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08화 (108/279)

20. 눈길 ( 1 )

기나센의 산들은 순결했다.

아침이면 산봉우리를 덮은 눈밭이 어스름을 빨아들여 세상은 희게 밝아갔고, 저녁에 떠오르는 달이 그 어스름을 거두어서 세상에 차가운 어둠을 흩뿌렸다. 어둠과 빛이 수시로 들락이는 눈밭은 늘 기름처럼 고요했다.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화폭처럼, 그저 흰 빛으로 침묵할 뿐이어서, 눈밭은 겨울밤엔 거울처럼 푸르스름했고 여름엔 눈 녹은 무늬로 붉은 빛을 새겼다.

그 눈밭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충실한 무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기나센은 그런 나라였다. 사부작 사부작, 그 눈길을 걷는 사람들, 용병들은 고요하게 타인이 배정한 자신의 죽음으로 걸어갔다. 손에는 언제나 검이 들려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기를 벌어오는 검이었다. 머나먼 원시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그 검은 늘 순결했다. 악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검을 쥐고 순결할 수 있는 길이란 그 눈길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싸락눈이 내려 그 움푹 패인 발자국을 메웠다. 눈이 쏟아지면 묵은 눈은 아래로 가라앉고, 보송한 새 눈이 이불처럼 기나센의 영봉을 덮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묵은 눈은 압력으로 투명한 물로 변해, 여름에 풀려나 바다로 흘러 언젠가 다시 새 눈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 새 눈은 또 젊은 용병의 발자국에 짓눌릴 것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눈의 은세계는 늘 그렇게 소멸과 탄생이 한 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기나센의 용병들은 언제나 그 눈송이 같았고 기나센은 눈밭 같았다. 나이든 용병이 어린 용병의 손을 붙잡고 눈밭으로 인도하고, 나이든 용병이 떠나면, 그 빈 자리를 자라난 용병이 메웠다. 그 영봉의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선 어린아이가 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에페 바체, 만년빙의 아이. 아이는 오랜만에 그 전설을 떠올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새 눈송이가 그 눈의 대지를 밟았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는 깊었다. 아이는 푹푹 빠지는 눈밭으로 가득한 기나센의 초입에서, 멀리 병풍처럼 세상을 둘러친 눈의 산맥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

"고향이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역시 이 순결한 산맥은 아이의 고향이었다. 레이븐사이드의 해묵은 눈들은 새 눈송이를 이 산으로 보내고 바다로 떠났다. 그들은 훌륭하게 기나센 사람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자신의 도착으로, 그 의무는 드디어 완성될 것이었다. 가슴에서 뜨겁게 일렁이던 무언가가 목까지 치솟았다. 아이는 그것을 삼키려 애썼다.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제는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지난날, 잰슨이 시험의 증표로 건네준 것이었다. 거기에 적힌 기한은 이제 나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가자."

"응? 알았어, 잠깐만!"

눈을 뭉쳐서 손장난을 치던 에바가 황급히 눈을 내던지고 곁으로 다가왔다. 퍽, 눈덩이를 얻어맞은 설송이 가지를 떨었다. 그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에바뿐이었다. 비제, 그리고 에어비스와는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기나센까지라는 목적지는 같았지만 목표하는 도시가 달라서였다. 기나센은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큰 나라였다. 아이는 기나센의 수도로 가야 했고, 그 남매는 우선 소도시에 들러야 했다. 밤새서 작은 눈언덕을 넘은 뒤, 산장에서 묵고 헤어졌다. 그러나 다시 만날 것이었다. 뽀드득, 아이는 눈을 밟으며 그 헤어짐을 생각했다. 그저께의 일이었다.

그 회상은 한 경고로부터 시작했다.

"정지! 유령이면 꺼지고 무법자면 더 멀리 꺼져라!"

이 계절 기나센의 산세는 험해서 마차가 다닐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국경의 초입에 들어선 아이 일행은, 곧 이런 경고를 들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오늘의 요일을 떠올렸다. 목요일, 그럼 뭐였더라.

"돼지고기를 잔뜩 든 손님이면요?"

"그럼 돼지고기만 내려놓고 꺼져라."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그건 기나센에서 통하던 암구호였다. 잠시 후, 나무 밑에 고인 어둠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풀 먹인 가죽갑옷을 입은 수색자들이었다. 그 어깨에는 특등 수색자의 견장이 번뜩이고 있었다. 아이가 차고 있는 견장과 같은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장사치들 말고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지 꽤 되었는데."

그들 중 대장 같아 보이는 자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띄고 나섰다. 하지만 아이는 그가 실제로는 전혀 호의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견장 무늬에서는 송골매가 뱀을 물어뜯고 있었다. 저것은 즉결 처형의 권리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기나센은 제국을 제외하고 가장 큰 국가인 동시에, 수많은 작은 적에게 포위된 상태인 국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이런 특등 수색자들은 산을 경계하며 방첩 활동에 힘써야만 했다.

팔짱을 낀 듯한 그의 손은 몰래 단검을 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대답이 이상하다면, 그 단검은 아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 것이었다. 먼저 신분 증명에 나선 것은 비제와 에어비스였다.

"비제 캄벨, 에어비스 캄벨, 아노덴 출신, 좋아. 부디 우리와 함께 전장에서 내장을 쏟을 수 있기를."

그는 피식 웃으며 비제와 에어비스의 신분을 확인했다. 다음은 에바였다. 에바는 지목을 받자, 잠시 골똘히 고민하더니, 무엇인가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커다란 가방을 엄청나게 뒤져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언니가 이런 일 있으면 이거 보여주면 된다고 그랬는데..."

에바는 놀랍게도, 나사렘에 있기 전에는 기나센에 있었다고 한다. 그 언니라는 사람의 명을 받고 나사렘에 갔다가, 언니의 귀환령을 무시하고 남아 있었고 결국 아이에게 들러붙은 것이었다. 에바의 말에서 언뜻 언뜻 나오는 그 언니라는 사람은, 에바에겐 거의 유일한 가족이자 주인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었다.

"찾았다!"

에바는 곧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내었다. 후후 불어서 그것을 수색자에게 건네주었다. 수색자는 혀를 차며 두루마리를 펼쳐 보더니, 눈을 부릅뜨고 그 내용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함... 은발... 아름다운 여성? 뭐, 시커먼 남자 놈들 사이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고, 음. 아니, 이미 통과 도장이 여러 개 있군. 됐어. 너도 신분은 증명됐다."

에바는 활짝 웃으며 두루마리를 다시 받아서 가방에 쑤셔넣었다. 이제 아이 차례였다. 수색자는 아이가 두르고 있는 아탕칼리의 계인을 보았다. 마술로 위조할 수 없는 광휘를 품은 것이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신분 증명은 없었다.

"되었소. 이미 밤이 깊었는데, 이 산맥에는 고약한 놈들이 많아서 밤 산행은 위험하다오. 이 근처에 우리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는데, 하룻밤 머물고 가는 게 어떻겠소?"

그는 몰래 쥐고 있던 단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을 높였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밤 늦게 길손을 발견하면, 하룻밤 재워주고 호위해주는 것도 수색자의 임무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굴란이라고 소개했다.

"소속 용병단은 없소. 나라에 매인 몸이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 일행은 곧 그와 수색자들의 인도를 따라 커다란 산채로 움직였다.

"으왓."

그 산채에 들어서자마자 에어비스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굴란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벽 가득히 커다란 호랑이 가죽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 흰 가죽 위에는 센디엘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놀랐소? 저 놈은 이 땅에서 200년 동안이나 아무도 잡지 못했던 괴물 백호인데, 우리 대가 되어서 드디어 잡아다 저렇게 걸어놓을 수 있게 되었지. 오천 루덴을 주고 사간다는 걸 거절했소."

그 어조에는 은근한 자랑이 배여 있었다. 굴란은 척 보기에도 서른은 넘어 보였는데 그 자랑하는 꼴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그 모습에 어딘가에서 아이는 잰슨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식탁에 둘러앉자 곧 막내 수색자가 데운 꿀술과 박과 따위를 내왔다. 어린 수색자들이 흥분에 젖어서 저 놈을 사냥할 때의 열광과 떨림, 행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놈은 영물이라, 나이를 먹으니 발자국을 거꾸로 찍어서 사람을 속일 줄도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잘못 쫓아갔다가 뒤에서 습격을 당했는데..."

한참을 얘기를 듣던 아이가 불쑥 나서서 말했다.

"그럼, 이렇게 삼각으로 포위 대형을 짰으면 훨씬 쉽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슥슥 지도를 그려 제시했다. 철이 들 때부터 레이븐사이드에서 구르며 카나기의 괴물들을 잡았을 때의 관록이 드러난 것이었다. 탁월한 포위 대형이었다. 그것을 살펴보던 굴란이 감탄했다.

"놀랍군, 아탕칼리에서 이런 것도 가르치는 거요?"

그는 아이의 신분을 아탕칼리의 유관자로 짐작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또 멸문한 용병단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사실이 자랑은 아니었으므로, 아이는 우선 넘어갔었다. 굴란의 칭찬에 발끈한 신참 수색자가 반론을 하려 들었다.

"하지만, 음, 음..."

반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 꿀술을 쭉 들이켰다.

"젠장. 쓸데없이 고생했군. 너무합니다. 지금까지는 자랑스러운 기억이었는데, 이걸 보고 나니 이제 내가 대가리가 나빠서 개고생한 기억으로 보이잖아요."

"아뇨, 저도 한 번 고생을 하고 깨달은 사실인걸요."

그리고 아이는 열다섯 살 무렵, 카나기와의 전쟁에서 벨루스를 몰이사냥할 때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때 아이는 한 번 팔을 물려 죽을 뻔했었다. 이 대형은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자 사방에서 감탄의 탄성이 솟아올랐다. 아이의 말에는 생생한 실전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말하는 투가 문외한이 아닌데. 당신 정체가 뭐요?"

모든 말을 경청한 굴란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이는 조용히 망토를 헤쳐 자신의 견장을 보여주었다. 특등 수색자의 견장이 빛났다. 그것을 본 굴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도 수색자였소?"

"예."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굴란은 에바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보니 먼 길을 돌아온 일행이셨군. 말괄량이 아가씨를 호위하느라 고생했겠소. 아니, 실례라면 미안하오. 다른 용병단의 일을 꺼내는 게 예의는 아니지만, 잘 돌아왔소."

왜 에바를 보고 이런 말을? 아이의 눈도 커다래졌다. 홱 고개를 돌려 에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바는 두 손으로 잔을 움켜쥔 채 꿀술을 마시고 있을 뿐 천진했다. 됐어, 나중에 시간이 나면 꼭 붙잡고 추궁해주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굴란의 수다에 빠져들었다.

아이가 수색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굴란의 입에선 가슴에 쌓인 말이 줄지어 새어나왔다. 다른 수색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 자러 갈 때까지도,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이런 말을 늘어놓기 위해서 그들은 산속을 헤매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래서 그 씹어먹을 놈들은 그 용병단을 버림패로 자기들만 퇴각했다 이거요. 안전하게 퇴각하기 위해서, 그 용병단에게는 구원군이 올 거라고 속이고 말이오. 이해하시겠소?"

그 격정적인 토로는 밤이 깊어서야 나왔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굴란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즐거운 과거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가 금세 떨어지자 이야기는 드디어 깊은 상처의 추억으로 넘어갔다. 굴란은 이 년 전 있었던 탈영병 추적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말의 음률을 따라 벽난로의 불꽃은 타닥여서 백호 가죽을, 거기에 그려진 지도를 비추었다. 커다랗게 중앙을 파먹은 제국, 그 옆에 길따랗게 늘어선 나라가 기나센이었다. 그 지도에서 기나센은 제국의 검대에 내걸린 검처럼 보였다.

"애초에 구린 계약이었으니 거부해야 했소. 이해해. 거부할 수가 없었겠지. 거부할 수 있는 죽음이 어디 있겠소."

굴란은 취기의 힘을 빌려 그런 말을 털어놓았다. 기나센이 제국의 옆에서, 가장 큰 나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제국과 투쟁한 결과가 아니라 제국에 충성한 결과였다. 기나센의 순결한 검들은 평생을 갈고 닦아 몇 푼 돈에 팔려 제국을 위해 쓰여졌다. 더러운 싸움의 선봉에 섰고 퇴각할 때에는 후미에 섰다. 제국은 이런 편리한 나라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용병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텅 빈 무의미함, 그것 덕분에 기나센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도망친 놈들은, 내 손으로 죽였소. 계약을 위반한 건 그 놈들이 아니라 우리였으니까. 그 중에는 스물 한 살 짜리도 있었는데 말이오. 내 동생이 죽은 나이가 그쯤이었는데."

굴란은 횡설수설하며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아이는 침묵하며 그 말을 들어주었다. 특등 수색자의 임무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계약을 지키지 않고 전선에서 도망쳐버린 용병이나, 계약을 어기고 고용주를 해한 용병을 추적해 죽이는 것. 아이는 들었으므로 알고 있었다.

"어디 조그마한 어촌에 숨어서 노 두개로 젓는 고깃배를 몰고 있었는데, 팔 한 쪽을 잘려서 발로 노를 젓고 있더군. 미안하다고 말하고 내 칼에 죽었소."

굴란은 그렇게 말하며 또 꿀술을 들이켰다. 아이는 침묵하며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무의미, 무의지, 용병의 삶은 항상 그렇게 살기를 강요했지만 살아 있는 것은 그러기 쉽지 않았다.

"뭐가 미안했을까."

그 탈영병을 죽인 일이 굴란에게는 가장 괴로운 일인 듯했다. 그는 딸꾹질을 하더니, 아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논리니 계약이니 따지기 전에 우선 기쁘다는 거요. 란페이 우르드, 그 분은 미인이셨지. 두어 번 본 일이 있소. 딸꾹, 잘 돌아오셨소."

아이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 자는 자신이 레이븐사이드의 일원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는 고개를 쳐박았다. 코를 골아가며 잠들었다.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열심히 굴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비제였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아이 일행은 숙소에서 나와 산길을 떠났다. 질펀하게 마신 굴란은 아침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아이는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새벽 이슬을 얼려, 잎새마다 얼음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침이었다. 한참을 걷던 아이 일행은 갈림길 앞에 섰다. 비제와 에어비스가 가야 하는 소도시와, 아이와 에바가 가야 하는 수도를 나누는 갈림길이었다.

"결국 여기서 작별이구나."

비제가 그런 말을 꺼냈다. 에어비스는 밝은 눈인사를 건네왔다. 아이는 어쩐지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역마차에서 만나고, 별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섭섭했다.

"떠나기 전에, 네 덕분에 이룬 성과를 보여주지."

비제는 피식 웃으며 스릉 롱소드를 빼들었다.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검 위에서 부서져 반짝였다. 츠츠츠, 잠시 후, 그 검의 검날 가득 푸른 신기가 치솟았다. 에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놀라는 척하긴. 아가씨도 괴물이면서."

은마차에 타서 동행하는 며칠간 아이는 계속 비제와 수련을 했다. 아셀라이의 수련법을 응용한 것으로, 조각도에 신기를 담아 조각을 하는 수련이었다. 아이는 비제에게 조각을 하라고 시켰었다. 비제는 손재주가 좋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조각하는 인물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솜씨가 좋지 않아 누구인지 알아볼 순 없었지만, 같은 사람을 조각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젯밤, 굴란과의 대화가 끝나고 비제는 잠자지 않았다. 밤새서 불을 키고 앉아서 사각대며 무언가를 조각했다. 이 신기는 어쩌면 그 수련의 결과물일 지도 몰랐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거면 시험에 통과하는 건 낙승이겠군요?"

"그래. 다 네 덕분이야. 그래서, 답례를 하고 싶다."

비제는 검을 다시 집어넣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각상이었다. 어제 밤새 조각한 것인 듯싶었다. 형편없는 솜씨 때문에 알아볼 수조차 없었던 그것은 이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띄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이가 놀라서 신음을 흘렸다.

"어? 어떻게 당신이..."

"도린 캄벨. 우리의 큰형을 조각한 거다. 그리고 아마도, 네 동료였겠지?"

비제는 그것을 던지듯이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황급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에어비스가 황망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어비스, 그리고 비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도린이 억지를 부려서 학교에 보냈던 둘째와 셋째 동생이었다. 그들은 기나센으로부터 급한 호출을 듣고, 우선 기나센 시민의 자격을 얻기 위해 이동하던 중 아이와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기막힌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당연히 일어나야 했던 만남이 조금 일찍 앞당겨진 것일 뿐인 것 같기도 했다.

비제가 깎아놓은 도린의 목상을 바라보며 아이는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목상은 실제보다 어깨가 듬직하게 벌어져 있었다. 둘째 동생이 바라본 큰 형은 그런 모습인 모양이었다. 혼자만 그 모습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는 게, 손에 움켜쥔 목상의 온기로부터 전해져왔다.

"시험이 끝나면 제도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으니까."

레이븐사이드가 기나센의 눈밭에 흩뿌린 눈송이는 아이 혼자가 아니었다. 비제는 그런 말을 남기며 팔을 흔들고 멀어져갔다. 마주 팔을 크게 흔들며 배웅하고 아이와 에바는 길을 떠났다. 회상에서 깨어난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에바가 이빨이 보이도록 웃으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있지, 아직 너는 소렌의 건물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며? 도착하면 내가 안내해줄게!"

소렌. 기나센의 수도가 소렌이었다. 에바는 이미 기나센에서 머물다가 움직였다고 했다. 도대체 왜 기나센에 에바가 있었는가, 아이는 오늘 밤에야말로 그걸 추궁해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이 따라 걷는 길 끝에선 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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