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45화 (145/279)

25. 블로어 ( 5 )

가문전의 소식은 순식간에 기나센 전체로 퍼져나갔다.

통령의 관저에는 각지에서 찾아온 사절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격렬하게 비분강개하거나, 항의하거나, 애원했다. 통령은 떨리는 손으로 잎담배를 피며 그들을 맞았고, 사절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윽고 레이븐사이드가 헤이든과 가문전을 벌인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명백한 특혜였다. 그러나 누구에 대한 특혜인지는 말이 엇갈렸다. 누군가는 큰 재산과 세력을 확보할 기회를 얻은 레이븐사이드에 대한 특혜라고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의견은 달랐다. 헤이든에 대한 특혜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대다수가 헤이든의 승산을 더 높게 쳤기 때문이었다.

재판장에서 보여준 아이의 힘은 굉장했지만 그래봤자 고작 한 명이었다. 거기에 개인적인 친교로 뭉친 몇 명이 더해져봤자 가문전을 수행해낼 수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웅크려서 벌벌 떨던 헤이든은 한 가닥 희망을 얻었다. 그들은 오호창을 소집했다.

오호창. 그것은 헤이든에 소속한 자들 중 가장 강한 다섯을 일컫는 말이었다. 헤이든은 원래 창을 중시하던 무가였다. 그 전통의 명맥만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어서, 헤이든은 그들만은 정예로 가려 뽑았고,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시켰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그들이 소집되었고, 이 다섯을 중심으로 가문전의 작전이 수립되었다.

가문전의 규칙은 간단했다. 마당에 종을 걸어두고, 가주는 가문을 상징하는 보검을 패용한다. 상대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종을 울리고, 가주를 쓰러뜨려 보검을 빼앗으면 승리하는 것이었다. 헤이든은 상대의 수가 적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기지 못하더라도 지지 않을 작전을 세웠다. 날이 밝자마자 구름처럼 저택을 포위하고 무가치한 병력을 축차투입하여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때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하면 가문전은 끝이었다. 아이를 비롯 정예가 공세를 위해 자리를 비우면 바로 저택이 위험해지도록, 포위망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의 내용은 륜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륜은 개미지옥 같은 수성전을 계획했다.

"알겠나. 몰살일세. 몰살."

륜은 아이에게 여러번 다짐을 받았다. 어차피 통령이 몰살을 조건으로 내건 이상, 이 쪽의 전략적 목표는 보검의 탈취 따위가 아니라는 게 륜의 설명이었다. 아이는 정면에서 문을 방어하며 들어오려는 적을 죽이고, 에바가 사기를 잃고 달아나는 적을 죽인다. 비제와 에어비스는 저택을 엄호한다. 그런 전략이 성립되었다. 당부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실력을 다 보이지 말게. 지친 것처럼, 위기에 빠진 것처럼 연기하면서 계속 적을 끌어들이게."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이려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 뒤따랐다. 아이는 작전의 내용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지금 여기에 있구나, 어린 순례자야.'

림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가문전 당일의 새벽, 아이는 륜이 지정해준 자신의 장소에 있지 않았다. 아이는 지금 높은 고목의 굵은 우듬지 위였다. 두꺼운 줄에 매달린 금종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 곳은 헤이든의 안마당이었다.

지금, 아이는 수비 대신 공세를 취할 생각이었다. 숨죽여 엎드린 채로 동터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나센의 눈 덮인 영봉 위로 해가 솟아올라서, 보랏빛으로 뒤엉킨 어스름을 말갛게 녹여냈고 가늘게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어둠은 사위어갔다. 가문전의 시작을 알리는 일출이었다.

"흡!"

종 앞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목을 붙잡고 켁켁댔다. 나무에서 떨어진 아이가 번개처럼 그 뒤를 잡고 목을 조였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앞으로 거꾸러졌다. 바닥에서 클럽을 주워든 아이는 그것으로 종을 크게 후려쳤다.

뎅, 뎅, 뎅ㅡ

세 번 연달아 종이 울리자 출정을 준비하던 헤이든의 저택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종의 떨림은 깊었다. 소리는 나뭇결을 타고 올라와서 손아귀에서도 맴돌았다. 클럽을 내던진 아이는 조용히 속삭였다.

"림, 블로어."

아이의 손아귀에 은빛의 검이 차올랐다. 움켜쥐자 당황한 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씨,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쩡!

칼날과 창날이 부딪히는 쇳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당의 이상을 눈치채고 달려나온 자가, 아이를 보자마자 문답무용으로 창날을 앞세워 덤벼든 것이었다. 창날에는 푸른 신기가 타오르고 있었고 가슴보호대에는 이빨 다섯개가 새겨져 있었다. 이 자가 오호창의 다섯 번째 창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검과 뒤얽힌 창날은 츠츠츠 불똥을 튀기며 검면을 미끄러졌다. 내려온 창날은 아이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교착 상태에서 찌르기로 나아가려는 의도였다. 아이는 신기가 푸르게 넘치는 창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놀란 상대가 흡, 숨을 들이쉬기도 전 창날은 부서졌다. 쪼개진 파편이 사방에 흩날렸다.

"무슨?"

아이는 그대로 창대를 빼앗아서 뺨을 후려쳤다. 쩍! 이빨이 부서져나가며 뺨에 붉은 상흔이 남았다. 멈추지 않고 달려들어서 블로어를 깊게 쑤셔넣었다. 옷을 꿰뚫고 살점을 찢어발긴 칼날은 심장에 깊게 틀어박혔다. 손잡이로 적의 맥박이 느껴졌다. 이 맥박은 아마도 륜에게도 전달되고 있을 것이었다. 왈칵, 핏물을 토하는 상대의 상반신을 앞발로 걷어차서 칼날을 뽑아냈다.

'희생을 줄이고 싶은 건가요?'

저벅저벅, 관저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아이에게 륜은 그렇게 물었다. 아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생각하기에, 몰살은 투표권을 가진 헤이든의 수뇌부를 몰살시키는 것이면 충분했다. 아이는 통령과 륜의 정치적 의도에 완전히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블로어 너머에서 긴 한숨이 들려왔다.

'한 시간. 한 시간이면 가주는 탈출을 시도할 걸세. 최대한 빨리 끝내주길 빌겠네.'

아이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저택의 안에 들어서자 어중이떠중이들이 우르르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병장기를 쥐어잡은 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블로어를 집어넣고, 일부러 사납게 외쳤다.

"림, 레바테인!"

복도 전체를 관통하고도 남을 커다란 대검이 아이의 손에 생겨났다. 신기를 불어넣자 붉은 대검은 횃불처럼 붉게 빛났다. 힘을 주어 크게 휘둘렀다. 쫘자자작! 대검은 폭음을 일으키고 양 벽을 전부 쳐부수며 사방에 돌조각을 흩뿌렸다.

"뭐, 뭐야."

이 압도적인 무력 시위 앞에 적들은 전율했다. 또 검을 휘두르자, 이번엔 기둥이 깔끔하게 베여나갔다. 경비대장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후퇴를 독려했다.

"저 미친놈, 이 저택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도망쳐!"

헤이든은 오호창 외에는 남은 에페 바체가 없었다. 가주는 늙었고 후손이라곤 젊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륜이 들여다본 계획에서, 그들은 여러 기관장치가 마련된 저택에 숨어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저택을 쳐부수면 된다. 그게 아이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래야 내 사도답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림은 만족한 듯 중얼거리며 레바테인의 검끝을 바라보았다. 저택을 떠받치는 기둥은 열두 개, 그 중 여덟 개만 부숴도 저택의 붕괴는 확실했다. 아이는 말없이 레바테인을 세게 붙잡았고, 휘둘렀다. 세 번째의 기둥이 굉음을 내지르며 부서질 때, 아이는 자신을 덮쳐오는 공세를 느낄 수 있었다.

"죽어!"

한 명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이번에는 두 개의 창날이 얽히듯 어깨와 무릎을 노리고 덮쳐왔다.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의 오호창이었다. 레바테인을 휘두른 후의 빈틈을 노린 일격이었다. 그들은 합격에 능숙한 듯 피하기 어려운 두 곳을 동시에 찔러왔다.

유령처럼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아이는 두 찌르기를 모두 피했다. 창대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어 넷째의 이마에 박치기를 갈겼다. 빡! 큰 소리. 적의 이마가 깨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질한 틈을 타서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손도끼를 꺼냈고, 목을 후려쳤다. 도끼날은 목뼈를 쳐부수고 깊게 박혀서 핏물 속에 뼛가루를 휘날렸다. 넷째는 허옇게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

"이, 개자식이!"

분노에 찬 일갈과 일격이 등을 노리고 달려왔다. 아이는 다시 검을 불러냈다. 이번에도 블로어였다.

스학!

천을 베는 듯한 소리. 빙글 회전하며 사선으로 올려친 블로어는 창대를 토막치고 셋째의 왼팔을 베어냈다. 잘린 하박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강자로 불렸던 자의 긍지인가, 셋째는 그럼에도 비명 하나 흘리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짐승처럼 달려든다. 아이는 허리를 틀어서 그 입 깊숙히 주먹을 꽂아넣었다. 주먹은 이빨을 쳐부수고 깊이 박혔다. 손목에 잇자국이 남았지만 상처는 경미했다. 뒤로 쓰러져 버둥거리는 셋째의 배를 밟고, 심장에 블로어를 꽂아넣었다. 또다시 진한 맥박이 검날을 타고 역류해서 손 끝에서 고동쳤고, 멎었다.

'아이 씨, 설마.'

"아프죠? 아플 리가 없는데도."

륜의 말에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금의 맥박 역시 륜에게 전달되었다. 생명을 거두어가는 감촉은, 환통인가, 아플 리 없을 텐데도 지독하게 시렸다. 비릿한 혈향 때문에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스윽, 코를 문지르자 손에 묻은 핏자국이 뺨에도 길게 남았다.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걸어나갔다. 피로 젖은 발자국이 점점이 길게 늘어졌다. 일곱 번째의 기둥을 쳐부수자 드디어 명확한 이상이 느껴졌다. 집이 기우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천장은 후들거리며 돌조각을 쏟아냈고, 복도 구석에서 쥐떼가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여덟 번째 기둥에 다다랐을 때, 거기에는 선객이 있었다.

"자네가 레이븐사이드의 새 가주인가?"

눈에 진물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고 허리는 접힌 것처럼 구부러졌다. 아이는 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헤이든의 가주가 틀림없었다. 이 노인과 젊은 아들로 구성된 가주 일가는, 함정이 가득한 4층에서 웅크리고 숨어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 함정을 건너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터였으므로 달아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1층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를 끄는 자는 창을 비끄러매고 있었고, 가슴에는 두 개의 이빨이 새겨져 있었다. 저 자가 오호창의 둘째인 모양이었다.

"이래뵈도 내가 관상은 조금 볼 줄 안다네. 자네의 영용함은 틀림없이 영웅의 관상이군. 그런데 이 늙은이가 늙어 눈이 침침해져서, 사람을 잘못 보고 큰 폐를 끼치게 되었네."

노인은 애걸하는 가운데서도 마지막 품위는 잃지 않은 듯 보였다. 휠체어에서 내려온 그는 떨리는 무릎으로 나직이 엎드렸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내 가문이 저지른 폐는 내 목숨으로 끝내주길 비는 바일세."

"아드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죽었다네. 내가 자결시켰어. 4층에 올라가면 시체와 보검을 확인할 수 있을 걸세."

아이는 뜸을 들였다. 또다시 블로어를 꺼내서 노인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늙은 사람 특유의 젓국 냄새 가운데서, 혈향이 몽글거리며 피어올랐다. 죽은 노인은 웃고 있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와 아들은 어디로 달아났습니까?"

둘째를 바라보며 아이는 당연한 것을 묻듯이 말했다. 둘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륜의 모략을 빌릴 것도 없이 자명한 일이었다. 이 자가 내려왔다는 것은 아들 역시 일층으로 내려왔다는 뜻일 테고, 가장 강할 터인 첫째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아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죽음을 청한 것일 터였다. 어울려준 것은 그저 노인이 만족 속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자비일 뿐이었다.

"글쎄. 내 시체한테 물어보지."

이호는 그렇게 외치며 등에 비끄러맨 창을 꺼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창대도 전부 묵직한 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림, 레바테인."

이번에는 레바테인을 불러내었다. 양측의 기합성이 울리고, 한 번의 충격으로 결론은 났다. 레바테인은 이호의 창과 몸을 쪼개 부쉈을 뿐만 아니라, 등 뒤의 여덟 번째 기둥도 가루로 쳐부쉈다. 가슴의 절반이 뜯겨나간 둘째는 왈칵,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휘청이던 저택이 무너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우르릉,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저택은 아래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넓게 피어오르고, 비릿한 피냄새 사이로 돌가루가 흩날렸다. 그 자욱한 연기에서 아이는 저벅저벅 걸어서 빠져나왔다. 헤이든의 병사들이 저택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으나,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귀 같은 아이의 모습을 보곤 아무도 가로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난리통에 머리를 묶은 끈이 풀어져서 긴 흰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비켜 주십시오."

아이가 말하자 길이 열렸다. 병사들은 아우성치며 아이의 앞길을 막지 않으려 애썼다. 돈으로 끌어모은 오합지졸들의 은의라는 건 결국 그 정도였다. 그들이 길을 열어주었으므로 첫째의 오호창과 아들을 추적하는 일은 쉬웠다. 그들은 금지된 숲으로 달아났다. 아이는 추적자의 기술 덕분에 금세 그들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한참을 뛰어간 아들은 피로로 정신이 나가서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고, 첫째는 그를 돌보고 있었다.

아들의 허리춤에선 금빛의 보검이 반짝였다. 장식술에 용의 어금니가 매달려 있는 보검으로, 검의 이름은 그 용의 이름을 따서 적명이라 했다. 레이븐사이드의 블로어와 같은, 헤이든 가문의 보검이었다. 아이는 그 검을 바라보며 그들 앞에 나타났다.

"결국 도착했군."

안색이 파랗게 질린 아들과 달리 첫째는 아이를 보고도 태연했다. 아이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헤이든은 무인 집단이라고 보긴 힘든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최정예인 이 다섯 명은 하나같이 훌륭한 무인이었다. 예우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짐승의 이빨을 닮은 검을 불러냈다.

"림, 유혼."

늘씬한 흰 날이 이빨을 드러냈다. 어디선가 불어온 소슬한 바람이 나뭇잎을 서걱대서 숲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첫째는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뻗쳐왔다. 머리, 눈, 가슴, 팔, 다리. 한 번에 다섯 곳을 찌르는 일격이었다. 그들의 절기임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허리를 투포환 선수처럼 굽혔고, 크게 휘둘렀다. 호를 그리는 유혼의 참격은 다섯 번의 찌르기를 모두 봉쇄했고, 철창과 부딪혀 창을 쪼개곤 가슴팍에 처박혔다. 털썩, 승부는 났다.

"그 검, 이름이 뭔가."

쓰러진 첫째는 피를 왈칵대며 물어보았다. 그는 원한을 남기지 않는 듯했다. 아이는 중얼거렸다.

"유혼. 깊고 그윽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검이군. 그런 혼잣말을 마지막으로 첫째는 세상을 떠났다. 오른쪽 눈을 미처 감지 못했을 때, 심장이 먼저 멈추었다. 허리를 굽혀 눈을 감겨주고 아이는 일어섰다. 유혼을 길게 늘어뜨리며 저벅저벅 아들에게 걸어갔다. 그는 떨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적명이고 재산이고 다 줄 테니까, 제발!"

"아니, 검을 뽑으십시오."

유혼을 던진 아이는 다시 블로어를 뽑아들었다. 기회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결투로 명예롭게 세상을 떠날 기회를.

"아니야, 너 같은 괴물하고, 무슨 어떻게, 어쩌란 말이야!"

그러나 아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벌벌 떨 뿐, 오호창처럼 명예롭지도 깨끗하지도 못했다. 쉬이익, 사타구니에서 뜨겁고 축축한 것이 흘러나왔다. 아이는 눈을 찌푸렸다. 블로어를 아들의 가슴에 깊숙히 꽂아넣었다.

"헉, 커헉, 제발..."

그러나 그토록 추한 죽음이라도, 심장의 맥박은 또 검의 피고랑을 타고 올라가서, 손끝에 기묘한 떨림을 남겼다. 이 떨림 역시 륜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아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허리춤에서 적명을 꺼내어 회수하고, 아이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잘 수행했네. 이걸로 가문전은 마무리야.'

밝으려 애쓰는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땠나요."

그 한마디만으로 륜은 아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도 당신은 좋은 정치인이라는게, 될 수 있을 것 같나요?"

륜은 지금까지 역사책을 보듯이 세상을 읽어왔을 것이었다. 륜은 헤이든보다 더 정당하게 처리해도 될 악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 악적들이라도 죽을 때 남기는 메아리는 깊었다. 그 메아리는 문자나 기호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도 그 떨림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아이는 그 메아리를 전해주고 싶었다. 륜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했고, 물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조디악이 작센을 먹어치우고, 성도 8궁을 앞세워 기나센에 쳐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륜은 간단한 해답을 제시했다.

'간단하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일세. 상대가 성도 8궁을, 그리고 기나센을 가지려 한다면, 우리가 그 모든 걸 가져가면 되지 않겠나.'

물담배를 빨아들인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성도 8궁이 되고, 또 기나센의 통령이 되어주면 된다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륜은 말했다.

'그 뿐만이 아니야. 이 세상의 모든 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모두 가져서, 나와 함께 세상을 지켜 주게. 왜냐면, 그런 힘을 보관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는 말일세.'

눈 덮인 산맥의 위도, 바다 깊숙이도 아닌, 자네처럼 바보같을 정도로 착한 사람의 손아귀 안일 테니 말일세.

륜의 말은 그렇게 끝맺었다. 아이는 그러나 륜의 그런 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토록 많은 죽음의 메아리를 건너온 자신이, 과연 륜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일지. 륜이 그 떨림을 알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그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블로어로 사람들의 숨통을 끊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답은 빨랐고, 또 확실했다.

'물론. 나는 여전히 확신해.'

이전과 달리 그 말꼬리는 희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지만, 내용은 같았다.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일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블로어에서 손을 놓았다. 숲의 천장을 덮은 나뭇잎 사이로, 아침의 햇볕이 부서져 쏟아지고 있었다. 그 엷은 빛을 얼굴에 받으며 아이는 입김을 토했다. 더운 몸속에서 찬 세상으로 흘러나온 입김은 하얗게 얼어서 스러졌다.

한 시간만에, 가문전은 그렇게 레이븐사이드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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