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귀향 ( 7 )
아이는 통령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짧은 이름이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얀. 그런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처음 본 것은, 기나센에 발을 들이민 후가 아니었다. 어려서 동화책을 읽으면서였다.
그 동화는 위대한 실패자에 대한 동화였다. 오십여년 전, 제국 남부에서 있었던 전쟁에서, 진군에 실패하고 조난했으나 300여명에 달하는 단원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생환했던 단장의 이야기였다. 그 생존의 방식에는 품위가 있었다. 그에게는 절망적인 싸움에서 없는 것만 같았던 생로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고 책에는 적혀 있었다. 그 재주의 이름은 인내다. 마지막 페이지는 그런 말로 끝맺었다.
"무얼, 그저 겨울까지 살아남은 매미일 뿐이지."
그것을 떠올리고 작은 찬사를 보내자 통령은 그렇게 답했다. 겸양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싶었다. 어쨌든, 이 자는 그 겨울까지 살아남는 재주로 오늘날까지 버텨냈고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 사실은 아이도 알고 있었다.
눈 앞에 마주한 그 통령에게서는 인내가 느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뜻한 바를 빠르게 전달했다.
"최근 우리의 고향은 미증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네."
미증유의 위협. 통령은 그 위협을 아주 멀리서부터 지목해갔다.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포위해가듯 서서히, 그러나 명확하게 핵심으로 접근해갔다. 통령이 우선 지목한 것은, 제국의 형세였다.
백여 년 전부터, 외신의 힘이 강해졌다. 야만인들의 침입이 거세졌고, 그 침입에 대항할 권리를 가진 아지프의 역할이 커졌다. 그 말뜻은, 백년 전부터 전쟁이 빈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전쟁에는 권력을 두고 다투는 안의 전쟁도 있었고, 외적과의 전쟁도 있었다.
"그 모든 전쟁마다 소모되는 것이 있지. 창검, 성첩, 그리고,"
용병.
통령의 말은 갑자기 찌르듯 핵심으로 달려들었다. 전쟁이 빈발하게 됨에 따라, 기나센은 달갑지 않은 특수를 얻었다. 용병단은 차례로 갖가지 전장으로 불려갔고, 소모당했다. 그 소모는 격렬했고 죽음의 방식은 납득되기 힘든 것이 많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백년 전부터, 그 소모의 속도는, 보충의 속도를 웃돌고 있었다.
"세상은 분명히 더 많은 칼과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네. 하지만, 그게 왜 우리의 칼이고 우리의 죽음이어야 하는가. 그런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아지프는 희생을 당연시했다. 정상적인 고용이라면 모를까, 그 고용의 방식을 명백히 이탈한 횡포에 주기적으로 시달리게 된 기나센에서 불만이 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불만은 대산맥파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 하나의 용병단으로는 힘이 약하니까, 작센과 힘을 합쳐서,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고 힘을 모아 부당한 횡포에 저항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명분이었지."
통령은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아이는 침묵했다. 통령은 그 침묵을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소산맥파는 거절했다네. 아니, 소산맥파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그들이 먼저 큰 산맥이라는 단어를 선점해서, 자신들이 아닌 모든 이들을 작은 산줄기에 붙어 사는 무리라고 묶어버렸어. 제국과 싸우는 것이 두렵고 마술사가 무서워서, 전우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무리라고 말이야."
얀은 그런 말을 하며 또 아이를 쳐다보았다. 또 판단을 요구하는 듯한 눈이었다. 이번에는 말까지 건네온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약간은, 그럴지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아이는 놀라서 눈을 떴다. 그러나 통령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약한 자에게 삶은 늘 비겁함을 견디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나아가, 약한 삶이 강한 삶보다 가치없지도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야. 자네는 대륙을 건너온 모양이던데,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겠지. 그들의 삶이 여기서 본 삶보다 가치있어 보이던가?"
아이는 조용히 생각했다. 마탑주를 떠올렸고, 도박장을 떠올렸고, 부패한 율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산맥에서 술을 마시던 기나센의 수색자들을 생각했다. 고개를 저었다.
"비록 한때의 굴욕을 견디더라도 그 삶을 지켜나가는게 내 사명이라고 나는 여긴다네. 나와 내 친우들이 비겁자라고 비난받는 것. 그것 하나로 기나센에서 우리를 뺸 모든 사람들이 명예와 삶을 양립시킬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있는 삶 아니겠는가."
아이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이 사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이란 항상 그런 인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령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대산맥파와 소산맥파의 싸움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지. 그게 벌써 삼십 년은 되었을 테야. 하지만 그 싸움에 구체적인 실체는 없었지. 구체적인 실체가 생긴 것은..."
통령은 차를 홀짝이고 말을 이어갔다.
"조디악. 그들이 개입하고 난 이후였다네."
여기서부터가 본론인 듯했다. 통령은 레테에게 손짓했다. 레테는 머뭇거리더니, 몇 번이나 끈을 감아 봉인된 두루마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명단이 적혀 있었다. 아이가 원래 건네 받은 것보다도 훨씬 정교하게 위장한, 가짜 에페 바체의 명단이었다. 거기에는 크레든의 이름도 있었다.
"그들은 십여 년 전부터, 대산맥파에 속하는 용병단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연을 맺어가며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네. 그 움직임이 워낙 은밀했기 때문에 알아채고난 후에는 이미 상당수의 용병단이 그들에게 잠식된 이후였지."
전쟁으로 몰락한 용병단은 레이븐사이드 뿐이 아니었다. 아지프의 희생을 강요하는 용병술 때문에 궁지에 몰리거나, 재정난을 겪게 된 용병단이 많았고, 조디악은 거기에 손을 뻗쳤다.
"그리고 그들은 자금력과 권력을 동원해 더욱 크게 대산맥파의 목소리를 사방에 퍼뜨리고 있어. 의분을 가진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그들에게 포섭되었지. 나는 여기서 심각한 위험을 느낀다네."
작센과 통합하고 제국과 맞서 권리를 쟁취한다. 이상론이지만 통령에게 그 이상론은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제국과 전면전이라도 치르게 되었다간, 기나센의 대부분은 말 그대로 쓸려나갈 것이었다. 현실적인 감각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미래가 보였다. 그래서 최근 기나센은 늘 소산맥파가 집권하고, 대산맥파가 자신들도 믿지 않는 이상론을 외치며 소수파에 머무르는 것으로 균형을 이루어왔다. 그 균형 속에서, 소산맥파는 대산맥파의 위협을 팔아서 자그마한 권리를 몇 개 얻어오는 방식이었다.
그 균형이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조디악의 손에 의해서.
"그들이 노리는 것. 그건 대산맥파의 통령을 만드는 것이야."
건국. 조디악의 소망이 떠올랐다. 아이의 머릿속에 드미트리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들의 손에 넘어간 북서 자치령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위협은 통령의 말 속에서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머릿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대안 없는 명분. 그걸 이용하려는 거군요?"
그들의 방식은 자치령 때와 똑같았다. 횡포를 부리는 제국에 저항해야 한다는 명분, 그 명분은 아름다우나 힘이 없었다. 그 힘을 빌려주겠노라고 접근하여, 자기 멋대로 주물러서 지배하는 것. 그것이 조디악의 방식이었다. 뜨겁게 부풀어오른 머릿속이 한없이 가려워졌다. 통령은 한 마디로 핵심을 요약한 아이의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 그 말대로일세."
통령은 깍지를 끼고, 또박또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진지한 어조였다. 저 멀리 제국의 남부에서부터 시작한 통령의 말은 이제 아이와 통령이 앉아 있는 이 작은 방까지 좁혀들어왔다.
"우리는 이 가짜 에페 바체 소동을, 전부 연막으로 보고 있다네. 그들의 목표는 단 한 명의 가짜 에페 바체를 통과시키는 거야."
허술한 가짜 에페 바체들 뿐만 아니라, 공들인 것처럼 보였던 크레든 같은 자들조차 전부 연막이라고. 그런 설명이었다. 아이는 침을 삼키고 그의 말을 들었다.
"외국인의 귀화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기나센이지만, 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한 방지 조항 정도는 있지. 그건 바로 통령 선거에 나설 자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게야."
오랜 전통을 가진 24가문. 그 가문의 수장에 한해서만 피선거권을 가진다는 제약이었다. 이런 제약조차 없었다면 특정 국가의 이민자 집단이나, 이익 집단에게 나라를 먹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24가문 중 한 가문이 멸문당했다네. 아지프의 손에 의해서."
옆에서 림이 흥미롭다는 듯 신음을 흘리는 것이 들렸다.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우리 특무국이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한 사람은 생존할 능력이 있고, 명분이 있으며, 가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네."
통령은 레테가 건네준 자료를 펄럭펄럭 넘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용병단이 현지에 주둔해 있던 당시 에페 바체로 등록되었고, 한 번도 기나센에 온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선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모르며, 세 번째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하기 직전에 용병단이 사수 명령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어기고 살아 돌아와도 문제가 없지."
아까부터 가렵던 머릿속이 터질 듯 뜨거웠다. 웅웅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기다렸다.
"조디악의 목적. 그건 그녀의 가짜 에페 바체를 기나센에 밀어넣어서, 통령 후보로 만드는 게야."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강하고, 아름답고, 또 조금 멍청한 구석이 있다고 합니다. 옆에서 레테가 그런 말을 흘렸다. 그런가, 그래서 그 가짜를 걸러내기 위해 시험관이 파견되었던 건가. 아이는 중얼거렸다. 아까 시험에서 눈늑대와 시험관을 물리친 가짜가, 지금 통령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짜일 것이었다. 그리고 또 이해가 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 우르드. 얼마 전 멸문당한 용병단인 레이븐사이드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적법한 후계자일세."
왜 그 가짜를 칭하는 별명이 눈표범인지를.
기나센의 눈표범. 그건 북서 자치령에서의 자신의 별명이었다. 아이는 레테가 건네준 특별 명단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븐사이드는 소렌에서도 특히 명망이 높은 용병단이었어. 유일하게 남은 단장의 혈육은 병약해서 용병일을 할 수 없어서, 멸문이 거의 확정된 상태지. 사람들은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또 복수하고 있다네. 이 때 그 생존자가 돌아와서 대산맥파의 우상이 된다면..."
통령은 그 한숨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는 계속해서, 특별 명단의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우르드, 16세.
자신이 귀향하기 전, 가짜가 먼저 귀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