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연기 ( 2 )
륜의 말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문을 두드린 것은 통령의 사절이 아니었다. 통령 본인이었다.
"힉?"
깜짝 놀란 륜은 쪼르르 뛰어가서, 팔의 맨살을 가리기 위한 숄을 가져왔다. 문간에 선 통령의 차림은 단출했다. 소매를 기운 웃옷에 보푸라기가 일어난 바지였다. 모자를 문간에 건 그는 오른팔에 든 무언가를 들어올리며 인사를 청했다.
"그간 안녕했나. 저번에 젊은 가주가 방문을 해 주었으니, 답방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 찾아왔다네. 들어가도 괜찮겠는가?"
"들어오세요."
답은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통령은 익숙한 듯 문지방을 넘어 걸어들어와서 식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통령과 륜의 부모님은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자주 집을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륜의 맞은편에서 곁으로 자리를 옮긴 아이는 통령이 식탁에 내려놓은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송어였다.
"마침 저녁때고, 저 앞에서 싱싱한 놈을 팔고 있길래 들고 왔네만, 이미 식사 중이었군."
"아뇨, 막 시작했습니다."
솜털이 하얗게 돋아난 호박잎 속에서 송어는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름진 옆구리가 등불을 받아서 무지갯빛이 부서졌다. 통령은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 당장 이 놈을 잡아서 요리해온다거나, 그런 싹싹함은 없는 겐가?"
"아시잖아요."
대답한 것은 륜이었다. 얼마 전 둘 사이에 그렇게 험악한 사건이 오갔는데도 륜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에 위안을 얻은 듯 통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맞군, 맞아. 식칼처럼 무거운 물건은 들 수 없는 몸이었지?"
"그렇죠."
"그 잠옷도 병 때문이고 말일세."
황급히 상의를 갖춰입는 것을 슬몃 보았던 모양이었다. 륜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두 사람은 손녀와 할아버지 같은 사이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통령은 륜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찾아오신 용건은?"
"허허, 별 일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투로 들리는군."
그 말과 함께 통령은 품을 뒤적여 담배를 한 갑 꺼냈다. 양해를 구하더니 스스로 불을 피워 입에 물었다. 옅은 잿빛의 연기가 고개를 쳐들고 천장으로 떠올랐다. 그 향기는 아이가 지금까지 맡아본 어떤 연초의 냄새보다도 순했다. 무언가 힘겨운 일을 견뎌내듯이, 담배를 오물거리던 통령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닫혔다. 몇 번이나 그랬다.
"그럼 이건 제가 간단히 소금을 쳐서 구워오겠습니다."
아이는 송어를 싼 호박잎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가 자리에 있어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요리도 결국 칼을 쓰는 일이어서, 아이는 요리에도 꽤나 소질이 있었다. 날이 무거운 정육도로 서걱, 송어의 목을 치고 기름선을 따라 배를 넓게 개복했다. 은빛의 몸통이 나비의 날개처럼 고르게 펼쳐졌다. 조심조심 뼈를 발라내고 소금을 치면서, 아이는 흘깃 식탁 쪽을 돌아보았다. 통령은 여전히 담배만 머금고 있을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미안하군. 안 좋은 버릇이야.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걸로 도피하는 습관이 들다 보니."
멀리서 바라본 통령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왜소했다. 정말로 보통의 노인처럼 보여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오른뺨의 피부는 낡은 가죽처럼 선명하게 접혀 있었고, 관절염에 시달리는 듯 이따금씩 다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의 바지에 왜 보푸라기가 그렇게 많이 일어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아무 말도 않던 통령은 자그마한 말을 몇 개 풀어놓았다.
"임기가 끝나면 이 나쁜 습관과도 작별일 줄 알았는데, 어찌된 것인지 임기 마지막이 되자 피울 일이 쏟아지는군."
"손주의 손주까지 보려면 건강을 챙기셔야죠."
"허허."
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가문에서 그는 이미 한대받는 몸이었으므로, 아들은 자신이 손주와 독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물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더니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했네."
그 말을 남기고였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륜은 영문을 몰라서 눈을 크게 떴다. 통령은 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젊은 가주에게 건네주게. 가주 일을 하다 보면, 이것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많을 게야. 이 늙은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순하고 질박한 놈일세. 이 놈으로 길을 들여야 몸이 덜 해롭겠지."
장미와 금박으로 장식된 담배였다. 통령은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이가 잘 구워진 송어를 들고 식탁에 돌아왔을 때, 통령은 이미 떠난 후였다. 식탁에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륜 혼자 남았다.
*
그는 담배만을 남기고 간 것이 아니었다.
담배갑의 안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들어 있었다. 륜은 쪽지를 챙겼고 아이는 통령의 선물을 품에 넣었다. 피울 생각은 없었지만, 성의를 무시하기도 뭐했기 때문이었다. 쪽지에는 '그 옷가게로 가라'는 말만이 적혀 있었다. 륜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제 생일마다 통령은 옷을 선물해줬어요. 이건 그 옷가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륜은 어제 있었던 통령의 방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략이든, 정치적 합의든, 좀 더 분명한 거래를 기대했는데 통령은 송어 한 마리와 담배갑 하나, 그리고 이 쪽지밖에 남기지 않았다.
"여기 가 보면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구조일까요? 도청을 의심해서 말할 수 없었다거나?"
그래서 아이와 륜은 지금 그 옷가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외출복이 없었던 륜은 한참이나 뒤져서 굉장히 소녀다운 옷을 꺼내왔다. 가죽 멜빵에 하얀 셔츠, 그리고 흰 속치마가 나풀대는 송아지 가죽 스커트였다. 언제적 옷이냐고 물어보니 10년 전에 입던 옷이라고 했다. 10년 전 옷이 맞다니, 10년동안 하나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단단히 삐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륜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서, 턱을 두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아이의 옆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두서없이 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얀 하세팔로스. 그는 원래 정치와는 아예 무관한 사람이었다.
정치에 손을 대기 전 그는 분명히 영웅이었다. 맡은 작전을 언제나 최소의 피해로 끝마쳤고, 패전에서도 자신의 사람들을 최대한 살려서 돌아왔다. 그는 인내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지휘 밑이라면 목숨을 맡길 수 있다는 사람이 많아서, 그의 이름을 걸고 병을 모집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얀은 그 기대를 지켜냈다.
그는 소산맥파의 구원자로 갑작스럽게 정계에 진출했다. 일반적으로 민주사회에서, 집권한 위정자는 그 사회의 시대정신을 재요약한 인물이기 마련이지만 그는 달랐다. 여론은 대산맥파를 지지하고 있었고 세상은 전쟁을 원했지만, 그는 영웅이었고 삶을 통틀어 한 점의 비위도 없었다. 그는 당선되었고 전쟁을 막아냈다. 그는 오롯이 순수한 개인의 힘으로 나라를 지탱했다.
그리고 8년의 임기를 수행하는 동안에, 그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마모되었다. 그 세월동안 그는 자꾸 비겁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인기 없는 결정을 해야만 했고, 반발이 일어나면 자신의 과거사를 소모해서 반발을 찍어눌렀다. 그 제압은 때로 비논리적이었고, 추했다.
이것이 거듭되며 사람들은 피로해졌다. 그는 어쩌면 인내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비겁한 것이 아닌가. 그런 평가와 뒷말이 퍼져나갔다. 이제와서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그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그 말을 꺼내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영웅이라는 명성의 힘으로 통령직을 수행해왔단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산맥파와 소산맥파를 화합하면서, 파멸로 치닫지 않게 막아세우는 유일한 방법. 그의 길은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당신은, 제 약혼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무나도 뚜렷한 영웅의 재목이에요."
륜은 통령의 모략을 읽었다. 그는 아이를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제국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를 받고 통령에 당선된 후에, 전쟁의 요구를 묵살하고 개인의 카리스마로 국정을 이끌어가기를 바랐다.
그 말을 들으며 아이는 통령의 수전증을 떠올렸다. 그의 가문에서도 버려지듯 먼 북쪽에 세워진 그의 집을 떠올렸고, 그 집에 맴돌던 한기를 떠올렸다. 시린 관절염을 견디며 그는 그 집을 직접 청소했고, 직접 차를 따랐다. 임기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문득 아이는 통령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인이기 전에 무인이었다. 무인의 최후는 소멸이어야 한다던 단테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정치는 소멸하기 위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찾아와놓고, 아무런 말도 안 한다? 모르겠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말을 늘어놓는 사이에 어느새 옷가게에 도착했다. 딸랑, 문을 열어젖히는 방울 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이는 묵묵히 품 속의 담배갑을 어루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륜은 복잡한 표정으로 옷가게 주인에게 통령의 쪽지를 건넸다. 주인은 활짝 웃으며 쪽지를 받아들였다.
"아, 당신이었군요! 주문은 잘 받았습니다. 따라오시죠. 남편 분은 거기서 기다리세요."
이 뒤에 통령의 제안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긴장한 표정으로 점원의 손에 딸려들어간 륜은, 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으로 아이 앞에 나타났다.
"이, 이, 이건..."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였다. 지금 륜은 혼례용의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주인은 활짝 웃으며 면사포를 륜에게 씌우려 들었다.
"그 분께서는 늘 자기 딸이 결혼할 때, 옷 한 벌 못 해준 게 아쉽다고 그러셨거든요. 어쩌면 아가씨한테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약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나풀나풀한 옷자락으로 륜은 황급히 아이의 옆에 앉았다. 하늘하늘한 옷차림이 어색한지, 면사포를 두 손으로 붙잡아 얼굴을 가린 그녀의 뺨은 붉었다.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냥 사과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사과? 통령이?"
"당신에게 그런 쪽지를 보냈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죠."
"그런..."
륜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륜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사과할 일이 아닐 터였다. 륜은 통령을 특별히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기나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 삶의 자세를 관철한 자라면, 그 죄는 감당할 대상이 될 지언정 사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륜 역시 아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통령의 제안과 이 결혼용의 예복에서, 다른 의도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쁜가?"
점원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기 전에, 륜은 면사포를 걷어올리고 아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새하얀 옷 속에서 륜은 작은 요정처럼 보였다. 아이는 문득 부끄러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섰다.
점원과 륜의 웃음, 그리고 문이 닫히는 종소리를 뒤로 하고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털처럼 늘어선 구름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