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눈길 ( 4 )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 7위계의 파계 율사와 일곱 학파 사이에 성립된 계약 얘기는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 걸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본론부터 얘기하시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까지 벌린 드미트리. 아이는 오히려 드미트리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가 더 의문이었으나, 입고 있는 여자 율사복을 보고 해답을 얻었다. 파계 율사지만 드미트리는 율사였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지위의 율사였으니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었다.
"그, 그럼, 힘의 학파. 두냐가 그 일곱 학파 가운데에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그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뜻 맡은 역할이 짐작가는 다른 학파들과 다르게, 두냐는 은밀했고 살면서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드미트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모르시는군요. 두냐, 그 암살단은 힘의 무게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무게추라면..."
"가끔씩 일곱 학파간의 힘의 균형이 깨져서 제국을 건립하며 세운 계약이 일그러질 때가 있겠지요. 두냐의 암살단은 그 때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학파에 가세하고 가장 강한 학파의 요인을 암살하는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베들렘, 두냐의 합법적인 아나테마는 그 역할을 위해 두냐가 직접 점지한 균형과 힘의 권화죠."
드미트리는 한 호흡 쉬고 말했다.
"그래서 베들렘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암살 대상, 그 자의 가장 정당한 원수에게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조용히 그 말을 경청했다. 드미트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보통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 7위계의 율사가 그린 제국의 설계도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냐의 암살단은 늘 베들렘을 찾아 헤매며, 베들렘을 발견하면 그 원수를 찾아내어 암살하는 일을 거듭해 왔습니다. 암살행을 끝마치면 베들렘은 자결하고, 또 새로운 베들렘을 찾아 헤매는 일이 반복되었지요. 천 년 가까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드미트리는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에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 베들렘이 죽고 난 후, 아무리 찾아 헤매도 새로운 베들렘이 나타나질 않았던 겁니다."
아이는 아연실색했다. 그게 얼마만큼의 중대사인지는 그것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암살단의 조직은 오직 신앙만으로 뭉친, 원시에 가까운 조직입니다. 신이 계속해서 그 삶과 암살의 목적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조직이죠. 그게 없어지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베들렘이 나타나지 않은 삼 년만에, 그들은 붕괴에 가깝게 내몰렸습니다. 어느 세력에 가담해야 할지, 어떤 의미로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그들 앞에 우리가, 아니, 소니아 님께서 나타나셨죠."
"그래서, 인공으로, 베들렘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입니까?"
드미트리는 의외라는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알고 계셨나요? 맞습니다. 소니아 님은 각종 연구에 해박하셨고 기다렸다는 듯 베들렘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우리와 계약을 맺었죠. 에바는 그 인공 베들렘입니다."
드미트리는 에바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열 살때, 두냐의 검은 개가 4위계와 싸워 이겼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유명하니 말입니다. 그건 실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베들렘을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실험. 고작 조그만 땅뙈기를 얻기 위해 그런 내기를 할 필요는 없었지요. 우리의 생각대로 그녀는 훌륭하게 완성되었고, 또 훌륭하게 자라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두냐는 조디악과 긴 계약을 맺게 되었지요. 자,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아이는 씹어뱉듯 되물었다.
"그게 자랑스럽습니까?"
드미트리는 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아, 아직도 궁금한 게 남으셨겠군요. 베들렘을 만드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대상을 잘못 골랐다가 우리가 원수로 지목되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궁벽한 오지까지 들어가서, 야만인과 인간의 혼혈 고아를 주워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베들렘으로 만들었지요. 그랬더니, 두냐의 학장이 이 아이의 원수를 무엇이라고 지목하셨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말하십시오."
"제국. 제국입니다."
그것이 드미트리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인 듯했다. 드미트리는 눈을 번뜩이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느낄 수 있었다. 세계의 적을 지목하는 그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무엇보다 뚜렷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세계는 제국의 죽음을 원합니다. 그 방법으로만, 세계는 균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두냐가 저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어때요, 저희와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억지 부리지 마세요.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자기 성취적 예언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자기들이, 에바를,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을 그 베들렘인지 뭔지로 만들어 놓고...!"
아이의 분노를 마주한 드미트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길렀습니다. 열 살부터 지금까지, 육 년이나 함께하며 말을 가르쳤고 이 아이도 저를 졸졸 따라다녔지요. 제 동생은 누구보다도 확고하고 뚜렷한 의지로, 그 자신의 의지로 말입니다. 제국의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의 뜻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런..."
"눈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미 세계는 망가졌습니다. 천 년 전의 안배는 이제 그 시효가 다해서, 일곱 개의 학파는 이미 각자의 종말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걸 억지로 묶어놓은 제국이라는 유령은 죽어야만 합니다. 죽어서, 그 시체를 양분으로 새로운 새싹이 자라나도록 돕는 것이 제국에게 남은 유일한 소임입니다."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 서성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망가지고 있어요. 얼마 전 남부에서 외신과 야만인이 크게 쳐들어왔지요. 그게 북서 자치령의 전쟁의 원인이니 알고 계실 겁니다. 아지프는 패배했습니다. 외신은 이 세계가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듯 계속 강해지고 있지요. 그 외신을 무찌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허락받은 아지프는, 미친 듯 폭주하여 제국민과 부랑자들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드미트리가 그 다음 지목한 것은 카나기였다.
"카나기도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그 자들은 정치와 지배의 기술로, 세상의 괴물을 길들이도록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자신의 균형도 유지하지 못해서, 아이신고르 일당이 기어이 3선에 성공했습니다. 이미 그 학파는 아이신고르 일가의 왕국처럼, 가산 국가처럼 변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 망가진 지배체제가 천 년 전의 선배님이 바라신 것이겠습니까?"
드미트리는 서성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든 세계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졌어요. 모든 세계가 망가졌으니까, 이젠 더 이상 어떤 세력 하나만을 죽이는 것으로는 도저히 균형을 회복할 수 없으니까, 두냐는 베들렘을 내는 걸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외신을, 세계의 적을 베들렘으로 벼리어 낸 것이지요. 제국은 끝나야 합니다. 그 끝은 밤의 끝처럼 확실합니다."
드미트리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세상이 끝난다면, 그 최후는 반드시 그 세상에서 가장 핍박받고 박해받던 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음 세상의 주인이 될 권리는 지금 세상의 노예들에게 있을 것이고 그것이 노예가 가진 유일한 권리입니다. 우리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나라를, 제국을 파먹고 성장해 새로운 세상 가득 들어찰 우리들의 나라가 곧 열리리라는 예언 말입니다."
아이는 드미트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열기를 더해가는 그 목소리에는, 전율에 가까운 흥분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레이븐사이드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 씨. 당신 역시 지금 세상의 희생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아이와 헤어지고 나서 조사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의 동료가 되어 주십시오. 제국을 끝장내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우리의 우상이 되어 주십시오."
드미트리는 아이의 두 손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드미트리의 손은 여자의 손처럼 희고 말랑말랑했다. 아이는 가만히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홱 뿌리쳤다.
"그래서 그 대안이라는 게 가면을 뒤집어 쓴 망령들과 도박장입니까? 치우세요. 제가 보기엔 당신들이 세울 나라라는 것도, 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희생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들일 테죠. 당신들은 노예가 아니며, 오히려 착취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털썩 앉아서 말을 끝마쳤다.
"노예가 가진 유일한 권리까지 훔쳐가는 짓은 그만두세요."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모닥불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드미트리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재미있다는 듯 아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야, 에바는 이런 말 몇 마디면 금세 눈물을 그렁그렁 맺었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제 동생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군요. 안 그렇습니까?"
아이의 눈에선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사그러들어가는 모닥불의 불꽃이 아이의 눈에서 반사된 것이었다. 그 표정은 차가웠지만, 아까처럼 맹렬한 살의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는 드미트리의 말을 듣고, 호노레와 어포슬이 해 왔던 제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둘의 말은 달랐지만 다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호노레의 말은 도덕을 품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고, 조디악에게는 힘과 계획은 있었으나 도덕이 없었다. 그 두 가지 사이 어딘가에 세상은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진심이었다. 어떤 삶과 어떤 경험이 드미트리를 그렇게 몰아갔는지 아이는 알 방도가 없었으나, 자신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진심을 품고 있었다. 아이는 그것이 닿을 듯 느껴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 자를 베어넘길 자격이 있는 것인가. 또 모닥불 너머에서 유령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는 까불지 말라는 듯 드미트리를 걷어찼다. 드미트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발을 붙잡으면서도, 이죽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뭐, 처음부터 이런 제안을 듣고 당신이 따라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당신이 비싼척 하면서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라는 건 이미 파악이 끝났으니까요. 저는 제 동생만 데리고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어디, 막아보시겠습니까?...악!"
정강이를 한 번 더 걷어찼다. 드미트리는 작은 비명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이 녀석은 특이 취향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의미없는 폭력 이상을 드미트리에게 휘두를 순 없었다. 드미트리는 레버넌트를 불러들여 잠든 에바를 업혔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죽거리는 것인지, 예언일지 모를 호언장담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그렇게 싫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동료가 될 겁니다."
어떤 계획이라도 세워둔 것인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 의기양양함이 꼴보기 싫어 베어넘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숱하게 떠올라 있는 유령의 숲이 자신과 드미트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유령들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착한 마술사를 나중에 죽이고 나쁜 마술사를 먼저 죽인다. 그런 어설픈 생각으로 여기서 드미트리를 베어넘긴다면, 일제히 입을 열어 비난하겠다. 그런 결심이 유령들에게서 엿보이는 듯했다. 아이는 결국 검을 뽑지 못했다. 아이는 멀어져가는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만간 저 재수없는 낯짝을 또 보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찾아왔다.
"기나센에서 봅시다. 그 때는 어울리는 차림을 하고 당신을 접대하죠."
드미트리는 멀리서 그런 고함을 치고 떠나갔다. 에바와의 작별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아이는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스스로를 끌어안듯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 때까지는, 해답을 찾아야, 할 텐데."
'무슨 해답 말이냐, 어린 순례자야.'
어둠 속에 덩그러니 앉은 아이에게 림이 말을 건네왔다. 아이는 검을 끌어안은 채로 침묵했다. 아이는 눈을 감고 호노레의 예언을 떠올렸다. 이제 당신의 십칠야가 끝날 것이고, 당신의 삶을 영원히 결정지을 만남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아이는 자신의 유년이 끝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체감은 불빛처럼 선명했고 기나센에 가까워질수록 확실해졌다. 자신의 삶은, 이미 그 어설픈 유년의 정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자라나 있었다. 유년이 끝났을 때에는, 그 유치한 한 줄의 정의보다 복잡한, 그러나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무언가를 품어야만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제국의 악덕과 타락은 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확실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안은 있는가. 호노레의 제안인가, 방금 만난 드미트리의 제안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건가."
어느새 새벽은 끝나서 출렁이는 눈의 산맥 틈새로 먼 동이 트고 있었다. 동트는 산의 품 가득히 하얀 빛이 빛나서, 강물처럼 굽이치는 흰 길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그 눈길은 아까 보았던 책의 여백처럼 흰 빛이었다. 아이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그 눈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렌으로, 에페 바체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