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치즈와 구더기 ( 4 )
그러나 그 다음은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
에어비스, 비제와 합류한 아이 일행이 곧바로 움직인 곳은 아노덴이었다. 가는 데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마차 안에서 아이는 륜의 얼굴을 조각하려 애썼다. 늘 침대에서 머물렀기 때문인지, 그 머리카락은 부스스했다. 나뭇결에 그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공허한 눈동자를 새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또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완성된 조각은 늘 륜보다는 란페이를 닮은 물건이 되어 있었다.
조각이 다섯 개째 완성될 무렵 마차는 아노덴에 도착했다. 아노덴에 들린 목적은, 도린의 남은 동생 둘을 찾기 위해서였다. 몸이 건강하고 무재가 있어서 용병이 되기를 택한 비제 그리고 에어비스와 다르게, 남은 동생들은 관료가 되기 위한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그 두 사람에게도 협력을 받아야 했다.
"싫어요."
시렌, 도린의 막내 여동생은 뚜렷하게 거절의 말을 택했다. 당연히 말을 들을 줄 알았던 비제는 크게 당황했다.
"왜? 사랑하는 막내야, 이 무슨..."
"이미 오전에,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다녀갔어요. 많은 돈과 좋은 일자리를 약속했구요. 저는 그 쪽이 더 좋은걸요."
"시렌!"
에어비스가 벌컥 화를 냈다. 시렌 옆에 있던 셋째 남동생, 다브는 처음 보는 누나의 분노에 몸을 움츠렸다.
"다브,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고서 말하는 거야?"
유약한 인상의 다브는 흐린 눈썹을 떨었다. 하지만 뜻을 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렌이 당차게 나서서 대답했다.
"상인들이죠."
"사람들의 목숨값으로 돈을 버는 상인들이야!"
"그럼 용병은 다른가요?"
마주 소리질렀다. 에어비스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시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결국, 큰 오빠도, 그 사람 말에 속아서 죽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오빠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너는 오빠를 욕되게 만들고 싶은 거야? 남 탓을 하려고?"
"나는 작은 오빠랑 언니도 그런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소리지르고 시렌은 자리에 앉았다. 시렌의 말에 말문이 막혀서, 비제도 에어비스도 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셋째 동생, 다브가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만약 저기 저 분이 승리하면, 형은 뭘 할 거야?"
"레이븐사이드의 재건을 돕는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이야기가 끝났어."
"그래. 나랑 시렌은, 형이랑 누나가 그러는 걸 바라지 않아. 그냥, 어디 남쪽의 따뜻한 휴양지에서, 귀족 경호나 해 주면서 평안하게 살았으면 해. 큰 형처럼, 이상한 전쟁터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그게 나을 거야."
"내 동생이 이렇게 사나이답지 못한 줄은 몰랐는데. 자기가 결정한 방식대로 죽었다면, 어디서 언제 죽던 스스로에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죽음이야. 남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었어. 그 용병단이 재건되면, 그 용병단은 정쟁의 중심에 설 거라고. 암살 시도도 있을 거고, 전쟁에 몰려나갈 일도 있을 거고, 아주 힘든 일이 될 거라고 했어. 맞지?"
비제는 입을 다물었다. 드미트리가 들려준 이야기인가? 그것은 진실이었다. 대충 가늠해보아도, 레이븐사이드의 재건은 피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 침묵을 들은 시렌은 한층 힘을 얻어서 소리질렀다.
"우리가 자기들을 도와줘서 재판에서 이기게 해 준다면, 그 사람들은 언니랑 오빠가 더 이상 용병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준다고 했어."
말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이지, 사실상 억지로 용병 일을 그만두게 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비제는 신음성을 흘렸다. 도린은 네 남매에게는 거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던 큰 형이었다. 그 죽음은 가장 나이들었던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동생들에게는 더욱 큰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틈을 파고들어서, 자신의 어린 두 동생들을 훌륭하게 포섭해냈다. 이 아이들에게 지금 이 행위는 사랑하는 언니와 형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것은 과연 틀린 것인가...
"가죠."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이였다. 이야기는 남매에게 맡겨두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움직여 철수를 권한 것이었다. 드미트리가 뿌린 독은 깊었다. 이야기하거나 강압으로 설득하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랬다간 오히려 우애가 상할 것 같았다. 비제와 에어비스는 그 말에 말없이 뒤돌아섰다.
증인 쟁탈전, 2대 3.
*
은방울꽃 재판이 예고된 지 열흘이 지났다. 앞으로 기한은 20일이 남았고, 아이 일행이 소렌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사방에는 재판의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이런 놈들은 끊이질 않는군."
비제는 걸레조각이 된 양탄자를 바라보며 질겁했다. 아이가 머물고 있는 여관, 아이의 방 앞만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직접적으로 아이를 해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적들, 주로 에페 바체 시험 탈락자들은 이제 아이의 정신을 공격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우편함에는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열어보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죽으라는 말이 잔뜩 적힌 편지도 받았고, 칼이 들어간 편지도 받았다. 정성스러운 필체로, 간곡하고 부드럽게 기권해달라는 편지도 받았다. 먼바다의 게잡이 배에서 구함을 받은 에페 바체 후보자의 편지였다. 아이는 힘든 벌을 받듯이 그런 편지와 음해들을 묵묵히 정독하곤 했다. 에어비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왜 그런 걸 하나하나 다 읽어주고 있는 거야?"
그냥 무시하고 찢어버리라는 말을 전했다. 아이는 천성이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정신을 공격하려는 전술은 생각보다 크게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고, 무언가를 생각하며 나무토막을 깎는 일이 늘어났다. 재판을 대비해서 에길론, 샤론, 에어비스, 비제, 레나, 타니아 모두와 이런저런 회의와 전략을 짜고 나면 아이는 구석에 틀어박혔다. 어디서 조각칼까지 구해서는 사각 사각 사각, 밤새도록 무언가를 깎고 있었다.
조각하는 대상은 늘 륜이었다. 얼굴을 마무리짓지 못해서 머뭇거리다 쪼개곤 했다. 아마도 륜에 대해서 큰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내뱉는 한숨에서 그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가끔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건 때를 틈타서 달려드는 선주와 말싸움을 하는 것이었지만, 제삼자가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저렇게 자기 탓도 아닌 비극에 일일히 슬퍼하는 걸까. 답답하게 느껴진 에어비스는 자신이 투서와 편지를 대신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의 특별한 편지를 받았다.
제도에서 온 편지였다.
- 이렇게 일찍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밑을 훑어본 에어비스는 성녀의 인장을 발견하고 덜덜 떨었다. 이건 호노레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다!
"거기! 청승 떠는 아저씨! 이것 좀 읽어봐!"
깜짝 놀란 에어비스는 구석에서 나무를 깎고 있던 아이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편지를 받아들였다.
- 제도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잘 마무리될 수 없을 정도로 잘 마무리되었지요. 아지프 내부가 요동치고 있는 듯합니다. 저를 찍어내려던 세력이 이번에는 다시 저를 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황궁의 안뜰에 있는 황금 사과나무를 아시는지요? 그 꽃이 이울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의 가지가 죽었을 때에는 변방에 큰 일이 생기고, 꽃이 떨어졌을 때에는 제국에 큰 일이 생기며, 나무가 죽었을 떄에는 세계가 멸망한다고 합니다.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때문에 사방이 소란스럽습니다.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호노레의 편지는 우선 제도의 상황을 전했다. 아이의 도움으로, 처해 있던 위기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내용이었다. 달가운 소식도 있었다.
- 제 제자도 조금은 덕을 보았습니다. 호즈 아도헤르라는 여자가, 우리가 떠난 틈을 타서 그녀를 집요하게 기소했더군요.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거꾸로 그녀가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를 제 제자가 차지했습니다. 당신의 연인은 이제 제국의 당당한 판사랍니다? 쌓은 업적으로 칭송을 받아서, 정확히 말하면 그 호즈라는 여자의 마력을 옮겨서, 짧은 시간 안에 3위계까지 위계를 올리기도 했지요. 다음에 만나면, 많이 칭찬해주시기를. ( 추신: 이 눈부신 성공 덕분에 혼담이 많이 들어왔는데, 전부 걷어찼답니다. 아까운 것도 많았어요. )
쓸데없는 사족이 많았다. 연인이라니? 주책이었다. 아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린의 막내 동생을 만나고 처음으로 흘리는 웃음이었다. 나이가 좀 있다보니 성녀라도 주책을 부리나보다, 그런 생각으로 글을 더 읽어나갔다.
- 재판은 저와 제 제자, 둘이서 담당할 예정입니다. 이는 여신께서 지켜보시는 재판이니만큼, 아주 공명하고 바르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도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고심해서 이 편지를 썼답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식사나 한번 같이 하지요. 저는 더 어렸던 날 그 부근에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점을 많이 알고 있어요.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예약을 부탁드립니다. 최소 4인, 최대 8인으로.
그리고 호노레는 어떤 식당의 이름을 적었다. 그것으로 편지는 끝이었다. 허락을 받고 옆에서 조용히 편지를 읽던 에어비스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성녀라는 분도 꽤나 인간미가 있으시네?"
하지만 아이가 주목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가죠. 확인할 게 있어요."
아닌 밤중에 비제와 에어비스는 아이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한참을 뛰어간 아이는 곧 호노레가 예약하라고 한 식당에 도착했다. 밤중에 문을 두들기자 나타난 주인은 짜증난 기색이었으나, 루덴을 받고 기분이 풀어져서 안으로 일행을 들였다. 아이는 재빨리 달려가서 예약 명부를 뒤졌다.
"뭐야, 고작 예약을 하자고 그런 건가?"
비제가 얼떨떨하게 묻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명부를 들어 보여주었다. 호노레가 예약하라고 한 날짜, 거기에는 이미 빼곡히 예약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내 이름과 에어비스 이름이 있지?"
얼떨떨하게 말하는 에어비스. 그 뿐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륜의 이름도 있었다. 주인을 붙잡고 물어보니, 오늘 도착한 편지가 그 예약을 걸어두었다고 했다. 아이는 확신해서 말했다.
"이건 이번 재판에서, 재판장이 선정할 증인들의 목록이에요."
최소 4인, 최대 8인이라고 적어둔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직감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 성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아이는 그녀가 이 편지에 뭔가 정보를 숨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읽어본 결과, 이 최대 8인이라는 문구가 제일 수상했다. 이 숫자는 증인의 숫자와도 일치했다.
최대한 간접적으로 정보를 건네기 위해서, 호노레는 이 편지를 보내고 자신이 선정한 증인들의 이름으로 예약을 잡아둔 것이었다. 이를 발견할 지, 못할 지는 오직 아이의 눈썰미에 달렸으므로, 또 적이 정보를 역이용할 수도 있으므로 공정했다고 우길 수 있었다.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약 명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명부에 적힌 이름을 보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타니아, 그리고 레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무관계한 타인인 레나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증인 쟁탈전은 4대 3, 다시 이 쪽이 한 발 앞서나가게 된 셈이었다. 나머지 이름들도 알고 있는 이름들이었다. 륜 우르드, 비제 캄벨, 에어비스 캄벨, 시렌 캄벨, 다브 캄벨.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낯설었다.
"플로에타 보르지아?"
이름은 낯설었으나 성은 낯익다. 불쾌하도록 낯익다. 또 한 자루의 루덴을 건네주어서 주인의 입을 막고 길을 나선 아이는,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 자치령에서, 사형이 끌어들였던 그 여자?"
틀림없었다. 영락한 귀족 출신이라 창부로 전락했다가, 랑벨로를 잡기 위해 레고르가 꼬드겼던 그 여자였다. 이 재판은 간부의 직계, 또는 에페 바체의 직계를 우선적으로 증인으로 잡고 있는 듯했다. 성 대로 그녀가 보르지아의 일원이라면, 증인으로 선택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여자가 왜 보르지아란 성을 달고 있는 거지? 아이는 아연실색했다.
어두운 담배 연기 속에 묻혀져 있던 그녀. 그녀가 이 재판의 향배를 결정지을 마지막 증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