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귀향 ( 1 )
기나센의 수도, 소렌은 산맥에 둘러싸인 도시였다. 어느 곳보다도 먼저 겨울이 찾아오는 소렌의 건물 지붕들은 네모반듯해서, 눈 내리는 밤이면 지붕마다 함박눈이 사각으로 쌓였다. 가지런히 정돈된 순백의 지붕들 옆에서는 사철 푸르른 상록수가 팔을 곧게 뻗어 건물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소렌 사람들은 그 상록수를 아꼈다. 첫 눈이 내리면 볏짚으로 겨울옷을 만들어 소나무를 둘렀고, 그 볏짚 안으로 벌레들이 모여들어 겨울잠을 잤다. 봄이 오면 그 벌레들은 볏짚옷과 함께 불태워질 것인데도, 한 줌의 온기에 속아 온 세상으로부터 모여드는 것이었다. 볏짚옷은 까슬까슬했다. 어쩌면 눈 앞에 가득한 사람들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고, 아이는 잠시 생각했으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림, 확실히 이상하지?"
아이는 지금 소렌의 공회당 앞에 있었다. 아이가 알고 있는 에페 바체의 시험 장소는 분명히 그 곳이었고, 오늘이 그 시험일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지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만장해 있었다.
'뭐가 말이냐, 어린 순례자야?'
"내가 알기로, 에페 바체의 세 번째 시험은 이렇게 큰 행사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있는 거지?"
이상했다. 아침 일찍 이 공회당 앞에 도착해서 아이는 시험관과 만나려 들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모여 있는 이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몇 명을 붙잡고 물어보니, 그들 모두가 에페 바체 시험을 위해 모인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에페 바체 자격을 줄 수 있는 건, 50년 이상 존속하면서 명문으로 인정을 받은 용병단에 한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거야?"
무려 300년 전에 창단되어, 피선거권을 가진 24 용병단 중 하나였던 레이븐사이드조차 결국 세 명 이상의 에페 바체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3년차의 에페 바체 시험을 보겠다고 몰려들 수 있는 것인지? 아이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함과 불안함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명백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긴장감이 아이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어이, 애송이. 뭘 그렇게 바짝 쫄아 있나?"
누군가가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자기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꽤나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였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선이 제일 많이 가는 가슴 갑옷은 불필요한 장식으로 가득한 명품을 차고 있었는데, 소드 벨트도 아대도 싸구려였다. 귀고리를 세 개나 차고 있는 그의 용모는 볼품없었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놀란 모양이군? 어디 출신인가? 내가 모르는 얼굴인 걸로 봐서 명가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국경 쪽에서 왔나?"
그는 실실 웃으며 아이를 툭툭 건드렸다. 시험을 받을 때 화려한 복장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이는 여관에 계인과 인장 등을 전부 벗어두고 허름한 모습으로 나왔다. 그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세상 물정 모르고 상경한 촌놈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별로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아이는 꾹 참고 물어보았다.
"예.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제가 저희 선배님들께 듣기로는, 이런 시험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글쎄, 너 같은 촌놈들은 몰랐겠지만 올해 시험이 이 개지랄이 날 거라는 건 소렌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구. 갑자기 에페 바체 자격이 있는 용병단이란 용병단들은 죄다 앞다투어서 어중이떠중이들을 등록시켰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남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골린이라고 소개했다. 아이의 얼굴엔 수심이 더해졌다. 골린의 말은 해답 대신 더 큰 의문을 주었을 뿐이었다. 왜 그런 일이? 아이는 이상함을 넘어 악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음모, 어떤 거대한 음모나 흉계 따위가 풍기는 악취였다. 그 수심을 잘못 이해했는지 골린은 으스대며 말했다.
"그래서 올해 시험은 존나게 빡셀 거라는 말이 많았어. 아무튼 여기 모인 놈들을 싹다 에페 바체로 만들어줄 수는 없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렇...겠죠."
아이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골린은 거들먹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찬 귀걸이가 바람에 짤랑대며 빛을 뿌렸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듣기 싫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올해 시험의 위험성과 어려움을 과장했다. 사망자가 나올 거라는 둥, 1/10밖에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둥, 섬에 풀어두고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 거라는 둥. 믿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적당히 위협을 끝마쳤다고 생각한 골린은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골린의 용병단인 헤이즈 같은 곳들, 유서 깊은 명문 용병단들은 미리 대책을 준비해 뒀단 말이야.
헤이즈. 들어본 적 있었다. 피선거권을 가진 24대 용병단 중 말석에 있는 곳이었다. 용병단임에도 용병으로 벌어들인 돈을 용병일에 재투자하기보다는, 별도로 차린 상단에 투자해서 돈벌이를 즐기는 곳. 풍문이 좋지 못한 용병단이었다.
"뭐냐면, 바로 이거란 말이지."
골린은 주섬주섬 품에서 강철 브로치를 꺼냈다. 그는 그 방패 모양의 브로치를 억지로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떨떠름해서 물어보았다.
"이게 뭔가요?"
"팀의 표시다."
그 대책이라는 건 부정행위였다. 사전에 몰래 사조직을 만들어서, 팀원끼리만 서로 협력해서 시험을 통과하자는 것이었다. 이 브로치는 그 팀의 표식이라고 했다. 골린은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헤이즈가 보장하는 팀에 합류하는 거야. 그리고 이 브로치를 찬 놈이 보이면 전력을 다해서 서로 돕고 끌어주는 거지."
"부정행위잖습니까."
"뭐? 안 걸리면 장땡이지. 촌놈 주제에 별 걸 다 생각하는군? 어리버리 떠는게 불쌍해서 특별히 기회를 줬더니 말이야."
아이가 차갑게 대꾸하자, 골린은 굉장히 기분이 상했다는 듯 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미쳐돌아가는데 뭐, 다른 놈들이라고 대책 준비 안 했을 것 같아? 다들 무슨 짓이든 뒤에서 하고 있을 텐데 우리만 안 하면 병신 되는거야. 처신 잘 해."
그리곤 뒤돌아서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또 어수룩해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이는 짙은 염오를 느꼈다. 손에 든 브로치를 휙 땅바닥에 내버렸다.
"기나센에는 저런 놈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 부분은 아직도 어리구나, 순례자야.'
림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이는 그러나 여전히 골린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저 골린이라는 사람은 에페 바체를 그냥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듯했지만, 아이에게는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아이는 은연중에 기나센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같기를 바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노가 더 커질 사건이 생겼다.
"다음! 공회당에 입장할 다음 사람!"
검사관의 말을 듣고 아이는 자기 차례가 왔음을 알았다. 아이는 지금 긴 기다림 끝에, 에페 바체 시험을 받기 위한 심사대 앞에 섰던 것이다. 험상궂은 표정의 심사관이 아이에게 증표의 제출을 요구했다. 아이는 소중히 품고 있던, 잰슨에게 받은 증표를 넘겨주었다.
"일단 증표는 맞군. 잘 들어라. 네가 어디 소속이고 누구 아들이건, 시험관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정확한 신분 확인은 시험이 끝난 후 진행된다. 같잖은 권력으로 야료를 부릴 생각하지 말도록."
"예!"
그들은 증표만을 확인하고 정확한 신분과 소속은 나중에 확인하는 듯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우렁차게 대답하고 증표를 돌려받았다. 슬몃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가 바랬던 기나센의 풍토는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잠깐!"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졌다. 돌아보니, 검은 옷을 입은 수색자들이 자신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검사관이 피곤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신고가 들어왔소. 이 자가 시험을 받기 전, 미리 사조직을 꾸려 부정행위를 공모했다는 신고요. 손 들어!"
그들은 곧 아이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뒤져보면 공모의 증거가 나올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와중에도 몸수색에 응했다. 한참이나 뒤지던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머쓱해져서 물러났다. 수색이 끝나고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아이에게 검사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또, 또 이거군. 자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무슨 제의를 받지 않았나?"
"예, 뭔 기생오라비 같은 놈한테 헛소리를 들었는데요."
"그 자식이 이상한 제안을 했지?"
"거절했습니다."
"잘 했어. 같은 일이 세 번 있었는데, 앞에 두 놈은 거절을 못해서 이 자리에서 자격을 박탈당했다네."
심사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아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골린, 그 자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서, 어수룩해보이는 놈을 골라 쓰레기 같은 브로치를 건네주고 찔러서 실격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만약 브로치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아이도 여기서 실격당할 뻔했다.
"아마 그 놈이 팀을 꾸려서 부정행위를 하는 건 확실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허술하게 하진 않을 테고, 헤이즈가 사전에 더 비밀스럽고 적발하기 어렵게 포섭을 해 두었을 게야."
"그딴... 그럼 그 자식부터 실격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가 거칠게 묻자 검사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 수 있나. 증거가 없는데. 의심만으로 큰 용병단의 에페 바체를 실격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그 놈이 접근한 걸 보니 자네는 꽤 영세한 곳 출신인가보군?"
아이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관은 증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증표는 이미 에페 바체 시험관으로 소렌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사람만이 발부할 수 있는 것인데, 왜 그 사람에게 직접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나?"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괜한 질문을 했다는 듯 검사관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스승이었겠군. 그래도 헤이즈를 내세우는 놈의 제안을 거부하다니, 여간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게 아닐 게야. 그렇지?"
"아니오. 그저 틀린 일이니까 거부했을 뿐입니다."
"자네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검사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을 두드려 인사를 하자는 표시였다. 아이가 그 주먹에 주먹을 맞대자, 검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깨를 쳐 주었다. 그리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자네가 마음에 들었으니 해 주는 말이야. 4번, 7번, 10번 시험장엔 들어가지 말게."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검사관은 잠시 후 모른 척 다시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대체 에페 바체 시험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아이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검사관의 말이 분명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4번, 7번, 10번. 아이는 속으로 되뇌이며 공회당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아이의 귓전을 때렸다.
"뭐야, 촌놈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거지?"
골린이었다. 아이는 차가운 눈길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네 명의 남자를 등에 호위처럼 거느리고, 골린이 거들먹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
골린은 뻔뻔하게도 고개를 쳐들고 다가왔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그 얼굴에 주먹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골린은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얼굴로, 자신의 무리를 시켜 아이를 둥글게 감쌌다. 날카롭게 묻는다.
"방금 너한테 저 새끼가 뭔가 정보를 들려주는 걸 들었다. 당장 말해. 어차피 시험관들은 지금 다 바깥에서 상황 통제 중이야. 너 하나 조져놔도 아무도 몰라. 말해!"
아이는 차분하게 사방을 살펴보았다. 모두 신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이 자들이 골린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팀인 모양이었다. 한 합이면 전부 피를 뿌리고 쓰러지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아이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웃어?"
"4번, 7번, 10번 시험장이 더 쉬우니 거기로 들어가라고 하던데요."
이 자들은 자신의 손에 쓰러지기보다는, 에페 바체 시험에서 비참하게 탈락해서 쓰러지는 편이 더 합당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