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0화 (120/279)

22. 산맥 ( 2 )

시험 전날의 마지막 밤, 불청객이 찾아왔다.

유리창의 십자 창틀 너머에서 달빛 스민 눈밭이 고요하게 잠든 밤에도, 아이는 잠들지 못했다. 밤새 뒤척였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 낯선 손님은 불도 키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으나 숨기는 기색도 없었다.

대놓고 발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 그 손님을 침대에 깔아뭉갰다. 작은 체구였다. 침대에 깔린 그 자의 몸은 가냘프고 왜소해서 켁켁대며 아이의 목을 쳤다. 풀어달라는 의미였다.

"목, 목 좀 풀어주십시오!"

기다란 분홍빛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서 흐트러졌다. 얼굴은 낯익지만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건 드미트리였다. 어째서인지 또 여자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금발 대신 분홍색 가발을 쓰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붙잡아 휙 집어던지자 하늘빛 단발이 드러났다. 아이는 사납게 물었다.

"드미트리, 무슨 낯짝으로 여기 기어들어왔습니까?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죠?"

"내 나라에 내가 있는게 뭐 이상하겠습니까."

"내 나라?"

"공식적으로, 저는 헤이즈의 법률 고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런 폭력 행위는 가문간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요?"

"또 기생충같은 짓을."

헤이즈. 아이를 탈락시키려 들었던 그 재수없던 놈이 속한, 24 용병단의 말석이었다. 조디악의 마수는 이미 그들 깊숙히 뻗쳐 있는 모양이었다. 드미트리는 뻔뻔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그 협박을 무시하고 드미트리를 집어던졌다. 드미트리는 침대 벽에 등을 부딪히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왜 좋아합니까?"

아이는 께름칙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충격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드미트리는 오히려 웃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만났을 때에도, 흠씬 두들겨맞으면서도 좋아했다. 이 사람은 혹시 여장벽에 피학증이 있는 변태가 아닐까, 아이는 그렇게 되새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팔 하나는 잘릴 각오를 하고 왔으니 좋아하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바로 심장에 칼이 꽂힐 것도 각오했습니다."

드미트리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침묵했다. 그 말대로였다. 아이는 더 이상 바보는 아니었고, 드미트리 정도의 인물을 아무런 준비 없이 죽였을 때 일어날 후폭풍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안전을 확인한 것이 기쁜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럼 그렇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이유가 뭔가요."

"진심. 진심을 보이기 위해서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에게 은근히 달라붙었다. 아이는 그 가슴팍을 세게 밀쳐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뒹굴어서 침대 벽에 부딪히면서도, 드미트리는 기분이 상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이제 저희가 왜 당신을 동료로 만들고 싶어했는지, 그 이유를 좀 아시겠지요? 당신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저희와 손을 잡아 주십시오."

"닥치고 꺼지세요."

"제국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드미트리는 벽을 보고 말하듯 계속 외쳐댔다.

"당신 개인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또 강해질 수 있다 한들, 그건 필부의 강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슬슬 깨달을 때도 되었을 텐데요. 당신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눈 앞에 보이는 악적을 수천 수만을 베어죽인다 하더라도, 세상은 달라지는 것 하나 없이 너울댈 겁니다. 거악은 바닷물처럼 베어지지 않습니다. 거악은 역사로만 베어낼 수 있고, 역사는 집단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지금 우리라는 역사는 당신을 요구합니다."

"닥쳐요!"

아이는 씩씩대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악업,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내세우는 거창한 말들이 아이를 격동시켰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이제 슬슬 무엇이든 선택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요. 우리는 물론 돈에 미친 개새끼들이고 망할 놈들이고 죽을 놈들이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가만히 제국에 칼받이를 대주는 이 나라는 개새끼가 아니랍니까?"

아이는 참지 못하고 드미트리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여전히 실눈으로 빙긋빙긋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당신은 개새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로 머무르고 싶어하는 듯하지만, 그건 어린애한테만 허용되는 행동입니다. 이제 어떤 개새끼로 살 것인지, 그것 정도는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에게 가장 찬란한 개집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도저히 회유를 하기 위한 태도라고 생각하긴 어려웠지만, 드미트리는 어쨌든 회유를 위해 접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드미트리는 즉답했다.

"해줄 수 있는 걸 먼저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당신을 통령으로 만들 것이고, 성도 8궁으로 만들 것이며, 제국을 포위하듯 자리한 나라들에서 군사를 일으켜 당신의 휘하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이 제국 안쪽으로 진격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어때요?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

"시험을 마치고, 우리의 일원이 되겠다는 맹세를 해 주십시오."

"싫다면?"

"싫다면, 기권이라도 해 주십시오."

아이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눈을 뜨고 말했다. 그 눈에는 약간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 듯했다.

"두 번째 제안은 순전히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불행해지기 싫다면, 기권이라도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군요."

아이는 드미트리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드미트리는 세 번 바닥을 굴렀다. 아이는 그런 드미트리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역사라는 건, 당신들이 멋대로 쓰는 게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써야 마땅한 겁니다. 세계나 시간을 끌어대서 다른 사람을 유혹하지 마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고 뒤돌아선 그의 눈은, 또 언제나처럼 빙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슬픈 예감을 주는 웃음이었다. 드미트리는 터덜터덜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

드미트리의 뜬금없는 제안은 아이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시험을 위해 공회당에 집합해 기다릴 때까지도 아이는 그 제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안 자체보다는, 제안이 암시하는 내용이 아이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제안은 많은 뜻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국 변방을 떠돌아다니며 세력을 쌓고, 또 숨겨온 일족. 조디악의 안배와 계획은 생각보다도 더 깊다는 것이었다. 제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다. 미친 소리였지만 상인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것은 미친 소리가 아닐 터였다. 최소한 도박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입에 담는 종족이 상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이는 사방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사방에는 에페 바체 시험자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미 조디악의 손에 넘어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막 세 번째 시험이 끝났다. 시험관은 소리를 크게 질러 다음 시험자를 입장시켰다.

"다음!"

아이의 굳은 표정을 오해했는지, 누군가가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일행이었던 시사이드의 소녀, 며칠을 다녔지만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였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라구. 이런 시험 정도는 네 실력이면 치즈 먹듯 쉽게 통과할 수 있으니까."

기나센의 관용구였다. 나는 그 치즈 잘 못 먹는데. 아이의 속에서 그런 생각이 솟아서 살짝 헛웃음이 났다.

"나나 저 자식 통과하는 거, 그거나 빌어줘."

덜덜덜 떨고 있는 소년을 가리키며 말하는 소녀. 아이는 주먹을 내밀어 그녀와 주먹인사를 했다. 다음 차례는 그녀였다. 그녀는 훌쩍 뛰어올라 무대에 입장했다. 상대는, 험상궂은 수염을 기르고 도끼를 쓰는 사내였다.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코 밑의 수염이 푸르르 떨렸다.

아이는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통령이 말한 대로, 시험은 결투에서 승리한 자가 통과하고 패배한 자가 탈락하는 방식이었다. 세 합 만에 승부는 났다. 물수리는 번개처럼 남자의 가슴을 후려쳐 박살냈고, 그 자랑하던 수염을 베어내서 허공에 흩날렸다. 남자는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환호성은 없었다. 그렇게 시험자가 통과하고 나면, 시험관은 무대에 올라서서 훈장을 달아주었고, 숨겨왔던 이름을 쩌렁쩌렁 공표했다.

"시사이드의 에페 바체, 샤론 쿠르디! 그녀가 이 시간부로 당당한 기나센의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샤론.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시험관은 샤론의 내력을 읊고, 그녀에게 어떤 선서를 하도록 시켰다. 샤론은 네 손가락만을 치켜들고 엄지를 굽힌 뒤 낭랑한 목소리로 선서를 마쳤다.

"다음!"

다음은 소년의 차례였다. 소년의 떨림은 크게 잦아들어 있었다. 샤론이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힘을 준 듯했다. 상대는 방패와 검을 쓰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성이었다. 소년의 싸움은 소녀의 것보다 조금 더 치열했고, 힘겨웠다. 방패에 깔려 팔이 부서졌고, 무릎을 짓밟혀서 무릎이 살짝 으깨진 것이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고, 회심의 일격으로 복부를 찔러 승리했다. 그는 버텨내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뒤로 벌렁 쓰러진 소년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시험관은 소년에게 완장을 달아주며, 또다시 크게 외쳤다.

"쿠일란의 에페 바체, 에길론! 그가 이 시간부로 당당한 기나센의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길론. 그게 소년의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색색대느라 선서를 마치지 못했고 들것에 실려갔다. 하지만 에길론은 입에 미소를 배어물고 있었다.

"다음!"

이제 아이의 차례였다. 아이의 차례는 거의 끝자락이어서, 무대 밑의 인원은 절반 가까이가 줄어 있었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대진표를 짜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 두었네. 자네의 적은, 그 가짜 아이 우르드로 정해져 있다네.

통령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이 무대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틀림없는 그 가짜 아이였을 것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서서, 장검을 뽑아드니 마음이 편안하고 머리가 명쾌해졌다. 그 가짜를 무찌르는 것. 우선 그것이 자신의 목표였고 사명일 것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입장!"

그리고, 아이의 얼굴이 다시 헝크러졌다. 자신의 맞은편에, 자신의 가짜가 올라섰다. 그 가짜는 숲에서 늑대를 죽이고, 다른 시험자를 구하고, 또 시험관을 무찔렀으면서도 죽이지 않은 자일 것이었다. 아이는 그 모든 미묘한 어긋남의 원인을 드디어 꺠달았다.

"너, 너는..."

자신의 가짜. 그 가짜는 북서 자치령에서 머물던 아이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었다.

검을 잘 쓰고, 아주 강하며.

한때는 기나센의 암고양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순진하고 아름답고.

은발이며, 여자이고.

또, 멍청하게 보일 정도로 순진하다.

"네가 왜 여기에?"

아이는 머리를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울상을 지을 것만 같은 얼굴을 다잡고 있는 것은.

에바 후이눔. 기나센으로 향하는 길을 동행했던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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