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귀향 ( 4 )
소년과 소녀의 대형은 엉성했다. 소년은 검을 들었고 소녀는 폴암을 들었는데, 검은 짧고 폴암은 길어서 합을 맞추기 힘들어하는 듯싶었다. 그 주위를 세 명의 남자가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선 워해머와 폴암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무기의 날빛은 더욱 희고 섬뜩했다.
워해머가 소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강맹한 일격이었지만 소년은 받아냈다. 저토록 날이 얇은 검으로 저렇게 둔중한 무기를 받아친다는 것은, 꽤나 실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소녀와의 호흡은 거의 맞질 않으니, 급조된 2인조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어린 순례자야, 당장 개입하지 않는 것이냐?'
옆에서 림이 의문스럽다는 듯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저 소년과 소녀는 검기로 보았을 때 정말로 기나센의 일원인 듯 싶었지만, 저들이 아무것도 증명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서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피해, 머저리야!"
깡! 소녀의 손에서 폴암이 뛰쳐나갔다. 전체적으로 삼지창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그 오른쪽 날에 워해머 자루를 가두어서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은색 자루가 금속과 뒤얽히며 끄르르륵, 쇠 긁히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저 폴암은 자루마저 전부 금속으로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유심히 집중해서 보니 자루에 문양이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해식 절벽의 부서진 돌조각 틈새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뻗고 싹을 틔우는, 해송의 문양이었다.
"아."
그것을 본 아이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저런 창을 사용하는 용병단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사이드, 그런 이름이었지."
레이븐사이드와 한때 형제 용병단이었다가, 지금은 갈라진 곳이라고 들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형제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우호적인 곳이라고. 란페이가 갈가마귀를 두드리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 폴암 같기도 삼지창 같기도 한 병기는, 레이븐사이드로 치면 갈가마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윽, 뭐야 이거!"
물수리. 저 창은 그런 이름이었다. 물수리의 창날이 워해머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망치머리와 자루를 연결하는 둥근 고리가 콰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물수리의 맹습에 껍질이 부서진 바다거북 같은 모습이었다. 둔중한 망치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소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웅!
창자루를 횡으로 휘두르는 소녀. 소리는 커다랬다. 물수리의 옆날은 남자의 옆구리를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고 또 숫자가 부족했다.
"윽!"
다른 남자가 그 등을 세게 걷어차 버린 것이다. 소녀는 앞으로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그 등을 또 다른 워해머가 노리지만 이번에는 소년의 검이 그것을 흘려냈다. 검은 삐걱거렸다. 소년의 실력은 소녀에 비하면 모자라서 충격을 충분히 흘려내지 못했다.
"괜찮아?"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소년과 등을 밀착했다. 나지막하게 말한다.
"다음부턴 지키려고 시간 쓰지 말고, 내가 덮쳐서 열리면 한번 더 공격해서 죽여. 난 상관 없으니까."
"뭐? 하지만 ,우리는, 방금 만난..."
"방금 만나서 함께 싸우기로 계약했지. 그러면, 전우다."
당찬 말이었다. 명가에서 오랜 시간동안, 용병으로 부끄럽지 않게 사는 법을 배웠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검을 곧추세웠다. 아까보다 훨씬 기세가 정돈되어서, 합이 훨씬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저 두 명은 일단 가짜일 리가 없겠네."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어서 아이는 레테가 건네준 문서를 품에서 꺼냈다. 그 소년소녀를 몰아붙이고 있는 세 명의 남자, 그들의 신상이 적힌 문서였다.
"랭 반도 서해에서 노략질을 하고 다니다 선장이 사형대에 걸려서 달아난 해적 잔당 세 명... 그렇게 추정된다고."
소년 소녀의 의기는 높지만 그들은 열세였다. 적들은 강했다. 어떻게 보아도 저들은 스무 살이 훌쩍 넘어보였다. 저 자들은 열다섯에 늪지대에서 죽은 에페 바체의 신상을 훔쳐 잠입했는데, 그것과 일치하는 점이라곤 눈색과 머리색 뿐이었다. 저들의 검에선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짠물 냄새, 노예 선수부의 체취, 사창가의 냄새 따위가 진동하는 듯했다.
반면 소년소녀에게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눈이 녹는 것같은, 또는 눈이 어는 것같은, 사부작대는 흰 향기만이 코를 간질일 뿐이었다. 도린에게서 났던 것과 비슷한 냄새였다. 그것이 아이를 움직였다.
"림, 유혼."
아이는 흰 대태도를 받아들고 훌쩍 뛰어내렸다. 사방은 당혹으로 물들었다. 동전을 찾아내어 지키려던 소년 소녀측도, 가짜 에페바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인가? 아군인가? 그것을 판단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듯했다.
"윽!"
아이는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눈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유혼은 순식간에 워해머를 쳐부숴 파편을 사방에 흩날렸다. 그 파편이 가라앉기도 전, 이격째가 날아든다. 가슴이었다.
"커헉!"
갑옷이 박살나고 피가 튄다. 상황을 파악한 폴암이 아이의 등으로 날아들었으나, 간단히 피했다. 피하고, 자루를 붙잡아 빼앗고, 거꾸로 휘둘러 아랫턱을 둘로 쪼개놓았다. 콱! 쿵! 남자는 박살난 턱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동료를 모두 잃은 마지막 남자는, 벌벌 떨더니 무기도 버리고 달아났다. 아이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저, 저, 감사합니다...?"
소년이 엉거주춤 아이에게 고개를 숙이려 들었다. 그러자 소녀가 등짝을 후려쳤다.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듯했다.
"당신, 목적을 말해! 당신도 우리가 가진 동전을 빼앗으려고 접근한 건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어쨌든 아이는 지금 레테에게 임무를 인계받은 시험관이었다. 시험자이자 또 시험관인 셈이었다. 명백히 자격조차 없는 가짜 에페 바체들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이의 임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반사이익으로 자격이 없는 에페 바체가 시험을 통과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 인정할게. 우리가 얻은 동전을 넘겨줄 테니, 우리를 그냥 보내줄 수 있겠나?"
남자들과 나눈 일합을 보고 아이의 수준을 대강 파악한 듯싶었다. 빠른 대안이었다. 붉은 머리가 굽슬대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는 짐짓 엄하게 물었다.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은데."
예상대로 소녀와 소년은 막 만난 사이였다. 정확히 동시에 동전을 찾아냈고, 그럼에도 서로 싸워서 동전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임시로 팀을 맺고 동전을 하나 더 찾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계약 직후에 저 자들이 동전을 빼앗으러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땐 네가 저 녀석보단 강해 보이는데, 왜 그냥 힘으로 뺴앗지 않은 거지?"
"이건 그런 걸 시험하려고 만든 시험이 아니니까."
소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소년은 상대적으로 엉거주춤해 보였다. 그 말은 아이에 대한 은근한 비난도 섞여 있었다. 왜 시험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의 것에 손을 대냐는 비난이.
'어때, 시험관 나으리. 이 정도면 합격인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옆에서 빙글빙글 웃는 림에게 살짝 대꾸하며 아이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건넨 동전을 받아 쥐었다가, 다시 튕겨주었다. 깜짝 놀라 동전을 받는 소년. 아이는 휙 뒤돌아서서 말했다.
"그럼 나도 그 계약에 껴줄 수 있겠어?"
"응? 당신이?"
"간단해. 그냥 두 개를 찾을 때까지 두 명이 함께 다니기로 한 계약이, 세 명으로 바뀔 뿐이야."
그들은 잠시 쑥덕대고 아이를 바라보고,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와서는 어설프게 아이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하룻밤 인연이지만 잘 부탁해요. 저는, 아!"
소년은 어리숙했다. 에페 바체 시험 도중 자신의 신상명세를 밝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데도, 버릇대로 소개를 하려다 스스로 입을 막았다. 소녀가 한심하다는 듯 소년을 쏘아보았다. 소녀는 짧게 인사할 뿐이었다.
"나는 여기 토박이다. 너는 좀 멀리서 왔나보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왔어."
*
넓은 숲에서 자그마한 동전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막연하게 동전을 찾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했다는, 그녀의 말을 아이는 믿기 어려웠다. 그녀가 위기에서 보여준 의기가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아이는 거기에 근거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말이죠, 이게 하필 50개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에요."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아무런 단서 없이 숲에서 동전을 뒤져서 찾으라는 식의 문제를 낼 리가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이 소년, 검을 다루는 데에는 조금 어수룩해 보였던 그의 주특기는 검술이 아닌 듯했다. 암호 해독, 독도법, 그런 종류의 기술을 전공으로 가진 자였다. 그는 나뭇가지 하나로 아주 능숙하게 금지된 숲 전체의 지도를 그렸다. 어떻게 이걸 즉석에서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나센을 비롯해서, 큰 전쟁이 있었던 80여곳의 개략적인 지형은 다 머릿속에 있는 걸요."
일부러 외운 게 아니라, 문제를 풀다보니 자연스럽게 외워졌다고 했다. 이것 역시 명문 용병가의 일원이라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놀란 입을 일부러 다물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아까 교관님이 한 명 한 명 동전 모양을 잘 살펴보라고, 오랫동안 볼 시간까지 주었잖아요. 그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나뭇가지나 꽃이라면 모를까, 동전이 저절로 자라는 것도 아닐진대 그렇게 철저하게 확인을 시키다니.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기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요. 이건 24번 복호법으로 복호화하면 교목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런데 교목은 아시겠지만 전략 야영법 중 하나거든요?"
뭘 아시겠지만, 이라는 건지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이해한 척 심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흘깃 돌아보니 시사이드의 소녀도 대동소이한 듯했다.
"그 전략 야영법이 지시하는 간격대로 금지된 숲의 지도를 나누면, 이렇게, 딱 50개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동전도 50개. 그러면 이 야영 지점마다 동전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 되겠죠."
그리고 그 결과 동전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그 작은 단서만 가지고 여기까지 추리해낸단 말인가? 아이 역시 특등 수색자로 약간의 소양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기술은 가지지 못했다. 감탄하고 있는데 소년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암호는, 에페 바체라면 누구나 해독할 수 있을 거라는 게 문제죠. 이, 음, 빨강 씨도 확실히 금세 알아차려서 저와 동시에 찾아냈구요.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서로 싸워서 동전을 빼앗을 능력을 시험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소녀의 머리가 굽슬거리는 붉은색이었으므로 그렇게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홱 소녀를 돌아보았다. 도도한 척하는 그녀의 볼에 살짝 붉은 빛이 맺혔다 사라지는 것을 아이는 보았다.
"그냥 찍은 거지?"
"무, 무슨 소리야!"
그 말대로였다. 이 소녀가 동전을 동시에 찾은 건 순전한 우연이었고, 소년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천재적인지 몰라서 상황을 잘못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 상황을 파악한 아이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전략이 세워졌다.
동전을 찾는 방법이 이렇게나 어렵다. 그러니 날림으로 교육받은 가짜 에페바체들은 자력으로는 절대 동전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을 따라서, 동전이 있는 위치를 돌아다니면, 가짜들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움직이자."
아이는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에페 바체, 그 엉성한 제도가 엉성하기에 오히려 완성된 채로 이어져온 이유는 이런 소년 소녀를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엉성함을 악용하는 것을, 아이는 용서할 수 없었다. 소년의 추측대로라면 가장 가까운 동전이 있는 곳은 동쪽에 있었다. 동쪽에서는 희미하게 칼 부딪는 소리가 또 울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