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산맥 ( 5 )
시험이 유예되었다.
이미 통과한 사람들, 에길론과 샤론을 포함한 7명의 자격은 유지되었지만, 남은 모든 인원들은 은방울꽃의 권위에 따라 시험에 묶인 몸이 되고 말았다.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올해에는 정말로 특이한 일이 많다고, 시험관과 노인들 몇이 중얼거렸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이였다. 공회당을 빠져나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에워쌌다. 의혹에 찬 눈길도 있었고 선망에 찬 눈길도 있었다. 말을 붙이려는 사람도 있었고 잡아채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아이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지금은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신분이 드러났으니 이제 신분을 숨길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아이는 우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쌓아온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해. 그런 의식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어떻게든 재판에서 승리해야 한다, 승리해야 하고, 기나센을 조디악의 마수에서 구해야 하며, 또 륜을 구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관에 들어선 순간, 이미 아이는 자신이 꽤나 유명인사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덮쳐! 이 자식이다! 이 자식만 없애면 올해 에페 바체는 재시험이다!"
그런 째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린이었다. 1차 시험에서 레테에게 떨어져서 흐느끼던 그는, 지금 핏발이 선 눈으로 아이를 삿대질하고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벌써 그런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골린 뿐만 아니라, 1,2차의 에페 바체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는 무시하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주인은 벌벌 떨고 있었다.
"맡겨두었던 물건을 돌려주세요."
반쯤 넋이 나가서, 아이가 말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화난 골린은 자신이 먼저 칼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공격은 느리고 엉성했다. 아이는 뒤돌아선 채로 그 칼날을 움켜쥐었고, 골린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코뼈가 뭉개지고 피가 튀었다. 얼굴이 박살난 골린은 칼을 놓치고 뒤로 쓰러졌다.
그게 싸움의 시작이었다. 열 명 남짓 되어보였던 탈락자들은 검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이들은 그만큼 절박했을 것이다. 아이는 달려드는 소년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바닥에 메다꽂았다. 나무바닥이 부서져 나뭇조각이 튀었다. 남자를 덮쳐 명치에 세 대를 꽂아넣었고, 두 명의 머리를 붙잡아 서로 부딪히게 만들었다. 빡 소리가 나면서 두 놈의 이마가 깨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일방적인 싸움이 계속되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열 명은 모두 바닥에 누웠다. 주인은 그제서야 아이가 맡긴 짐을 꺼내 돌려주었다.
휘익, 아탕칼리의 계인이 새겨진 망토를 휘감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졌다. 왜 저렇게 강한지, 이유를 알았다는 듯한 탄식이었다.
"수리비로 쓰세요."
아이는 건네받은 주머니에서 루덴을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고, 성큼성큼 여관에서 나섰다. 문 밖을 나가기 직전, 누군가가 그 발목을 붙잡았다.
"못... 나가...!"
이가 하나 깨진 채 신음하는 소년이었다. 아까 달려든 남자들 중에서, 제일 솜씨가 괜찮은 녀석이었다. 예년의 시험이었다면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눈에선 눈물이 샘솟고 있었다.
"못 가, 죽고 나서 나가!"
아이는 잠시 침묵했고, 한숨을 내쉬면서 발을 뺐다. 연거푸 소년이 달려들었고 위협했으나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목 뒤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식탁 위에 엎어놓았다. 기분은 착잡했다.
"괜찮나? 이미 한바탕 소란을 겪은 모양인데."
문 밖을 나서자마자, 착잡함을 달래줄 사람이 도착했다. 샤론과 에길론이었다. 에길론은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눈 한쪽은 뜨지도 못하면서도 여기까지 달려와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이는 말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여관에서 빠져나온 또 한 명의 소년이 자신의 등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메다꽂힌 소년은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면서도, 계속 아이에게 달라붙었다.
"이미 달라붙었구나..."
에길론은 신음하듯 말했다. 그 난장판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기나센 전역에는 그 사건의 전말이 소상히도 퍼져 있다고 했다. 거기에는 교묘한 편집이 이루어져서, 아이가 가짜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또 아이를 실격시키면 정상적인 재시험이 일어날 것이라는 추론이 붙어 있었다고 했다.
"아마, 그 놈들의 짓일 거에요. 정보를 공개하는 것과 동시에 여론전의 고지를 점하려는 술책..."
"그럼 너희는 나를 믿는 거야?"
아이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조디악이 퍼뜨린 풍문 속에서, 아이는 통령이 불러들인 첩자 비슷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통령이 대산맥파를 억누를 속셈으로 라달라리아와 아탕칼리를 끌어들였고, 제국의 개 짓거리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이지만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흔히 얻기 힘든 귀물인 은방울꽃의 존재는 그 유언비어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아이가 그렇게 물어보자, 에길론은 웃으며 말했다. 붕대로 감싼 눈가가 말려올라가서 아팠는지 살짝 신음을 흘렸다.
"저는 말보다는 눈을 믿으니까요. 제가 볼 때는, 아이 씨는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샤론도 동의하는 듯했다. 아마 에길론의 판단 근거가 그것 뿐은 아닐 것이었다. 가짜 크레든을 죽인 일이 에길론에게도 흘러들어갔을 것이고, 가짜라면 그런 일을 할 리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말이 고마웠다. 말없이 샤론을 바라보자 그녀도 말을 꺼냈다.
"한 번 전우는 죽을 때까지 전우다. 이미 너한테 도움을 받았어. 돕게 해 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주먹을 내밀었다. 물수리의 철제 자루를 견뎌낸 손마디는 여자의 손 답지 않게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했다. 아이는 가만히 그 주먹에 손을 부딪혔다. 뒤늦게 에길론도 엉거주춤 손을 부딪혔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아이의 배후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거대한 배후와는 관계 없이, 순수하게 아이를 돕기 위해서 다가온 모양이었다.
*
또 누군가가 습격해오기 전에, 세 사람은 재빨리 움직였다. 에길론이 길을 인도했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에길론이 속한 용병단인 쿠일란의 산장이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동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 거에요."
에길론이 그런 말을 꺼냈다. 샤론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쿠일란은 소렌이 아니라 기나센 외곽과 제국 변두리를 오가는 용병단이었고, 소렌에는 변변찮은 지부도 없었다. 산장은 며칠 머무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었는데 그래서 관리가 허술했다. 충분히 숨어 지낼 만한 곳이었다. 에길론은 곰 모피 의자에 앉아서, 계란으로 부어오른 눈두덩을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은방울꽃, 그 물건으로 즉결 재판을 피한 건 분명히 소득이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닙니다."
은방울꽃을 사용했을 때, 라달라리아의 이름에 걸고 일어나는 재판. 그 재판은 공명정대함이 담보되어 있었다. 아이가 청한 재판이지만 아이가 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높았다. 오직 재판을 얼마나 더 잘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정해질 것이었고, 그런 권모술수의 영역은 아무리 보아도 조디악의 특기였다.
"이럴 때는 그냥 소재를 안 주는 것이 좋아요. 어떤 행동이든, 악의에 찬 해석 아래에선 하지도 않은 악행의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우선 이 곳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세요. 제가, 조력자를 구해 볼게요."
에길론은 그렇게 말했다. 그 눈은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아이는 살짝 감동했다. 그 손을 붙잡고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정말로."
그 말을 듣자 에길론은 쑥스러운 듯 손을 빼고 손사래쳤다. 옆에서 샤론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럼 우리 똑똑이 꼬마가 볼 때 나는 뭘 하면 될 것 같아?"
"우선 본가에 돌아가 보실래요?"
샤론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의외의 요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길론의 말에는 계획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재판에선 아무래도 정무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샤론 씨는 시사이드의 일원이라고 하셨죠? 명문으로 알고 있는데."
"명문은 개뿔. 그냥 남들 산 파먹을때 바닷물 파먹어서 근근이 먹고사는 놈들인걸."
샤론의 말에 에길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들이 지금은 누구보다 중요합니다. 시사이드는 별다른 정치적 이유 없이 대산맥파를 지지하는 곳으로 아는데, 맞나요?"
"별다른 이유? 뭐, 돈이나 땅을 받아야만 이유인가?"
"그렇죠. 그러니 꽤나 쉽게 그 파벌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알 수 있을 거에요. 그 정보를 좀 전달해주세요."
"그러니까, 스파이를 해 달라고?"
샤론이 마뜩찮은 듯 그런 말을 꺼내자, 에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둘러 말하는 것이 더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샤론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떠날게."
"당장요?"
"스파이 짓 해먹으려면 너희랑 붙어있던 티 안 낼 수록 좋을 거 아냐."
그리고 그녀는 방 구석에 세워놓은 물수리를 집어들고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다음 주에 돌아오겠다, 그것이 그녀의 선언이었다. 곧이어 에길론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아이에게 당부를 남기고서였다.
"모쪼록, 불편하시더라도 여기에 계시는 게 좋을 거에요."
전략이 정해지기 전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얘기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길론도 곧 산장에서 떠났고, 통나무에 가죽으로 벽을 바른 산장에 아이는 홀로 남았다. 죽도록 피곤했다. 아이는 우선 눈을 붙이기로 했다. 천장에 매달린 호롱불을 끄자, 기름 등잔에 벌레 시체가 가득 고여있는 것이 보였다.
"림."
아이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부쩍 말이 없어진 그의 신은 뒤에서 속삭였다.
'왜 그러느냐?'
외로워. 그런 말을 꺼내려는 아이는 말을 다시 가슴으로 삼켰다. 이제 자신은 열네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그런 어리광은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대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쇠를 긁는 듯한 너털웃음을 들으며 아이는 눈을 감았다. 피곤에 젖은 몸은 금세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
그러나 아이는 혼자 있을 수 없었다. 자정, 바깥에는 눈비가 내렸다. 십자로 낸 창문으로 몇 알이 눈과 비가 흘러들어와 뺨을 적셔서 아이는 밤잠을 설쳤다. 뒤숭숭한 꿈자리였다. 그리고, 아이는 뒤숭숭함의 원인이 그 비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너!"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득달같이 유혼을 꺼냈고, 둥글게 참격을 갈겼다. 어둠 속에서 늑대의 이빨처럼 번뜩이며 유혼은 덮쳐들었다. 누군가가 밤을 틈아 산장에 숨어들어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건 에바였다.
"윽!"
에바는 뒤로 굴러서 간신히 유혼을 피했다. 블로어 대신, 늘 쓰던 기형단검을 꺼내서 유혼을 잡아세웠다. 칼을 맞대고 대치하면서, 에바는 천천히 말했다.
"미안, 미안해."
사과할 일을 왜 한단 말이야. 아이는 다시 유혼을 크게 휘두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멈추었다. 달빛을 받은 검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슬픔을 품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에바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칼을 집어넣었다. 에바는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언니 몰래, 몰래 온 거야. 싸우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 눈썹은 비맞은 개처럼 처량했다. 가슴 속에서 살짝 치밀어오르는 측은함을 억누르려 애쓰면서, 아이는 소리쳤다.
"전할 말이 있으면 해!"
처음 들어보는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눈썹을 떨면서, 에바는 선 채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륜에 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