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치즈와 구더기 ( 1 )
문을 열자마자 고깃국이 끓는 냄새가 주린 내장으로 흘러들었다.
아이는 멍하니 레나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거처로 향했다. 지붕 낮은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그녀의 집은 있었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레나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레나는 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주었다.
"예쁜 머리니까 잘 간수해야죠."
비에 젖은 대형견을 닦아주듯이 레나는 꼼꼼하게 머리를 닦았다. 수건의 거슬거슬한 천 너머로 따뜻한 손의 온기가 전해졌다.
"잠깐만 기다려요. 고기 스튜를 끓여 뒀어요. 많이 배고프죠?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아이는 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먼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막 헤매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었다.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아이가 제일 먼저 찾아다녔던 것은, 타니아와 레나였다. 그녀들은 마지막 전투 직전에 보급을 마치고 떠나갔었다. 직접 아라딘폴 공성전에 참가하지 않은 만큼, 살아 있을 확률이 제일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금세 꺾였다. 거대한 매장 구덩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용병단에게 줄을 대어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이나, 기술자, 각종 노무자들을 죽여서 파묻은 구덩이였다. 깊게 파인 원통형의 구덩이 여기저기에 그들의 깃발이며 짐마차 따위가 박혀 있었다. 아지프의 정보를 노출할 수 있으므로 몰살시킨 것이었다.
괴로웠다. 그 시체 구덩이는 시체 자신의 손으로 파내어진 듯했다. 죽은 시체를 인골귀로 일으켜서 그 손으로 직접 땅을 파게 시켰을 것이다. 타니아와 레나 역시 그런 운명을 겪었을 것이다.
쉿쉿 달려드는 커다란 송장벌레를 잡아뜯고 들개만한 쥐떼를 베어넘기며 두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고 시체 구덩이를 헤매던 아이는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아이는 두 사람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줄 알았던 레나가 사실 살아 있을 뿐더러, 이 기나센에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를 깨달았다.
"이거, 저, 혹시..."
사방에 진귀한 물건들이나 사치품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자신이 넘겨준 것도 몇 개 보였다. 팔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타니아 누나의 집인가요?"
레나는 냄비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냄비 안에서는 붉은 고기 스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진득하게 볶은 고기에 토마토를 붓고 적양파와 흰 당근, 파프리카 따위를 함께 끓인 스튜였는데, 견딜 수 없을만큼 멋진 향기가 났다.
"우선 먹어요. 많이 시장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얼굴에선 은근한 자부심이 보였다. 아이는 말 없이 스푼을 집어들었다. 한 숟갈 떠서 국물과 고깃조각을 삼켰다. 고기는 부드러웠다. 비에 젖어 추운 몸과 바짝 말라있던 위장에 뜨겁고 얼큰한 국물과 부드럽고 감칠맛나는 고기가 스며들었다. 푹 삶은 고기는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흰 이빨을 감싸안듯 뭉개져 식도로 흘러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는 허겁지겁 자기 몫의 스튜를 전부 먹어치운 후였다.
단순한 스튜가 아니었다. 국물 깊숙히, 숙성된 생명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 바닥이 드러나도록 먹은 뒤에야 아이는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치즈였다. 한 입도 먹기 힘들었던 기나센 특유의 양젖 치즈가, 이토록 깊은 풍미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가 먹는 모습을 미소로 바라보던 레나는 말했다.
"맛있죠?"
아이는 문득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죽을 듯 고민하다가 이렇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레나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선 잘 먹어야 돼요. 굶지 않고 잘 먹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할머니가 그랬어요."
농가의 어른들이 으레 하는 말이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레나는 스튜를 한 국자 더 퍼서 아이에게 건네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기 전에 먹으면서 들어주세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시죠?"
조력자가 있었다. 레나의 말은 결국 그것으로 요약 가능했다. 막 레이븐사이드에 보급을 마치고 군납 상인들의 집결지로 마차를 몰아갈 때, 그 조력자가 움직였다. 당장 북서 자치령에서 떠나서, 기나센으로 오라는 쪽지를 보내왔다. 심부름꾼이 건네준 그 쪽지는 낯설고 불친절했으나, 마침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타니아는 그 쪽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충고는 정확했다. 북서 자치령의 작은 마을에서 몸을 숨기던 두 사람은, 풍편에 아라딘폴 공성전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오열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또 다른 쪽지가 날아왔다. 어떻게 그녀들이 숨은 곳을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쪽지는 언제나 정확하게 날아왔다. 빨리 그 민가에서도 떠나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그 쪽지는 곧이어 있을 전쟁 금지 칙령과, 그 칙령의 여파로 북서 자치령이 무법지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두말없이 두 사람은 그 쪽지의 말을 따랐다. 그 쪽지의 말 대로였다. 북서 자치령은 곧 생지옥이 되었고, 그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전에 두 사람은 간신히 북서 자치령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럼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죠?"
아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타니아와 레나는 그 의문의 조력자를 '신부'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 사람은 항상 이렇게 찢은 성경 페이지에다 메시지를 적어서 보내왔거든요."
그래서 신부인가. 아이는 고기조각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레나는 신부가 보내온 쪽지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신부님의 쪽지를 따르다보니, 어느새 기나센에 도착했어요. 언니 집에 도착해보니, 예상한 대로 이미 또 쪽지가 도착해 있더군요."
그 쪽지는 레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르드 저택에 들러보라는 것이었다. 그 쪽지의 말대로 우르드 저택에 방문한 레나는, 때마침 부주의하게 나비를 쫓아서 뛰어다니던 에바를 만났다. 누군가가 에바를 에페 바체라고, 기나센의 눈표범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듣고 레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이 사람이요? 말도 안 돼요!"
그것이 통령의 눈에 들어갔다. 내심 의심하면서도 정치적 부담 때문에 수사할 결심을 하지 못하던 통령은, 그것을 계기로 에바의 정체를 캐기 시작했고, 그래서 조디악은 에바를 급히 나사렘으로 파견 보냈다... 아이는 레나의 말을 듣고 그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쪽지는 계속되었다. 레나에게도 특무국의 사람이 붙었는데, 쪽지는 그 툭무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연이어 알려주었다. 통령에게서도 몸을 숨기라는 것이 신부의 조언이었다.
"마지막으로, 때를 기다리라는 쪽지가 왔어요."
곧 큰 소란이 일어날 테니, 그때까지 몸을 숨기라는 쪽지를 마지막으로 신부의 조언은 끝났다. 레나는 특무국의 눈이나 조디악의 눈에 걸리지 않도록, 타니아의 저택에 바짝 엎드려 숨어 있었다.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출입했으며 하인 행세를 했다. 그리고 오늘, 아이를 둘러싼 재판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그 때가 왔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레나는 눈을 빛내며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저희를 여기에 머무르게 만들었다는 건 알겠어요. 재판에 휘말렸다고 하셨죠? 저희도, 레이븐사이드의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이겨내자는 말로 레나의 말은 끝을 맺었다. 그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었다. 양쪽을 둘러싼 복잡하고 지난한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간단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이는 오히려 그 무지로부터 구원을 받은 느낌을 들었다. 웃었다.
"감사합니다."
왜 통령의 말을 듣거나 조디악의 말을 듣는 것만 생각했을까. 그냥 이기면 된다. 어차피 은방울꽃을 써서 재판을 이끌어낸 것도 자신이었다. 둘 모두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서, 륜도 구하고 기나센도 구한다. 그게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격정이 차올라서 식탁 너머로 레나를 꽉 끌어안았다.
"어? 어?"
"고맙습니다. 정말로."
레나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확 달아올랐다. 방금 먹은 고기스튜보다도 더 새빨간 붉은색이었다.
"저저저저저저저, 안 되는데, 저 비에 젖어가지고 모모모모모모목욕도 안 했는데..."
그때 뒤에서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홱 고개를 돌려보니 또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타니아였다. 그녀 역시 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욕물은 아까 받아줬는데? 아, 갑자기 산책가고 싶은데 둘만 남게 집 비워줄까?"
"언니!"
레나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말에 타니아는 웃다가, 갑자기 배를 감싸쥐었다. 아이는 왜 그런 것인지, 또 왜 타니아가 레나에게 모든 설명을 맡기고 나서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타니아, 그녀의 배는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빨리 들어가서 누워 계세요!"
"미안, 미안. 그래도 태교에 좋은 장면이라 안 봐둘 수가..."
"빨리요!"
타니아는 레나의 재촉을 받고 이끌리다시피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품은 아기, 그 잉태한 생명은 아마도 잰슨의 아기일 것이었다. 아라딘폴 공성전이 끝나고 어느새 열 달 가까이가 지났다. 아이는 누워 있는 타니아의 손을 잡고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타니아는 아이의 가슴을 툭 쳐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얘도 인사하고 싶나봐. 자, 자, 가만히 있어봐. 그럼 배 걷어차는게 들린다?"
전쟁터에서도 생명은 태어난다. 자신은, 레이븐사이드의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고, 지켜나가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발차기의 울림, 작은 발고동은 아이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무슨 말하는 건지 난 이해할 수 있는데. 알려줄까?"
"알려주세요."
"삼촌한테 꼭 이기래. 그리고, 이모를 구해달래."
삼촌은 아마 아이. 그리고 이모는 륜을 뜻하는 말일 터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까지 한 달, 너무도 훌륭한 조력자들을 손에 넣었다. 이 두 사람은 아이가 진짜 아이라는 것을 소상히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들이었다. 신 앞에 가장 공정한 법정이라는 은방울꽃의 법정에서 이 사람들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승리한다. 통령의 힘도 조디악의 힘도 빌지 않고, 승리해서, 전부 지켜낸다. 아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목표를 되새겼다.
"윽!"
그 때 갑자기 타니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해산이 가까워져서 몸조리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레나는 황급히 그녀의 등을 쳐주었고, 아이도 당황해서 그녀를 도우려 들었다.
"아, 맞아. 아이 씨는 힘이 세죠?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커다란 상자로 막아서 봉인해둔 지하실. 원래는 잰슨이 열어주었던 지하실 귀중품 창고에, 몸조리에 좋은 영약이 숨겨져 있으니 좀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여자 둘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어서 영약을 두고도 손을 못 댔다는 것이 레나의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재빠르게 지하실로 뛰어내려갔다.
곧 커다란 상자로 막힌 지하실 문 앞에 도착했다. 아이는 괴력을 발휘해서 간단하게 그 상자를 치울 수 있었다. 지하실 문을 열고 창고를 뒤적여서, 아이는 곧 녹옥 병에 담긴 영약을 찾아냈다. 오랜 시간동안 숨겨져 있었던 듯 녹옥병 위에는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 녹옥병 밑에, 이상한 쪽지가 있었다.
성경을 찢어 만든 쪽지였다.
-두 사람을 데리고 도망쳐라. 재판은 포기해. 그게 모두에게 좋다.
"이건..."
아이는 그 쪽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쪽지 위에도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신부, 레나와 타니아를 이 곳까지 인도한 자. 그 정체불명의 조력자는 이번에는 도주를 권하고 있었다.
'호오오...'
림은 그 쪽지를 보고 흥미롭다는 듯 턱을 붙잡았다. 아이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이 자는 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미래를 예지라도 하는 듯 안배를 깔아두고, 이제는 재판을 포기하라 하는가? 이 자는 적인가, 조력자인가?
하지만 그 쪽지가 말하는 것은, 결코 아이가 들어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아이는 쪽지를 꾸깃하게 접어 내던졌다.
"승리한다. 반드시."
창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날은 맑게 개어 있었다. 아침 해가 맑게 개인 산맥을 밝은 빛으로 물들였다. 비가 갠 후의 산맥은, 여느 때보다도 더 영롱하고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