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 4 )
재판은 아이의 승리로 끝났다.
더없이 완전한 승리였다. 그 승리는 륜의 승리이자, 타니아의 승리였고, 레나의 승리였으며 또 레이븐사이드의 승리이기도 했다. 공회당의 구석에 걸터 앉은 아이의 왼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륜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 승리자의 명단에 한 줄을 더하기 위해 누군가가 접근해왔다.
"몸은 좀 괜찮은가?"
통령이었다. 통령은 기나센의 이름을 그 목록에 더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래는 조부가 없는 륜에게 할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통령이지만, 기나센의 운명이 다른 천칭에 오르자 그는 주저없이 륜에게 자살을 종용했었다. 륜이 힘을 잃고 잠에 빠져든 데에는 그의 탓이 가장 컸다.
"기나센의 모든 국민들을 보호하고 위무할 책임을 진 몸으로, 자네가 겪은 모진 고초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네.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하고 싶군."
결국 아이는 그의 도움 없이 재판에서 승리해냈다. 통령에게도 기꺼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난 일에 대한 사죄를, 그리고 화해를 청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아이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감사합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정치적 언사를 취하고 있었다. 사죄하고 있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륜에게 사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사죄할 것이 없을 것이었다. 아이는 통령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수 많은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자의 힘이, 또는 무기력이 눈동자 너머에 담겨 있었다.
그는 기나센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랬다. 대산맥파는 작센과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었다. 통령은 전쟁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은 시작되면 패배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았다. 작센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불붙기 시작한 불처럼 전쟁은 제국을 향할 것임이 분명했고 제국과의 전쟁은 곧 파멸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나라가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막는 것, 굴욕을 인내하더라도 기나센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통령이 생각하는 기나센의 삶이었다. 그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는 개인의 목숨은, 어쩌면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화해를 청할지언정 사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 방법은 불분명했다. 쉬이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짧게 대답했다. 무례한 태도였지만 통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죄의 뜻이라기엔 뭐하지만, 내 직권을 다해서 자네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네. 또 명예로운 역사를 지닌 용병단인 레이븐사이드, 그 재건을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가진 모든 힘을 다하여 조력할 것을 여기서 천명하겠네."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통령이 지금 내놓는 대가는, 원래 륜을 죽이고 통령의 아래에서 재판을 승리했을 때에 주려 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지금 그냥 내놓으려 하고 있었다.
아이는 륜을 돌아보았다. 통령의 사죄나, 사과를 받을 대상은 아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아니라 륜이었다. 륜은 무표정했다. 그녀는 잠시 통령의 주름진 얼굴을, 그리고 단안경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그 몸짓을 이해할 수 있었다. 륜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통령의 방식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럼,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기색을 확인한 아이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입에서 나온 부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에페 바체 시험을 다시 열어 달라고?"
통령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통령이 만인의 앞에서 직권을 걸고 한 말인 만큼, 아이는 기나센의 어떤 직위든 이권이든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고른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 물론 이미 통과한 사람들은 예외입니다. 올해의 에페 바체 시험은, 이상한 방해가 너무 많이 끼어들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방청석에서 죽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두 조디악의 승리를 바라고 찾아왔던 에페 바체 탈락자들이었다.
"저 역시 전쟁터를 헤매던 고아 출신이어서, 이 시험이 가지는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고 때문에 자격에서 떨어지는 건, 더없이 슬픈 일입니다."
통령은 턱을 매만지며 아이의 제안을 생각했다. 정치 생활에 길들여진 그에게는 슬픈 버릇이 생겼다. 정치적 손익을 먼저 계산하는 버릇이었다. 이것으로 레이븐사이드는 인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와 륜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것들 외에는 어떤 손익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개인의 선성에서 비롯된 제안임이 틀림없었다. 통령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는 여러모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예?"
"자네가 말하기 전에, 내가 마땅히 신경써야 했을 일을 짚어주니 부끄럽단 말일세. 좋아. 이 자리에서 에페 바체 시험을 다시 치를 것을 맹세하겠네!"
통령의 맹세. 그건 보증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이 끝나자, 재판장 가득 환호가 치솟았다. 열화와 같은 환성 때문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이런 환성을 처음 받아보는 레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했다. 공회당의 궁륭에까지 그 함성이 닿아서, 눈 무더기가 후드득 바닥에 떨어질 때, 돌발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이 어르신! 어르신 계십니까!"
누군가 했더니 골린이었다. 그리고 에페 바체 시험에서 떨어진 낙오자 무리였다. 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놈들이었다. 아이의 선언을 듣고, 상기된 그들이 뭔가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골린 무리는 상기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끌고 온 것을 아이에게 던져주었다.
"저희들을 뒤에서 조종해서 어르신께 대들게 만들었던 원흉을 잡아왔습니다!"
흥분에 젖어서 저지른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아이에게 저지른 죄를 이 제물에게 떠넘겨서 무마해보려는 심산인 듯했다. 무리 중 하나가 들고온 것을 거칠게 땅바닥에 내려찍었다.
"이 계집입니다!"
"크학!"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는 사람. 그건 드미트리였다. 빠르게 공회당을 빠져나가 헤이든의 마차에 오르려 했던 드미트리를, 헤이든의 에페 바체 후보였던 골린이 기다리다 낚아채서 달려온 것이었다. 얼마나 손속이 거칠었는지, 이미 입과 얼굴은 피멍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상의는 절반이 찢겨나가 있었다.
"이 계집이 오고 나서부터 숙부도, 사형도 전부 이상해졌습니다! 이 년은 악귀가 틀림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어르신의 손으로 죽여 주십시오!"
골린의 말이었다. 함성이 일었다. 아마도 그는 드미트리가 조디악의 2인자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는, 지금 다른 것에 놀라서 신경이 팔려 있었다.
"계집?"
"보지 마세요!"
거칠게 다뤄진 탓에 상반신이 너덜너덜한 드미트리는, 분명히 여성용의 내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움츠러들듯이 몸을 숨겼다. 아이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에바는 계속해서 드미트리를 언니라고 불렀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주하는 에바였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아마도 신분상의 문제로 남장을 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드미트리는 굴욕감으로 떨고 있었다. 장내의 눈길은 싸늘했다. 어쨌건 재판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제도와 절차를 존중하며 끝났다. 그런데 야만스런 폭력으로 그 재판의 결말을 더럽힌 골린 무리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저들이 평소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분위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자, 우물쭈물하던 골린 무리들은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붙잡아!"
통령이 손짓으로 명령을 내리자, 레테를 비롯한 특무국 사람들이 그 무리를 잡으러 쫓아나갔다. 공회당은 어수선해졌다. 결투장에는 어느새 아이 일행과 드미트리, 혼자만 남았다. 차가운 바닥에 부서지듯 널브러져 있는 그녀의 앞머리는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문득 그녀는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욕보이지 말고 처분하십시오."
기나센의 장악은 조디악의 건국을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소니아가 엿본 예지에서, 멸망한 세계 위에 건국을 성공한 경우에는 늘 그랬다. 그 미래가 부서진 지금, 세계의 운명이 얼만큼 흐트러졌을지 드미트리는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그런 드미트리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륜이었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드미트리의 상반신에 둘러주더니, 몸을 일으켜주었다.
"가세요."
"예?"
드미트리는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륜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에바에게 언니나 다름없는 사람이죠. 에바한테 제가 겪은 슬픔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아요. 떠나세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륜을 바라보던 드미트리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게 당신 형편에 맞게 돌아갔군. 아닙니까?"
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그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갑자기 악을 쓰듯 소리쳤다.
"당신한테 놀아났어. 개처럼 굴러다니는 내가 우습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저 비극의 주인공인 척 방 안에 누워 있기만 했는데, 우리는 알아서 그 술수에 속아넘어가 돈과 물자를 바쳤고 통령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군요. 통령에게선 얼마나 우려낼 겁니까? 이익을 본 사람이 범인인 법이죠. 그래, 아, 언제부터입니까? 에바를 꾄 것도 당신입니까? 당신이 나를 살려보낸다고 말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드미트리답지 않은 횡설수설이었다.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나를 죽이지 않는 이유, 그겁니까? 내 보증으로 당신들에게 물자를 건네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물자를 받기 위해서?"
그러나 륜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러진 발을 질질 끌며 공회당을 나섰다.
"나는, 그리고 키레넨은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무슨 대가를 치르든, 우리의 나라를 만들 겁니다! 그, 세상에서, 뵙죠. 이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듯이, 악을 쓰면서 공회당을 나섰다. 아이는 그 뒷모습을, 하얗게 드러난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문득 통령과 그녀가 겹쳐보였다. 공회당은 가득 차 있었고 그녀가 떠나가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문을 닫자 둥근 창문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래시계를 닮은 그림자였다. 통령의 나라는 승리로 충만했고, 그 끝에 포개어진 그녀의 나라는 공허했다. 그들에게 세계의 모양은 모래시계와 같은 형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쪽이 차오르면, 한 쪽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그 두 사람을 모두 긍정한 륜은 어떤 사람일까.
아이는 고개를 돌려, 휠체어에 앉아 있을 륜을 바라보았다. 또 기면증인가? 아니면 그저 피로인가. 그녀는 어느새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