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블로어 ( 1 )
소렌의 상공에 머물던 눈구름이 걷혔다.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온 칼바람이 뒤엉킨 눈구름을 저며내어 멀리로 떠밀었고, 씻긴 듯 말갛게 개인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개울의 살얼음을 깨고 송어를 잡아 호박잎에 싸서 집으로 뛰어갔고, 흰 눈밭 사이에서 풀잎과 참개구리들이 엷은 연두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린 손아귀에 붙들린 송어가 이따금씩 아가미를 흔들 때, 기름진 비늘에선 무지갯빛이 부서졌다.
겨울의 나절에 찾아온 짧은 봄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시기의 소렌에서는 늘 이랬다. 저택의 2층에서, 아이는 활짝 열린 창문으로 송어를 들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 물고기는 아마도 어느 집의 아침 식사일 것이었다. 눈을 감고 아침의 찬바람을 깊이 들이마셨다. 칼날처럼 서늘한 바람이 허파를 시원하게 쓸어내리고 사라졌다.
재판이 끝난 지 일주일 째의 날이었다. 륜과 약혼해서, 레이븐사이드의 새 단장이 된 아이는 어느새 이 광경과 찬바람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젯밤에 떠 둔 세숫물에는 얇은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가볍게 두들겨 부수고, 시리도록 찬 물로 얼굴을 씻었다.
"흐아아아암!"
그 때였다. 옆 방에서 긴 하품 소리가 울렸다. 아이는 세안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숫대야를 붙잡고 방을 나선 아이는, 옆 방, 그러니까 륜의 방문 앞에 멈춰섰다. 발로 두들긴다.
"일어났어요?"
"아직..."
"대답하는 거 보니까 일어났는데."
"기면증이 도져서... 5분만 더 자야 해요..."
아이는 무시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명목상이지만 약혼한 사이이니 거리낌이 없었다. 온갖 책이 어지럽게 쌓여서 발 디딜 틈도 없는 륜의 방을 조심조심 가로질러서 아이는 륜의 침대 앞에 도착했다. 륜은 도롱이벌레처럼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오늘은 저도 나가서 할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자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나는 환자라네, 조금만 더 자게 해 주게나...콜록 콜록."
가짜 기침을 하곤 귀찮다는 듯 이불을 걷어올려서 얼굴까지 감추는 륜. 아이는 갑자기 열이 뻗쳐서, 그 위에 세숫물을 들이부어버렸다. 륜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안 일어나면 한 번 더 부을 겁니다."
"저는, 저는, 매우 병약한 환자인데! 너무해요!"
"환자는 무슨."
"흐아아악!"
두 번 정도 등골에 얼음물을 부어넣자 효과가 있었다. 륜은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뒤돌아서서 아이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륜은 엄청난 게으름뱅이였다. 처음에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아니면 병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사흘이 지날 때까지는, 봉착한 큰 위기를 넘긴 탓에 긴장이 풀어진 것으로 여겼다. 일주일이 다 되어서 깨달았다. 이 사람은 그냥 천성 자체가 게으르다는 것을.
참견을 하지 않았더니, 륜은 씻지도 일어나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서 책만 읽다가 잠들어버렸다. 식사는 어떻게 했나 알아보니, 침대 밑에 숨겨둔 과자와 사과주만으로 세 끼를 대충 때웠다고 한다. 아이는 이런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종일 방 안에, 아니, 침대 안에만 있으면 안 답답해요?"
"침대 안에만 있었다니 무슨 소리죠? 저는 방금 저 멀리 야만인들의 땅에 다녀왔어요."
하루종일 읽었던 책을 두들기며 륜은 그렇게 말했다. 별볼일없는 가슴을 쭉 편 채로,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아이는 질색했다.
"말이야 멋있지만 그냥 누워서 하루종일 소설만 읽었다는 거잖아요."
"어허, 책 그리고 상상력과 함께라면 이 자그마한 한 뼘 침대도 훌륭한 왕국이라네. 부러운가? 그럼 오늘은 특별히 자네가 내 침대 왕국에 영유할 수 있도록 입국허가를 내 주겠네. 사양은 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는 내 낭군이니까."
옛스러운 말투를 할 떄의 륜은 묘하게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는 질색하며 등골에 다시 얼음물을 들이부었다.
"낭군은 무슨."
고양이 같은 비명이 터졌다. 그제서야 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밖으로 나가면서 아이는 통보했다.
"오늘은 성녀님께 답방을 가야 하는데, 당신은 안 올 거죠?"
"당신이라니, 하다못해 누나라고 부르면 안 되겠는가? 섭섭하게."
저래봬도 륜은 아이보다 연상이었다. 란페이의 여동생이니까 항렬로는 이모가 될 지도 몰랐다. 아이는 아탕칼리의 계인이 찍힌 망토를 휙 걸치며 답했다.
"안 가는 걸로 알게요. 세 끼 다 준비해놨으니까 꼭 제대로 된 밥 먹고, 목욕물 끓여 놨으니까 꼭 씻으세요. 냄새나요."
"냄새? 설마?"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팔에 코를 박는 륜을 뒤로 하고, 아이는 저택을 나섰다.
*
재판이 끝나고, 성녀 일행은 통령의 별장을 빌려 머물고 있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 곁에 지어진 고택이었다. 털빛 검은 사냥개 한 마리가 입구에 묶여서, 엎드린 채로 꼬리를 살랑대고 있었다. 아이가 다가오자 맹렬히 짖어댔다.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택의 높다란 굴뚝을 바라보았다.
'왜 멈춰섰느냐? 어린 순례자야.'
성녀는 자신의 집행관, 단테 아길리오가 꼭 아이를 보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정도 도움을 받았으면 한 번 답방은 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였다. 내일 성녀 일행이 다시 제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오늘은 그 답방을 할 마지막 기회였고 그래서 아이는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 뭔가..."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을 피다가 걸려서 친정으로 끌려간 신랑의 기분이 들었다. 대문의 입구에 거꾸로 매달린 철창 장식이 어쩐지 음산하게 보였다.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저택으로 걸어들어갔다.
"아, 오셨군요!"
기우였다. 성녀, 그리고 다나는 화려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녀는 어딘가 언짢은 표정이었고, 다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자리에 앉은 아이는 성녀와 인사치레로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거나, 덕분에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었다는 덕담이었다.
다나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동안 손을 깍지끼고 앉아서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어쩐지 그 웃음이 무섭다고 느꼈다.
"그럼 이제 슬슬 음식을 드시는 건 어때요? 아이 씨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인 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경직했다. 접시에는 사과 파이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이건..."
간식이면 모를까, 오찬의 주 메뉴로 사과파이는 명백히 이상했다. 하지만 다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 몫의 사과파이를 잘라서 먹고 있었다. 어쩐지 주눅이 든 아이는 한 토막 사과파이를 잘라서 입으로 가져갔다.
"죄송해요. 하지만 왠지 단 걸 먹고 싶은 기분이어서."
그 말투에선 왜 그런 기분인지 물어봐달라는 기운이 강하게 풍겨왔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셨나요?"
"여기에 온 이후로 너무 머리를 많이 썼거든요. 성녀님께서 오기 전까지, 최대한 그 꼬맹이를 붙들어둬야 하니까,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매일 밤을 새서 재판을 준비했잖아요. 그렇죠?"
"예..."
아이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다나는 전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웃는 낯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고작 3위계의 햇병아리 율사인 제가 그 드미트리를 붙들어뒀기 때문에 아이 씨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죠?"
"예... 아주 감사합니다."
아이는 뭔가 강한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호노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나는 사과파이의 큰 조각을 한번에 삼키며 말을 마쳤다.
"그래서 스스로한테 상을 주고 싶었어요. 사과 파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거든요. 아이 씨도 잘 알고 있죠?"
"아, 예..."
다나는 아주 우회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전달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에게 상을 내놔, 귀에 윽박지르는 것보다도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는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 할머니의 집에 함께 양자로 들어갔을 때, 늘 자신을 혼내고 장난치던 다나의 기억이었다. 아이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가면처럼 웃고 있던 다나의 살기가 멎었다.
"이건?"
"당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준비했던 선물이에요. 다나 씨가 머리에 항상 꽂던 꽃과 비슷하게 생겨서..."
그건 머리핀이었다. 다나가 항상 머리에 꽂고 다니는 꽃과 비슷하게 생긴 머리핀. 호노레는 속으로 실소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소년이나 준비할 것 같은 선물이었다. 호노레는 반응을 기대하며 다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깜짝 놀랐다.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감사하게 받을게요."
일부러 머리를 풀고, 아이가 준 머리핀을 꽂은 다나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압력에서 벗어난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 기적적으로 분위기가 풀려서, 남은 오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호노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원래 오늘 이 자리는 거의 청문회가 될 예정이었는데.'
오직 정치적 목적으로 약혼을 한 것인지. 그럼 그게 실제 결혼으로 갈 가능성은 있는지. 륜과의 관계는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 다나는 그냥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는지 등등 아주 복잡하고 지난한 문제들에 죄다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다나는 어제 씩씩거리며 질문과 함정을 준비했다.
사과파이는 이 청문회의 애피타이저 정도였다. 그런데 저 보잘것없는 머리핀 하나에 마음이 다 풀려서 헤헤거리는 꼴을 보자니, 호노레는 남의 일인데도 복장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어딘가 안심이 되기도 했다. 호노레는 눈 앞의 광경에서, 두 사람이 갈라지는 미래를 읽을 수 없었다.
*
식사를 끝마치고, 아이는 저택에서 빠져나와 금지된 숲으로 걸어갔다.
금지된 숲, 에페 바체의 두 번째 시험이 있었던 그 곳에서 단테가 기다리고 있다고, 호노레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금지된 숲으로 향하는 아이의 머릿속에선 고민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림, 역시 그 두 사람한테는 이야기해야 했을까?"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림은 조용한 눈동자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는 곧 블로어, 륜과 함께 만들어낸 두 번째 검을 불러내어 들여다보았다. 날이 일찍 저물어서, 은색으로 늘씬한 검날 위로 달무리가 이지러지고 있었다.
이 검은 세계의 죽음을 베어내야만 하는 검이었다..
륜은 과연, 스스로를 모략의 신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아이의 힘을 듣자마자 그녀는 임기응변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 검을 만들어내도록 은연중에 유도했던 것이다. 륜과 함께 만들어낸 이 검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제조되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만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는 것. 그것이 륜의 사명이었고, 동시에 블로어의 사명이었다.
이 검을 움켜쥐었을 때 아이는 이 검의 계약자인 륜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다. 륜이 조디악에게서 읽어낸 수천 수만가지의 미래, 그리고 그에 대한 모략이 이 검 안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 모략 중에는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때로는 륜 자신의 죽음을 상정한 것도 있었고, 살육과 파괴 그리고 배신이 뒤따르는 것들도 있었다. 이전까지의 아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삶의 방식들이 블로어 안에는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었다. 가끔씩, 아이는 블로어를 불러내어 이렇게 그 길들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의 아이는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검을 붙잡고 눈을 감은 채 신경을 집중하면, 아이는 륜과 영혼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면, 빵집에 들러서 달걀 케이크 하나만 사다 주게.'
지금까지는 대부분 이렇게 쓰잘데기없는 대화를 나누는 데에 쓰일 뿐이었지만. 아이는 대꾸하지 않고 블로어를 집어넣었다.
이 블로어를 쥔 뒤로 아이는 륜이 어떤 절망 속에서 몸부림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밤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처럼, 멸망은 피할 길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러설 자리 없는 자의 절박함이 마음 깊이 와닿았고, 아이는 세계의 존망을 무엇보다 앞세우는 륜의 정의에 동감했다.
블로어가 보여주는 미래는 대개 같은 방향을 그리며 전진했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미래의 형태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아나테마, 7위계의 마도사.
그런 세상의 거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무언가를 관철해낼 때 미래는 달라졌다. 블로어는 눈 앞의 상대가 그런 거인인지, 아닌지를 판별해주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성녀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나는 성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성녀는 또 비밀 조직인 어포슬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계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아닐지, 아이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망설인 끝에 아이는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자신의 결정이 옳았는지 아닌지 되뇌이면서 걷는 사이에, 금지된 숲의 물씬한 눈 냄새가 코를 적셔왔다. 혈향과 뒤섞인 눈비린내였다. 어느새 단테가 기다리는 곳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단테는 초입에서부터 선명한 발자국을 남겨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왔군."
그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서 숫돌로 칼을 다듬고 있었다. 성도 8궁의 검, 알데바란. 그 외신을 멸하기 위한 검이 틀림없었다. 숫돌이 남긴 무늬가 밤빛을 받아서 시리게 빛났다.
아이는 조용히 단테를 바라보았다. 강인함이 그 눈동자에서 끼쳐왔다. 성도 8궁, 그 역시 블로어가 지정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거인의 한 사람이었다. 단테는 녹색의 눈으로 아이를 읽듯이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검을 꺼내라."
아이는 품에서 장검을 꺼내 말을 따랐다. 하지만 단테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더 명확한 요구를 해왔다.
"그 외신의 힘이 담긴 대검, 그걸 꺼내라."
레바테인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단테 아길리오, 그는 선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