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09화 (109/279)

20. 눈길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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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즈다예비치는 눈의 고장에서 태어났다. 한겨울이면 큰 길이 얼어붙어 출입이 끊기는 고장이었다. 적어도 세 달간은 제국의 누구도 그 고장에 들어설 수 없었다. 관원들은 가을에 미리 나가 세입과 세출을 신고했고 제국은 그 밖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깊은 겨울이면 길마다 흰 눈이 구름처럼 쌓여 제국과 고장을 격리했다. 먼 바다의 비릿한 물냄새를 품고 밀려오는 북풍이 높다랗게 눈의 벽을 쌓아서 흐릿한 고독으로 그 고장을 몰아갔다. 고장을 둥글게 가로막은 눈벽은 바람결을 따라 물결치듯 일렁였다. 겨울마다 그 고장은 제국과 멀리 떨어진 어느 땅으로, 누구의 나라도 아닌 곳으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봄이 풀려나는 해토머리의 눈 녹는 냄새에는 얼어터진 주검의 향이 스며 있었다. 조난자를 위해 깊은 길목마다 자그마한 땔감과 음식을 구비해두었는데, 봄이 되어 찾아가면 그 길목마다 늘 시체가 잠자고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땔감은 재로 변해 흐릿했다. 시체의 죽음은 늘 춥고 외로웠다. 그 추운 조난의 길에서, 자그마한 선의로 마련된 음식과 땔감은 생명을 구원하지는 못하고 다만 죽을 자리를 정해주는 듯싶었다.

어느 봄날에도 여느 봄날과 마찬가지로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시체는 여느 시체와 달랐다. 그 시체는 헐떡이며 우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어미의 품에서 그 아이는 메말라 죽기 직전에 구조되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드미트리 즈다예비치였다.

눈 속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병적으로 희디 흰 피부를 가졌다. 그를 입양한 부모의 살빛은 검은 빛이었다. 드미트리의 양부모는 키레넨의 일족이었다. 제국의 모멸과 핍박을 피해, 겨울만이라도 세상과 격리되는 이 고장에 숨어 몸을 피한 것이었다.

키레넨의 일족은 제국민에게 경어를 써야 했다. 정식으로 입적을 시키면 드미트리 역시 키레넨의 일족이 될 것이므로 그들은 입적을 시키지 않았다. 제국의 호적에서 드미트리와 양부모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래서 양부모는 자신의 자식에게 경어를 썼다. 빈, 이라는 옛된 경어로 그들은 그들의 자식을 불렀다. 어린 드미트리는 빈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살결에 깊게 파고들어 사무치는 느낌을 받았다.

돈의 힘으로밖에 살 수 없는 키레넨의 일원답게, 그들은 꽤나 돈이 많았다. 그 양부모는 조용했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저 바깥에서 모아온 돈으로 소작을 주어 먹고 살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소작을 주는 농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벗어 인사해야 했다. 가끔 까닭없는 투석이나 욕을 들을 때도 있었다. 때론 키레넨의 일족인 하녀가 매를 맞고 울면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요가 몸서리치게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드미트리는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울분에 찼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양부모는 제국에서의 대접보다는 낫다며, 빈, 이라는 말로 드미트리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한 번도 눈의 고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드미트리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빈, 빈께서 훌륭하게 자라서, 우리도 매맞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지요."

양어머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드미트리는 그 날부터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율사가 되는 것, 장사치의 양자가 신분을 끌어올릴 방법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드미트리는 제도로 유학을 떠났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노라고 울면서 헤어졌다. 고사리 같은 손을 호호 불며 제도로 떠나갔고, 훗날 금빛이 휘황한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율사에 합격하고 돌아왔을 때, 이 고장에서 이미 그의 집은 사라져 있었다. 불이 붙어 타오른 집은 재로 삭아 있었고 양부모도 하녀도 주검으로 얼어 흩뿌려져 있었다. 드미트리가 율사가 된 것, 그것이 그 파멸의 원인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키레넨,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 일족이 드디어 권력을 얻었다.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자신에 비추어 생각했다. 돌아온 드미트리는 곧 이 땅에 부임해 주재 율사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것을 위해 수지에도 맞지 않는 양자를 기른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제 저 일족은 마각을 드러내어 모든 농토와 모든 과실수를 집어삼킬 것이고, 고리대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녀자들은 모두 그 일족한테 강간당하고, 농토를 빼앗겨 거지가 된 사람들은 매질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율사가 된 드미트리는 그 모든 것을 방관할 것이라고, 그런 소문으로 끝맺었다.

그 모든 것은 자기들이 키레넨에게 해온 것에 더욱 가까웠다. 자신들이 해온 악업은 그들의 마음 안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악업이 두려웠다. 한겨울, 다시금 불어온 바람이 길을 끊어 제국과의 연결을 단절했을 때, 그들은 횃불을 들고 모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불을 질렀으며 하녀를 겁간했고 저택을 부수고 재산을 나누어 가졌다.

삼 개월이 지나서야 드미트리는 도착했다. 증거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악에 받쳐 법으로 복수하려 들었으나 키레넨을 위한 법이 제국에는 없었다. 아무도 주검을 수습하지 않았으므로 가족들의 시체는 검은 흙 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작은 손으로 그것을 묻으면서 드미트리는 울지 않았다. 율사복은 흙과 눈으로 젖어 얼룩졌다. 그 와중, 그는 부모의 품에서 작은 편지를 발견했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진실이었다. 처음으로 빈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다. 낯선 이름이었다. 드미츄어 즈다키렌, 그것이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드미트리는 그 동사한 시체의 아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 부모의 친자식이었고, 마술로 피를 섞어서 피부를 희게 만들었으며, 키레넨의 운명을 물려주기 싫어서 연극을 꾸민 것이라고. 그런 사실이 적혀 있었다.

드미트리는 편지를 다 읽고서도 울지 않았다. 북,북, 찢어서 주검과 함께 파묻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보였으므로 울 수 없었다. 숙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하면서도 생명은 물려주려 애썼던 애정이 가슴 속에서 치받았다. 온 몸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빈이라는 단어가 떨면서 자신을 울리려 애썼지만 울지 않았다. 혼자서 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길은 계속 굽이치며 그 끝을 숨기려 드는 것 같았다. 조난자를 위한 쉼터에 다다라서 또 얼어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제서야 드미트리는 듣는 사람 없는 울음을 세상 가득 울었다.

울면서 하나의 결심을 끝마쳤다. 자신에게 이제 제국민은 사람이 아니고, 오직 키레넨의 일족만이 사람인 것이라고. 저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겠노라고.

제도로 돌아간 그는 무섭게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 성공으로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다. 무섭도록 마력을 수양했고 법을 연구했다. 어린 나이에 5위계의 율사 자리에 올랐을 때, 그 질투 많은 라달라리아의 율사들도 탄복할 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런 드미트리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금 가면을 뒤집어쓴 구릿빛 피부의 미녀, 소니아 아바키렌이었다. 그녀와 드미트리는 하룻밤동안 대담을 나누었다. 다음 날, 제도는 발칵 뒤집혔다. 달아난 드미트리가 파계 율사로 전직하여, 소니아와 함께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언... 예언이라."

드미트리는 지금 율사복을 입고 차창 밖의 눈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었다. 분명히 같은 물이 얼어 눈이 되는 것일 텐데도, 기나센의 눈은 그 빌어먹을 고향의 눈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드미트리는 지금 골칫덩이를 치우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중이었다. 드미트리는 기나센으로 향하는 마차에 앉아 있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려도 무시하고 귀환하지 않더니, 이젠 아주 잠적을 해버린 골칫덩이 검은 개. 에바를 찾아 직접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후우우우...."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창에 입김이 뿌옇게 서렸다. 드미트리가 소니아와 함께하기로 한 이유, 그것은 그녀가 예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키레넨을 위한 나라가 건국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국이 바뀔 것이라는 것. 그 예언은 저 유리창 밖의 산맥처럼 선명했다.

ㅡ우리도 매맞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지요.

부모가 남긴 그 말이 떠올라서 드미트리는 거절할 수 없었다. 소니아 아바키렌, 그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멸족당한 줄 알았던 예언의 능력을 가진 키레넨이었다. 건국은 모든 키레넨의 소망이었다. 그 소망을 그토록 뚜렷한 예언으로 보여준 것이다. 누구라도 홀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맹점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그 예언은 한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테마였다. 아나테마는 운명에 매인 존재가 아니어서, 아나테마들의 활동은 이 예언을 헝크러뜨리고 망가뜨릴 수 있었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그것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에바를 쫓아서, 나사렘을 지나 기나센으로 옮겨가면서, 드미트리는 그것이 엄청나게 큰 맹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바는 계속 통제가 되지 않았다. 반쯤 아나테마나 다름없는 베들렘이기 때문이었다. 에바를 찾으러 뒤늦게 나사렘에 들린 드미트리는 그 참상에, 그리고 그 참상을 무찌른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실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랐다. 박애의 아이킬로스, 그 화신체의 강림이라니, 그리고 그 퇴치라니. 이건 예언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모두 세상을 크게 뒤집어엎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큰 일인데 느닷없이 솟아났고 느닷없이 해결되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이미 소니아의 예언은 엇나갔을 지도 모른다, 이런 불안감이 등판에 식은땀으로 맺혔다.

소녀에겐 동료가 있었다. 수소문하며 전해들은 그 말도 더럭 겁이 나게 만들었다. 에바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렸다. 드미트리가 생각하기에 에바 혼자서 아이킬로스의 화신체를 무찌르는 것은 무리였다. 그 동료라는 사람이 일을 해결한 것이 틀림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외신의 화신체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성도 8궁이라도 들렀던 것인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면, 왜 예언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비틀림이 자꾸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세상을 헤집어놓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지금 센디엘에는 아나테마가 몇 마리씩 횡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니지. 드미트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빛 머리가 나풀나풀 흔들리며 시야를 가렸다. 아나테마가 어떤 존재인데 그렇게 시장통 구경거리처럼 나돌아다니겠어.

"에바, 그 녀석이 모든 비틀림의 원인이겠죠."

지금 그녀만큼 자유분방하게 나돌아다니는 아나테마는 없을 것이었다. 빨리 에바를 붙잡아서, 원래 계획을 시행해야 한다. 드미트리는 그 생각뿐이었다. 드미트리는 차창을 보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미아가 되면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대체 무슨 지혜가 샘솟아서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죠?"

그 대답은 한참 뒤에 깨닫게 되었다. 추적 끝에 숙영하고 있는 에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었다. 몰래 숨어서 숙영지를 바라보던 드미트리는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또 당신이었나요..."

에바와 함께했던 의문의 동료. 그 정체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아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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