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산맥 ( 1 )
새벽의 산맥은 눈에 덮여 있었다. 백색 뿐이었다.
그 산맥이 휘감듯 품은 금지된 숲, 그 앞의 하얀 공터에는 시험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시험자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피곤함이 뒤얽혀 있었다. 흑복을 입은 시험관이 그들을 통제했다. 그는 바위를 밟고 올라서서 뒤돌았다. 산맥 반대편에서 솟아오르며 세상을 밝히는 아침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시험의 끝을 알리는 일출이었다.
"자, 그럼 통과자는 48명으로 끝인가?"
시험관은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시험을 마감하고, 통과자들을 모아 돌아갈 생각이었다. 앞에서부터 통과자들이 줄을 지어 동전을 제출하고 공회당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험관은 동전을 깨물거나, 특수한 약품을 발라가며 동전을 확인했다. 그렇게 절반쯤의 시험자가 통과했을 때,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뭔가?"
"저, 저, 잠시만요. 아까 보여드렸었는데, 어디 뒀는지를 모르겠는데..."
한 소년이 허둥거리며 동전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까 아이와 함께한 소년이었다. 그 뒤에는 시사이드의 소녀가 팔짱에 물수리를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관이 뭐라 말하기도 전, 소녀가 채근했다.
"너 바보 아냐? 이런 놈을 통과시켜도 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소년은 허둥거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소녀가 사나운 눈으로 그 옆구리를 걷어찼다. 소녀가 너무 가혹하게 대하자 시험관은 오히려 측은해져서 소년을 달랬다.
"됐어, 됐어. 안 잡아먹으니까 천천히 하라고. 당황하니까 더 못 찾는 거 아닌가. 자네 둘의 증표는 아까 확인했으니 늦더라도 제출만 확실히 하면 된다네."
"감사합니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말로 느리게, 꼼꼼히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소녀가 그 옆에서 이따금씩 흉험하게 채근했다.
사실 동전은 소녀의 품에 있었다. 그들은 지금 시간을 끄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 아이가 어쩐 일인지 이 장소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통령과의 환담을 마치고 뛰어온 아이의 눈에도 그 광경이 보였다. 통령이 따로 말을 해 주어서 의미는 없는 호의였지만, 그래도 아이는 작게나마 감동했다.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거 아니에요?"
슬쩍 접근해 툭, 팔꿈치를 쳤다. 소년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돌렸다가, 아이를 보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내막을 알아챈 시험관도 피식 웃었고 세 사람을 통과시켜주었다.
"어디 갔던 거야?"
소녀가 아이의 어깨를 툭 두들기며 책망하듯 물었다. 아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밭을 떠나 공회당으로 돌아가는 길, 세 사람의 발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한참이나 걸어가던 중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산맥을 휩쓸고 지나가서, 먼발치에서 숲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시험 기간에는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음 시험, 마지막이 될 시험은 부상자들이 상처를 정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3일 후에 치뤄질 예정이었다. 그 동안 시험자들은 공회당에 갇혀서 생활해야만 했다.
공회당 지하에는 비상시를 위해서 숙소와 생활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곳이 시험자들의 집이 되었다. 다음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시험자들의 대응은 천차만별이었다. 시험을 대비해서 동료를 만들려는 자들도 있었고, 정보가 누출되는 것을 피해서 두문불출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긴장감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제기랄, 또 졌네."
아이 일행이었다. 첫 날 저녁부터 세 사람은 함께 다녔다. 소년이 그런 상황을 주도했다. 답례를 하고 싶다며 얼굴을 들이밀어서 함께 밥을 먹었고, 휴게실로 쓰이는 작은 회의당에서 저녁마다 머물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여기서 좌상귀를 전부 버리셨어야죠. 계속 집착하니까 패착이 된 거에요."
"난 포기 안 해."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돌을 치웠고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 옆에서, 주워온 삭정이를 깎아 자그마한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조각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 지난 이틀 동안, 아이는 통령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통령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견해가 옳음을 보증하진 못했다. 그의 견해는, 그리고 소산맥파라는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배를 이끌고 항해하는 선장이라기보다는, 배를 닦고 아끼는 관리인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무채색의 흰 나라, 기나센을 그저 희고 순결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 듯했다.
반면 대산맥파는 그 산맥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는 듯했다. 흰 눈 위로 발자국을, 피를, 검은 빛을 새겨서라도 역사의 무대에 입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흐름은 자신에게 소산맥파의 편을 들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지만, 아이는 이렇게 얼떨결에 그런 것을 선택하기 싫었다.
"저기."
물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는 다시 바둑돌을 달그락거리는 소녀에게 말을 물었다. 규정 때문에 이렇게 오래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통성명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바둑판 위에 돌을 딱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왜?"
아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작센과의 통합에 대해서, 그리고 제국과의 투쟁에 대해서. 다들 입에 담기 금기시하는 주제였다. 소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는 그저 바둑판 위에 돌을 또 내려놓을 뿐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답은, 소년 쪽에서 먼저 돌아왔다.
"그런 걸 물어보시는 까닭은 뭔가요?"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소년에게 충분한 대답을 들려준 모양이었다. 소년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꺼냈다.
"저는 그냥,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모습대로 이 산맥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신의 정체를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괴물의 습격으로 엉망이 된 마을에서 그는 살아남았고 상인의 조수로 거두어졌다. 상인을 따라 사방을 헤매던 도중, 우연히 기나센에 들렀고, 용병단의 눈에 띄어 에페 바체가 되었다고 했다.
"신기했어요. 이런 땅은 어디에도 없었거든요."
상인의 조수로, 상인이 되기 위해 교육받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세상은 거짓말과 이전투구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 땅은 달랐다. 각양각색의 고향과 내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으며, 내부의 권력 투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했다. 나라라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같은 인상이었다. 소년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사람의 목적은 있어도 나라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기나센은 용병단으로 이루어진 나라였고, 용병들은 칼과 같았다. 휘두르는 자가 원한을 가질지언정, 용병들 그 자신은 어떤 원한도 오욕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전통과 명예를 지키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도, 자국민을 수탈하지도 않고 조용히 없는 듯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결국 소년의 견해는 소산맥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어떤 파벌이라고, 간단히 결론짓기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아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옆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엿같은 돼지놈들이 돈 가지고 무슨 짓거리를 시키던, 그냥 해오던 대로 닥치고 따르라고?"
딱! 바둑돌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이는 직감적으로, 왜 이런 주제를 꺼내기 꺼려했는지를 깨달았다. 싸움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사냥꾼이 사냥터를 찾듯이 그냥 검을 휘둘러서 밥벌이를 할 장소를 찾는 것, 좋아. 그게 좋은 거라고 쳐. 그래도 좋은 사냥터와 나쁜 사냥터를 가려 받을 권리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냐?"
"저, 그런 말은..."
"최소한 나는 사냥꾼이 되고 싶지, 사냥개가 되고 싶지는 않은걸. 그리고 개가 되지 않으려면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고 나는 배웠어."
딱! 소녀의 바둑돌이 소년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공세는 지나쳤다. 무의미한 듯 놓여 있던 백돌을 무시하고 진격하다가, 뒷덜미를 채여서 양단수를 맞고 말았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양단수로부터 시작해서, 기껏 쌓아온 대마가 전부 죽을 위기였다. 하지만 무시하고 계속 공세를 이어나갔다.
"무모하게 싸우면, 이렇게 전멸을 면치 못할 텐데요."
"전멸. 기껏해야 이 세상이 나한테 할 수 있는 게 전멸뿐이라면, 난 희생당해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싸우다 죽을래."
소녀의 흑돌은 결국 바둑판의 끝에서 끝까지 진격을 멈추지 못했고, 전멸했다. 또 불계패였다. 소녀는 앉은 채로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짧은 옷 탓에 배꼽이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선언하듯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끝났어. 그게 내 생각이다."
소녀의 말은 대산맥파에 가까워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단순히 어떤 파벌에 속한다고 간단히 생각하기에는, 더 깊은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소년의 말도 소녀의 말도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한 쪽을 골라야만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또 다른 삭정이를 집어들어서,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조각하는 것은 통령의 얼굴이었다.
그 날 밤, 아이는 통령에게 부탁을 들었다.
ㅡ결국 이번 시험으로 대부분의 가짜 에페 바체들은 탈락하고 말았지. 하지만 녀석들의 진짜 목표는 단 한 명, 이 아이 우르드라는 자를 통과시키는 것일세.
그 자의 신분 위장은 완벽하다. 만일 소산맥파에 속하는 통령과 그 파벌이 섣불리 그 위장을 걷어내려고 한다면, 조디악은 그것을 정치적 공세로 몰아 무마할 것이다. 그런 설명이 뒤따랐다. 아이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진지한 목소리로 통령은 결론을 내렸다. 이 음모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에페 바체 시험에서 떨어뜨려야 한다고.
-마지막 시험은, 그래서 대결로 판가름내기로 했다네.
두 명씩 짝을 지어 일대일 대결을 펼치고, 승리한 자가 통과하고 패배한 자가 탈락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그 가짜 아이가 탈락하지 않는다면, 세 번째에서라도 확실하게 떨어뜨리려고 정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가짜가, 특무국 요원조차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혹시 도와줄 수 있겠나?
그 가짜를 쓰러뜨려달라. 그것이 통령의 부탁이었다. 아이는 망설였다. 우선 그 요구를 들어주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자신이 진짜 아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이븐사이드의 유일한 생존자. 마지막 에페 바체라는 지위는 엄청나게 특별한 것이 되어 있었다. 처세술을 쌓은 아이는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통령과 레테는, 자신이 설마 그 아이 본인일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낌새였다. 그것을 알려준다면, 자신은 통제할 수 없는 파벌에 휩쓸려 도구로 이용될 것 같다는 짐작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계속 이 곳에서 고민했던 것이다. 통령을 전적으로 믿어도 좋을지, 소산맥파의 파벌에 휩쓸려도 좋을지. 늘 그렇듯이 해답은 없었다. 세상은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있었다. 대산맥파가 되었건, 소산맥파가 되었건. 작센과의 통합이 되었건 영원한 침묵이 되었건. 그 운명의 향배는 기나센 사람들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디악을 이 배후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분명한 사실을 되새기자 머릿속이 맑게 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치하게 싸우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내버려두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을 마시러 가기 위해서였다.
"어?"
그런데 문 밖을 나설 때였다. 누군가가 방 안을 엿보다가 후다닥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재빨리 움직여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모퉁이에서 놓쳤다. 내가 쫓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라니? 모퉁이 바닥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정성스레 여러 번 접은 쪽지였는데, 의외로 내용은 간단했다.
'미안해.'
"뭐야, 이게?"
아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글자 마디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쓴 것 같은 필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