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6화 (126/279)

22. 산맥 ( 8 )

대산맥파의 성녀. 조디악은 륜도 그렇게 이용하려고 하고 있었고, 삶에 아무런 의지가 없었던 륜은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였다. 소산맥파의 수장으로서, 또 통령으로서, 자신은 그녀에게 접촉할 수 없었노라고 통령은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와서, 이제 자네가 도착하지 않았나. 아이 군, 자네만 도와준다면 레이븐사이드를 앞세워서 통령을 먹어치우려는 저들의 음모는 분쇄할 수 있을 테지. 레이븐사이드는 재건될 수 있을 걸세. 륜의 유지도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 테야. 하늘의 도우심 아닌가."

통령의 말은 갑자기 핵심을 찔러들었다.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이 뒤따랐다. 자신이 이제 재판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미 특무국과 고문들이 모여서 재판을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 말들이었다. 그렇게 재판에서 승리하고 나면, 기나센의 균형과 평화를 위해 협조해라. 특무국에 이미 자네를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레이븐사이드의 재건도 도와주겠다... 많은 말이 뒤따랐다. 혹할 만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 말이 닿지 않았다. 길게 들었던 말, 륜에 대한 말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령의 말을 곱씹던 아이는 불현듯 깨달았다.

"륜의 유지, 라구요?"

이 사람은 레이븐사이드와 륜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정치적 말장난이었다. 그리고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통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미 륜 우르드, 내가 알던 그녀는 조디악의 손에 넘어간 이상, 죽은 거나 다름 없다네. 아닌가?"

륜 우르드, 그녀는 지금 조디악이 확보한 '레이븐사이드의 대표자'로서의 명분이었다. 그리고 통령은 아이 역시 레이븐사이드의 대표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한 쪽은 죽어야만 한다.

"그 무슨!"

아이는 격정적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포기하게. 지금 헤이든의 고문으로 위장해 전입한 그 자, 드미트리라고 했던가? 그는 상당한 고위의 파계 율사라고 들었네.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이런 저런 구속으로 그녀를 옭아매어 놨겠지."

통령은 말을 매듭짓듯이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재판이 끝나면, 그녀는 죽어야만 한다네. 되도록이면."

아이의 손에 의해서. 그런 말이 뒤따랐다.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 가문의 일은 가문 안에서 처리한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 단검을 주워들었다. 불현듯 또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설마, 자살 권유를 한 것도?"

이런 구체적인 담론은 오래 준비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통령은 이미 륜을 포기했다. 포기한 것을 넘어서,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녀를 구원할 수도 확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에게 남은 수단은.

통령은 부정하지 않았다.

"나일세. 그녀는 알아보았겠지. 내 필체로 적혀 있었으니까."

그것이 륜이 자살 권유를 받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던 이유였다. 아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다. 새빨간 신기가 단검 가득 넘실거렸다. 아이의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매달려 그렁였다. 목을 꿰뚫자, 다 죽여버리자. 그런 충동이 힘줄과 관절 가득히 차올랐다. 그 순간, 통령은 노한 표정으로 소리질렀다.

"뭐 하는 건가!"

그 호통이 아이의 몸을 잡아세웠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먼 곳을 돌아왔던 통령의 말은, 드디어 포위를 마치고 핵심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잃고 언니도 잃었을 때, 그녀는 이미 스스로 삶을 포기한 상태였네! 그 이후 그녀의 대처는, 그토록 영명했던 그녀의 것이라곤 보이지 않아! 이 늙은이는 오십 년을 전장에서 헤매면서 보아 왔다네. 이 친구야, 영혼은 육체보다 일찍 죽어. 자네는 비극을 겪고 영혼이 죽어버린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망자의 삶은 일찍 끝내주는 것이 그 자를 위해서도 좋단 말일세!"

"그런, 비겁한, 비겁... 당신도 결국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는 그녀의 영혼이 빛났을 때를 기억해. 륜 우르드, 그녀는 내 손녀나 다름없이 길러온 아이일세!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것은, 이 기나센의 균형이야! 껍데기만 남은 육신 때문에, 그녀의 영혼이 만든 그 업적이 부숴지는 걸 과연 좋아할 것 같은가!"

이 말을 위해서. 그렇게 멀리 돌아온 것이었나. 재선을 거친 통령의 말솜씨는 노회했다. 아이는 더 이상 단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검을 든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크게 소리질렀다. 그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쿡!

큰 소리와 함께 날아간 단검은 벽에 꽂혔다. 검의 손잡이는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었다. 통령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검을 내던지고, 마구잡이로 저택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소란에 깜짝 놀라 달려온 레테가, 황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쫓을까요?"

"아니, 내버려두게. 괴로울 게야."

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벗어난 후, 그의 얼굴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순간적으로 뿜어낸 살기는 웅혼했다. 먼 옛날, 외신 갈란퀸과 마주한 기분을 다시 느낄 정도였다.

"손수건을 좀 주게."

통령은 레테에게서 손수건을 받아서 외알 안경을 반짝이도록 닦았다. 안경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 잠깐 사이에 오 년은 더 늙은 듯 초라했다. 그러나 안경을 쓰자마자, 그 모습은 유령처럼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창 밖에선 눈비가 내렸고 물안개가 창가를 희게 물들였다.

*

저택에서 벗어난 아이는 무작정 달렸다.

짙게 내린 눈비는 밤바람에 녹아 완연히 비가 되어 있었다. 세찬 비가 아무리 몸과 옷을 적셔도 가슴에서 일어난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서, 아무도 없는 구석에 다다른 뒤에야, 지쳐서 무릎을 잡고 숨을 내쉬었다. 하얀 숨은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고,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비적대며 구석의 낡은 창고로 걸어갔다. 외벽은 썩어 있었다. 그 썩은 외벽에 등을 기댄 아이는,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림은 조용히 날개를 펼친 채 그 옆에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앞머리에 가려서 아이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림은 속삭였다.

'그래서, 어린 순례자야. 결정은 내렸느냐.'

아이는 침묵했다.

'조디악의 말을 들어서 륜이라는 아이의 편을 들 것이냐.'

륜의 편을, 정확히는 조디악의 말을 따른다. 그러면 륜은 무사할 지 모르나, 기나센은 죽을 것이다. 북서 자치령의 잔영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황금 가면을 쓴 채 노예가 된 사람들과, 도박장에서 팔이 잘려 신음하던 농부들, 산 채로 썩어가는 사과 농장의 풍경이 눈 앞의 기나센에 겹쳐져 보였다. 고르면, 기나센이 그 꼴이 될 것이었다. 고를 수 없었다.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림은 이어 물었다.

'허면, 저 통령의 말을 들어 륜이라는 아이를 죽일 것이냐.'

아이는 힘없이 또 고개를 저었다. 통령을 생각했다. 자신의 손녀라고 생각한다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죽으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인상은 선했다. 그것이 아이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림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문장만 바꾸어서 반복했다. 아이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저으니 림도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검게 죽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렌을 둘러치듯 웃자란 산맥의 산그림자가 눈 앞에 들어왔다.

눈비의 잔영인가, 산맥까지 바다가 몰려오는 환영을 보았다. 눈비가 일으킨 물안개는 산맥을 잠식해가는 듯싶었다.

아이에게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은 결국 바다였다.

륜을 떠올렸다.

몸이 약해서, 침대에 갇힌 채 바라봐야 할 세계를 생각했다.

피붙이가 언니밖에 없는 사람에게, 언니가 가질 의미는 어떤 것일지를 생각했다. 블로어가 떠올랐다. 밤새서 쥐어짜내 한 줄의 문장을 선물했을 때, 그녀가 느꼈을 쑥스러움을 생각했고 침대에서 언니에게 안길 때의 포근함을 생각했다.

그 포옹 속에서 피어올랐을 따스함과, 그 따스함에서 멀어져서 손을 흔들 때의 슬픔을 생각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의 절망과, 그 작은 몸으로 이겨나가야만 할 세상의 무게를 생각했고 자신이 품은 정의의 추함과 왜소함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결단은 불가능했다.

올려다본 산맥은 자우룩한 물안개와 어둠에 잠겨서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계는 감당할 수 없이 넓고 아득했고 아이는 그 아득함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침묵하느니 차라리 적을 주길 바랬다.

알기 쉬운 악과 알기 쉬운 적 앞에서만 자신은 어른 흉내를 냈을 뿐이었고, 세계의 무게와 어려움 앞에서 자신은 또다시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밤새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산맥은 완전히 바다에 잠겼다. 고개를 숙여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어쩌면 죽음과 잇닿은 내장에서, 뜨거운 울음이 치받고 올라왔다. 아이는 결국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악은 존재의 형식처럼 느껴졌다.

존재하려는 것은 악의로 호흡해야만 하는 듯싶었다.

이 악의로 가득한 세상의 바다에서, 숨 하나 쉬지 못한 채 멍하니 가라앉아만 가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참을 수 없이 슬펐다.

그래서, 결단은.

기나센을 살릴 것인가, 륜을 살릴 것인가.

이것이 십칠야의 끝을 결정할 마지막 갈림길인가.

어느 쪽에도 구원은 없을, 선악이 뒤섞인 두 갈래길에서, 아이는 계속 숨죽여 울며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 계셨군요."

그 때였다.

새카맣게 내리는 비가 멎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산이었다. 아담하게 만든 우산이, 자신의 머리 위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러느라 우산을 쥔 사람은 비에 새까맣게 젖어가고 있었다.

"한참 찾았어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 소렌을, 돌아다녔는데."

그 얼굴을 보고, 아이는 입을 벌렸다.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점점 크게 확장되어갔다.

레이븐사이드는 멸문했고, 관계자들은 모두 죽었다. 아이는 한 번도 기나센을 밟지 않아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사람이 없다. 그런 전제 하에 조디악의 계획은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있었다. 진짜 아이와 가짜 아이를 구별할 수 있으면서도, 죽지 않은 사람.

"가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 아이에게 우산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일 년만에 본 얼굴이었지만,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레이븐사이드에 물건을 납품하던 상인의 조수, 레나.

아이에게 우산을 내밀고 있는 건 바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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