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43화 (143/279)

25. 블로어 ( 3 )

돌아오는 길은 고적했다.

멀리서 불어온 칼바람이 저문 숲을 서걱대며 아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테의 조치 때문에 상의를 잃어버린 아이는, 망토만을 걸친 채로 저벅저벅 길을 걷고 있었다. 어깨가 계속 뻐근했다. 아마도 며칠 정도는 지나야 그 감각에 익숙해질 것 같았다.

"응?"

숲의 초입에서 물컹, 무언가를 밟았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발 밑을 쳐다보았다. 그 정체를 깨닫고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그건 시신이었다.

금지된 숲은 얼마 전 에페 바체 시험이 치러졌던 장소였다. 그 때 많은 사람이 이 숲에서 죽었다. 옷자락은 그 사망자 중 하나로 보였는데, 백골이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숲에 바글대는 짐승과 벌레들이 파먹은 듯싶었다. 아이가 발을 떼자, 인광이 뒤채이는 안공에서 팔뚝만한 지네가 황급히 달아났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유해의 옷을 들춰보았다. 시즙과 썩어가는 살이 뒤엉킨 안쪽에선 구더기와 개미 떼가 부글거리며 난해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자는 죽어서 벌레들의 나라를 건설한 모양이었다. 죽음 위로 과잉된 생명이 포개어진 광경을 아이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단테의 말이 떠올랐다. 무인의 죽음은 소멸이어야 하며, 죽음 위에 무엇인가가 건설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이 자는 자신이 세운 나라를 기뻐하고 있을까.

텅 빈 안공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아이는 잠시 그 시신의 얼굴을 마주 응시했고, 검을 뽑아들었다. 매장을 위해서였다. 클리브 솔리스의 넓적한 날은 삽처럼 쓰기 좋았다. 얼마 안 가 자그마한 흙무덤이 만들어졌다.

'그 검은 거의 연장이로구나, 어린 순례자야.'

림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색유리가 검면에 새겨진 클리브 솔리스는 흐린 달빛도 찬란하게 여과해서 반짝였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이냐, 림은 물었다. 아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집에 돌아온 것은 밤이 한참 깊어서였다. 아마도 단테에게 당해서 정신을 잃은 시간이 꽤 길었던 모양이었다. 밤거리를 희미하게 비추던 기름등도 거의 꺼져서, 담벼락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와 그림자를 건너가듯 벽에 손을 짚어가며 걷던 아이의 눈에 특이한 것이 보였다.

"이거 놓으세요!"

"어허, 밤중에 목소리 높이지 마!"

익숙한 얼굴이었다. 레나가 불량배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손에는 천으로 덮인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만삭인 타니아의 심부름을 하던 중인 듯했다. 레나와 타니아는 재판이 끝난 이후, 레이븐사이드가 재건될 때까지 물건을 납품하기로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입은 은혜를 제하더라도 결코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레나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전에, 그 불량배를 응징하는 사람이 있었다.

"흑!"

빠악! 머리에 돌을 얻어맞은 듯 큰 소리. 털썩 쓰러진 불량배의 뒤에서 나타난 것 또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 에바가 손을 털고 있었다. 레나는 얼굴을 화악 밝히더니 에바에게로 달려가 감사를 표했다. 그 동안 아이는 슬쩍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에바는 쑥스러워하며 레나의 칭찬을 듣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후 일주일 동안, 매일 밤마다 몰래 소렌의 밤거리를 순찰하고 있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저 녀석."

허튼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바는 베들렘이었고, 베들렘은 반쯤 아나테마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활을 쏠 때 작은 발사각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듯이, 에바의 작은 행동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파급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의외성의 덕을 보았지만 이제부터는 변수를 줄여야 할 때였다.

그래서 륜은 에바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야만 일과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도록 요구했는데, 에바는 에바였다. 그런 요구가 에바를 길게 붙잡을 수 없음은 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보람찬 일을 했다는 듯 얼굴을 밝히고 돌아가는 에바를 미행했다.

조심조심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에바는 뒷뜰에 들어가 벽 앞에서 멈추었다. 벽 앞에는 침대 시트와, 각종 담요와 방수포 따위를 묶어 만든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저걸 타고 소리없이 내려와서 밤마다 자경단 일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 뒷모습을 보며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영차, 줄을 붙잡고 올라가려는 에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깜짝 놀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에바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못된 짓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를 보자 줄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미,미안, 잘못했어."

에바는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 표정은 굉장히 기운없어 보였다. 저택의 벽에 나란히 기대어 앉은 아이는 에바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냥,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싶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는 에바. 드미트리와 헤어진 이후로 에바는 계속 풀이 죽어 있었다. 드미트리는 에바에게 친언니와 같은 사람이었고, 이런 형국에 놓여서도 에바는 드미트리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수 없었다. 유아적인 행동이었지만 아이는 그것을 꾸짖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나다니면서 불량배나 찾아다닌 거야?"

"응. 그거 말고도, 고양이 밥도 주고, 이상하게 거리에 놓여 있던 돌도 뽑아다 버리고..."

"어?"

"왜, 왜?"

"그 돌은 마차가 못 지나다니게 하려고 일부러 박아놓는 건데."

"진짜?"

눈이 자주 내리는 소렌에서는,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진창이 생기는 경우가 잦았다. 마차가 그 진창에 빠져 곤욕을 치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을 박아놓은 것이었다. 에바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또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안해. 내가 바보라서. 자꾸 잘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돼."

아이는 조용히 에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까지 에바는 그저 도구로 살아왔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런 삶에서 풀려난 지금 에바는 방황하고 있었다. 그 방황이 이런 밤놀이로 표현된 것일 터였다.

"저기,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에바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이를 쳐다보았다.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런 건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일이라고 하자, 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어쩌면 에바의 십칠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륜의 방.

"뭘 그런걸 망설이나. 그럼 바로 와락 끌어안고 너는 나만 따라오면 돼, 뭐 그런 말이라도 했으면 되지 않나."

물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륜은 피식 웃었다. 단테와의 만남을 보고하기 위해서 륜의 방에 들린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질색했다.

"예?"

"그 아이는 순수한 아이니까. 조금만 강하게 나가면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그 반반한 얼굴은 뒀다가 어디에 쓸 생각이세요."

어이없어하는 아이에게 확인사살하듯 말하는 륜. 이게 명목상이라지만, 자기 약혼자에게 할 말인가? 혹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가, 아이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장난스러워 보여도 농담을 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요는 그 정도로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해야 한다, 이 말일세. 우리에겐 여유가 없어. 에바 후이눔, 그녀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인재일세. 내 낭군을 바쳐서 그녀를 영원히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나는 허락하는 바일세."

"내가 당신 물건입니까?"

아이가 질린 듯 반문하자 륜은 파이프에서 입을 떼고 웃었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그녀의 입술은 묘하게 요염해보였다.

"당신 언니랑, 그러니까 단장님이랑은 하는 말이 반대인데요."

"언니가 뭐라고 했는데요?"

"어, 그러니까, 모든 여자한테 다 친절하게 대하면, 전부 불행해질 테니까, 결혼할 한 사람하고만, 저, 그러라고."

륜은 하얗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과연. 내 언니지만 지나치게 연애관이 고전적이라니까. 그러니 연인도 한 번 못 사귀어봤지."

"당신도 방 안에만 있어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

"어쨌든! 요는 그 정도의 정신으로 무장해달라 이 말이야."

"말 돌리기는 참 잘 하시네요."

아이의 말대꾸에도 불구하고 륜은 뻐끔거리며 말을 끝맺었다.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 부덕이 되는 때도 있는 법일세. 우리가 지금 거의 승산 없는 싸움에 도전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선용할 수 있는 것은 선용해주기를 부탁하는 바일세."

농담으로 시작한 말이었지만 어조는 진지했다. 륜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 나에게 꼭 들려주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아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테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베루스의 정체, 단테가 자신의 몸에 조치를 취해 주어서 선주가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 조치가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것, 단테가 자신에게 성도 8궁이 되기를 권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성도 8궁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이 말인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파이프로 아이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그럼 조디악이 왜 중간에, 에바 대신 자네를 기나센의 통령으로 세우려고 했는지도 설명되는군. 그때 그치들은 자네가 아나테마라는 걸 몰랐을 때인데도 말이야."

"무슨...?"

"그 자들이 자네를 회유할 때, 무슨 명목을 내걸어서 회유했다고 했나?"

"저라면, 성도 8궁이 될 수 있다고...아."

아이는 깨달았다.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큰 나라인 기나센, 그 통령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꼭두각시를 세워서 조디악은 세계를 바꾸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조디악의 핵심적인 모략이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기도 했다. 에바는 베들렘이기 떄문에 그 조건을 충족했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세우려고 한 것은,

"그래. 조디악도 알고 있다는 걸세."

성도 8궁도 아나테마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조디악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실로 레이븐사이드의 적법한 후계자인 아이를 성도 8궁으로 만들어서 내세우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륜은 주섬주섬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언가가 잔뜩 휘갈겨 적혀 있는 빈 공책이었다. 어려운 것을 복잡하게 계산한 듯, 검은 글씨가 빼곡하게 그 서면을 채우고 있었다. 아이가 다가가서 그 공책을 바라보려 하자 륜은 갑자기 공책을 닫더니 보여주지 않았다.

"사과하기 전에는 보여주지 않겠네."

"사과요?"

"아이 씨는 제가 침대에 누워서 지난 일주일간 그냥 뒹굴거리기만 한 줄 알았죠? 그래서 아침에 얼음물을 부었던 거구요. 제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사과하기 전에는 이거 안 보여줄 거에요."

륜은 짐짓 삐진 듯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주일 동안 륜은 자료를 조사하면서 뭔가를 계산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별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아이는 륜의 볼을 꼬집었다. 보여줄 때까지 붙잡고 있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항복한 륜은 공책을 열어주었다.

"이건..."

"나는 이 곳에 누워서 조디악의 다음 모략을 계산하고 있었네. 모략을 엿보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뿌옇게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 자네의 말을 들으니 드디어 그 비밀이 풀렸군."

륜은 모든 모략을 읽어낼 수 있었으나 운명을 바꾸는 존재들에 대한 모략은 읽어내기 버거워했다. 그래서 그 흐릿함을 계산했던 것이었다. 그 공책에는 조디악이 앞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의 예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륜은 펜을 꺼내들어 그 예시들에 찍찍 줄을 그어갔다.

"우선, 대산맥파를 선동해 기나센 내부에서 또다시 정쟁을 일으키는 방법. 이건 보완 전략으로는 아직도 실행 가능성이 높으나, 구심점을 잃어버린 이상 주 전략이 되긴 힘들겠지. 무엇보다 이게 지금 조디악의 주된 모략이라면 내가 보지 못할 리가 없어. 기각."

찌이익, 줄을 긋고 또 다른 모략을 찾아간다.

"암살. 암습. 허나 무모해. 자네를 1대 1로 이길 암살자가 존재할 거라고는, 글쎄, 자네가 오늘 만나고 온 그 단테 아길리오 정도가 아니라면 생각나지 않는군. 이것 역시 기각."

찌이익, 페이지를 넘긴다.

"에바가 잔정이 많다는 것을 이용해서, 에바를 회유해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방법. 글쎄, 이것 역시 생각은 해 두어야겠지. 하지만 이것도 자네의 이야기를 들으니 착수하지 않은 것 같군. 기각."

그런 식으로 한참이나 륜은 줄을 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책에는 단 하나의 전략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건..."

"조디악이 멸망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은 항상 세 군데의 땅을 거느리고 있었다네. 북서 자치령, 기나센, 작센. 고로 그들에게 이 땅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일세. 협상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사안이야. 거기에 그들은 운명을 바꾸기 위한 칼인 베들렘을 잃어버렸지. 이 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무엇이길래 내게 보이지 않는 걸까? 나는 그걸 고심하고 있었다네."

륜은 혓바닥으로 펜촉을 적셔서, 굳은 잉크를 풀어냈다. 긴 선이 남아서 분홍빛의 혓바닥 위로 검게 번져갔다. 륜은 거기에 무엇인가를 끄적였다.

"성도 8궁을 확보해서, 작센으로부터 기나센을 침공하는 것."

이것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게 되겠지.

륜은 그렇게 조용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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