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눈길 ( 3 )
소렌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길목, 숙영을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 앞.
아이는 팔찌를 돌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흐릿하게 빛나던 글자가 꺼지고 흰 백지의 잔영만이 남았다. 마레가 건네준 팔찌에는 성경 말고도 여러 책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팔찌를 받은 이후로 아이는 틈틈이 그 책을 읽었고 오늘 그 마지막에 도달했다.
그 내용은 마레가 학술원에서 쫓겨나기 전 몰래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책의 줄마다 마레가 써놓은 주석이 있었고 페이지의 여백마다 필기가 있었다. 아이가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요 몇달 간, 아이는 그 기록을 훑어 따라가고 있었다. 아이의 정신이 부쩍 성숙해진 데에는 그 책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끝났구나."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가 여백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텅 빈 여백이 가득 떠올랐다. 처음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할 때의 자신이 여백 위로 비쳤다. 먼 옛날이 아닌데도 먼 옛날처럼 아련했다. 첫 날, 몇 시간이나 애를 써서 열 페이지를 겨우 읽었던 밤에 자신의 하얀 뺨으로 주홍색 모닥불의 빛이 스몄던 것이 기억났다. 그 때 밤새워 되뇌었던 말이, 무엇이었더라.
"착한 마술사를 나중에 죽이고... 나쁜 마술사부터 죽일 거라고."
어설픈 말이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세상을 가득 뒤덮은 마술이라는 먹구름이 너무 싫고, 그것을 걷어 없애버리고 싶으면서도, 아이는 무자비한 복수자나 살육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때로 말은 어설프고 모자랄수록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 진심의 힘으로 아이는 모순을 이겨내고 삶을 견디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페이지의 끝에 다다를수록, 아이는 더 이상 그 말에 진심을 담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나 그 말을 지켰을까. 이렇게 또다시 불빛이 뺨에 스며 어둠 속에서 나 혼자만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면, 그런 의문이 엄습해왔다. 깊은 밤의 어둠 속에는 유령들이 숨어 이 쪽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자신이 죽여온 마술사만 해도 수백을 헤아릴 것이다. 그 모든 마술사의 유령들이 모닥불 저쪽에서 퀭하니 이쪽을 응시하며, 말 없는 추궁을 가해오는 것으로 느껴졌다.
때로 그 유령들은 말을 건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은 왜 죽어야 하고 다른 이는 왜 살아야 했는지 물어보는 울음이었다. 아마 카나기의 패잔병이었을까, 등에 칼이 꽂혀 뱃가죽이 새파란 유유령이 물었다.
ㅡ네 누나라는 계집은 비열한 살인마다. 나는 가장이었다. 내 살육에 더 엄정한 근거가 있을 텐데, 왜 그 계집은 칼을 받지 않고 나는 네게 베어져야 했느냐.
고개를 돌려 무시하려 애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칼을 뽑아 휘두르면 불빛만이 일렁일 뿐 유령은 베어지지 않았다. 죽은 자가 또 칼을 받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반응을 보이면 유령들은 오히려 더욱 더 기뻐해서, 제각기 의문과 추궁의 말을 가져와 쏟아부었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그것들을 벨 수는 없었다. 그것들을 베기 위해서는 영혼을 베는 물건이 필요한 듯했다. 이를테면, 정의 같은 것이.
"착한 마술사를 살리고... 아니, 나중에 죽이고..."
중얼거리면 그 혼돈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레가 남긴 책을 더 읽어가서 더욱 성숙해질수록, 그 유년의 선언은 빛을 잃어갔다. 세상의 모든 타인을 설득하진 못할지언정 자기 자신 안에서만은 확고했던 그것은, 이제 자신에게도 어설프고 유치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이를테면 카사노 센모레노. 교회의 첨탑에 몸을 던진 그 주교의 죽음은 어려웠다. 만일 그가 부활해서 자신에게 심판을 요구한다면, 그를 죽여야 할 것인가 살려야 할 것인가. 저 어설픈 정의로는 그 의문을 베어낼 수 없었다.
림에게 물어보아도 림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때론 그 침묵이 고마웠지만 때로는 원망스러웠다. 아이는 눈을 더 깊게 감았다. 눈꺼풀과 눈 사이의 자그마한 틈새에도 어둠은 가득 고여 있었다. 또 어떤 유령이 그 틈새에 파고들어 말을 건네올 것만 같았다.
"왜 그래? 졸려? 그럼 너 먼저 자도 되는데."
아이는 눈을 떴다. 목소리를 듣자 유령의 환영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말을 건네온 것은 에바였다. 그녀는 흐아암, 크게 하품을 하고선 말을 건네왔다.
"어차피 여기는 이미 안전한 곳이니까. 대충 자도 대충 될거야."
그 무사안일함이 정겨워서 아이는 피식 웃었다. 둘은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기나센의 수도인 소렌에 도착할 것이었고 오늘은 에바와 동행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도착하면 어쩔 거냐고 묻자 에바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글쎄? 일단 언니를 찾아야지?"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 언니라는 사람은 네 친언니인 거야?"
"아니. 난 가족 없는걸."
다시 흐아암 하품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에바. 아이는 말문이 막혔다. 꽤 오랜 시간을 에바와 함께 있었지만, 에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 넌 왜 기나센에 있던 거야?"
"언니가 시켜서."
"기나센에 머무르면서 뭘 했어?"
"언니가 시킨 거?"
같은 대답의 반복이었다. 아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자 뭐가 좋은지 에바도 덩달아 웃었다.
"언니는 어쨌든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언니 말만 들으면 최소한 틀릴 일은 없는걸."
아이는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어설픈 대답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심일 것이었다. 그 때였다.
"잘 알고 있군요.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멋대로 행동한 거죠?"
웃음기를 머금은 여자 목소리였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에바는 반쯤 감겨 있던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라서 홱 아이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에바가 언니라고 부른 사람은 율사복을 입은 여자였다. 운모 안경을 써서 눈을 가리고 길따란 금발을 늘어뜨렸는데, 키는 아이의 가슴팍에도 닿지 않을 듯 작았다. 에바를 찾아 헤매다 때맞추어 나타난 것인가? 그녀는 살벌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빨리 돌아오라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지금 저희가 얼마나 큰 곤경에 빠졌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에바는 낯이 없다는 듯 몸을 숨기려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한다.
"어, 어쨌든, 아직 늦진 않았잖아..."
그 말에 율사복을 입은 여자는 살벌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에바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연신 사죄를 하다가, 여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말하자 달려들어서 여자의 품에 안겼다. 아이는 가만히 그 율사복을 입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일 텐데, 그 음색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 제가 없는 동안 길 잃은 동생을 보살펴 주셨군요."
그녀는 가식적으로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아이는 그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 눈빛은 딱딱했다. 그녀는 자그마한 신음을 흘리며 손을 빼더니, 가슴에 손을 대고 다소곳이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죠."
"어? 언니. 하지만, 이렇게 그냥 헤어지기에는..."
"가죠. 제 말은 잘 듣기로 했죠?"
아이는 뚫어져라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태연함을 연기하는 그 얼굴의 목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그것을 보고 함께 자고 가기를 권했다. 그녀, 에바가 말한 언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거절할 명분이 없어 머뭇거리더니, ,결국 아이의 말에 따랐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고, 에바가 침낭으로 들어가 새근새근 잠자기 시작할 때. 아이는 그 언니라는 사람을 불러들여 모닥불 저쪽에 앉혔다.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꼴은 뭔가요, 드미트리?"
에바가 말하던 그 언니는 드미트리였다. 완전히 여자 목소리인 것처럼 목소리를 바꾸었기 때문에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유심히 살핀 결과 변장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사전 정보도 그것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에바가 조디악의 명에 따라 기나센에서 벗어나서, 나사렘에 합류해 있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알고 있는 조디악의 관련자는 적었고 이 여자는 아무리 봐도 자신을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시죠?"
딱딱한 웃음을 지으며 부정하는 드미트리에게 다가가 안경을 홱 빼앗았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특징적인 실눈과 그 실눈 사이에 담긴 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는 그 안경을 접어서 내려놓고 드미트리의 금발을 잡아당겼다. 예상대로 가발이었다. 하늘색 단발이 나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발을 빼앗긴 드미트리는 버둥거리며 다시 가발을 받아가려고 들었지만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헛수고였다. 아이는 사납게 말했다.
"왜 꼴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여장까지 하고 여기 나타난 건가요. 다음에 만나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꼴에, 전혀, 안 어울린다고 말하셨습니까?"
어째서인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이상한 반론을 하는 드미트리. 철저하게도 여자 율사복까지 구해 입은 꼴을 본 아이는 더 사납게 말했다.
"예. 하나도 안 어울리고 이상합니다. 같잖은 변장은 그만두고 앉으시죠."
"같, 같잖은, 변장..."
드미트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털썩 앉았다. 자포자기한 듯한 행동이었다.
"예. 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같잖은 변장을 하고 저 말썽꾸러기를 회수하러 왔습니다. 왜 위험을 무릅쓰고 같잖은 여장을 하고 당신 앞에 나타났냐고요? 저 아이는 아주 중요한 계획의 일부분이고, 운명이 어디로 튈 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같잖은 변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더 궁금하신 거 있나요?"
드미트리는 그 여자 율사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남자면서 왜 그게 상처지? 아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큰 계획? 당신들 조디악의 그 예언인가요.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겁니까?"
"글쎄, 제가 굳이 그걸 시시콜콜 얘기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아이는 품에서 스릉 검을 뽑아들었다. 장검의 검날이 불빛을 받아 빛났고 그 검날에는 태연한 드미트리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드미트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동료가 되어준다면, 그럼 다를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동료가 될 겁니다. 드미트리가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는 여전히 눈에 힘을 주며 드미트리에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단념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야말로 휘두르지도 못할 칼은 넣어두시죠. 제 목숨에 그 시골 마을의 안전이 달려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찔러 보시렵니까?"
콱! 그 말과 동시에 아이의 검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귀 옆으로 늘어진 드미트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베고 지나갔다. 이거 괜한 도발을 하면 안 되겠군요. 드미트리는 웃음을 지으며 척추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못 본 사이에 또 성장했는지, 아이의 기세는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에바와 당신들 조디악은 무슨 관계입니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입니다. 당신의 소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제가 보기엔 사기꾼과 피해자의 관계로 보입니다. 당신은 전혀 착하지도 똑똑하지도 않고 심지어 언니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거짓말로 저 녀석을 옭아매고 있는 겁니까?"
"하, 안 본 사이에 어디서 웅변술 강론이라도 수강한 건가요? 말솜씨가 굉장히 매끄러워졌군요?"
이 도발은 효과가 있는 듯했다. 드미트리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걸 알아서 어쩔 작정이십니까?"
아이는 침묵했다. 멋대로 다른 이의 삶에 밀고 들어가도 되는가, 아이에게는 지금 그 확신이 없었다. 드미트리는 아이의 칼을 옆으로 밀쳐내고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제가 기꺼이 그 호기심을 채워드리죠. 제가 사기꾼이라고 하셨습니까? 얄궂게도, 저 아이의 말은 전부 진실이고 저도 저 아이를 마음 깊이 친애합니다."
드미트리의 말은 길었다. 아무래도 드미트리는 아이에게 에바가 자신들과 함께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은연중에 아이를 포섭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투로 분위기를 잡더니 아이가 얼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당신은 혹시 가미온이 어떻게 일곱 주신 중 하나로 인정받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계약 때문이죠."
"맞아요, 일곱 학파간 세운 계약 때문...아니, 당신?"
드미트리는 금색 눈동자가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