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블로어 ( 4 )
통령의 집은 북쪽에 있었다.
그의 가문인 크레인헤이븐 역시 북쪽에 있었는데, 그보다도 더욱 북쪽이었다. 그다지 윤택한 곳이 아닌 듯 포석은 갈라졌고 늘어진 돌담엔 말라죽은 담쟁이가 무성했다. 문을 열어주는 수위는 무표정했다. 은근한 한기를 느끼며 아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수위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제지했다.
"잠깐, 그건 뭐요?"
허리에 매달린 블로어를 보고 꺼낸 말 같았다. 지금 아이는 통령의 부름을 받아서 저택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저택의 안쪽에서 무슨 말이 오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블로어를 불러내어 허리춤에 차고 가기로 했다. 륜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침을 삼켰다.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날붙이를 거두어가려는 것인가? 하지만 수위는 기름먹은 듯 흰 빛으로 윤기나는 가죽칼집을 보고 감탄할 뿐이었다.
"좋은 검이군. 들어가시오."
철컹, 문이 닫히는 쇳소리를 뒤로 아이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허술하지 않나?"
'별로. 사정을 알고 나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네.'
륜의 말은 블로어를 통해서 들려왔다. 그녀는 통령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통령은 가문에서 홀대를 받고 있었다. 얀 하세팔로스, 그는 통령이자 가주였다. 첫 임기에서 그는 통령으로서의 책무를 가주로서의 책무보다 앞세웠다. 줄곧 그랬다. 기나센의 국익과 가문의 국익이 충돌할 때, 그는 기나센의 이익을 우선시했고 때로는 나라를 위해서 가문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불만의 누적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개인의 영광을 챙기지 않고 나라를 지켰다는 평가와, 개인의 영광을 위해 가문을 희생시켰다는 평가를 동시에 들었다.
이 경원시는 그 시절의 여파였다. 첫 번째 임기에서 그렇게 명성을 쌓아올린 그는 두 번째 임기부턴 달라져서, 자신이 쌓아올린 명성을 소모해서 국정을 수행해나갔다. 그에게 소모당할 뻔한 사람치고 륜의 평가는 객관적이었다.
'그러니 특별히 경호 병력을 내줄 필요도 없고 의전을 챙겨 줄 필요도 없다 이거지요. 얀 하세팔로스는 크레인헤이븐의 일원이 아니고, 어느 누구의 소속도 아니다. 그런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리고 블로어에서 손을 놓았다. 응접실은 저번에 보았던 비밀 가옥의 응접실보다도 소박했다. 나쁜 말로는, 초라했다. 하녀도 없이 스스로 차를 끓여서 그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다네. 젊은 가주."
푸근한 인상으로 그는 말했다. 소매가 넓은 밤갈색 옷 속에서 그는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다. 그저 그런 사회적 의식에 불과한 말 몇마디가 오간 끝에 통령은 드디어 본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에 나는 젊은 가주가 가문을 재건하는 걸 돕겠다고 약조했었지. 오늘 드디어 그 첫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불렀다네."
아이는 다소곳한 척 책상 아래로 블로어를 붙잡았다. 통령의 말을 륜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숙였다. 옅은 찻물 위에 흰 불빛이 깔려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통령은 자신의 잔을 홀짝 들이마시며 말했다.
"지난 일주일간, 특무국과 기나센은 총력을 기울여 헤이든을 조사했다네. 그 일주일간의 조사만으로, 나라를 뒤엎기 위해 외적과 공모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지."
헤이든, 24가문의 말석이던 그 가문은 조디악의 손을 잡아서 위로 올라서고 싶어했다. 원래부터 그들은 용병단이라기보단 상인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다른 용병단들이 기나센의 명예를 더럽히는 걸 극도로 꺼려서 정예만을 가려 뽑을 때 그들은 저급한 패들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모은 이들에게 허명을 씌워 비싼 값에 파견하기를 즐겼다. 다른 이들이 쌓아올린 명예를 소모해서 돈을 버는 행위나 다름없었고, 그래서 원래부터 경멸어린 시선을 받던 이들이어서, 쌓은 원한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부정을 공표하고 처벌하려 할 때, 수많은 가문에서 수많은 요청이 들어왔다네. 복수권을 사용하여 가문전을 열어서 자신이 그 처벌을 대신하겠다는 요청이었지."
"설마. 그런 이유는 아닐 것 같습니다."
"호, 젊은 가주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나?"
통령이 고개를 들자 외알 안경이 흰 빛으로 가득 빛나서, 그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블로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금화는 피가 묻든 오물이 묻든, 가치가 변하지 않는 물건입니다. 헤이든은 부정한 방식이라 해도 어쨌든 수많은 재산을 쌓았죠. 가문전의 승자는 그 재산을 가져갈 정당할 권리를 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가문전을 승인할 권리는 나에게 있지. 그럼 젊은 가주, 자네는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겠나?"
통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말한 선물인 모양이었다. 아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통령은 외알안경을 벗어서 옷자락으로 닦았다. 통령은 말했다.
"자네에게 그 가문전의 권리를 주겠네. 승리하게."
그것을 위해서 뇌물을 동반한 숱한 청탁을 모두 물리쳤다고 답했다. 헤이든은 말석이라도 어쨌든 24가문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쌓은 재산이나, 가지고 있는 업장은 중위권을 넘어 상위권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 자산을 빼앗을 수 있다면 확실히 레이븐사이드를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이가 망설이자 통령은 추가적으로 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력이 약간 모자라 24가문에 속하지 못한 중견 규모의 용병단에서, 가문전에 대한 청탁이 쇄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견 규모의 용병단을 명가로 만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기회라는 말도 뒤따랐다. 하지만 아이가 망설이는 건 다른 것이었다. 블로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마도 그 청탁에 뒤따를 조건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조건은 몰살입니까?"
몰살. 그 단어는 두 음절만으로 공기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통령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힘겨운 일을 버텨내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도 고개를 숙였다. 찻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흔들렸다. 손가락으론 블로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죽의 감촉이 손바닥 가득 번져서 손금의 잔무늬로 쓰리게 퍼져갔다. 한참이나 그렇게 침묵의 대치가 계속된 가운데,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통령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 사람은 어쨌든 좋은 정치인은 되지 못하겠군.'
륜은 그렇게 평했다. 아이는 딱딱한 얼굴로 머릿속 한 켠에서 울리는 그 음성을 듣고 있었다. 머릿속의 다른 한 켠에선, 몰살, 그런 단어가 칼날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몰살.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박멸. 통령이 그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곧 있을 통령 선거에서 헤이든은 어쨌든 대산맥파의 후보를 지지할 것이 확실하니까. 권리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다면 그 자는 대산맥파에 표를 행사하겠지. 어떤 권리자도 남기지 않는 확실한 멸문이어야만 그 표 하나를 증발시킬 수 있을 게야. 그러니 아마 통령은 몰살을 요구할 걸세.'
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륜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흐린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던 아이는 통령이 좋은 정치인이 못 될 거라는 륜의 말에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너무 양심적이니까.'
륜은 담담한 어조였다.
'헤이든은 이미 더할나위 없는 정적이자 악적일세. 이토록 정당하게 죽여도 될 적도 없을 게야. 그런데 자네에게 그렇게 좋은 기회를 주면서도, 그 몰살 하나가 마음아파서 저렇게 빚을 지는 양 굴고 말로 대답조차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겠나.'
"그런...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정치인입니까?"
'그래. 자네 같은 부류는 절대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지.'
한 호흡 쉬더니,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륜은 계속 통령의 제안에 대한 해석을 늘어놓았다.
'이 제안으로 통령은 세 가지를 노리고 있다네. 첫 번째, 본보기. 이미 조디악의 침투는 너무 공공연해졌어. 알게 모르게 뒤에서 조디악에게 협력한 가문도 많을 걸세. 한 가문 정도는 참혹한 숙청을 겪어야 그 죗값이 치러지겠지.'
륜은 말했다. 어조가 바뀌어 있었다.
'영리한 점은 일부러 가문전의 형식을 취할 수 있도록, 헤이든의 치부를 공표한 거에요.'
"그게? 어째서죠?"
'치부를 공표하자 소산맥파의 가문들은 옳다꾸나 가문전을 신청했죠. 소산맥파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그런 심정이었을지, 아니면 그냥 눈 앞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었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산맥파의 가문들도 가문전을 신청했어요.'
륜은 또다시 어조를 바꾸었다.
'그말인즉슨, 이걸로 대산맥파가 가지고 있던 암묵적인 상호간의 신뢰를 전부 깨부쉈다고 할 수 있지. 약해지면 동료에게도 이빨을 들이민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이제 누가 서로를 믿을 것인가?'
"아."
륜의 말은 명쾌했다. 과연 모략의 신다운 통찰이었다. 그녀는 거의 읽듯이 통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신청을 잔뜩 받아서 공개해놓고서는, 정작 숙청은 자네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두 번째 의도를 읽을 수 있지. 통령은 은혜를 베풀고 싶은 걸세. 나와, 자네에게.'
이건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륜의 다음 말은 당연하지 않았다.
'모략을 꾸미는 자가 은혜를 베푸는 건, 절대로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닐세. 그건 일종의 투자야. 통령은 자네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하며, 또 그것을 사방에 공표하고 싶어해. 그 이유는 세 번째 의도에서 찾을 수 있지.'
륜은 존댓말로 이어 말했다. 이런 종류의 대화가 늘 그렇듯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는 당신과 대산맥파를 분리해내고 싶어해요.'
대산맥파.
얼마 전부터 야만인의 침입, 외신의 침입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세졌다. 아지프는 그 방어를 위해서 용병을 희생시키기를 즐겼고, 기나센이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양도 이루말할 수 없이 커져갔다. 민중은 분노했다. 대산맥파는 그 희생으로부터 말미암은 분노를 먹고 자라난 세력이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제국에게 시달리는 이유는 힘이 없기 때문이며, 작센과 통합해서 힘을 기르고 제국과 교섭해야 한다는 요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요구는 정당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언덕에선 정당한 요구는 이뤄질 수 없는 경우가 더 잦았다.
'죽더라도 명예롭게 싸우고 죽자는 자들이 대산맥파, 그리고 그런 자들조차 살려서 집에 돌려보내야 하는 게 소산맥파. 통령은 후자에 속하고, 그리고 희생당한 명가의 유일한 후손인 자네와 나는 명백히 전자에 속하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확히는, 아지프의 횡포에 분노하는 민중과, 대산맥파는 별개의 세력이란 말일세. 대산맥파는 그저 그들을 대변한다는 명목을 쥘 뿐이야.'
아이는 슬슬 륜이 하려는 이야기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은연중에 대산맥파로 분류되던 자네가 앞장서서 대산맥파인 헤이든을 쳐부순다면,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자네와 대산맥파를 분리해서 인식하게 되겠지.'
"그 다음에는..."
'통령은 대산맥파가 받고 있는 민중의 지지를 자네에게로 돌릴 생각인 걸세.'
블로어를 쥔 채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마지막 말은 눈 앞에서, 륜의 육성으로 들려왔다.
"자네를 다음 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산맥파도, 소산맥파도 아닌 사람. 그런 사람을 통령으로 만들어서 전쟁을 막고자 하는 것이 통령의 생각이었다. 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륜의 말 뒤에는 이런 사정들이 얽혀 있었다. 륜은 엷은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물었다.
"그런데도 거절할 수는 없겠지. 안 그런가?"
아이는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섰다. 내심 초조한 듯 륜은 속눈썹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바라보던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든을 멸문시키는 가문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의 표시였다.
그 끄덕임은 아까 통령의 끄덕임과 더없이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