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수레바퀴 ( 4 )
아이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냉소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깊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머물렀던 이름 없는 마을의 별밤이 목소리의 뒷전에서 일렁였고 탁 트인 나사렘의 전경이 그 말꼬리를 매듭지었다.
"제국이 어딘가 잘못되었다, 일곱 학파만으로는 모자라다, 당신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요? 당신들의 말을 따라 그 약속이라는 걸 깨고 신의 수를 늘리면, 세상이 갑자기 천국으로 바뀌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 어포슬이라는 당신들의 세력이 권력을 쥔다는 거겠죠."
"그런...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면 훨씬 더 좋고 편한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삼백 년 동안 뭘 한 건가요."
"때를 기다리며... 힘과 세력을... 동지를... 두 명으로 시작한 이 결사는, 이제 뚜렷한 실체를..."
"사람은 백 년이면 죽지요. 힘을 모으다 죽은 사람의 자손이, 또 힘을 모으다 죽어서, 지금 그 후손이 또 저한테 힘을 모으자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호노레는 말문이 막혔다. 얼른 머릿속에서 재판을 공박하듯 논리를 짜내려 들었다. 대의, 논리, 기술적인 안배, 청사진, 수많은 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다. 아이의 진지한 눈이 요구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저는 핍박받는 동족을 위해 일생을 바쳤노라고 말하던 흡혈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동족이 아니라, 동족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종류의 괴물이었습니다. 그 한 명 한 명의 이름없는 동족이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그는 이해한 척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민중을 위해 제국을 끝내고 새 제국을 열겠다고 말하지만, 저는 선뜻 그걸 믿기 어렵습니다."
제국의 부패는 굳이 성녀나 현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선명한 악덕을 근거로 당신은 선량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이용할 뿐인 것 아닌가. 그 악덕 뒤에 숨어 자신의 선성을 증명하는 걸 회피하는 것 아닌가. 그런 힐난이었다.
"그런...! 당신에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는 이미 몇 번이나 시험대에 들어섰던...! 이해하고 있어요. 국가의 미덕은 결국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해본 적이...!"
호노레의 격앙된 반응. 아이는 그러나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죠.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그랬다고,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호노레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무릎을 폈다. 가죽을 감은 검손잡이의 촉감에는 땀이 배여 있었다. 일렁이는 불꽃을 오가는 말과 달리, 그 거친 촉감은 너무나 깊게 와닿았다.
"저는 배운 게 없습니다. 유일하게 배운 게 있다면, 나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 뿐입니다. 모르겠어요. 당신과 당신 집단의 구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얼마나 논리적으로 정연하며 밝은 미래를 비추고 있는지, 그게 저한테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그걸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설명이나, 증인이 필요하다면, 보충해서 보여드리겠어요."
"아니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호노레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며 선고하듯 말했다.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세요."
아이는 그웬돌린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디오소의 진실을 그녀는 몰랐고 또 정치적으로는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그녀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몸을 바쳐 그녀를 도왔으며 결국 나사렘을 밝힐 광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 광휘는 벌써, 아셀라이라는 한 사람을 구해낸 것처럼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바보라서, 무슨 대가를 주겠다,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 건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진심인지 아닌지, 선의를 품고 있는지 아닌지. 그런 것뿐이에요. 당신의 선의를 제게 보여주세요. 그럼 당신의 제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타올랐다. 선명하고 짙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호노레의 목소리였다.
"진심, 진심이라. 어떻게 하면 진심을 보여드릴 수 있죠?"
"글쎄요. 성녀님께서는 현명하신 모양이니, 좋은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겠죠."
호노레는 갑자기 쿡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말은 지당했다. 외려 자신이 왜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제안을 건넨 것만으로도 아이가 응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게 더 궁금할 정도였다.
'성녀라는 직위에 나도 모르게 취해 있던 거지.'
라달라리아의 최고위 직함이니까, 모두들 떠받들어 주니까. 고작 열여섯 살의 소년이 자신의 진심 어린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끄럽게 느껴졌다. 제국을 개혁한다고 명분을 내세우면서 그 제국의 명분을 사용하는 자신이 굉장히 모순적이고 초라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정말로 선한 사람임을 보여 달라.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잠시 동안 호노레의 머릿속에 수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자에게 작위를 줄까, 직위를 주거나 연금을 주거나, 소원을 들어줄까. 그런 생각들이었다. 잠시 후 같은 이유로 호노레는 부끄러워졌다.
호노레는 아까 전 아이가 데려온 쥘로메라는 꼬마를 생각했다. 아이는 그 꼬마에게서 진심을, 마음 밑바닥에서 뭉클거리는 순선함을 발견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살리려 한 것일 것이었다. 이 소년에게 진심을 증명하는 건 그 꼬마에게는 쉬운 일이어도 성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졌습니다. 부끄럽군요. 아, 다나 양이 왜 그렇게 당신을 연모하는지 알 것 같아요."
호노레는 고개를 저었다. 느닷없는 소리에 아이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와 다르게, 그 모습은 영락없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라서 호노레는 또 짓궂게 웃었다.
"원래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걸 가진 사람에게 이끌리기 마련이거든요. 이건 진심이랍니다."
"그, 말뜻은..."
호노레는 길게 늘어진 뒷머리를 쓸어올렸다. 장작을 태우는 불빛이 희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구릿빛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그 머리에서 빠져나온 손가락에는, 한 송이의 꽃이 쥐어져 있었다.
"저도 그래서 오히려 당신에게 더 이끌리는 걸요. 당장 저희 결사에 합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꽃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엉거주춤 그것을 받아들였다. 손 안에 받아든 꽃을 확인하고, 놀라서 살짝 입을 벌렸다.
"이건 그 성녀의..."
"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그 꽃은 라달라리아의 성녀의 집행관만이 가질 수 있는 꽃이었다. 이 꽃을 가진 자는 라달라리아의 5위계에 준하는 각종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아셀라이에게 인정을 받고 나서 받은 계인보다도, 제국 내에서라면 더 가치있을 물건이었다. 이게 있었더라면 그때 그 부패 율사들을 암살하듯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파면 조치를 내리고 쫓아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같이 할 생각이..."
"집행관의 업무 따윈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어두고 싶은 속셈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저한테는 당신보다 훨씬 멋진 집행관이 있는 걸요."
그 말을 마치자 호노레의 뺨이 갑자기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라도 잘못 먹은 듯 몸을 배배 꼬더니,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을 내고 싶어하는 듯했다. 아이는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호노레의 자랑을 들어 주었다. 그 자랑은 장작이 다 타올라 거뭇한 재로 변할 때가 되어서야 끝났다. 아이는 검을 끌어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일어서며, 아이의 귀에 속삭이듯 한 마디를 건넸다.
"언젠가 제가 그, 진심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을 때. 그 때 찾아와 주세요. 아니, 진심으로 울면서 찾아오게 만들어 드리겠어요."
마차역의 바깥에선 먼 동이 트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기도 전부터 국경 도시의 거리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마탑주가 죽었고, 성녀 호노레 블뢰유의 제자가 직접 악을 징치했노라는 소문이었다. 음산하게 돌아다니던 아지프의 마술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 소문에 현실미를 더했다. 억류되어 있던 마차들은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씩 국경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이미 도시의 하늘은 마차가 일으키는 부연 흙먼지로 노랗게 뒤덮였다.
"이거 유명인과 동행하고 있었군."
비제도 그 소문을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호노레와 다나가, 구해낸 사람들을 시켜 퍼뜨린 소문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아이가 북서 자치령을 배경으로 한 그 미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들어 있었다. 여기까지 그 책이 퍼져 있던 것인가, 어디서 구했는지 비제의 손에는 아이와 다나를 멋대로 주인공 삼은 삼류 로맨스 소설이 들려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간악한 심성을 가진 흉악범의 심장마저도 녹여버릴 듯한 아름다운 미성으로 천사는 당당하게 읊조렸다... 푸흡!"
"하지 마, 좀!"
"어, 책이 틀렸는데. 좀 더 아름다운 미성으로 말해 봐!"
에바가 멋대로 그것을 빼앗아가서, 에어비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에바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재미있는 놀릴거리를 찾았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어대며 놀려댔다. 아이의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는요? 저는 어떻게 쓰여 있나요?"
다나가 시치미를 떼며 물어보았다. 사실 그 책을 구해서 건네준 것은 다나였다. 지금부터 다나와 호노레는, 이 국경 도시와 제도에서 뒷수습을 해야 했으므로 다시 아이 일행과 헤어져야 했다. 그 동안 자신의 입지를 에바에게 확실히 각인시킬 생각으로, 자기와 아이의 이야기가 적힌 책을 건넨 것이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바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놀려댈 구절을 찾기 바빴다. 아이의 용모를 7줄에 걸쳐 길게 칭찬하는 대목에서 아이는 더 견디지 못하고 책을 빼앗았다.
아이 일행의 마차를 배웅하는 마차역에서, 호노레는 저게 어젯밤의 그 진지했던 소년이 맞나,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이제 정말로 십칠야의 끝이로군요."
유년이 성년으로 성숙하는 마지막 밤, 십칠야. 마법 같은 만남이 줄지어 찾아오는 그 꿈의 한 가운데였기 때문에, 저렇게 천진한 모습과 진지한 모습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호노레는 그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호노레는 이 말을 배웅의 인사로 선택했다.
"자, 받으세요."
그녀는 마차칸에 올라서는 아이를 붙잡고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건 카드였다. 호노레와 처음 만날 때, 그녀가 엉터리 점술사 흉내를 내며 사용했던 타로 카드. 거기에는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건네줄 때에, 그녀의 두 눈이 갑자기 금빛으로 빛났다.
"당신의 긴 여정은 이제 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소년으로 맞는 마지막 밤은, 이제 단 하나의 기적 같은 만남만을 남겨두고 있을 것입니다. 그 밤의 결말을 결정지을 그 만남을, 그리고 그 뒤에 기다릴 선택을. 신중히 결정하시기를."
그녀가 제도를 떠나오기 전 점쳤던 예언. 그것을 그대로 들려준 것이었다. 이것만은 엉터리 점술이 아니었다. 아이는 심유한 눈빛으로 그 진갈색 수레바퀴를 바라보았고 주머니에 넣었다. 호노레는 그 뒤에 또 하나의 당부를 남겼다.
"이건 개인적인 예감이지만, 저는 느낍니다. 심상치 않은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정지되어 있던 제국이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증거겠죠. 좋은 쪽으로 변할지, 나쁜 쪽으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호노레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마쳤다. 은마차의 마구에 매달린 여덟 마리의 말은 크게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 변화의 중심에 있을 겁니다. 그런 예감이 들었어요."
아이는 흐릿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말들이 일으키는 커다란 소리에 묻혀서, 호노레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점으로 사라져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노레는 말했다.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글쎄요, 틀림없이 좋은 쪽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다나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