아이의 눈에 특이한 것이 들어왔다.
'극비 사항'
네 글자였다. 문서는 아주 복잡하고 기묘한 암호로 암호화되어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 네 글자 뿐이었다. 그 문서의 하단에 사람의 이름. 낯익은 이름.
"길... 아잘록?"
손끝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렸다. 네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어두운 색조로 뭉클거리며, 선주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바가 걱정스런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 주어 간신히 벗어났다.
"이건 따로 챙겨야겠어. 혹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그 문서를 네 번 접어 주머니의 가장 깊숙히 집어넣었다. 무엇일까, 아마 길 아잘록에게 바치는 실험 보고서쯤 될 것이었다. 어쩌면 내통 문서나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대적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저장고를 더 뒤져도 소득은 없었다. 아지프의 광기가 만들어낸 쿰쿰한 어두움을 계속 직면하여, 기분만 가라앉을 뿐이었다. 마침내 조수는 마장고의 바깥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마장고의 안은 어두웠다. 아치문 바깥으로 붉은 횃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햇빛을 바라보며, 어린아이는 두 사람을 등지고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말한다.
"저는 살려주실 건가요?"
아이는 그제서야 왜 이 조수가 집요하게 하나라도 더 저장고를 안내하려 들었는지 꺠달았다. 쓸모가 다 하면,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아지프의 마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생각은 대개 그러했다. 아이는 갑자기 먼 옛날이 떠올랐다.
'어쩔 테냐?'
림이 조용히 물어보았다. 이 꼬마는, 자의가 아니었을지언정 어쨌건 아지프의 마술사였다. 마술이라곤 하나도 배우지 못했어도 그랬다. 큰 망설임. 그러나 결정은 빨랐다.
"가자. 내려가자."
아이는 그 꼬마의 로브를 벗기고 승강기로 데려갔다. 꼬마는 퀭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이름을 물어보았다. 쥘로메라는 이름이라고 했다. 아이는 쥘로메를 호노레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게 맞는 결정인지, 그래도 되는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아이는 그 결정이 마음에 들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거품이 기분 좋게 부글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역마차 안.
"이렇게 빨리 일을 끝마치고 돌아왔다구요?"
호노레는 처음에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더 맞았으리라. 아이와 에바의 몸에는 격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시간이 너무 빨랐으므로. 하지만 쥘로메와 문서를 건네주고, 다나가 곧 사람들을 잔뜩 이끌고 나타나자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달라리아는 당신의 이름을 석판에 새겨 영원히 기억할 것을 맹세드립니다."
그녀는 은방울꽃을 건네주었다. 성녀의 꽃, 억만금을 주어도 사기 힘들다던 그 꽃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감사 대신,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예? 아, 저는 이미 약혼자가 있어서 고백이라면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해요."
시의적절한 농담이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쥘로메를 가리켰다.
"저 꼬마를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소속은 이미 아지프 쪽입니다만, 그래도, 자신이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호노레는 물론, 비제와 아이비스도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지금 성을 하나 살 수도 있는 은방울꽃을 거절하면서,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부탁한단 말인가? 호노레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헤 벌렸다.
"그게 부탁의 끝인가요?"
"예."
"받아들이죠. 아니, 그건 성녀의 의무입니다. 굳이 새로 부탁을 할 이유도 없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은방울꽃을 내밀었다. 계산속이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언가를 건네 은혜를 베풀어두는 쪽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걸 호노레는 알았다. 그 말을 들은 쥘로메는 머뭇거렸다.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저, 저, 제가 뭔가, 증인이나, 조수나, 그런 건..."
처음 받아보는 호의가 어색한 것이었다. 아이는 알 수 있었다. 다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더니, 그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렸다. 대화가 끝나자, 역마차에 가득한 피난민들에게서 환성이 솟아올랐다. 이제 이 국경 도시의 가렴주구는 끝난 것이었다.
"아직 긴장을 놓치면 안 돼요."
아이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제시켰다. 모닥불을 피우고 건장한 용병 몇 명과 둘러앉아, 불침번을 자처했다. 그 흰 얼굴에 주홍 불빛이 어른거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잠들 때까지도, 아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심 어린 희생... 방금 그건 분명히 진심이었죠. 이거 의외의 소득을 더 얻을 지도 모르겠는데요, 단테.'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잠자지 않은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호노레였다. 호노레는 잠든 척, 몰래 아이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지자 몸을 일으켰다. 아이에게 접근해 옆에 앉는다.
"혹시, 이야기 좀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