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46화 (146/279)

26. 연기 ( 1 )

그 다음날부터, 가문전의 사후 처리가 시작되었다.

헤이든의 안살림을 맡아 했던 총관은 사치가 몸에 배여 있었다. 아마도 가진 옷 중 가장 검소한 옷을 고른 것일 텐데도, 승자인 아이와 륜의 복장보다 화려해서 곳곳에서 금사와 고급 단추가 반짝였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정말로, 정말로 밀알 한 톨 소금 한 알갱이도 안 남기고 전부 고해 바친 겁니다. 노, 높으신 분들께서 어떤 뜻으로 계속 반려하시는지, 이해가..."

륜은 기다란 곰방대로 담배를 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야 이중 장부니 그렇지 않겠나."

"이이이이중 장부요? 하이구, 당치도 않은 말씀을! 10년치나 이중 장부를 쓰는 놈이 대관절 어디 있단 말씀입니까?"

륜은 피식 웃었다. 총관도 멋모르고 멍청한 웃음을 마주 지었다. 그 옆에서 아이는 적명을 품에 쥔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웃던 륜은 곰방대로 총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자네 말이 맞다네. 1년이나 2년이면 모르겠어. 10년치나 가짜 기록을 가져다주니 아무리 우둔한 나라도 눈치를 채는 것 아니겠나."

"무, 무슨..."

"흉년이어도 풍년이어도, 식수가 늘어나도 줄어들어도 급양 비용이 변동폭이 거의 없지 않나. 이 해는 수해로 쌀을 구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터인데도 쌀을 9할, 밀을 1할 비율로 급양했다고 되어 있군. 자네들 식구들은 혹시 쌀밥을 매우 좋아하나?"

륜의 말을 들은 총관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에에에... 아주, 아주 쌀을 좋아해서, 특별히 그 쪽으로..."

"근데 왜 전년도와 총 비용이 비슷한가."

륜의 말에 총관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장부를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계집이 괜히 나선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양으로 자료를 내놓으면 대충 훑어보다 말 줄 알았다. 그런데 슥 훑어본것 만으로, 그런 지엽적인 부분에서 이상을 찾아낼 줄이야? 눈을 끔뻑거리는 총관에게 륜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매각했다고 보고하고 빼돌린 유물이나 물자들을 보관하는 창고. 그게 어딨는지도 말하게."

"예?"

총관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 되어서 눈을 껌뻑거렸다. 륜은 한심하다는 듯 곰방대로 장부의 끝을 가리켰다.

"재작년에 분명 헤이든에서, 오랜만에 발굴된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을 하나 낙찰받았다고 들었다네. 위험한 물건이라 바로 팔았다고 들었네만, 그럼 이건 뭔가. 왜 그 이후로 이렇게 보관 비용이 배증됐는가?"

"그, 그건, 어, 어.."

"그 투창은 조심히 다뤄야 해서, 마법진이 설치된 특제 창고가 필요하지. 이건 그 유지비용 아닌가."

"아니, 아니, 그건, 어, 쥐떼가..."

그 말을 들은 륜은 다시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재미있는 쥐떼군. 요즘 쥐새끼들은 마법 시약도 파먹나?"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시약 비용 역시 높은 폭으로 증가한 것을 짚으며 꺼낸 말이었다. 총관은 정말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정수리가 보이도록 납작 엎드릴 뿐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 저, 남은 가솔들이, 먹고 살 방도가 필요해서, 그만...!"

이중 장부를 써서 재산을 빼돌리려 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이칼마로이의 투창, 그건 신기를 담아 내던졌을 때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창이었다. 그 위력은 6위계의 마술사가 쏘는 굉혈포에 버금갔고, 내던지면 산산조각나서 사라지는 소모품이었다. 원래 100여개가 존재했던 그 창은 지금 서른 개도 남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 창은 야망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기를 탐내하는 물건이었다. 마술사 아닌 자가 마술사를 죽일 수 있게 해 주며, 평범한 읍성은 일격에 부숴버릴 수 있다. 단 하나로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릴 수 있는 물건이 귀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유물이라서 숫자도 한정되어 있으니, 이게 출토라도 되는 날에는 온 센디엘이 들썩일 정도였다.

자연 그것을 소유한 자에 대한 견제도 극심했다. 헤이든은 그 견제가 두려워, 더 비싼 값에 다른 곳에 팔아넘기기 위해서 낙찰받은 양 숨기고, 비밀리에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을 보관했던 것이다. 아주 비밀리에 보관하기 위해 기나센 산골짜기 끝자락에 숨겨놨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가문전이 일찍 선포되었다면, 조금만 더 숨긴 창고가 가까웠더라면 레이븐사이드 저택이 그 창을 맞을 뻔했다.

총관이 이 창을 빼돌리려고 했던 목적은 명확했다. 이 창 하나만 빼돌려도, 헤이든에서 쫓겨나게 생긴 모든 가솔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들킨 총관은 지금 눈 앞에서 절벽이 무너져내리는 심정이었다.

륜은 곰방대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천천히 총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그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솔들은, 우리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일정량의 생계를 지원하겠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예?"

총관은 헛것을 들은 양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륜은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짓고 확언할 뿐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바깥사람이 굳이 그런 방식으로 가문전을 처리한 건, 동포가 피흘리는 걸 보기 싫어서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그 동포가 거리에 나앉거나 산적이 된다면, 바깥사람의 큰 뜻이 흐려지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총관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해졌다. 병 주고 약 주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총관의 몸은 본능적으로 지금 해야만 할 일을 실행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비로우십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도록 뼈에 새기겠습니다!"

여전히 상냥한 얼굴로 총관의 등을 두드리는 륜을 보며, 아이는 살짝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

총관이 떠나간 후.

륜은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또 무언가를 잔뜩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륜이 요리를 잘 하지 못하고, 또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인 탓에, 기본적인 소양은 교육받은 아이가 가사 담당이 되었다. 따끈한 버섯 수프를 끓여서 벙어리장갑을 끼고 냄비를 나르던 아이는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혹시 앉거나 서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습니까?"

륜이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은 좋았다. 문제는 자세였다. 륜은 얇은 베이지색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 나뭇바닥에 엎드려서 골똘히 공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지가 묻는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밥 먹어야죠. 더 늦게 먹으면 자다가 탈나요."

턱, 턱, 수저를 내려놓고 밑준비를 마친 뒤 채근해도 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한숨을 쉬고 륜에게 다가가,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올렸다. 실크 잠옷의 부드러운 촉감이 사락사락 손에 번졌다. 들어올린 륜을 털썩, 식탁 앞 의자에 내려놓듯 앉혔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부모 같은 행동이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이것까지는 계산을 마쳐야..."

그럼에도 계속 공책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륜의 입에 무언가가 들어갔다. 스프를 담은 스푼이었다. 입에 들어온 걸 오물오물 받아먹은 륜은, 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손 있으니까 직접 먹어요."

괜히 부끄러워져서 수저를 내려놓자, 륜은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입을 벌린다.

"오늘 저 덕분에 큰 물건을 얻어냈잖아요. 이 정도 상은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을 말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륜이 아니었더라면 그 귀중한 물건을 눈 뜬 채로 잃어버릴 뻔 했다. 눈을 감고 입을 더 크게 벌려서 채근해온다. 어쩔 수 없지.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스프를 떠서 륜의 입에 밀어넣었다. 하지만 그냥 넣지는 않았다.

"윽, 버섯을 한 스푼에 두 개나?"

"몸에 좋은 거니까 꼭꼭 씹어 먹으세요."

륜은 편식도 심한 편이었다. 과자나 홍차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여서, 이렇게라도 억지로 먹이지 않으면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단 한 가지 경우,

"그래서,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계산하고 있습니까?"

모략을 꾸미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물우물 버섯을 씹어 삼킨 륜은 자랑스레 공책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난해한 구조도가 그려져 있었다.

"오늘 행동으로 자네가 통령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계산하고 있었다네. 내 계산으로는, 1할은 늘어났어."

"행동?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을 얻은 것으로요?"

"아니. 헤이든의 잔존 세력에게 자비를 베푼 것으로."

아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헤이든에 그저 고용되었을 뿐인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무국적자가 되어 쫓겨나는 건 아이도 바라지 않던 터였다. 그래서 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의의를 두지도 않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륜은 자랑스레 공책을 두들기며 말했다.

"이런 방면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네. 만약 자네가 나와 통령의 말대로, 헤이든을 몰살시키는 것을 택했더라면, 우리의 속한 진영이 더 뚜렷해지는 대신 한 가지 문제가 생기지. 문제이자 장점이라고 나는 생각했네만."

"문제? 그게 뭔가요?"

"우리의 정치적 생명이 통령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것."

몰살은 어쨌든 몰살이었다. 권력을 쥔 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정당한 복수가 될 수도 있었고, 잔인한 폭거가 될 수도 있었다. 통령은 그 해석의 권력을 쥔 사람이었다. 고로, 몰살했을 때에 통령은 아이의 정치적 약점을 쥐게 되는 셈이었다.

륜은 그 말을 마치고 또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아이는 피클을 집어서 그 입에 넣어주었다. 신 맛이 입안 가득 돌아서, 륜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게 이익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해. 통령은 지금 자네를 차기 통령으로 만들 생각으로 가득하다네. 그걸 위해 전폭적인 투자를 할 생각도 만만하지. 그렇다면, 이 쪽에서는 그 투자를 마음놓고 할 수 있게끔 보증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나."

아이는 표정을 흐렸다. 아이는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 정말로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의 기운이 흐려졌음을 감지한 륜은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방금 다시 계산을 해 보았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보증은 필요 없었던 것 같네. 통령은 이미 자네를 지원할 생각으로 가득하더라 이 말이지."

"보증 없이도?"

"보증 없이도."

륜은 이번에는 자신의 손으로 스프를 뜨고는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자비로운 인상, 그저 정치를 모르고 선의로 살아갈 뿐인 인상을 주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더 이득이라 이 말일세. 이 행동은 정치에 찌든 사람에게는 그저 선한 개인성의 발로로 보일 테지. 그리고 계산한 결과, 통령은, 정치적 논리보다 개인성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일세."

오히려 그런 정치적 보증보다, 우직한 선행으로 증명한 개인적 성격을 통령은 더 신뢰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아이는 얼굴을 흐렸다.

"정말로요?"

"그래.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만물을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일수록 비정치적인 사람에게 이끌리기 마련이라네. 내가 자네에게 그러듯이."

마지막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륜은 심통이 났는지, 스푼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나는 확신할 수 있네. 이틀 안에 새로운 거래를 제시할 통령의 사절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내기해보지 않겠나?"

그 때였다.

똑, 똑.

굵고 두꺼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륜은 득의에 찬 미소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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