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34화 (134/279)

24.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 2 )

극심한 혼란 가운데서, 드미트리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래, 세계의 운명은 텅 빈 서판처럼 모두가 써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한 권의 완성된 책처럼, 결말까지 빼곡히 내용이 들어차 있는 형상이었다. 키레넨의 일족은 드물게 미래를 예지할 수 있기에 배척받았다. 하지만,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것이 곧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래를 바꾸려는 의도로 사건을 일으키면, 세계는 그 사건의 영향력을 줄이고 다른 사건을 일으켜 세계의 흐름을 원래의 역사 진행에 귀속시켰다. 미래에 영웅이 될 자를 먼저 죽여버리면,원래 죽었을 누군가를 살려 그 영웅이 할 일을 대신 시키는 식이었다.

이미 출판된 책의 한 페이지를 말소하고, 완전히 다른 내용을 적어넣는다고 해도, 다음 페이지의 내용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미 출판된 책을 받아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짓을 해도 미래를 바꿀 수 없다.

그 바꿀 수 없는 미래 속에서 키레넨은 언제나 배척받았다. 소니아 아바키렌, 그리고 그녀의 조상들은 언제나 하염없이 미래를 관측해왔다. 저 공고한 제국이 무너지는 미래를, 그리고 키레넨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미래를 갈구했기 떄문이었다. 소니아 아바키렌은 늘 선조가 남겨준 미래의 관측기록을 살펴보며, 자신이 관측한 미래와 대조하고 또 대조했다. 변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발견했다. 백 번 관측했을 때 한 번 꼴로, 미래가 변했던 것이다.

세계의 형상은 책과 같다고 했다. 그 내용을 바꾸기 위해서는 조금 더 본질적인 권리자, 예를 들면 출판업자나 작가와 같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7위계의 마술사이며, 또 아나테마였다. 미래의 변화는 둘 중 하나가 발생했음을 암시했다. 소니아 아바키렌은, 그리고 조디악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미약한 변화의 흐름을 쥐어잡아서, 세계의 운명을 뒤바꾸기 위해서였다.

조디악이 찾아낸 변화의 원인은 나하트 칼벨레인, 천재로 유명한 아지프의 마도사였다. 젊은 나이에 6위계에 도달한 그는 놀랍게도 이미 7위계의 문을 반쯤 열어젖힌 상태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 보았으나, 스스로를 희생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그가 7위계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정적으로 몰려 숙청당하기 직전, 그는 자신의 딸인 마리아 칼벨레인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고 각성할 예정이었다. 7위계가 되어 아지프의 학장 자리를 쥐어잡고, 아지프 전체에 대한 토벌 전쟁을 일으키며, 제국 남부 전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 셈이었다. 제국은 멸망하고 외신이 침입해 세계를 먹어치우며, 조디악은 난세에선 쓰레기나 다름없는 금화더미를 움켜쥐고 사멸할 것이었다.

막아야 했다. 온 세상을 뒤진 소니아 아바키렌은 곧 한 장의 지도를 발견해냈다. 아나테마가 될 수 있는 신전의 위치가 표기된 지도였다. 그녀는 그것을 나하트 칼벨레인에게 찔러넣었다. 절망에 몸부림치던 그는 그 지도를 발견하고 계획을 바꾸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아나테마가 되기 위해 도피행을 택했다. 그리고, 나하트의 소식이 끊겼다.

그 도피행으로부터 어떤 일들이 초래됐는지 조디악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무려 세 명의 아나테마가 그 도피행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났음을, 저기 있는 저 하얀 검사 또한 자신들이 뒤바꾼 운명의 일부임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자신들이 위험의 화근을 잘랐노라고 기뻐할 뿐이었다. 그 이후로, 100번 관측하면 99번은 같게 보였던 미래는 크게 변했다. 50여번은 다른 양상을 보여줄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가지는 같았다. 그 모든 미래 속에서 제국은 멸망하고 세계 역시 멸망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조디악은 그 멸망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멸망 위에 한 뙈기,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하길 원했다.

에바는 그 미래를 조디악에 맞게 바꾸기 위해 준비된 칼이었다. 아나테마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합법적인 아나테마나 다름없는 베들렘, 그것을 노리고 소니아는 접근했다. 파계 율사가 된 드미트리가 받은 첫 임무가 바로 그 베들렘의 생산과 확보였다.

가능한 한 가장 착하고, 순진하며, 정의롭고 멍청한 아이를 골랐다. 아픈 척 꾀병을 부리는 동생을 위해서 밥을 굶어가며 얼마 없는 식량을 양보하곤 했던 에바는 딱 알맞는 대상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부리기 위해서, 드미트리는 에바와 거의 가족처럼 지내며 정을 쌓았다.

에바는 여덟 살에 카나기의 4위계를 죽여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험이라고 불렀지만, 정확히 어떤 실험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베들렘인 에바가, 과연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에바가 죽인 4위계는 원래의 미래에서 이신 아이신고르의 치부를 엿듣고 선거 직전에 고발하던 인물이었다. 카나기의 학장 선거는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중대사다. 과연 그 죽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아이신고르를 고발하게 될까? 그 실험은 에바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신 아이신고르는 3선에 성공했다.

에바는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에바를 통령 자리에 올리려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에바의 권한과 능력이 커질수록, 세계의 비틀림은 커지고 운명의 변화도 커질 것이었다. 모든 미래에서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아비규환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 미래의 틈바구니에서 기나센과 북서 자치령, 제국을 둘러친 외곽 국가들을 발판으로 키레넨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조디악의 목표였다.

그런데 아이와 만나고 나서부터, 이상한 관측이 계속되었다. 아이가 통령 자리에 올라선 예지가 자꾸 관측되었던 것이다. 아이의 정체가 진짜 레이븐사이드의 에페 바체였다는 것을 조사로 알고 나서, 그건 아마도 원래 세계의 운명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예지를 토대로 아이를 영입하려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예지를 거듭하느라 몸을 많이 상한 소니아가 스스로를 혹사시키면서까지, 여러 번 예지를 거듭해 오늘의 재판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어떤 예지에도 륜이 이렇게 배신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 정도의 변화는, 에바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드미트리는, 소니아의 예지가 이렇게 빗나간 경우를 알고 있었다.

"당신! 당신도, 설마?"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드미트리는 금색 눈을 드러내며 아이를 노려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강함, 그가 개입되었을 때 자꾸 변화하는 운명. 증거는 명확했다.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가 아탕칼리 신자의 흉내를 냈기 때문이었고, 또 아나테마가 그렇게 굴러다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으으윽... 왜? 왜?"

드미트리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눈으로 아이를 노려보며 신음했다. 기나센의 장악은, 조디악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몇 번 돌출된 변수를 일으키더라도 웃어넘겼다. 그것이 결국 운명을 바꿀 수는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이 재판은, 그리고 아이는 조디악이 세워둔 청사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긴 혼란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이기고 싶습니까?"

재판은 이미 5대 3. 아이 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어버린 상황이었다. 놀리는 건가? 드미트리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그 다음에 아이가 꺼낸 말은 결코 조롱이 아니었다.

"그럼 당신의 장기를 보여줄 때가 됐군요. 내기판을 준비하시죠."

파계 율사로서, 내기에 입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기의 내용은, 에바와의 결투였다. 마침 재판 장소는 공회당, 이 지하에는 전통적인 결투 재판을 위한 결투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만약 저 아이가 승리한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재판을 기권하고 당신들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이기면요?"

"저 아이에게서 손을 떼십시오. 영구적으로."

검으로 에바를 가리키며 말하는 아이. 죄인처럼 서 있던 에바는 당혹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구하기로 마음먹은 '모두'에는, 륜 뿐만 아니라 에바도 포함되어 있었다.

*

흥미롭게 재판을 지켜보던 에어비스는 신음을 흘렸다. 제안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에어비스는 아이의 강함은 본 적이 있지만, 에바의 강함은 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이 저런 제안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저 소녀가 배신을 해서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 아닌가? 이미 마음은 이 쪽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항복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그것이 에어비스의 생각이었다. 바라보는 모두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륜의 방으로 돌아가던 중, 저택 바닥에서 아이는 또 '신부'의 메모를 받았다. 에바를 구하고 싶으면, 재판의 절정에서 이렇게 선언하라는 조언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드미트리는 무겁게 말하기 시작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하십시오."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의 강함을 알고 있는 샤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에길론은 얼굴을 딱딱히 굳힌 채였다. 드미트리의 어조는 결코 농담이나 허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그래도 재판은 저희의 승리로 기록됩니까? 확언해주십시오."

"물론."

아이가 아나테마다. 거기에, 어째서인지 아탕칼리와 모종의 협약까지 맺고 있다. 재판의 절정부에서 드미트리는 이 사실을 알아챘다. 그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아이를 없애거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까지 파급되었다. 아이의 성장세는 마당에 심은 대나무보다도 빨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기나센과 통령이라는 보호막까지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에바에게는 아직 그것이 있다.

그 모든 계산 끝에 드미트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 괜찮겠습니까, 성녀님? 재판 도중에 또 재판이 열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만..."

누군가가 불안에 떨며 호노레에게 말했다. 하지만 호노레는 아이를 믿었다. 재판장을 맡은 성녀의 허락으로, 두 사람은 곧 결투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에페 바체의 1차 시험 때에도 사용했던 결투장, 그 양 끝에 두 사람이 섰다. 한 줌의 모래를 들어 바닥에 뿌리면서, 드미트리는 말했다. 음산한 어조였다.

"에바, 당신은 언니인 저를 실망시켰지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바가 흠칫 떨었다. 륜을 구하겠다는 충동으로 움직였지만, 에바는 드미트리에 대한 죄책감 역시 느끼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에바에게 접근해 그 심장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럼 벌을 받아야겠지요?"

그리고, 에바의 몸에 잠들어 있던 외신을 폭주시켰다.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몸이 머리부터 발까지 거무튀튀한 빛으로 물들어가고, 그 위로 거대한 검은 개의 형상이 드러났다.

"이, 무슨!"

결투장의 방청석에서 관람하던 통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바에게서는 불길하고 묵직한 기운이 폭풍처럼 쏟아져나와 좌중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믿는 것은 이것이었다.

외신, 아이달로스의 사냥개를 완전히 받아들여서 이성마저 잃어버린 상태의 에바.

이 에바라면 6위계의 마술사에 버금가는 전력이었다.

"당신이 제안한 내기입니다. 그럼, 시작하시길."

네 발로 엎드린 에바에게서 물러서며, 드미트리는 박수를 쳐서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쾅! 방금 전까지 에바가 발딛고 있던 자리가 둥글게 부서지며, 돌조각이 튀고 검은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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